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포식자' 윤석열의 시간, 당신은 동의하는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포식자' 윤석열의 시간, 당신은 동의하는가

[프레시안books] <포식자들의 시간>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법원의 1심 무기징역 선고로 지난 '윤석열 3년'의 시대가 공식적으로 페이지를 다시 넘겼다. 이해할 수 없는 양형 참작 사유가 찝찝한 뒷맛을 남기고 제1야당의 대표가 여전히 '윤어게인'을 외치고 있지만, 국민의힘 내에서도 계파를 가리지 않은 절연 요구가 분출하는 등 '내란'을 둘러싼 지리멸렬했던 개념 공방도 일단은 갈무리되는 모양새다.

그럼에도 3년은 너무 길었다. 내란종식을 천명한 거대 여당의 과할 정도의 실행력을 믿지만, 수도 서울에 상처처럼 남은 '비워진 용산'을 바라보면서 이 같은 감상을 지울 수 없다. 민주정부의 실정과 겹친 벼락 스타 윤석열의 등장이 정치권에 새로운 '문법'에 대한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면, 계엄으로 정치적 자살을 완성하기까지 이어진 이 기인의 3년간의 행적은 그 문법을 안정적으로 안착시키고 말았다.

최소한의 정치 감각조차 갖추지 못했음을 스스로 증명한 윤석열에게 '여의도 문법을 새로 썼다'는 식의 상찬을 보내는 게 아니다. 다만 비상식을 상식으로, 비정상을 정상으로 취급한 윤석열의 3년은 권력 추구 과정에서 윤석열을 직간접적으로 활용한 모든 정치인들에게 확신을 준 듯하다. "무모한 행동이 주는 충격 효과를 활용"하는 '포식자'의 방식이, 가치평가를 떠나 이 세계에서 '유효해졌다'는 확신을.

▲<포식자들의 시간 : AI 시대, 절대 권력의 설계자들>, 줄리아노 다 엠폴리 지음, 이세진 옮김 ⓒ을유문화사

21세기 '체사레 보르자'들이 나의 일상에 도착했다

"구세계는 일정한 보호책을 전제로 했다. 그 세계에는 특정 기관들의 독립성에 대한 존중, 인권, 소수 집단의 권리, 국제적 파급 효과에 대한 고려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포식자들의 시대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 새로운 세계에서는 진행 중인 모든 과정이 끝까지, 극단적인 결과를 볼 때까지 가고야 말 것이다. 그중 어떤 과정도 어떤 방식으로든 억제되거나 통제되지 않을 것이다.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기'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 (본문 중.)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의 수석 고문 출신인 정치평론가 줄리아노 다 엠폴리는 저서 <포식자들의 시간>에서, 그가 목격해온 각국 자유주의 정부의 쇠락과 도널드 트럼프, 무함마드 빈 살만 등 '새로운 정복자들'의 등장을 두고 위처럼 통찰한다. 미국 민주당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자유주의 진영이 대중과 유리된 채 우물쭈물하던 사이, "진흙탕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이 정복자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비웃으며 혼돈을 본인들의 무기로 만들었다.

흔히 '극우포퓰리즘' 등으로 해석되는 정복자들의 득세에 저자는 이름을 붙이기보단 그 '방식'에 집중한다. (장강명에 따르면 애초 "새로운 것은 너무 새로워서, 우리는 그걸 뭐라 부를지조차 아직 모른다.") 이 새로운 세계에서 정치적 혁신의 아이디어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유통된다. 예상을 벗어난 주변부의 아이디어들이 정치적 중심부로 거침 없이 진출하면서 "공적 토론은 플랫폼에서 정해놓은 규칙만 벗어나지 않으면 뭐든지 다 허용되는 진흙탕 싸움으로 변한다."

