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그것이 어려운 것은 그 이유가 너무도 많아 뭐부터 말해야 할지, 뭐가 핵심이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하기 때문이다. 의료비가 오를 것이고, 건강보험료가 오를 것이며, 교육비가 오를 것이고, 전기·가스 등 공공요금이 오를 것이며…. 이런 눈앞에 닥쳐올 손해를 계산하는 것은 내가 너무 쫀쫀하기 때문일까? 그렇지만 이런 손해를 보는 상황은 누구도 좋아하기 어렵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그렇잖아도 항상 도시에 착취당하고 시장에 농락당하던 농민들의 삶이 전면적으로 초토화될 것이고, 땅이 있어도 농사지을 수 없게 되는 사태가 닥쳐올 것이다.
이 따위 한심한 상상의 장이 싫다
이런 사태에 대해서도 '신도시'를 만들고 투기로 땅값을 올려 '보상책'을 찾는 거대한 개발의 정신으로 '해결'하려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전국의 들판이 콘크리트로 덮이는 그날이 닥쳐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對)중국 경쟁력이 없으니 포기해야 마땅하다는 제조업, 그 제조업 공장의 노동자들이 여기저기서 밀려나 선진화된 실업사회(실업률이 10% 근방을 오락가락하는 서구의 사회처럼!)가 도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게 아니면 그 노동자들이 한미 FTA로 수입된 선진 서비스업의 발전 덕택에 보험사원이 돼 보험상품을 팔러 다니고, 법률회사 직원이 되어 법원을 들락거리고, 컨설팅회사의 직원이 되어 회사 사장님들에게 선진화된 경영방법을 알려주러 내왕하는 '탈공업사회'가 도래할 거라고 믿어야 할까?
어느 것이든 피하고 싶은 상상이거나 믿을 수 없는 상상이다. 우리의 풍부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이 따위 상상으로 내모는 한심한 상상의 장이 싫다.
정부관료 믿으라니, 사기꾼 믿을 신앙심이라도 길러야 하나?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멀쩡한 자국 은행을 부실은행으로 둔갑시켜 외국자본에게 팔아넘기며 뒤로 슬쩍 돈을 챙기는 정부관료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겨야 하는 것일까? 우리 영화는 미국영화에 비해 경쟁력이 없다는 영화인들의 말에 미국인들이 볼 영화를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말로 응수하는 협상단 대표에게, FTA식 구제심판제도가 뭔지도 모른 채로 협상안을 만들고 있는 협상단 관료들에게 우리의 삶 전체를 맡겨야 하는 것일까?
그러려면 먼저 사기 전과자라도 믿고 그에게 자기 재산의 운용을 맡길 정도의 맹목적 신앙심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 그게 아니면 "외환은행처럼 저리 큰 은행도 저렇게 쉽사리 넘어가는데,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우리네 인생이 뭘 어쩌겠어"라며 포기하는 손쉬운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차라리 철없는 몽상가, 무모한 낭만주의자가 되어 거대한 수레 앞에 팔을 들어 대드는 당랑거사(螳螂居士)가 되고 싶다.
어디 이뿐일까?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구조적인 차별을 제도화하면서도 자본에 대해서는 모든 차별은 사라져야 한다면서 산업폐기물로 사람들을 집단으로 폐기처분했던 잔혹한 기업 메탈클래드의 '손해'조차 국가로 하여금 배상하게 하고, 우편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우체국에 대해서조차 자본과 똑같이 행동할 것을 강요하는 FTA의 턱없는 심판제도를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멀쩡한 정신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이런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어차피 미국시장이 없으면 망할 경제이니 미국경제가 저물든 말든 좀더 찰싹 달라붙어 운명을 같이 하자는 가미카제식 동맹주의를, 멀쩡한 안목을 갖고 있다면 어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싫은 것은 한미 FTA라는 하나의 사건에 겹쳐져 있는 몇 겹의 환상들이다. 그것은 이런 것들이다. 자본, 그것도 잘 나가는 일부 거대 독점자본의 이익을 국민 전체의 이익으로 착각하는 경제적 환상. 국민의 인생을 판돈으로 걸고 국민을 대신하여 '올인'하는 도박이 무슨 구국의 결단이나 큰 정치라도 되는 양 착각하는 정치적 환상. 미국과 연계되면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외교적 환상. 전체적으로 경제적 부가 늘어나면 사회 전체가 잘 살게 될 거라는 사회적 환상. 그리고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인생을 걸고 자신이 남들을 위해 뭔가 큰일 혹은 희생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도덕적 환상(과대망상!).
