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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경제 대안 논의부터 다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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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경제 대안 논의부터 다시 하자

[한미FTA 뜯어보기 100 : 한미 FTA 중간점검(3)] 노무현형은 안 된다

나는 FTA에 대해서 원천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양자 간 경제협약은 원칙적으로는 실익이 있기 때문에 진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한미 FTA도 그것을 어떻게 설계하고 조항구성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두 나라 모두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협상될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 동의한다. 그러나 무조건 FTA가 좋다거나, 중국의 위협을 극복하고 국민경제가 살 길은 한미 FTA 밖에 없다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거려지지 않는다.

인접국들과의 지역경제를 다시 보자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나라들은 많다. 1990년대 초반부터 급격히 진행된 세계화와 더불어 지역화가 동시에 진행됐고, 이에 따라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이라는 용어가 한동안 유행하기도 했다. 이는 얼핏 의미 없는 언어유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은 말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선진국들은 제3세계를 향하던 해외투자를 미국으로 많이 돌렸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이런저런 이유로 선진국들의 돈이 해외직접투자의 형태로 미국으로 많이 흘러들어 갔고, 이 때문에 세계화 이후로 중남미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선진국들 중에서 미국과의 직접관계를 확대하면서도 자국 국민경제를 튼튼하게 운용한 나라들이 자국이 속한 지역경제의 기본구조를 보다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구조로 전환시켰다는 점은 흔히 간과되고 있다.

예를 들어 스위스와 덴마크 같은 나라들은 인근의 프랑스 및 독일과의 전통적 산업연관 관계를 강화시켰고, 우리에게는 '요술방망이'처럼 보인 아일랜드도 유럽연합(EU) 통합시장의 앞마당 역할을 하면서 국민경제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동안 한국경제도 미국경제와의 연관성을 강화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가깝게는 한중일, 조금 멀게는 러시아까지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는 리더십의 부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중일러 3국 간의 과도한 패권경쟁 때문이었는지, 아직은 안정적인 지역 내 경제관계 혹은 지역 내 무역관계에 대한 로드맵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다.

노무현 대통령도 동북아 중심국가와 같은 황당한 이야기를 하면서 동아시아 지역경제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정도의 튼실하지 못한 패권적 접근방식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 '캐스팅 보트'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과도한 자신감의 발로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미국과의 관계와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과의 관계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 미국이 제시하는 '경쟁적 자유화'라는 틀은 부시 정권 이후에 얼마나 더 갈까? 국제정치적으로는 중국의 위협이 앞으로도 계속 거론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중국과 한국 사이에 이미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경제적 관계는 국제무역 상의 현실이다. 일본과는 또 어떤가?

한국경제의 대외 축을 동아시아 지역경제와의 관계 및 미국경제와의 관계라는 두 개로 단순화해 보면, 이 두 개의 축을 동시에 발전시키고 두 개의 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취해야 노선이다. 지금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는 것처럼 "일단 미국으로 간다"면서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대외 축 하나에만 대한민국 국민경제를 송두리째 얹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한미 FTA라는 것이 우리나라와 미국 양자 간의 일이라고 하지만, 경제규모로 세계 1위인 미국과 세계 10위인 한국이 형성하는 관계가 둘 사이만의 이야기로 끝날 일인가?

'다발적 FTA 추진'을 하겠다던 정부의 FTA 로드맵을 선의로 받아들인다면 이상적인 전략은 한미 간 경제관계에 관한 논의와 한중일 간 역내 협력관계에 관한 논의를 최소한 동시에 진행시키면서 두 축 사이의 연관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한중일은 FTA라는 틀이 아니더라도 매우 다양한 협력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럼에도 중국위협론을 내세워 이런 가능성을 무시하고 한미 간의 축 하나로만 국민경제의 기본구조를 구상하고, 그 충격으로 세계일류 국가를 만들겠다는 정부의 기본구상이 가당키나 한 것인지 모르겠다.

동아시아 역내 경제의 파트너로서의 중국이나 일본과의 관계는 무시해도 좋다고 보는 것인지 모르지만, 실제로 한국경제의 대외적 힘을 떠받쳐주는 것은 바로 이런 역내 관계다. 이걸 무시하고 경제의 대외 축을 한 쪽으로만 몰고 가려는 현 외교통상부의 국민경제 구상은 지나치게 근시안적이다. 중국과 일본은 동북공정과 독도 문제에서 보듯 껄끄러운 이웃이긴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세계 경제사는 지역경제의 안정화와 미국과의 관계라는 '두 가지 축의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나간 나라들이 누구에게나 힘겨웠던 10여 년 간의 세월 동안에도 선진국 반열에서 밀려나지 않았다.

