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두 얼굴'의 앨 고어, 그의 진짜 얼굴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두 얼굴'의 앨 고어, 그의 진짜 얼굴은?

[화제의 책]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

"주장들이 양쪽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어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평범한 상황이라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 분명한 '승리' 따위는 필요 없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면한 문제가 행동이 필요한 명백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대중이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이 전부다."

홍보학자 필립 레슬리의 이 말은 '지구 온난화'를 둘러싼 논란에 딱 적용된다. 수많은 과학자들의 경고에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다. 석유업계, 석탄업계 등은 광고와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로비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다. 그렇게 쏟아 부은 돈은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최근에 나온 미국 전 부통령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김명남 옮김, 좋은생각 펴냄)과 이미 개봉된 같은 이름의 영화는 이런 교착상태에 큰 돌파구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훗날 역사가는 지구 온난화 문제를 둘러싼 논란을 살필 때 앨 고어를 아마도 '두 얼굴의 사나이'로 기록할 가능성이 크다.

앨 고어, 그는 과연 떳떳했나?

영화든 책이든 <불편한 진실>을 처음 볼 때, 앨 고어가 걸어온 길을 아는 사람이라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고어는 부시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지만 정작 1997년 미국이 기후변화협약 교토의정서를 거부할 때 미국의 대통령과 부통령은 바로 클린턴과 고어 본인이었다.

당시 고어는 지구 온난화에 대한 위험성을 유창한 능변으로 강조하면서도 정작 클린턴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대처하도록 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고어는 교토의정서에 미국이 동참하지 못하게 된 책임을 공화당과 무관심한 대중의 탓으로 돌리면서 기업이 원하는 대로 정책이 유지되는 데 이바지했다.

<뉴욕타임스> 1997년 12월 12일자는 그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클린턴과 고어는) 환경 문제에 대해서 강경한 발언을 하면서도 상원에서 불리한 표결에 직면하지 않았다. 백악관의 한 고위 관리는 (…) 클린턴의 남은 재임 동안 (…) 협정 비준안이 제출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예상은 적중했고 조지 W. 부시가 집권하면서 상황은 최악이 됐다.

고어는 <불편한 진실>에서 지구 온난화에 대한 진실을 불편하게 여기는 일군의 기업들과 그들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아 왔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꺼리지 않는" 부시 정부를 비판한다. 고어의 이런 지극히 정당한 비판은 10여 년 전의 클린턴과 고어 본인에게도 적용돼야 마땅하다.
▲ <불편한 진실>(앨 고어 지음, 김명남 옮김, 좋은생각, 2006) ⓒ프레시안

"이 문제만큼 과학계의 의견이 잘 통일된 것도 없다"

이런 과거를 염두에 둔다고 해서 <불편한 진실>의 가치가 훼손되지는 않는다. 설득력 있는 근거를 통해 전개되는 앨 고어의 환경운동가 뺨치는 선동은 지구 온난화가 왜 지금 당장 대응해야 할 시급한 문제인지 잘 보여준다. 언론에 이름깨나 오르내리는 명망 있는 지식인까지도 이 문제를 '사이비 과학' 정도로 취급하는 한국의 현실을 염두에 두면 더욱더 그렇다.

고어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지구 온난화는 주류, 비주류를 가릴 것 없이 과학계에서는 합의가 된 사항이다. 예를 들어 <사이언스>의 편집장 도널드 케네디는 지구 온난화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이 문제만큼 (과학계에서) 완벽하게 의견이 일치한 주제를 학계에서 또 찾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10년 동안 <네이처>, <사이언스>와 같은 과학 학술지에 발표됐던 지구 온난화에 관한 논문 중에서 918개(10%)의 논문을 무작위로 선택해 살펴봤다. 이 문제에 이견을 제기한 논문은 단 한 편도 없었다. 반면에 14년 동안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로스앤젤레스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이 문제에 관한 기사 636건(18%)에서는 무려 53%가 의심을 드러냈다.

이런 큰 차이는 석유, 석탄업계가 쏟아 부은 수백만 달러의 위력 탓에 생겼다. 1997년 <월스트리트저널> 등이 보도한, 110명의 '세계적인 대기과학자'가 서명했다는 한 선언문(라히프치히 선언문)은 그 단적인 예다. 미국 상하원에도 제출된 이 선언문에 서명을 한 과학자 110명을 확인해보니 대기과학 전문가는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서명자 가운데 25명은 텔레비전 기상캐스터였다!)

"지구 온난화 대응은 '도덕적 문제'"

앨 고어는 온도 측정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스무 해가 지난 25년 안에 몰려 있는 것(전 시기를 통틀어 가장 뜨거웠던 해는 바로 2005년인데, 이 기록은 해마다 경신되고 있다), 빙하가 녹고 있는 것, 최근 눈에 띄게 늘어난 전 지구적 기상이변 등을 대면서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을 일깨운다.

"2004년에는 세계의 모든 과학 교과서도 다시 써야 했다. 교과서는 그동안 '남대서양에서는 허리케인이 발생할 수 없다'고 가르쳐 왔다. 하지만 그 해, 사상 최초로 허리케인이 브라질을 강타했다. 끝나지 않았다. 2004년에는 미국의 토네이도 발생 최고기록도 깨졌다. (…) 지구 온난화 탓에 허리케인의 평균 강도는 (…) 일제히 상승할 것이라고 한다."

물론 고어가 충격 효과를 낳기 위해 드는 여러 가지 예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대기과학자 사이에도 지구 온난화의 속도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전 지구적 기상이변과 지구 온난화의 연관성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점점 더 지구 온난화 외에는 그 이유를 생각할 수 없는 '거대한 변화'가 진행되는 것은 사실이다.

<불편한 진실>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구는 그다지 강하지 않으며, 인간은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인간은 지구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설정해야 한다. 앨 고어는 말한다. "나는 지구 온난화에 대응하는 것이 도덕적인 문제라고 확신한다. 이제 우리 스스로 떨쳐 일어나 인류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

<불편한 진실>은 현존하는 세계의 주류 정치인 중에서 앨 고어가 환경 문제를 가장 깊이 있게 고민해 온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1990년대 보였던 '과거의 얼굴'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현재의 얼굴'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 예를 들어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미국의 대통령 후보가 됐을 때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