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우리 측 협정문 초안에 '투자자-국가 소송 제도'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공식으로 인정했다. 투자자-국가 소송 제도란 외국인투자자가 투자유치국을 상대로 직접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를 뜻한다.
정부는 원래 이 사실을 '대외 비공개'로 분류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목표 및 우리측 협정문 초안 주요 내용'이라는 제목의 대국회 보고서에서만 밝혔다. 그러나 지난 19일 <프레시안>이 '미국기업에 한국정부 제소권 보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 보고서의 전문을 공개하자 우리 측 협정문 초안에 이런 제도가 들어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정했다.
그러나 정부는 '투자자-국가 소송제도가 우리나라 공공정책의 독립성을 훼손할 것'이라는 <프레시안>의 지적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외교통상부의 한미FTA기획단은 19일 해명보도자료에서 "'투자자-정부 간 분쟁해결 제도는 <프레시안>의 기사 내용처럼 외국기업이 투자유치국의 공공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도록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투자와 관련한 내·외국인 차별 금지, 이행의무 부과 금지 등 외국인투자를 보호하기 위해 핵심적인 협정상의 의무 위반에 대해서만 제3자적인 기관인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등을 통해 중재를 허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외교통상부는 또 "이 제도는 한-칠레 FTA, 한-싱가포르 FTA, 한-유럽자유무역연합(EFTA) FTA 등 우리가 체결한 모든 FTA에 이미 포함된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즉 정부는 '투자자-국가 소송 제도'를 외국인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부의 시각에 비춰볼 때 정부는 미국과의 FTA는 물론 현재 추진 중인 다른 나라들과의 FTA에도 이 제도를 허용할 가능성이 높다.
'투자자-국가 소송 제도', 미-호주 FTA에는 없다
그러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소속의 송기호 변호사는 <프레시안>에 보내온 기고문에서 기업이 정부를 제소하도록 허용하는 '투자자-국가 소송 제도'는 외국인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가 아니라 "정통 국제법상 이단(異端)과 같은" 독소조항이라고 지적했다.
송기호 변호사는 이 제도가 우리 측 협정문 초안에 담긴 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시하고, 정부가 한미 FTA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꼭 지켜야 할 첫번째 마지노선이 바로 이 투자자-국가 소송 제도를 한미 FTA에 넣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 미국과 FTA를 체결한 호주도 이 제도를 협정문에서 빼는 데 성공했다고 지적했다.
송 변호사가 제시한 두 번째 마지노선은 미국의 덤핑규제법을 혁파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한미 FTA 협상에서 자국의 덤핑규제법에 대해 논의할 생각이 없음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송기호 변호사는 정부에 우리 측 한미 FTA 협정문 초안의 전문(全文)을 공개하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현재 송 변호사가 소속된 민변은 정부를 상대로 우리 측 협정문 초안의 전문을 공개하라는 정보공개 청구를 준비하고 있다.
송 변호사는 최근 발간된 <녹색평론> 88호에서는 "관료들이 한미 FTA의 협상 내용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한다. 왜 그럴까? 정보를 독점해야 관료들이 (제멋대로) 마지노선을 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협상 결과를, 마지노선을 지킨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며 "관료들의 정보 독점"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한 바 있다. <편집자>
이번 주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성패를 좌우할 가장 결정적인 시기 중 하나다. 한국과 미국 양국이 지난 19일 교환한 각각의 한미 FTA 협정문 초안을 바탕으로 한미 FTA의 협상전략을 구체화하고 협상의 마지노선을 정하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프레시안>을 통해 공개된 외교통상부 한미FTA기획단의 대국회 보고서를 봤을 때 한미 FTA는 이미 '실패한 것 같다'는 우려가 든다.
무엇보다도 우리 측 초안에는 미국 투자자와 기업들이 한국정부의 공공정책에 직접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투자자-국가 소송 제도(investor-state claims)'가 포함돼 있다. 이는 우리 정부가 끝까지 한미 FTA 협정문에 넣지 않아야 할 독소조항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의 덤핑규제를 혁파하려는 정부의 의지도 부족해 보인다. 세계무역기구(WTO)는 이미 미국의 덤핑규제가 WTO 협정에 대한 위반이라고 판정했는데도 우리 정부는 '미국이 덤핑규제를 발동하는 조건을 강화하는 특례조건들을 다수 넣는다'는 수준에서 미국의 덤핑규제를 다루고 있다.
나는 정부가 △한미 FTA 협정문에서 투자자-국가 소송 제도를 삭제하고 △미국의 덤핑규제를 약화 또는 폐지시켜야 한미 FTA가 성공한 협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또 정부가 한미 양국이 교환한 협정문 초안의 전문을 공개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양국의 협정문 초안이 공개돼야 우리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한미 FTA에 대한 사회적 토론과 합의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첫 번째 마지노선은 공공정책의 독립성을 지켜내는 것
한미 FTA에서 우리 정부가 지켜내야 할 첫 번째 마지노선은 '공공정책의 독립성'이다. 한미 FTA에서 환경, 보건, 의료, 노동, 교육 정책의 독립성을 훼손할 수 있는 '투자자-국가 소송 제도'를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 제도는 1994년 미국, 캐나다, 멕시코가 체결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처음으로 등장한 제도다. 이 제도가 한미 FTA에 들어가면 미국의 투자자와 기업들은 한국의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한미 FTA 협정문에 들어간 미국 투자자 보호 조항들을 준수하고 있는지 직접 법적으로 따질 수 있게 된다.