저자는 이런 새로운 방식을 지배하며 활보하는 자들을 마키아벨리가 묘사한 절대 군주 체사레 보르자에 비유한다. "다섯 세기 만에 환생한 체사레 보르자"들은 리야드의 최고급 호텔을 고문실로 만들어 정재계 인사들을 대규모로 숙청하고, 엘살바도르의 갱스터들과 소수의 록 음악 팬들을 한 데 묶어 마치 <헝거 게임> 속 필드와 같은 교도소로 몰아넣는다. 그들의 '롤모델'로 존재하는 트럼프는 엘리트들의 워키즘을 조롱하며 옥좌에 화려하게 복귀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엘살바도르의 나이브 부켈레,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이 신종 포식자들에 대한 다 엠폴리의 경험적 기록은 흥미로우면서도 서늘하다. 세계연합(UN)이 여전히 세계를 대표하느냐는 그의 질문은 심박수를 높이고, 마침내 그가 기존 사회가 통제 가능성을 이미 잃어버린, 테크 거물들의 인공지능(AI) 신세계를 예고하는 대목에 이를 때 즈음 당신은 공포에 빠져버릴지 모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재명 정부와 트럼프 행정부의 예상할 수 없었던 충돌에서 우리는 이 새로운 문법을 이미 목도한 바 있다. 치열한 관세협상의 결과물은 아닌 밤 중의 홍두께 같은 SNS 선언으로 뒤집혔고, '극우 네트워크'로 짐작된다는 민간 분야의 한미 네트워크가 외교 위협으로 다가왔으며, 독점 기업 쿠팡의 목소리가 미 정치권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고, 한국의 야당은 이 기이한 사건들을 에너지로 삼았다.

즉 저자가 제시한 신세계는 이미 지척에 도래해 있다. 또한 우리는 그 사실을 익히 감각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이 국내법과 국제법을 모두 무시한 채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를 체포했을 때, 그럼에도 세계가 그 행위에 대한 적절한 대응 방식을 고르지 못한 채 고뇌하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의 우리는 이 영화 같은 패권 전쟁의 일면을 '나이키 체포패션'이나 '테토남식 해결법' 따위의 밈화된 쇼츠와 릴스로 접하고 있지 않나.

AI가 만들어 낸 실제와 놀라울 정도로 닮은 목소리나 우스꽝스럽게 동작하는 마두로의 몸짓을 곁들여 '밈'을 즐기고, 한편으론 그 '트럼프식 해결법'에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환호하는 우리의 일상은 새로운 방식의 권력에 자연스럽게 동의하고 있는 우리들 대중의 모습을 방증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책의 추천사에 적힌 장강명의 질문엔 우리 모두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떠오르는 신세계의 질서에 동의하는가."

언제나 공포는 공포의 대상과 나의 거리가 가깝거나, 가깝다고 믿어질 때 커지기 마련이다. 책을 읽으며 당신이 느낄 수 있는 섬뜩함은 동의한 적 없는, 정확히는 동의 여부에 대해 고민도 해본 적 없는 신세계가 이미 나와 내 친우들의 '동의' 속에 내 일상으로까지 침범해 왔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온다. 다시 추천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것은 이미 태어났고 그람시는 "권력은 강제가 아니라 동의를 통해 유지된다"고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2022년 3월 12일 당선을 확정지은 후 첫 대구 방문 자리에서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선 스타 윤석열'을 다시 꿈꾸는 신세계의 주민들

초유의 내란사태를 일단락한 한국의 풍경도 돌아본다. 대한민국 정상화를 기치로 내건 새 정부는 어떤 분야에서 괜찮은 성과들을 실제로 내보이고 있다. 그러나 윤석열이 꿈꿨던 '포식'의 흔적들은 정치 양극화, 심리적 내전 등의 이름으로 우리 곁에 남았다. 김문수와 이준석의 대선 합계 득표율(49.49%)은 이재명과 권영국의 합계(50.4%)에 근접했다. 김문수에 표를 준 41.15%의 국민을 '내란세력'이라 성토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대치상황이다.

