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여인은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 있었다. 하체를 불편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에 수치심을 느낄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을 '윤금이'라고 불렀다. 미군 놈들 짓이라고 했다.
그 시절, 그 두 장의 사진이 나를 전율하게 했던 것은 그들의 죽음이 끔찍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삶이,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그들의 죽음보다 덜 끔찍하지도 덜 비참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은 각기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적어도 1945년 이래의 어떤 정치적, 군사적 관계의 연장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었고, 때문에 근본적으로 연결돼 있는 공적인 사건이었다. 나의 삶이나 나의 죽음조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누가 한미 FTA 협상을 '대등한 협상'이라고 하는가?
사람들은 "미국의 힘에 의지함으로써 정권을 잡는다(혹은 유지한다)"는 말을 완곡하게 에둘러서 '한미동맹'이라고 부른다. 세상의 몇몇 바보들은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기도 한다. "한국이, 미국의 원조를 받아 겨우겨우 먹고살게 된 이 가여운 나라가 어느새 어엿하게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눌 수 있을 만큼 성장해 '동맹'을 맺게 되다니 참으로 감격스럽지 아니한가." 그들은 때때로 가슴 뿌듯해 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한미동맹'의 빽으로 정권을 잡은 자들은 제 나라 국민들을 미군 양아치들이 희롱하고 잔인하게 죽여도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해칠까봐 찍소리도 못한다. 그들은 멀쩡히 농사짓는 땅을 빼앗아서 군사훈련을 하겠단다. 그 잘난 '한미 군사동맹'을 위해서. '동맹'은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겠단다. 경제적으로 '동맹'을 맺겠다는 말이다. '협상'이라는 말도 한다. 그 순간 사람들은 깜빡 속는다. 뭔가 대등한 위치에서, 민주적으로, 평화롭게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겠다고 한다. 그래서 다들 '협상'을 잘하고 있는가에만 신경을 쓴다.
미국은 광우병에 걸린 소를 사지 않으면 협상을 계속하지 않겠단다. 약값을 올리지 않으면 협상을 중단하겠단다. 모두, 모조리, 다, 하나도 남김없이 내놓지 않으면 '협상'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들 건 내주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우리 측 '협상단'은 그래도 우리도 뭔가 얻어내고 있으며, 잘 하고 있고, 잘 될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협상'이란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다.
내가 한미 FTA에 반대하는 이유?…상대가 미국이니까
내가 한미 FTA에 반대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상대가 미국이기 때문이다. 그들과는 '동맹'도 '협상'도 불가능하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지금으로부터 약 80년 전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온갖 잡놈들이 설치고 서양의 제국들이 고개를 들이밀고 있을 때 자신의 시대를 걱정하며 루쉰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정말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그래도' 있다면 우선 감히 말하고, 감히 웃고, 감히 울고, 감히 노하고, 감히 욕하고, 감히 싸우며, 이 저주스러운 곳에서 저주스러운 시대를 물리쳐야 할 것이다." 문득, 이 말이 지금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다가온다.
<바로잡습니다> 지난 16일 시작된 본 기고문 연재 '왜 한미FTA에 반대하냐고?'의 1회와 2회에서 기고자의 직함을 '겸임교수'로 표기한 것은 <프레시안> 측의 편집과정상 오류이며, 이를 '강사'로 바로잡습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측은 '겸임교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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