즉 한미 FTA라는 국제 통상협정의 준수 여부에 대해 미국정부가 한국정부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미국 투자자들이 직접 한국정부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조약의 당사자를 '국가'로 보는 정통 국제법의 입장에서 보면 이단(異端)과도 같다. 한미 FTA에서 이 제도가 허용된다면 앞으로 론스타 같은 미국계 투기자본을 사후적으로 규제하는 일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반면 투기자본은 한국정부의 규제 강화가 기업의 이익을 침해했다는 명분으로 한국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한을 갖게 된다. 한마디로 투기자본의 힘이 강력해진다는 것이다.
1995년 멕시코의 한 지방정부는 독극성 폐기물 처리장을 건설하려는 미국기업 메탈클래드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이 지방정부가 해당 지역을 환경보호구역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그러자 메탈클래드는 이 조치가 NAFTA의 투자자 보호 규정 위반이라며 해당 지방정부를 NAFTA 중재법정에 제소했다. NAFTA 중재법정은 '지방정부의 환경보호 조치는 수용(收用·expropriation)이나 다름없다'며 메탈클래드의 손을 들어줬다. 결국 이 지방정부는 메탈클래드에 1600만 달러를 배상해야 했다.
1998년에는 미국 기업 에틸이 캐나다 정부를 NAFTA 중재법정에 제소했다. 캐나다 정부가 에틸이 생산하는 엠엠티(MMT)라는 가솔린 첨가제에 대한 판매를 금지한 것이 NAFTA의 투자자 보호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캐나다 정부는 엠엠티가 캐나다의 환경을 오염시키고 국민건강에 해를 끼친다며 판매를 금지했다. NAFTA 중재법정은 캐나다 정부가 에틸에 130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캐나다 정부는 엠엠티의 판매를 금지하는 환경정책도 폐기해야 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호주 정부는 미국과의 FTA에서 '투자자-국가 소송 제도'를 유명무실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는 성공이었다. 만일 한미 FTA에 투자자-국가 소송 제도가 들어가면 한국정부가 시행하려는 공공정책의 독립성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 이 경우 한미 FTA는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두 번째 마지노선은 미국 덤핑규제법의 혁파
한미 FTA를 성공으로 이끌 두 번째 가능성은 미국의 덤핑규제법을 혁파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미국은 한국산 제품에 대한 덤핑마진(dumping margin)을 계산할 때 한국기업이 미국에 정상적으로 수출한 물량의 가격은 계산에 넣지 않는 '제로잉(zeroing)' 계산법을 사용한다. 이 경우 한국산 상품의 덤핑마진은 실제보다 더 부풀려지고, 그만큼 한국산 제품에 매기는 반덤핑 관세는 더 높아진다. 미국은 한국기업들로부터 부당하게 거둬들인 반덤핑관세를 미국 기업들에 나눠주게 된다.
가령 미국은 한국의 하이닉스에 부당하게 높은 반덤핑 관세를 매긴 후 그 관세 수입금을 하이닉스의 경쟁업체인 미국 마이크론에 보상금 형태로 제공했다. 한국정부는 이런 부당한 조치를 지난 2002년 12월 WTO 중재법정에 제소했다. 2002년 9월과 2003년 1월에 잇달아 열린 WTO 1심과 2심은 모두 이같은 미국의 조치가 WTO 협정에 대한 위반이라고 판정했다. 그러나 미국은 WTO 중재법정으로부터 불법 판정을 받은 이 덤핑규제법을 내년 9월까지 존속시키기로 했다.
미국은 현재 새로운 덤핑규제법의 제정을 준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는 미국이 과연 이 새 덤핑규제법에서 어느 정도까지 종래의 불법적인 관행을 없앨 것인지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의 덤핑규제법은 한미 FTA의 핵심적 쟁점이 돼야 한다.
미국은 1986년부터 2003년 4월까지 무려 18차례에 걸쳐 한국제품에 대해 불법적인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다. 그 중 14건의 관세가 미국이 경쟁력을 상실한 철강제품에 부과됐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이 정말로 한미 FTA를 통해 대미수출을 늘리고자 한다면 미국의 이런 자의적인 덤핑규제를 막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한미 FTA의 성공과 실패를 가를 것이다.
미국의 '2002년 무역법(Trade Act of 2002)'에 따르면 미국정부는 덤핑규제법을 개정해야 하는 내용이 통상협정에 들어갈 경우 그 통상협정에 대해서는 협정 체결 180일 전에 관련 사실에 대해 미국 의회에 통지해야 한다. 한편 덤핑규제법을 규제할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 협정의 경우에는 협정 체결 90일 전까지만 의회에 통지하면 된다. 그러므로 미국의 덤핑규제법을 혁파하는 성공적인 한미 FTA가 될 수 있는 협상 시한은 사실상 올해 12월 31일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통상관료들은 한미 FTA의 체결 시한이 내년 3월 31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미국에 미국 덤핑규제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부가 정말로 한미 FTA 협상에서 성공을 거두고자 한다면 한미 FTA의 첫 협상 테이블에서부터 미국의 불법적인 덤핑규제법을 가장 중요한 의제로 다뤄야 한다. 미국이 이 문제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협상을 중단하거나 연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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