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가 또다시 미국의 덤핑마진 계산법인 '제로잉(Zeroing)'이 WTO의 반덤핑 관련 협정을 위반했다는 판정을 내렸다.
제로잉이란 수출가격이 국내가격보다 낮은 경우만 덤핑마진에 산입하고 수출가격이 국내가격보다 높은 경우는 마이너스로 계산하지 않고 제로(0)로 산입하는 방식으로 덤핑마진을 부풀려 덤핑관세율을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제로잉 방식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만 사용하고 있다.
계속되는 협정위반 판결에도 미국은 교묘하게 제로잉 유지
9일(현지시간) WTO에 따르면 WTO 상소기구는 지난 2004년 일본이 '미국의 제로잉은 WTO 협정 위반'이라며 미국을 상대로 제기했던 소송과 관련해 지난해 9월 WTO 분쟁조정 패널이 미국에 승소 판결을 내렸던 것을 뒤집고 일본의 손을 들어줬다.
이 판정은 WTO 분쟁조정기구(DSB)로 보내져 미국에게 국제무역규약에 부합한 덤핑마진 계산법을 채택하라고 권고하는 형식으로 처리될 전망이다. 하지만 물리적 강제력이 없는 이런 권고가 미국 측의 태도 변화를 낳을지는 의문이다.
WTO는 이미 수차례에 걸쳐 미국의 제로잉이 WTO 반덤핑 협정에 위배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이때마다 미국은 제로잉의 적용 방식을 '살짝' 손질하는 방식으로 이 관행을 계속 유지해 왔다.
WTO 상소기구는 지난해 4월에도 유럽연합(EU)이 미국을 상대로 제기한 16개 행정재심에서 미국의 제로잉이 WTO 반덤핑 협정에 위배된다고 판정했다.
또 WTO 상소기구는 2005년 캐나다산 목재를 둘러싼 미국과 캐나다 간 분쟁이나 2001년 인도산 면 침대보를 둘러싼 EU와 미국 간 분쟁에서도 미국의 제로잉이 WTO 규정에 어긋난다고 판정했다.
"한미FTA에서 WTO보다 높은 수준의 제로잉 금지 관철해야 했으나…"
우리나라도 제로잉과 관련해 미국을 상대로 WTO에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고, 이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미국에 대한 무역보복 권한까지 부여 받았다. 하지만 미국 측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수출업체들에 제로잉 덤핑마진 계산법을 적용해 왔다.
2002년 산업자원부가 국내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미국의 무역구제법 가운데 가장 피해를 주는 사항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응답 1순위가 바로 제로잉이었다.
우리 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무역구제 분과 협상에서 미국 측에 '제로잉 금지' 조항을 요구해 우리 수출기업들의 피해를 줄이겠다며 선전해 오다가 지난 12월 5차 협상에서 이런 요구를 철회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WTO(세계무역기구) 다자간 협정 차원에서 관철할 수 있는 요구사항이라 협상전략 차원에서 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미 FTA 반대진영과 수출업계는 "그러면 굳이 미국과 양자 간 협정을 맺는 이유가 뭐냐"면서 "게다가 미국은 WTO가 제로잉은 협정 위반이라고 판정을 내려도 이를 무시해 왔다"고 비판해 왔다.
국제통상에 정통한 송기호 변호사는 "WTO에서 계속해서 제로잉이 WTO 협정을 위반했다는 판결이 나오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WTO 체제의 허술함을 보여준다"면서 "정부는 한미 FTA 협상에서 WTO보다 높은 수준에서 미국의 제로잉을 금지할 수 있는 장치를 도입해야 했으나 이를 스스로 포기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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