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재계 서열 2위인 현대기아차그룹이 지난 2003년 1월 공식 선언한 '투명경영'이 구호에 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상은 비자금 경영, 하청업체 착취 경영 등 '비리경영'으로 얼룩진 성장을 해왔다는 지적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또 현대기아차그룹이 대외여건 악화를 이유로 지난 1월부터 전사적으로 천명해 온 '비상경영'도 부실경영을 호도하기 위해 안팎의 희생양을 만들어내려는 속임수였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이같은 비판은 우선 그룹 내부로부터 나오고 있다.
현대기아차그룹 노동조합은 3일 〈현대기아그룹 비자금 성명서〉를 발표해 "신뢰경영, 투명경영은 화려한 말잔치에 불과했다"면서 사측과의 전면투쟁을 선언했다.
***현대차노조 "천민자본의 행태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
노조는 최근 비자금 의혹 등으로 현대차 양재동 본사 등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이 벌어진 사태에 대해 "현대차그룹이 그 태생적 한계와 비자금 조성, 뇌물에 의한 특혜 등 천민자본의 행태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며, 신뢰와 투명경영을 부르짖는 최고경영층이 아직도 구태의연한 정경유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구시대적인 행위로밖에 볼 수 없다"고 질타했다.
노조는 나아가 지난 1월부터 대외여건 악화를 명분으로 내건 '비상경영체제'에 대해서도 이를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노조는 "비상경영은 부품사 노동자의 납품가 인하와 원-하청, 임금동결을 통한 착취자금을 계열사 확장과 정치권 로비자금으로 전용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면서 "비자금을 불법적으로 조성하고 정치권에 상납하며 계열사 확장과 정의선에 대한 경영권 세습에 몰두해 온 경영층은 더 이상 비상경영 타령을 당장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특히 '비상경영'을 명분으로 하청업체들에 요구해 온 납품가 인하 요구의 허구성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에서도 드러났다.
강대형 공정위 부위원장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현대차와 기아차가 하청업체들에게 납품단가를 부당하게 인하해줄 것을 요구한 사건과 관련, 혐의가 있는 것으로 보고 받았다"면서 "현대차와 기아차는 환율인하에 따른 조치라고 해명하지만 환율인하 이외에도 정당한 이유없이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한 혐의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매체에서는 현대기아차 그룹에 '면죄부'를 줘야 한다는 호소를 하기도 한다. 이들은 "범죄가 있다면 법의 심판이 있어야 하겠지만 현대차에 대해 광범위하고도 심도 깊은 수사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변한다.
한국경제 전체적으로 각종 선행 경기지표가 너무 좋지 않게 나오고 있기 때문에 재계 서열 2위인 현대차에 대한 전방위적 수사는 진짜로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국적 특수상황에서는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있는 오너경영 체제가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면서 검찰의 수사가 총수 일가로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박기도 한다.
***누가 현대차에 '면죄부'를 주려 하나**
그러나 이같은 논리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과거 사법부의 논리를 연상시킨다는 지적이 있다. 정관계에 비자금을 뿌리면서 계열사 확장에 몰두하든, 하청업체들에게 부당하게 납품가를 깎으면서 편법적인 경영권 세습체제를 구축하든 우리 경제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 기업은 '건드리면 좋을 게 없다'는 식이라는 것이다.
IMF 이후 정부가 재벌규제와 개혁을 외쳤던 것은 비리경영으로는 '세계 초일류 기업'이 될 수도 없고, 어느 순간 무너져 더 큰 재앙이 된다는 공감대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미 '세계경영'을 외쳤던 대우그룹이 국민들에게 80조 원의 부채를 안기며 공중분해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은 투명경영을 선언했던 2003년 1월 신년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투명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유럽이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생산성은 떨어지지만 아직도 자동차 강국으로서 위치를 유지하는 것은 경제, 사회의 투명성과 명확한 법적 절차에 따른 것이다."
현대기아차그룹은 이런 정 회장의 선언에 따라 "글로벌 스탠더드의 최우선 순위로 부각되고 있는 윤리경영과 투명경영의 정착을 통한 국제경쟁력 확보에 주력하기로 하고 투명한 기업활동으로 국가발전에 공헌하겠다"면서 "어떠한 형태의 금품이나 향응수수 행위도 배척한다"는 등의 실천강령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의 검찰 수사를 보면 효율적인 자원분배를 담담한다는 재무라인이 실상은 '검은 돈 조성책'으로 검찰에 줄줄이 체포, 소환되고 있으며, 수십억 원의 비자금이 현장에서 적발됐다.
검찰은 지난 26일 그룹의 일감 몰아주기 방식으로 급성장한 계열 물류회사인 글로비스 본사를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사장실과 재경팀 사이 후미진 벽에 숨겨진 비밀금고를 찾아냈다. 이 비밀금고 안에서 양도성예금증서(CD), 달러, 수표 등 50억 원이 넘는 비자금이 발견돼 검찰이 압수를 했으며, 동시에 글로비스의 이주은 사장은 비자금 조성혐의로 체포됐다.
그 뒤 29일에는 현대기아차 그룹의 자금흐름을 총괄하는 채양기 기획총괄본부 사장, 30일에는 이정대 재경본부장 등 재무라인들이 잇따라 검찰에 소환되고 있다.
검찰은 내주부터는 현대기아차의 또다른 '비자금 조성 창구'로 알려진 현대오토넷에 대해 본격 수사에 들어갈 방침을 밝히고 있어, 비자금 스캔들은 계속될 전망이다.
***참여연대 "글로비스는 편법적 경영권 상속 통로"**
이처럼 계열사를 통해 하청업체 납품가 착취 등으로 조성한 비자금은 정관계 로비 자금으로 뿌려진 것 이외에도 '경영권 세습' 구축을 위한 자금으로도 활용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31일 참여연대 관계자는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사장이 편법적인 상속과 경영권 승계에 비상장계열사인 글로비스를 이용했다"면서 "내달 6일 구체적인 과정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검찰 일각에서는 오래 전부터 글로비스가 편법적인 경영권 상속 통로로 이용되고 있다고 보고 예의주시한 것으로 알려져 이번 수사가 '재계의 편법상속에 대한 손보기'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특히 글로비스는 "경영권을 물려받을 2세에게 상장예정 기업의 주식을 저가에 몰아준 뒤 그 기업이 상장되면 막대한 차익을 올리게 한 뒤 그룹 경영권과 직결되는 모기업의 주식을 매집하는 방식으로 경영권을 세습한다"는 시나리오를 따르고 있다는 의혹을 받아 왔다.
실제로 정의선 사장은 2001년 부친 정몽구 회장과 함께 50억 원 정도를 투자해 글로비스를 설립했고, 그룹의 일감 몰아주기로 급성장한 글로비스가 지난해 말 상장되면서 현재 5000억 원이 넘는 평가차익을 올리고 있다.
이처럼 갖가지 의혹이 불거지면서 현대기아차 그룹이 계열사 16개에 불과했던 지난 2001년 4월 이후 40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2위로 급부상한 과정이 정상적이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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