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호주는 왜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거부했을까?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호주는 왜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거부했을까?

[한미FTA 뜯어보기 55:기고] 정부의 '차별대우 구제론'이 가리는 진실

지하철을 교통수단으로 삼다보니 이따금 맹인 분들을 만날 때가 있다. 맹인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승강장을 찾아가는 그 분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도 아슬아슬하다. 그래서 주변의 행인이 시각장애인의 손을 잡고 길동무를 해주는 때가 많다.

두어 달 전에 맹인들에게 안마사 자격 취득에서 정상인보다 특혜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들었을 때 지하철의 맹인들이 떠올랐다. 이 판결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이 판결에 대해 '시각장애인에 대한 복지정책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차별대우 구제의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정부는 <MBC> PD수첩의 방송 내용을 반박하는 신문광고를 하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 미국 투자자에게 한국 정부를 국제중재에 회부할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투자자가 차별대우로 피해를 입었을 경우에 대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연 이 제도는 차별대우를 구제하기 위한 것인가?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반대한 호주 변호사협회

호주의 멜버른에 있는 모나시(Monash) 대학은 2001년 8월 '미국과의 FTA: 그 쟁점과 시사점(An Australia-USA Free Trade Agreements: Issues and Implications)'이라는 장문의 연구보고서를 호주 정부에 제출했다. 호주가 2002년 11월 미국과 FTA 협상 개시를 밝히기 1년4개월 전의 일이었다.

이 보고서는 FTA로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처음 도입된 투자자-국가 소송제도로 인해 외국인 투자자가 환경법과 같은 국내법을 무력화시켰다는 비판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호주는 미국과 FTA를 체결하면서 이렇게 결함 있는 제도를 채택할 이유가 없다(There is no reason why a flawed mechanism should be adopted in an Australian US FTA)"고 결론 내렸다.

그 뒤 호주 정부는 호주의 산업계와 시민단체들에 2003년 1월15월까지 미국과의 FTA에 대한 공공의견을 제출(public submission)할 것을 공지했다. 약 200개의 공공의견이 호주 정부에 접수됐다. 호주 변호사협회(Law Council of Australia)도 호주 정부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변호사협회는 NAFTA의 투자자-국가 소송제도의 분쟁사례를 볼 때 이 제도에 적절한 한계선을 긋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호주 빅토리아 주 변호사협회(Law Institute of Victoria)는 이 제도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 정부의 규제권한을 위협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호주의 변호사들은 이 제도를 채택할 경우 호주 정부가 공공이익을 위해 추진하는 정당한 정책에 대해서까지, 미국 투자자들이 '수용과 같은(tantamount to expropriation)' 조치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호주 정부를 중재에 회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캐나다 정부가 2002년 미주자유무역협정(FTAA)에 이 제도를 두는 것에 공식으로 반대한 사실을 호주 정부에 상기시켰다.

호주 정부와 의회의 선택

시민의 의견을 수렴한 호주 정부는 2003년 3월 3일 '미국과의 FTA에 임하는 호주의 목표(Australia-US Free Trade Agreement: Australian objectives)'라는 제목의 문서를 공식 발표했다. 미국과의 1차 협상 개시를 보름 앞둔 시점이었다. 호주 정부는 외국인 투자에 대한 지역사회의 염려에 부응하는 협상이 되도록 하겠다면서, 공정한 국가 대 국가(State-to-State) 차원의 분쟁처리 절차를 둘 것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해서 호주 정부는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채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호주 정부는 미국과의 1차 협상을 마친 후 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여기서 호주 정부는 공공정책을 신축적으로 추진할 권한(flexibility)을 지킬 것이라고 보고했다. 호주 정부는 2003년 5월의 2차 협상에서 호주 측 협정문 초안을 미국에 제시했는데, 거기에 투자자-국가 소송제도는 들어 있지 않았다. 결국 호주는 2004년 5월 FTA 협정 문안에 최종 서명할 때까지 투자자-국가 소송제도를 결코 채택하지 않았다. 그 대신 미국의 체면을 고려해 상황의 변화(change in circumstances)가 생기면 이 제도의 도입을 고려(consider)한다고 했다.

