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한미 FTA 최종 협상이 시작된 후 이틀 동안 협상장인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나와 있는 기자는 최소 5번 똑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 김종훈 한미 FTA 한국 측 협상 수석대표, 민동석 농림부 농업통상정책관, 배종하 농림부 국제농업국장, 그리고 한덕수 한미 FTA 체결지원위원위 위원장 등 5명이 이구동성으로 "쌀을 지키겠다"고 외쳤다.
한미 FTA 최종 협상 전에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와 청와대가 10여 개의 민감 농산물을 'U(Undefined, 관세철폐 이행기간 15년 이상 또는 개방예외)' 품목으로 하겠다는 기존 마지노선을 접고 '어차피 농업은 죽게 생겼으니, 쌀 하나만 지키면 그만'이라는 획기적인 농업 개방안을 마련했기 때문일까? 이들의 발언은 그만큼 확신에 차 있었다.
한미 FTA 최대 성과물은 "쌀 지켰다"?
한미 FTA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한미 FTA가 '열기 위한 협정'이지 '지키기 위한 협정'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고 넘어가면 농업 분야의 개방예외 품목 개수가 줄어드는 것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니다. 오히려 '쌀을 지키면 한미 FTA에서 할 일은 다 한 것 아니냐'는 식으로 쌀 문제를 국내 협상용 카드로 쓰려고 하는 한국 협상단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실제로 한국 협상단은 '쌀 시장 개방예외'를 협상 타결 후에 성과물로 쓰기 위해 애지중지 아껴두고 있는 분위기다. 그런 분위기를 감안해서일까? 미국 측은 협상이 막바지 중에서도 막바지에 이른 지금까지도 "예외 없는 개방"이라는 원칙만 주장할 뿐 아직까지도 협상 테이블에 쌀이라는 의제를 올리지 않고 있다. 27일 민동석 차관보는 기자들과 만나 "아직 쌀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지난 4일 <한국일보>는 "한미 양국은 한미 FTA 협상에서 우리로선 가장 민감한 농산물인 쌀을 개방 예외 품목으로 인정하기로 사실상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런 '즐거운 낭보'에 대해 통상교섭본부는 최강도의 알레르기 반응만 보였다. 이날 통상교섭본부는 공식 해명자료를 내는 대신 취재기자들에게 문자 한 통만을 날렸다. "오보임."
한미 FTA의 가장 큰 성과물이 될 '쌀 개방예외' 소식을 미리 써먹은 '괘씸한 언론'에 대해 불쾌하다는 반응이었다. 평소 한미 FTA에 대해 찬성 기조를 유지해 온 <한국일보>는 이틀 후인 6일 '김현종 교섭본부장, (한미 FTA 반대) 시위 막다 쓰러진 경찰관 도와-가슴 따뜻한 FTA 인연'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마치 협상단에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경제적 논리로 협상하겠다"더니 고도의 정치 플레이
쌀이 지닌 '정치적 폭발력'은 진정한 협상 고수라면 놓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다. 그래서 통상교섭본부는 '한미 FTA 협상은 정치 논리를 배제하고 철저히 경제 논리로 진행하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최종 지시마저도 무시하고 있는 것일까?
철저한 경제 논리로라면 한미 FTA에서 쌀 시장을 개방해야 옳다. 적어도 현장에서 볼 때는 그렇다. 양자 간 협상은 양자, 즉 한국과 미국만의 특성을 반영할 수 있다는 한국 협상단의 지적을 100번 이해한다고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쌀 시장은 이미 개방됐으므로 '쌀 시장을 지키겠다'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이미 미국에 개방된 쌀 시장을 어떻게 관리할지'가 더 중요하다는 송기호 국제통상 전문변호사의 지적은 허투로 들을 일이 아니다. (☞관련기사 보기)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지난 24일 미국 측의 쌀 개방 입장과 관련해 "쌀 문제에 있어 미국 측이 얻을 것은 별로 없다"며 "협상 카드로 쓰기 위해 (쌀 개방 문제를) 꺼낸 게 아니겠느냐"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런데 '정말로 듣기 좋은 꽃노래'는 언젠가부터 사라졌다. 대표적인 게 "한국 협상단은 제로잉(Zeroing) 금지, 최소부과 원칙(Lesser duty rule), 비합산(non-cumulation) 등을 요구하고 있다"는 말이 그것이었다. 한미 FTA로 미국의 악명 높은 반덤핑 조치 남용을 없애겠다고 자신하던 한국 협상단은 지난 5~6차 협상에서 미국이 관련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그 분야의 협상 자체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쇼'까지 했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 업체들에 실질적인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반덤핑 조치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는 정도로 말이 바뀌었다. "제로잉 금지, 최소부과 원칙, 비합산 등은 요구하지 않고 있다"는 말의 통상교섭본부식 다른 표현으로 해석하면 되겠다.
'곡기'를 끊음으로써 한미 FTA에 반대하는 사람들
정부가 "쌀은 꼭 지키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쌀을 먹지 않는 것으로 한미 FTA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20일 넘게 단식을 하고 있는 문성현 민주노동당 대표가 그렇다. 최근 단식에 나선 천정배, 김근태, 임종인 의원이 그들이다. 그들뿐일까?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단식이라는 처절한 '바디 랭귀지'를 통해 한미 FTA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문성현 대표는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쌀 시장은 막았다는 논리에 국민들이 속지 말아야 할 텐데…"라고 걱정하는 마음을 토로했다. 이날 문 대표의 단식에 동참한 권영길 민노당 의원도 "쌀은 애초부터 협상 대상이 아닌데 왜 자꾸 쌀 이야기만 하는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들을 보는 협상단의 시각은 싸늘하기만 하다. 김종훈 대표는 "민주주의가 발전한 거 아니겠냐"며 점잖게 비아냥 거렸고, 다른 고위급 관계자는 "아직 협상 결과도 나오지 않았는데 단식부터 하면 어쩌자는 거냐"며 대놓고 비웃었다.
부동산-조세 문제, 통상장관급 협상 테이블에 오른다
26일 첫날 협상이 끝난 시각인 저녁 8시 기자는 투자 분과장인 최경림 외교통상부 FTA 국장과 우연히 마주쳤다. "투자자-국가 소송제(ISD)의 예외 대상에 부동산 정책과 조세 정책이 들어갈 것 같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최 국장은 "어렵다"며 "곧 통상장관급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 같다"고 평소처럼 성실하게 대답했다.
경제적 논리로만 따지자면 부동산 문제나 세금 문제는 쌀 문제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할 것이다. 집값을 적정 시장가격으로 안착시키고, 적절한 수준의 세금을 걷어 나라 살림을 하는 것이 한미 FTA 체결에 앞서는 정부의 기본적 기능이기 때문이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왜 "부동산 정책이나 조세 정책을 투자자-국가 소송제의 대상으로 하지 말자는 요구를 미국이 거부하면 한미 FTA 협상을 결렬시키겠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 것일까? 현장의 기자는 그 점이 늘 궁금하다. 그런 꽃노래라면 다섯 번 아니라 열 번이라도 즐겁게 들을 것 같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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