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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전 대통령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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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전 대통령 별세

향년 88세…노환으로 타계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전직 대통령 가운데 최고령이었던 최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6시께 서울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전 7시 37분께 영면했다.

지난 7월 미수(米壽, 88세)를 맞았던 최 전 대통령은 수년 전부터 심장질환 등 노환으로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었으며, 자택에는 간병인이 상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 전 대통령은 해방 직후인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공직에 입문한 뒤 주로 외교공무원으로 활동했으며, 3공 시절이었던 1967년 외무부 장관을 거쳐 1976년부터 4년 간 국무총리를 지냈다.

10.26 사태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같은 해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이듬해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경호실 관계자는 "일단 추정 사인은 심장마비이나 워낙 노령인데다 최근 건강상태가 악화돼 간병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최 전 대통령 장례식 절차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규정에 따라 행정자치부에서 정해질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장남 최윤홍 씨 등 2남 1녀가 있다.

▲강원도 원주 출생 ▲경성 제1고보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만주대 ▲서울대 사범대 교수 ▲외무부 통상국장 ▲외무부 차관 ▲외무부장관 ▲국무총리 서리 ▲대통령 권한대행 ▲10대 대통령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의장 ▲국정자문회의 의장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

군부 쿠데타 세력과 악연 맺은 고인의 일생

22일 서거한 최규하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대통령 직위가 최단명으로 끝난 '비운의 대통령'이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갑작스레 대통령직에 올랐지만 이듬해 5.18 사태로 대변되는 신군부의 집권으로 7개월여 만에 하야해, 혼란한 정국 속에서 한국 정치사의 중앙무대 뒤로 쓸쓸하게 퇴장해야 했다.

아호가 현석(玄石)인 최 전 대통령은 1919년 7월 16일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경성제1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문과를 마친 뒤 만주국립대 대동학원을 졸업했다.

최 전 대통령은 해방되던 해인 1945년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 취임했으나 이듬해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관직생활에 첫 발을 디딘 뒤 1951년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를 거쳐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발탁되면서 전문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1952년 주일대표부 총영사, 1959년 주일대표부 공사 및 외무부 차관,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 고문, 1964년 말레이시아 대사를 거쳐 1967년 외무부 장관에 기용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취임해 1972년 11월과 1973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남북조절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평양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1970년 한국외국어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국제회의 참석만 해도 1967년에 22차 유엔총회에 수석대표로 참석한 것을 비롯해 30여 회에 이를 정도로 외교관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최 전 대통령은 유신체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4공화국 시절인 1975년말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이듬해 국무총리로 임명돼 1979년까지 4년 간 국무총리직을 수행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 전 대통령이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에 오른 뒤 같은 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으로 대통령에 피선됐으며,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 주도한 신군부의 12.12 사태 직후인 같은 달 21일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0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중심이 돼 5.18 사태가 터지는 등 혼돈의 회오리가 계속되면서 최 전 대통령은 신군부의 위세에 눌려 결국 그 해 8월 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특별성명을 발표한 뒤 대통령직을 사임해야 했다.

4공화국과 5공화국 사이의 진공상태에서 대통령직에 올랐다가 결국 신군부에 떼밀려 대통령으로서의 정상적인 권한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다 8개월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대통령직을 마감하게 된 것.

실제로 대통령 의전일지 등에 따르면 신군부가 5.17 비상계염령을 전국으로 확대한 이후 같은 달 31일까지 최 전 대통령이 공식행사에 참석하거나 각료, 군관계자 또는 민간인을 면담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등 신군부의 그늘에 가린 그의 한계는 자료상으로도 입증된 바 있다.

또 1996년에 공개된 미국 측의 12.12 사태 및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비밀문건에 의하면 최 전 대통령은 미국 측으로부터 대통령 선출 직전 약 1년만 재임할 것을 요구받기도 했으며, 재임 후 개헌을 추진했지만 곧 이은 퇴진으로 개헌이 성사되지는 못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9년에 낸 회고록에서 최 전 대통령에 대해 "헛된 욕심과 좁은 시야에 갇혀 민주화를 지연시켰다"는 부정적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최 전 대통령은 1981년 4월부터 1988년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으로 활동했으며 1991∼93년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1970년 일등수교 훈장, 1971년 수교훈장 광화대장, 1979년 무궁화대훈장, 1980년 건국훈장과 대한민국장 등의 국내 훈장과 타이 정부로부터 받은 백상최고 기사대장 등 10여 종의 외국훈장을 받았다.

그의 서거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1∼3대, 1965년 서거), 박정희 전 대통령(5∼9대, 1979년), 윤보선 전 대통령(4대, 1990년)에 이어 역대 대통령 중 4번째다.

그는 하와이 망명생활 중 쓸쓸히 생을 마감한 이승만 전 대통령이나 부하의 총탄에 숨을 거둔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달리 천수를 누렸지만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최단명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홀홀이 사라졌다. 격동의 시기에 신군부와 맺은 악연의 내막도 속시원히 밝히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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