미국의 압력을 물리친 호주의 통상장관 대디(S. Deady)는 2004년 2월 호주 의회에 이렇게 보고했다. "호주와 미국 양국은 법치주의(rule of law)가 효과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나라들이라는 점, 따라서 이러한 사법제도를 보유하고 있는 고도 선진국(highly developed countries)인 호주와 미국 사이에서는 투자자-국가 소송제도를 따로 둘 필요가 없다는 점에 동의했다."

그런데 호주 의회는 이에 안심하지 않았다. 호주 의회는 2004년 6월 미국과의 FTA 협정문에 대한 심의 결과를 발표하면서, 미국의 체면을 고려해서 넣어준 '상황변화 시 고려'라는 조항 때문에 행여 나중에 미국에 꼬리 잡힐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잘 단속할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투자자-국가 소송제는 미국법의 적용을 관철하려는 것

미국은 왜 한미 FTA에서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요구하는가? 미국 통상법 제2102(b)(3)조는 해외투자 분야에서 미국의 협상목표를 규정하면서, 해외에 투자하는 미국의 투자자에 대해서도 미국의 법 원리와 실무(United States legal principle and practice) 아래에서 누리는 것과 같은 보호를 해주는 것이라고 명시했다. 미국인이 미국에서 기업활동을 하든 해외에서 비즈니스를 하든 법적으로 차이가 없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2006년 2월 2일 미국 통상법 2104(a)(1)조의 규정에 따라 미국의 상원과 하원에 보낸 한미 FTA 협상 개시 통지문을 보면 협상목표의 하나로, 한국에 투자한 미국인을 미국의 법 원리와 실무에 상응하는 보호를 하는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일찍이 미국은 '1994년 미국의 양자간 투자협정(BIT) 표준안'을 만들면서, 그 장점으로 미국 투자자가 외국의 국내 법정을 이용할 의무가 없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이 1994년 FTA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NAFTA에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도입한 까닭이 멕시코 등 남미의 자원민족주의에 대한 미국의 염려에서 비롯되었음은 상식에 속한다.

미국인 투자자는 한국에서 차별받고 있지 않다

투자자-국가 소송제는 결코 차별대우 구제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한국의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의 헌법과 법률에 따라 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 한국은 외국인 투자에 대한 '지원'과 '편의제공'을 목적으로 명시한 외국인투자촉진법을 시행하고 있고, 조세감면 등 여러 지원 제도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사법부는 결코 미국인 투자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변호사가 생업인 필자는 아직 외국인 투자자를 차별한 판결을 본 적이 없다. 대법원은 심지어 학교 급식에 우리 농산물을 우선 사용할 것을 규정한 전북도 조례에 대해 가트 규정 위반이라며 무효판결을 한 바 있다.

투자자-국가 소송제도의 용도는 결코 차별구제에 있지 않다. 그 목적은 미국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한국의 공공정책에 대한 압박이요, 그로부터의 자유다. 미국인 투자자들은 우리의 환경, 노동, 문화, 식품위생, 우체국보험, 조세 등 여러 공공정책이 자신들의 투자이익을 건드렸다며 한국 정부를 국제중재에 회부할 것이다. 지금 미국 제약회사들은 한국의 보험약가 재조정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투자자-국가 소송제도였다면 한국의 보건복지부는 국제중재에 이미 회부되었을 것이다. 론스타는 재론할 필요도 없으며, 캐나다의 우체국 서비스를 국제중재에 회부한 바 있는 미국의 UPS도 한국에서 마찬가지 조치를 취할 것이다.

예외규정으로는 중재회부를 막을 수 없다

정부는 이 제도가 적용되지 않을 예외조항을 충분히 두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중재 제도의 본질을 모르는 말이다. 투자자-국가 소송제의 핵심 조항은 중재회부에 대한 포괄적이고 사전적인 동의간주 조항(consent to arbitration)이다. 대한민국 국내에서 중재법이 제정된 때가 이미 40년 전인 1966년이다. 그런데도 왜 중재가 아직 일반화되지 않을까? 그것은 당사자의 동의가 없으면 중재법정으로 갈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재동의 조항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조항이다.