노동자, 여성, 난민, 외국인(주로 중국인) 등 소수자를 겨냥한 윤석열식 혐오정치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포식자 정치인인 트럼프의 그것을 어설프면서도 위험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 "청년 대부분은 중국을 싫어한다", "건폭" 등 윤석열의 구호들은 왜곡됐을지라도 사회 어딘가에 실존하는 욕망이나 현상들을 발굴해, 그것을 실제로 '정치적 아이디어'화한 결과물들이다.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은' 결과 일부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바이든-날리면 사태, 임성근을 위한 격노, 박정하지 못했다는 대국민 담화 등 정책 외적으로도 뻔뻔하고 극단적인 행위들을 이어가던 윤석열은 끝내 자멸했다. 그러나 직후 민주당이 '내란청산'이라는 기회를 잡은 채 진행된 21대 대선 국면에선 코너에 몰린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일상화된 '윤석열식 아이디어'가 다시 곳곳에서 포착됐다. 나경원은 드럼통에 들어가 사진을 찍었고, 김문수는 "가짜 진보 확 찢어버리겠다"며 퍼포먼스를 펼쳤다.

영화 <신세계>에서 비롯된 '드럼통 밈'은 주로 반민주당 성향 커뮤니티에서 '이재명 조폭설'을 조롱하며 쓰이다 하나의 밈으로 굳어졌다. 이를 현실 정치로 소환한 천박함 위에서 내보인 나경원의 비장한 표정은 정치권의 기존 질서에 대한 조롱과도 같았다. 여성 신체 훼손을 내용으로 '이재명 막말 리스크'를 겨냥한 김문수의 행위는 어떤가. '이재명 막말'에 대한 가치판단과 관계 없이 여성혐오의 확대 재생산임이 명확한데도 정권재창출을 꿈꾸는 제2당 후보의 공식 퍼포먼스가 됐다.

너나 할 것 없이 심리적 내전을 우려하던 언론들 중 많은 수는 당시 이 같은 기행에 '막말', '망언', '논란' 따위 단어를 한줄 붙이거나 그마저도 없이 대중에게 전했다. '찢재명'을 구호로 외치는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 구호에 담긴 여성 신체 훼손의 동작을 본인 손으로 재현하며 화제를 모으는 유력 대선 후보의 모습은, 물론 단편적이지만 절대 달갑지 않은 하나의 시대상을 상징하는 듯해 아연하게 다가왔다. '주변부의 아이디어'는 완벽하게 정치의 중심으로 진입한 듯하다. 그것도 혁신, 파격 등의 이름표를 뒤집어 쓰고.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결국 패배했고, 예상 외 선전의 공로를 이 같은 극단적인 아이디어들에 돌리는 것도 맞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이 사례들로 어떠한 흐름의 변화를 가늠해 보는 것까지 무리로 보이진 않는다. 의원실의 청년 보좌진이 '드럼통'과 같은 아이디어를 거침 없이 제시하고, 당의 미디어 담당 기구에선 당이 자랑한다는 젊은 인력들이 '새롭고' '혁신적인' (라고 주장하는) 방식으로 극우적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점점 적극적으로 기용되는 이 '젊은 피'들의 활약과 그에 만족하는 당의 모습은 최근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청년 극우화 현상과 함께 맞물려 일종의 기류변화를 감지케 한다. 이준석, 윤석열, 나경원, 김문수 등 이들의 활약을 추동하는 간판은 언제든지 바뀌겠지만, 이 '아이디어'들의 준동은 계속될 것이고 이들은 "끝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란수괴가 아닌 혜성 같은 대선 후보 시절 '윤석열'이 다시 나타나길 바라는 신세계 주민들의 등장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4일 청와대에서 열린 '청년 일자리와 지방투자 확대를 위한 기업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 엠폴리는 책에서 '테크 거물'의 플랫폼 권력과 '보르자형 인간'의 정치 권력 사이 구조적 유사성으로 "디지털 봉기에서 힘을 얻고 자신의 권력 의지에 제한을 둘 생각이 전혀 없다"는 점을 짚는다. 그리고 자유주의 진영을 향해 "민주당은 게임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한 이들에게 최소한의 책임을 부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윤석열의 반대급부를 자처하며 대한민국 정상화를 외치고 있는 지금 한국의 민주당은 어떨까.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민주당은 2회에 걸친 '이재명 대 윤석열'의 싸움에서 강력한 1인 지도 체제를 통해 끝내 상황을 돌파했지만, 그 과정에서 '가속 페달'의 군비 경쟁에 뛰어들면서 스스로 작금의 정치 극단화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피하기 힘들다. 진보진영 내부에서의 비판까지 무릅쓰며 삼권분립을 아슬하게 줄 타는 방식의 '이재명 지키기' 과정은 역시 전례 없는 수준의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중앙으로 진출하는 과정이었다.

