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훈 한국 측 협상 수석대표는 지난달 7차 워싱턴협상 당시 "서비스 시장의 개방 수준이 당초 예상보다 낮다"면서 '낮은 FTA론'의 포문을 열었다. 이어 한미 FTA의 필요성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했던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이경태 원장이 "한미 FTA는 중간 수준의 딜이 돼야 현실적"이라며 낮은 FTA론을 확산시켰다.
여기에 일부 언론이 가세하면서 한미 FTA는 당초 예상보다는 낮은 수준의 FTA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기정사실처럼 굳어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도 지난달 27일 한미 FTA에서 법률 및 회계 서비스 시장이 개방되지 않는 것을 예로 들며 "미국과의 동조화를 통해 서비스 수준을 끌어올리고 일자리를 만들어 줄 욕심이었으나, 협상하는 것을 보니 우리 측이 그 부분에서 너무 협상을 잘해 (시장을) 잘 안 열어주고, 미국도 별로 애를 안 써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어쨌든 요는 한미 FTA가 '당초 계획보다는 낮은 수준'의 FTA라는 것이다.
낮은 수준의 FTA, 비판론자의 의견 수용 결과?
그런데 '낮은 수준의 FTA'란 도대체 어떤 FTA인가? 한미 FTA 비판론자들 가운데 일부가 주장했던 게 다름 아닌 '한미 FTA를 꼭 맺어야 한다면 낮은 수준으로 가자'가 아니었던가? 어쩌다 정부 스스로 FTA 수준이 낮아졌다는 말을 꺼내기에 이르렀나? 혹시 낮은 수준의 FTA란 정부가 한미 FTA 비판론자들의 의견을 겸허히 수용한 결과인가?
이런 상황의 전후맥락을 짚어보기 전에 먼저 '낮은 수준의 FTA'의 정의부터 명확히 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100명의 전문가가 100개의 다른 정의를 내놓겠지만, 기자는 낮은 수준의 FTA란 '상품 시장 및 서비스·투자 시장의 개방 수위는 전면 개방에 가까울 정도로 높은 한편 국가 고유의 정책 권한과 법적 체계는 온전히 확보되는 FTA'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미 FTA는 결코 낮은 수준의 FTA라고 부를 수 없고, 그렇게 불려서도 안 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한미 FTA에 들어가는 것이 기정사실이 된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절차)' 때문이다. 미국 기업이 한국의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모두에 대해 소송을 걸 수 있도록 허용하는 '무시무시한' 제도가 한미 FTA에 들어가는데도 낮은 수준의 FTA라고 하면 그건 억지다.
이뿐만 아니라 한미 FTA에는 악명 높은 역진방지(Rachet) 조항이 들어간다. 협정이 체결된 당시의 시장 개방 수준을 기준으로 협정이 발효된 후에는 이보다 개방 수위를 높일 수는 있어도 낮출 수는 없다는 내용의 이 조항에 따르면, 우리는 한국 영화가 고사 직전의 위기에 처해도 스크린쿼터 일수를 지금보다 늘릴 수 없고, 외환위기가 닥쳐도 지금보다 높은 수준의 외환규제를 할 수 없다.
서비스·투자 시장의 개방 수준이 원래 계획보다 낮아졌으니까 낮은 수준의 FTA라고? 한미FTA의 경우는 서비스·투자 유보안(개방 예외 목록)에서 빠진 시장은 자동으로 개방되는 네거티브 방식을 따른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미래에 어떤 분야에서 어떤 충격이 나타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충격을 막을 수 있는 정책 권한조차 포기하게 만드는 통상협정을 낮은 수준이라고 할 수는 없다.
웬디 커틀러 미국 측 협상 수석대표도 8일 브리핑에서 "한미 FTA가 낮은 수준의 FTA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는 한 기자의 지적에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I don't buy it)"며 "한미 FTA는 높은 수준의 균형 잡힌 협정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낮은 수준의 FTA, 1석4조의 변명 효과
그런데 정부 입장에서는 '낮은 수준의 FTA'라는 말이 여러 모로 유용하다. 기자의 계산대로라면, 최소한 1석4조의 효과가 기대된다.
무엇보다 정부는 한미 FTA가 낮은 수준이라는 수사를 통해 서비스 시장을 원래 선전했던 만큼 많이 개방하지 않은 데 대한 이유를 꾸며낼 수 있다. 정부는 애당초 한미 FTA의 가장 큰 기대효과로 서비스 시장 개방을 통한 국제경쟁력 향상을 들었으나 실제로 법률, 회계, 의료 등 서비스 시장의 개방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국내 기득권의 반발이 컸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측 협상단이 한국의 서비스 시장을 열어 제치는 만큼 미국의 서비스 시장을 열어 제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미국 측은 해운 및 어업 서비스에 대해서도 시장을 열지 못하겠다고 하고, 조달시장 개방 대상에서도 주(州)정부는 배제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서비스 시장의 개방 수준만 예상보다 낮아진 것이 아니다. 한국 측이 '관세 인하 효과로 소비자가 크나큰 이득을 보게 되리라' 예언했던 분야 중 미국 측이 실제로 시장을 개방해준 분야는 별로 없다. 자동차와 섬유가 그 대표적인 예다. 협상 막바지에 한국 측이 뭔가 엄청난 양보를 하지 않는 이상 이 분야에서 획기적인 전진이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또 '낮은 수준의 FTA'라는 말은 한국 측이 협상에서 얻어내겠다고 호언장담 했다가 실패한 분야들을 싸잡아 포장하는 데 동원될 수도 있다. 정부는 한미 FTA를 통해 미국의 자의적인 반덤핑 조치를 완화할 것이라고 크게 선전해 왔지만, 도무지 얻어낸 것이 없다. 그러니 '낮은 수준'이라고 점잖게 포장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아가 정부는 '낮은 수준의 FTA'라는 말로 향후 국내 협상에서 한미 FTA 비판론자들을 현혹시키려 들 수도 있다. 서비스 시장의 개방 수준이 이처럼 낮지 않느냐며, 한미 FTA로 인한 개방 효과도 그만큼 낮지 않겠냐며, 그러니 이제 한미 FTA 그만 반대하고 빨리 비준하자는 식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건 정부도 예상하지 못한 효과일 테지만, 정부는 '한미 FTA는 낮은 수준이었다'는 것을 빌미로 향후 시장 개방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구멍을 미리 마련해 둘 수 있다. '자발적인 자유화 조치'와 '자발적인 구조조정'의 신봉자인 작금의 정부 부처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정부가 조심할 것이 있다
단, 정부 입장에서 딱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보수언론과 한미 FTA 찬성론자들이 이런 '가짜' 낮은 수준의 FTA가 '진짜' 낮은 수준의 FTA인 것으로 착각하고 당초 계획대로 높은 수준의 FTA를 체결해야 한다며 핏대를 높일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한미 FTA에는 찬성하지만 한미 FTA를 추진하는 노무현 정부에는 결코 찬성할 수 없는 이들이 '꼬투리 잡을 수 있는 건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들은 '한미 FTA를 추진하는 현 정부'에 우군인가 적군인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