한미 FTA에서 중재회부에 대한 포괄적이고 사전적인 동의간주 조항을 두는 이상 한국 정부는 언제든 중재에 회부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예외조항을 둔다고 해서 중재회부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나프타(NAFTA)에도 환경정책에는 이 제도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조항(제1114조)이 있었지만, 멕시코 정부는 폐기물 처리장 문제 때문에 미국 기업 메탈클래드(Metalclad)에 의해 중재에 회부됐다. 한국 정부는 일단 중재에 회부당하게 된다. 다만 중재절차에서 예외에 해당한다는 항변, 곧 중재기관은 관할(jurisdiction)이 없다는 주장을 제출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3인의 중재부가 예외사항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한국 정부는 더 이상 다툴 수 없다. 왜냐하면 중재는 1심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최소한 동의권 선택 조항과 국내법 적용 조항은 두어야

그러므로 투자자-국가 소송제도 그 자체를 두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중국과 아시안 사이의 FTA(제5조), 유럽연합(EU)과 멕시코 사이의 FTA(제15조)가 그 예다. 그래도 정녕 국제중재 제도 자체를 두어야만 한다면 중재 회부에 동의할 것인지를 개별적으로 한국 정부가 판단하고 선택할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뉴질랜드와 태국이 2004년에 체결한 FTA가 그 대안이 될 것이다. 이 FTA에서는 투자유치국 정부가 중재회부 동의권을 사안마다 개별적으로 행사할 권리가 있다(제9.16조, the parties concerned may agree to submit the dispute to…).

또 하나의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국제중재 절차에 적용될 준거법에서 한국의 국내법이 배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NAFTA에서처럼 국제법(rules of international law)만이 적용된다면 한국 정부가 승소하는 사건은 천연기념물처럼 드물게 될 것이다. 앞에서 본 뉴질랜드와 태국의 FTA에서도 중재에 회부당한 나라의 국내법(national law)이 같이 적용되도록 했다. 많은 FTA들이 그러하다.

미국과의 합의, 골격이라도 공개해야 한다

필자는 여러 차례 한미 FTA의 성공을 바란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필자는 미국의 반덤핑 장벽을 크게 낮추는 것이 FTA의 성공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포괄적이고 사전적인 국제중재 회부 동의 조항을 한미 FTA에 둔다면 한국의 공공정책의 자율성이 훼손되어 한미 FTA는 실패할 것이다. 이 점에서 한미 FTA의 성공을 위해 한국의 법률가들이 나서야 할 몫이 있다. 그래서 한 변호사 단체는 지난 6월 16일 한국과 미국이 1차 협상에서 합의했다는 투자자-국가 소송제도의 골격을 공개해줄 것을 청구했다. 하지만 외교통상부 장관은 6월 26일 공개거부 결정을 내렸다. 초안 전부를 공개하라는 것도 아니고 법률가들이 중요한 사법제도에 대한 논의를 위해 필요한 정보를 공개하라는 것인데 그것조차 공개하지 않는 처사는 한미 FTA의 성공 전망을 어둡게 한다.

필자는 농촌에서 성장했다. 그때는 어느 마을에 가든 장애인이 꼭 한둘은 있었다. 어떤 형이 있었는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동네에서는 울력이나 급한 일을 알릴 때 쓰는 동네 징을 치는 일을 맡겼다. 그 형이 동네골목을 신나게 뛰어다니며 자랑스럽게 징을 치던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것 같다. 이처럼 지역사회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맹인 분들에게 내린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한미 FTA와 관련해 정부가 펼치는 투자자-국가 소송제도 '홍보'다. 정부의 이름으로 내는 광고의 제목에 '외눈박이'라는 시각장애인 차별적인 용어가 사용된 것도 유감스럽지만, 정부가 먼저 나서서 이 제도가 '차별구제용'이라는 홍보를 하는 것은 법률가로서 참 보기에 난감한 장면이다. 정부가 한미 FTA에 임하는 진정성을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성공적인 FTA를 바란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홍보'가 아니라 '공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