이를 테면 한국의 자유주의 진영은 '보르자형 정치'의 문법에 스스로 뛰어든 셈이다. 포식자의 핵심은 "제한 없는 권력 의지"다. 이른바 '개딸'로 대표되는 강력한 지지자 동원 정치가 한없이 강화되는 사이 진보정치에 대한 책임은 오히려 희미해졌다. 다수 유권자들은 이제 '이상을 늘어 놓는' 소수정당보다 내란을 종식시킬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게 됐다. 20대, 21대 국회를 거치며 '위성정당'을 택하지 않은 진보정당은 원외로 밀려났다. 촛불연대가 꿈꾸던 국회의 다원주의는 해묵은 옛말이 됐다.

내란 딱지를 떼어낼 기미가 없는데다 의석 수마저 절대적으로 부족한 국민의힘을 제외하면, 사실상 '슈퍼여당'만 남은 살균된 국회에서 민주당은 인권 부문의 백래시나 경제적 규제 부재 등의 문제에 자연스럽고 효과적으로 침묵한다. AI 대도약과 첨단산업 육성, 규제 완화와 금융 활성화 등의 성장 관련 키워드를 매일 외친다. 스스로 게임의 지배자를 자처하는 이상 그것들에 "최소한의 책임"을 부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머지않아 우리도 한국판 일론 머스크, 샘 올트먼을 목도하게 될까? 그렇다면 그들의 위험한 선택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 한국의 정치와 민주주의 체제는 그런 여력을 남겨 놓고 있을까? 혹은 포식자들의 '깐부 회동' 소식을 릴스로 접하며 농담 반 진담 반의 찬사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연스럽게, 지금도 그러하듯이. 물론 이런 지나친 상상을 할지 말지도 그 상상에서 어떤 기분을 느낄지도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의 몫이다.

경고에 가까운 어조로 포식자들의 시간을 증언하던 저자는 책의 종장에서 묘한 여운을 남긴다. 프랑스 파리 대도시권, 인구 1만 4천 명의 코뮌 리외생에서 구글의 교통 애플리케이션 '웨이즈'와 싸우는 지방자치단체장 미셸 비송의 이야기가 마지막을 장식한다. 숨가쁜 정치느와르를 연출하던 저자는 돌연 "인간적인 교류에서 느끼는 즐거움, 따뜻한 정, 그리고 그 속에 숨어 있는 놀라운 순간들"을 조명한다.

비숑은 웨이즈의 실시간 최단 경로 제안이 학교나 어린이집, 요양원 주변의 보행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행동에 나선다. 포식자들과의 접촉은 쉽지 않은 일이다. 비송은 갖은 노력 끝에 기업의 사절단을 만나지만 그 만남 또한 무엇도 바꿀 수 없을 것 같다. 시작한 적도 없는 싸움이 이미 종반까지 치달아 있다. "그들이 뭐라도 하긴 했을까요?", "글쎄요." 비숑과의 마지막 질답을 나누고 저자의 마지막 문장은 독자를 향한다. 그럼에도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한예섭

몰랐던 말들을 듣고 싶어 기자가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겁하고, 조금이라도 더 늠름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현상을 넘어 맥락을 찾겠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