노무현 대통령은 어쩌다 환상게임에 휘말렸나?
이런 환상들은 대중이 갖고 있다기보다는 대통령이나 그 주변 인사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학적 개념인 '이데올로기'라는 말보다는 정신의학적인 개념인 '망상(delirium)'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이 어이없는 환상들이 현실적인 힘을 갖고 작동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런 환상들의 게임에 말려들게 한 것일까?
우리는 이런 환상 또는 망상들이 작동하게 한 '객관적인' 이유와 '주관적인' 이유에 대해 간단하게 추측할 수 있다. 망상의 객관적 이유 중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이었을 것이다.
개성공단은 중국보다도 싼 임금으로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으니, 가령 거기에 삼성이나 현대 등 기술력을 갖춘 남한 자본이 들어간다면 중국과도 경쟁할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할 수 있으리라. 그걸 미국시장에 내다팔 수 있다면, 남한 자본은 가격경쟁력이 강화되니 이득을 볼 것이고 거기서 지불한 임금은 북한경제를 살려낼 기사회생의 약이 될 것이니, 이거야말로 남북한 모두가 사는 '윈-윈 게임'이 아닌가!
그것은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노무현의 꿈에 딱 맞는 '한 건'이었을 것이다. 이거라면 "남은 임기에 정치적 생명을 걸고 올인하겠다"고 할 만한 사안이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 정도 일을 위해서라면 몇십만 농민이나 노동자들의 고통, 혹은 영화인들의 저항은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일종의 비용 내지 판돈 같은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거라면 그 도박 같은 '올인'이 남북통일과 민족중흥을 위한 숭고한 일이 될 것이니, 무지한 인민들의 반대와 비판은 시대를 앞서가는 인물들이 받게 마련인 시련의 증거로 받아들여졌을 게 틀림없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여러분은 '그때 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 참 잘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일종의 순교자적 심정으로 모든 역경을 헤쳐나가리라고 다짐하게 됐을 것이다. 스스로 자랑삼는 '도덕적 진정성'은 이런 종교적 심정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떠한 반대도 그의 귀에는 안 들리는 것은 이 숭고한 결심의 벽이 그토록 두텁기 때문일 게다.
더구나 내막을 있는 그대로 까놓을 수 없는 사정은 한미 FTA에 대한 모든 반대를 무지의 소산으로 돌릴, 즉 '여러분들이 이 모든 생각을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할 그럴듯한 알리바이마저 제공해 준다. 따라서 남는 것은 비밀스런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서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뿐이다.
이런 게 아니고선, 느닷없이 한미 FTA에 대한 외골수의 신앙심을 갖게 된 대통령의 심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게 아니고선, 청와대 담당자와 측근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길로 꼴통 같은 고집과 곤조로 치달리는 대통령의 행태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게 아니고선, 스스로 운동권 출신임을 자처하면서도 모든 운동권이 한결같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한미 FTA를 고집스레 하겠다고 우겨대는 노무현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관료-기계'는 '관성의 힘'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핵실험으로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은 물건너간 게 아닌가? 그렇다면 기대했던 가장 중요한 이익이 소멸된 것 아닌가? 그러나 국가장치를 움직이는 관료-기계들은 관성의 힘으로 움직인다. 즉 일단 하기로 한 것은 해야 한다. 그것은 하기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해야 할 이유를 다시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해야 함을 설득하는 것이 더욱더 중요한 일이 된다.
그래서일까? 경제관료를 지낸 노무현의 한 측근(강봉균)은 북한의 핵실험 직후 이렇게 말했다. "경제적 이득이 없더라도 정치적 동맹 차원에서 한미 FTA를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새로운 이유를 찾아낸다!
더구나 지금 와서 북한 핵실험 때문에 한미 FTA에 대한 입장을 바꾼다면, 그건 그것을 추진한 이유이지만 감추어야 할 이유를 까놓는 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물러서야 할 때 물러서는 것은 '올인'하는 도박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노무현이 이준기에게 해줬던 말이 다시 그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 정도로 자신감이 없어요?"
