이미 일본은 1986년에, 중국은 1992년에 외국의 변호사들에게 법률서비스 시장을 개방했다. 한국은 이들 국가보다 훨씬 늦게 법률시장을 개방하는 셈인데, 한미 FTA에서의 법률시장 개방안을 들여다보면 미흡하고 더디다.
일본에서 외국 변호사들은 '외국법 사무 변호사', 약칭 '外弁'으로 등록한 후 활동하는데 비해 한국에서는 외국 변호사들이 변호사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 한국 변호사와의 동업이나 고용도 FTA 발효 5년 후 일정 요건 아래에서나 허용된다. 이래서는 법률시장에서 의미 있는 경쟁자들이 적기에 등장하기 어렵다.
'더딘' 법률시장 개방과 '무모한' 투자자-국가 제소제 도입
그런데 이렇게 '더딘' 법률시장 개방과 대조적으로 매우 '무모하게' 도입되는 새로운 사법제도가 있다. 바로 투자자-국가 제소제(ISD, Investor-State Dispute)이다.
이 제도는 미국인 투자자가 한국의 행정, 입법, 사법 작용이 한미 FTA의 투자자 보호 조항을 위반해 자신의 [기대]이익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한국을 국제중재에 회부하는 제도이다.
필자는 작년 5월 이 제도를 비판하는 글을 <프레시안>에 기고했다. (☞관련기사 보기) 또 그 동안 여러 차례 이 제도를 한미 FTA에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이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제도를 우리 측 협정문 초안에 넣어 미국에게 전달했다. (☞관련기사 보기) 이 제도의 도입은 이미 예정돼 있었고, 예정대로 종결됐다.
조문도 공개하지 않으면서, 투자자-국가 소송제 반대는 왜곡 선동?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필자는 가장 먼저 이 투자자-국가 제소제가 협정문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조문화 됐는지를 알기 위해 무진 노력했다. 그러나 모두 좌절됐다.
각자의 정치적 입장을 떠나, 누구도 한국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갖는 압도적인 영향력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로 이런 미국의 투자자들에게 한국을 국제중재에 회부할 수 있는 새로운 권한을 부여하는 새로운 사법제도를 도입하면서, 그 제도가 어떤 제도인지는 알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한미 FTA 투자자-국가 제소제의 조문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한줌도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놀랍게,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2007년 4월 5일자 <청와대 브리핑>에 게재한 'ISD 반대는 세계화하지 말자는 것'이라는 글에서 이 제도에 대한 비판을 '왜곡 선동'이라고 규정했다. (☞관련 홈페이지 보기)
청와대는 '의견 제출권'을 '찬성의견 제출권'으로 해석하는가?
제도는 시장과 더불어 한 사회를 이루는 기본적 요소이다. 한 번 도입되면, 그로 인한 이해관계와 기득권이 형성돼 변경하기 어렵다. 한국의 행정절차법이 입법예고의 방법과 기간, 의견 제출과 그 처리에 대해 자세히 규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행정절차법은 한국의 국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입법예고안에 대해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공권을 부여하고 있다. 또 행정청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런 의견을 존중해 처리할 공법적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행정절차법 이전에 대한민국의 헌법은 국민이 자신의 견해를 진술할 기회를 통해 절차의 진행과 그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는 적법절차 원리를 선언하고 있다.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은 법률가 출신이다. 그러므로 청와대에 묻는다. 청와대는 행정절차법이 국민들 모두에게 부여한 '의견 제출권'을 '찬성 의견 제출권'으로만 해석하는가?
그동안 진행돼 왔던 한미 FTA 협상은 법률적으로 볼 때 하나의 행정작용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헌법 관행에 따르면 협상 결과로서 국회에 제출될 FTA 협정문은 법률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국민의 의견 제출과 발언은, 그 내용이 찬성이든 반대이든, 헌법과 법률이 보장한 국민의 권리이다. 그리고 청와대는 국민의 적법한 권리 행사를 존중하고 처리할 공법적 의무를 지고 있다.
그럼에도 청와대가 전면에 나서서 국민들의 의견 제출을 '왜곡 선동'이라는 용어로 비난하는 것은 법적인 문제를 따지기에 앞서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필자와 같은 일개 시민도 나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선동'이라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투자자-국가 소송제, 알려진 한도 내에서 뜯어보자
필자는 그 동안 투자자-국가 제소제에 대해서 예비적 연구만을 해왔을 뿐 이 제도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는 한사코 사양했다. 실제로 한미 FTA 협정문에서 이 제도가 어떻게 조문화 됐는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줌도 안 되는 자들만이 한미 FTA 투자자-국가 제소제의 조문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청와대가 '왜곡 선동'이라는 용어를 주저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지금까지 파악한 범위 내에서, 의견을 밝히기로 결심했다.
앞으로 조문이 공개되면, 이 글은 보완될 수 있고, 심지어 수정될 수 있다, 이 점을 독자들은 양해해 주기 바란다.
-Q1: 미국인 투자자는 국세청의 과세 조치를 국제기관에 제소할 수 있나 없나?
-A1: 제소할 수 있다.