달러화 위주의 세계경제는 영원하지 않다

1985년 플라자 회담으로 달러화가 세계경제의 기축통화 기능을 회복한 이후로 구상무역 또는 국가 간 장기계약에 의한 무역체계가 사라지고, 달러화를 결제화폐로 하는 체계가 다시 자리 잡았다. 1980년대 후반 이래 지금까지 약 20여 년 간 세계무역이 이렇게 진행돼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달러화의 지위는 다시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고, 유로화를 중심으로 한 유럽 경제권이 터키까지 끌어들이면서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으며, 곧 동아시아권을 중심으로 비달러화 교역권이 등장할 것이다.

여기에 자원이 전반적으로 부족한 시대가 오면서 자원외교가 활발해지고 30년짜리 장기계약에 의한 무역이 다시 등장했다. 우리가 시베리아나 우즈베키스탄, 혹은 베트남 같은 곳의 해외 가스전이나 유전 개발에 참여하면서 경험해본 장기계약의 시대가 다시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에 자원선물 시장이 일반화하면서 단기 거래와 달러화 결제 거래로 구축돼 온 국제무역의 한 축이 지금 장기계약에 의한 무역으로 전환되고 있다. 규모는 아직 미미하지만 베네수엘라의 석유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중남미의 3각무역 시스템 PTA(People's Trade Agreement)는 전형적인 구상무역 체계다.

WTO의 무역체제가 그대로 지켜진다고 하더라도 달러화 위주의 경제체계가 10년 후에도 지금과 같이 유지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달러화 이외의 다른 화폐를 무역 결제에 사용하는 지역도 늘어날 것이고, 자원의 안정적인 거래를 위해 선물시장이 아닌 직접 조약에 의한 거래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사실 한중일 사이에 무역을 하면서 결제대금으로 달러를 사용하는 것은 당장은 편리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보면 불편함과 불이익이 많을 것이다. 다른 지역적인 결제화폐를 이용하거나 구상무역 방식을 통한 3각무역 또는 북한까지 포함한 4각무역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높다. 달러화가 점점 더 불안해지면서 외환 보유수단을 포트폴리오 형태로 다각화하는 추세도 강화되고 있고, 국가 간 직접거래와 유로화를 비롯한 비달러 거래비중이 점차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이런 흐름에 비추어 달러화 경제에 목매달고 포트폴리오적 고려를 하지 않는 한미 FTA는 국민경제를 불안정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경제외교의 관점에서 보면, 한미 FTA 협상은 속도를 늦추는 대신 지역적인 무역경제 체계를 포함하는 지역경제를 구상하고 국가 간 무역결제 방식에 대한 논의를 다각적으로 벌여나가는 것이 국민경제의 안정과 미래의 발전 가능성을 확보하는 데 보다 유리하다.

누구도 예견하기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기계적인 계산으로는 이미 지불불능 상태에 놓여 있는 미국경제가 앞으로 어려움에 처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될 때 만약 한국경제가 지역경제가 아닌 미국경제에 연동되는 상태라면 미국경제의 어려움이 곧바로 한국경제의 어려움으로 직결될 터인데, 그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그리고 그 책임은 누가 지겠는가? 한미 FTA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는 지금의 경제관료들에게 그때 가서 책임을 지울 수도 없을 것이다.

달러화가 초래할 수 있는 위험에 대응하고, 안정적인 자원무역의 비중을 확대하고, 지역경제를 안정화하기 위해 세계 각국은 지금 지역적인 결제수단, 직접무역, 구상무역, 다자간 지원 틀을 의제로 삼고 가능한 모든 외교수단을 동원해 그야말로 눈물 나는 경제외교를 벌이는 중이다. 베네수엘라와 같이 못 사는 나라가 주도한다고 해서 구상무역을 추구하는 일을 비웃을 것은 아니다. 서로 필요하기 때문에 손을 잡는 것 아니겠는가? 영국이 돈이 없어서 자국 빈민층을 위해 석유를 40%의 가격에 지원하겠다는 차베스의 제의를 받아들였겠는가? 앞으로는 세계무역의 일정 부분이 지역경제, 구상무역, 직접외교를 통해 움직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인식을 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 정부는 한미 FTA를 추진하는 데 협상능력과 외교능력을 그야말로 총투입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경제외교 역량을 투입해야 할 대상에 FTA만 있는 것은 아니며, 한미 FTA만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한미 FTA의 속도를 지금이라도 조절하고 안전판을 다양하게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이 2006년과 2007년에 대한민국 경제관료들이 외교라는 틀을 통해 해야 할 일이다. 모든 걸 다 내던지고 온 국민과 관료들의 시선을 한미 FTA에 집중시키는 것은 한국경제의 바람직한 대안 모색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한미 FTA 늦추고 '한국경제의 대안' 논의부터 하자

우리의 사회갈등과 양극화, 그리고 부동산과 관련된 지표들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나도 한숨부터 나온다. 시급히 무엇인가 대책이 필요하다는 데 대해 누가 동의하지 않겠는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말에는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그 '미래'의 내용이 무엇이냐가 문제다.