이런 식으로 올인하는 도박사의 망상이 앞서 말한 객관적 이유에 더해진다. "끝까지 베팅하면 결국 승리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몇 겹의 환상이 현실적인 힘을 갖고 작동하게 만든 또 하나의 요인, 즉 '주관적인' 요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잘 알다시피 그는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올인'하는 도박사의 망상 덕에 성공했고, 그로 인해 대통령이라는 꿈을 이루었다. 그것은 사실 그의 매력이기도 했고, 그의 장점이기도 했다. 그래서 스스로 자랑스레 '바보 노무현'을 자처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미친 듯한 열정으로 그를 좋아하고 지지하지 않았던가?
한미 FTA는 '선거주의'와 '도박주의'와 '한탕주의'의 결합물
그러나 어쩌다 도박판에서 큰돈을 땄다고 해서 계속 도박판을 헤집고 다니면 한때의 행운이 인생을 망치는 결정적 불행이 되고, 슈퍼마켓으로 성공한 사람이 그 성공의 경험에 취해 있으면 평생 슈퍼마켓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모두가 잘 아는 유명한 정치가는 "어떠한 조건에도 대립물로 전환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선거에서 이기거나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좋은 방법이 행정적 통치를 수행하는 데 좋은 방법이 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미련스런 '올인'의 도박정신이 선거의 승리나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는 좋은 방법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국민 전체의 삶을 좌우하는 경제정책의 선택이나 국제조약의 체결에도 좋은 방법일 수는 결코 없는 일이다(사실 그는 어떤 경제정책에도 올인하지 않았고, 부동산 정책조차 일관되게 밀어붙이지 못했지만 말이다).
선거야 떨어져도 또 나가면 그만이지만, 한미 FTA처럼 우리 인생을 좌우할 사태는 한번 해서 실패하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직위를 걸고 올인해서 성공한 경험, 그건 선거에나 다시 써먹을 일이다. 그걸 한미 FTA처럼 국민경제 전반에 대한 포괄적 시야와 정치·경제적 상황에 대한 전략적 사유, 그리고 예상되는 손익에 대한 치밀한 계산이 필요한 문제에 쉽사리 써먹으려는 발상처럼 안이하고 위험한 게 또 있을까?
세상 모든 일이 선거와 같으리라는 선거주의적 망상, 끝까지 버티면 결국은 승리하리라는 도박주의적 망상, 그래서 한탕하면 그간의 오류는 모두 잊고 그것으로 자신을 기억해주리라는 한탕주의적 망상, 이런 망상들이 그와 그의 관료들이 한미 FTA를 미친 속도로 몰고 가며 하나의 현실적 사태로 만들고 있는 주관적 이유인 것이다.
아무리 된장이라 우겨도 똥은 똥일 뿐
한미 FTA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 그것은 한마디로 '망상의 정치학'이다. 그 망상이 만들어내는 겹겹의 환상들을 우리가 공유하게 될 때, 혹은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될 때 망상의 정치는 현실적 힘을 획득해 우리 자신의 삶을 향해 물질적 힘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망상은 허구적이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범위 안에 존재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정확하게 현실과 동일한 효과를 행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현실적 효과가 망상 안에서 상상한 것과는 아주 다른 방향으로 펼쳐지리라는 것이다. 망상 안에서 똥을 된장이라고 알고 먹는 사람에게도 물리적으로는 똥은 똥일 뿐인 것처럼. 더욱 나쁜 것은, 망상으로 인해 실패한 경험이 일반화될 경우 부재하는 것을 만들어가는 모든 창조적 상상이나 미래를 꿈꾸는 즐거운 몽상조차 결국엔 파국으로 귀착될 끔찍한 망상으로 간주돼 비난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모든 희망이 절망의 다른 이름이 되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꿈꾸고 상상하는 능력조차 빼앗겨버리는 것, 바로 이것이 '한미 FTA'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망상의 정치에서 우리가 예견하는 미래다. 그것은 끔찍해진 현실 다음으로 닥쳐올, 그 현실보다 더 끔찍한 우리의 미래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미 FTA를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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