미-싱가포르 FTA는 세금부과 조치(taxation measures)에 대해 투자자가 국가를 제소할 길을 명백히 열어 놓고 있다. 미-호주 FTA도 미국 투자자가 제소할 길을 확실히 터놓고 있다. 한-싱가포르 FTA에도 투자자의 국가 제소권을 명문으로 보장하고 있다. 한미 FTA도 이들 FTA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먼저 미-싱가포르 FTA는 수용(expropriation)이라고 의심되는 조세부과 조치에 대해서 투자자-국가 제소제를 적용해야 한다고 명시했다(21.1.6.조). 미-호주 FTA는 조세부과 조치에 대해 수용 보상 조항이 적용돼야 한다고 규정했다(22.3.5.조). 한-싱가포르 FTA는 투자자-국가 제소제는 과세조치가 수용을 구성하는 범위 내에서 적용돼야 한다고 명시했다(21.4.4.조).
이처럼 미국인 투자자는 국세청의 세금부과 조치를 수용이라고 주장하며 한국을 국제중재에 회부할 수 있다. 이 제소 자체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Q2: 한국의 과세 조치가 수용인지 아닌지 누가 판단하는가?
-A2: 한국 재정경제부가 특정 과세 조치가 수용이 아니라고 투자자에게 회신할 경우, 국제중재기관이 판단한다.
미-싱가포르 FTA, 미-호주 FTA, 한-싱가포르 FTA 모두 국가의 특정 조치가 수용인지 아닌지 국내 '관계당국(competent authorities)'에 사전에 조회하도록 하는 제도를 두고 있다. 한미 FTA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특정 과세 처분이 수용이라고 주장하는 투자자는 먼저 한국 재정경제부에 조회를 해야 한다. 재경부는 6개월 안에 이 문제를 검토한 후 수용인지 적법한 조치인지 투자자에게 회신해야 한다. (재경부가 수용이라고 회신할 경우, 투자자는 징수당한 세금을 돌려받고 사건은 종결된다.)
재경부가 적법한 조치라고 판단한 경우, 투자자는 한국을 국제중재에 회부해 판단을 구하게 된다. 그러면 국제중재기관이 특정 과세 처분이 수용인지 여부를 최종적으로 판단한다. 한미 FTA에서는 이런 사전 조치의 일환으로 양국 국세청의 협의 절차가 있다고 하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Q3: 정부는 "과세는 일반적으로 수용을 구성하지 않음"을 명시했다는데?
-A3: 이는 국제중재에서 과세 처분이 수용인지 여부를 판단할 때 고려할 사항이지, 이 조항으로 과세가 투자자-국가 제소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강조하고 있는 "과세는 일반적으로 수용을 구성하지 아니한다(the imposition of taxes does not generally constitute expropriation)"이라는 조항은 한-싱가포르 FTA에도 들어가 있는 규정이다(주석 21-1). 정부는 한미 FTA에서는 이 주석을 별도의 부속서 형식으로 두기로 했다.
그런데 이 규정은 과세 조치가 수용을 구성하는지 여부를 평가할 때 고려사항들(considerations)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 조항을 놓고 '모든 과세 조치는 수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법률가가 있다면, 그 실력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조항은 '일반적 차원'에서 과세가 수용이 아니라는 것일 뿐, 구체적이고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는 과세의 경우는 다르다.
또한 이 조항에서 사용한 'do not'은 'shall not'보다 훨씬 구속력이 약한 개념이다. 한국 정부가 이 조항이 넣었으니 안심해도 좋다고 말한다면, 이는 미국 변호사들의 실력을 매우 우습게 아는 것이다.
이들 변호사가 지목할 진짜 핵심은 '투자자가 스스로 수용이라고 판단한 과세 조치를 국제중재에 회부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열려 있다'는 것이다.
-Q4: 론스타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면, 이 조치도 제소 대상이 될 수 있나?
-A4: 론스타는 한국 정부를 제소할 수 있으며, 한국이 패소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미국계 사모펀드인 론스타에 대한 과세가 가능한지 여부는 여러 가지 유동적인 상황과 법적인 쟁점이 많아 별도로 다뤄야 한다. 일단, 국세청이 론스타의 주식양도차익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론스타는 재정경제부에 대한 사전조회 후 한국을 국제중재에 회부할 수 있다. 아무도 이 절차를 막을 수 없다.
그런데 한-싱가포르 FTA에 들어간 주석에는 특정한 개별 납세자(specific individual taxpayers)를 겨냥하지 않고 모두에게 비차별적으로 적용되는 과세 조치는 수용에 해당할 가능성이 '낮다'고 돼 있다. 이를 거꾸로 해석하면, 특정한 개별 납세자를 겨냥한 과세 조치는 수용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한 이 주석에는 투자가 행해질 당시 해당 과세 조치에 대한 법률이 이미 발효 중이었고, 관련 정보가 공개됐거나 널리 이용 가능했다면 수용을 구성하지 않는다고 나와 있다. 이를 거꾸로 해석하면 투자 당시 관련법이 아직 발효되지 않았고 관련 정보가 공개되거나 이용 가능하지 않았던 과세 조치는 수용을 구성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정적인 상황이지만, 론스타는 <국제 조세 조정에 관한 법률>의 관련 개정조항이 론스타가 투자할 당시에는 발효되지 않았다거나, 한국이 론스타에 대한 과세를 의도해 조항을 개정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물론 이 주석에는 조세의 '회피 또는 탈세(avoidance or evasion)'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의 과세는 일반적으로 수용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있다. 하지만 론스타는 벨기에 국적의 LSF-KEB 홀딩스를 설립한 것이 조세를 회피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조항이 들어갔다는 것만으로 한국이 안심해도 좋을지 의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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