우리나라의 대외 경제의존도는 70%다.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이런 숫자는 인류역사에서 나온 적이 없다. 노벨상을 탄 경제학자, 아니 외국의 경제학자 누구라도 붙잡고 "어떻게 해야겠는가?"라고 물어보라. 그러면 이 숫자를 낮추어야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는 경제학의 상식에 해당하는 것이다. '균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폴 새뮤얼슨이나 맨큐의 경제학 교과서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경제관료들에게 이 숫자를 들이대면 "그러니 개방만이 살 길"이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런 구조를 가지고 우리나라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미국과 같이 제조업을 해외로 내보내고 연구개발이나 제품디자인과 같은 분야만 본국에 남겨둔 매우 특별한 국민경제를 가진 나라의 경우에도 해외부문이 20%를 넘지 않는다.

좌파든 우파든, 진보든 보수든 우리나라 경제의 대안에 관한 논의는 경제학적 상식을 회복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경제문제에 대해 단 하나의 답만이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미 FTA를 통해 중국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일류국가가 되자"는 식의 황당한 처방이 통하는 상황에서는 대안에 관한 논의 자체가 불가능하다.

한미 FTA가 체결되면 농업 분야에서 적어도 국민의 3% 이상 되는 인구가 신규 실업자로 노동시장에 흘러나올 것이다. 그 충격을 한국의 국민경제가 받아낼 수 있겠는가? 세계화 국면을 '국민경제의 기형성 증폭'으로 헤쳐 나가고자 했던 IMF 이후의 경제운용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서비스업을 강조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FTA 정책은 '기형성 극대화'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런 정책은 겉으로는 성장을 촉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중간계층, 중소기업, 기층 생산자를 붕괴시킬 것이다.

스웨덴형, 덴마크형, 아일랜드형, 스위스형은 물론이고 심지어 일본형도 미국을 향해 질주하려다가 국민경제의 저변과 중간층을 무너뜨리게 될 '노무현형'보다는 나은 대안으로 여겨진다. 필자는 한국경제의 대안으로 스위스형과 덴마크형을 혼합한 형태가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것은 지역적 서비스와 다국적 기업이 공존하는 형태이며, 평화국가를 지향하는 국민경제의 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밖에도 사회적 대타협을 전제로 한 스웨덴형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고, 시장의 영역이 보다 확대된 형태이지만 복지의 비중도 낮지 않은 네덜란드형을 원하는 이들도 있다. 그 어떤 것이든 지금의 한국경제보다는 훨씬 낫다.

70%에 이르는 해외의존을 장기적으로 해소해나가는 것에서부터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면 대한민국 국민경제의 장기적 운용방향에 관한 토론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토론이 1년이 걸릴지 수년이 걸릴지 모른다. 다만 이런 토론이 이루어진다면 지금의 한국경제보다는 개선된 대안이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국민경제의 해외의존도 70%를 그대로 놔두면서 "그러므로 개방만이 살 길"이며 "중국이 무서워서라도 당장 한미 FTA를 해야 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경제의 '대안'이 될 수 없다. 경제 시스템이란 게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국민경제의 장기적인 운용계획은 적어도 30년을 최소 기간단위로 해야 한다. 미국 의회가 행정부에 부여한 신속무역협상권한(TPA)의 시한 때문에 몇 달 만에 후닥닥 한미 FTA 협상을 타결해야 한다는 비상식적인 말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한미 FTA 협상 자체야 해도 좋다. 다만 그 일정을 늦추고, 대신 동아시아 지역경제의 장기적인 비전에 대한,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경제의 대안과 진로에 대한 논의를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한다. 한미 FTA 체결은 국민경제의 운용방향에 대한 국민적 합의 내지 공감대가 형성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한미 FTA를 놓고 "하자"거나 "하지 말자"거나 "할 거면 빨리 하자"라는 세 마디 말만 주고받아서는 한국경제의 바람직한 대안이 찾아질 수 없다. 국민경제는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시간이 많이 걸리고 합의에 이르기 어렵다 하더라도 우리는 국민경제의 대안에 관한 논의를 해야 하고, 최소한의 공감대라도 만들어가면서 그 토대 위에서 국민경제를 운용해야 한다.

쇄국을 하자거나 반미를 하자거나 시장경제를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대안에 관한 토론을 통해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논의와 주장을 포괄해내는 과정도 없이 "한미 FTA로 무한대의 시장이 열린다"는 식의 비과학적인 구호를 내세워 국민경제를 실험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위험한 일은 더 이상 하지 말자는 얘기다. 벤처기업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실험을 해본 것으로 이미 한국경제에 대한 실험은 충분히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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