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인 도올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가 '새만금 갯벌 지킴이'로 나선다. 김용옥 전 교수는 6일부터 8일까지 사흘간 '새만금을 살려야 전북도민과 우리나라가 산다!'라는 주제로 새만금 방조제에서 1인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김용옥 전 교수의 이번 1인 시위는 그가 3년 전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터뷰는 물론이고 그밖에 여러 차례의 언론 기고를 통해 밝혀 온 새만금 방조제 공사에 대한 소신을 직접 실천으로 옮기는 일이다. 그는 여러 차례 수경 스님, 문규현 신부 등과 함께 새만금 방조제 공사가 강행될 경우 포클레인 앞에 드러누울 것을 약속했다.
김용옥 전 교수는 6일 아침 새만금 방조제 공사 현장으로 향하기 전 장문의 대국민 호소문을 써 <프레시안>을 비롯한 일부 언론에 보냈다. <프레시안>은 새만금 문제에 대한 그의 오랜 고민이 응축돼 있는 이 글을 전문 게재한다. <편집자>
"제가 온 정치적 역량을 총동원해서 잘 풀어가겠습니다. 시간적 여유를 주십시오."
"계속 지체하시면 저는 어느 날 새만금 방조제 공사하는 포클레인 밑에 드러누워서 농성할 생각입니다. 포클레인으로 찍어 죽여도 저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절 죽여서까지 그 일을 강행하실 것입니까?"
"그럴 일도 없고요."
"절 죽이십시오."
"그런 싸움 몇 건에 휘말리면 대통령으로서의 권위와 능력이 소진됩니다."
"하여튼 새만금 갯벌만은 살려주십시오."
이것은 노무현 대통령 취임 50일을 기념하는 첫 인터뷰 기사의 한 단락이다. 나는 당시 〈문화일보〉 편집국의 일선기자였다.
나는 믿고 기다렸다. 최소한의 이성과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새만금 문제에 관해서는 명백한 도덕적 판단이 설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기에 국민의 상식에 따라 건전한 해결책이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사태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성은 고독하다. 지성은 최소한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 사회의 건강을 위하여 합리적 언어의 소통이 가능하다고 믿고 사는 나로서는 함부로 사회적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나의 행동에 대한 가치판단이 반드시 나의 주관대로 정의롭게만 판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삼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만금 문제만은 해석의 여지가 없는 우리 국토와 우리 민족의 생존권을 위한 명백한 가치판단이 나의 양심에 부과되기 때문에 더 이상 언행의 갈등을 감내할 수 없었다.
나는 3년 전 청와대에서 국민을 향해 던진 나의 양심의 호소에 따라 새만금의 방조제공사 마감을 서두르는 포클레인 앞에 드러눕기로 결심했다. 2006년 3월 6일 오전 11시를 기해 나는 새만금 방조제 위에서 1인 시위를 감행한다. "새만금을 살려야 전북도민과 우리나라가 산다"라는 구호를 홀로 외치며!
***누가 새만금 문제 해결을 막는가?**
새만금 문제의 가장 비극적 사태는 언론이 차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언로가 개방되어 있는 시대에 그 무슨 허언인가? 새만금은 물론 전라북도라는 행정구의 전유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간척사업에 일차적인 관심과 권한과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전북도민이다.
그런데 전북도민들에게는 새만금에 관한 어떠한 합리적 논의도 전북도민들의 생계의 향상을 붕괴시키려는 음모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어떤 인식론적 그물이 덮어 씌워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독재시절부터 정착된 막연한 개발론적 가치체계 속에서 형성된 호남 특유의 후진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정치꾼들의 무분별한 정책추진에 그 일차적 소이가 있다.
새만금이 추진되었던 상황은 피폐해져 가는 농촌을 구하고자 하는 근원적 필연성 속에서 민중 내부로부터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노태우가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전북 표를 긁어모으기 위해 농어촌진흥공사의 한 시안을 선거공약으로 활용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노태우는 새만금 공약을 집행할 의사가 없었다. 그런데 노태우 대통령에게 공약실천의 강행을 요구한 것은 야당총재 김대중이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1991년 11월부터 33Km의 방조제를 막는 대비극의 막은 올랐던 것이다.
그 후 새만금 문제에는 일단 시작된 것은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야만 한다는 도지사들의 무조건적 전진정책, 농업기반공사(현재 한국농촌공사)의 관료주의 타성의 이기주의, '쌀' 생산을 부의 척도로 생각하는 시대착오적인 서민들의 이데올로기, 도정과 교묘하게 밀착된 지역언론, 방조제공사와 관련된 소수 대기업과 그 하청업체들의 로비활동, 환경단체들의 외침을 지역경제 발전에 대한 제동으로 왜곡시키는 여론형성 등 이 모든 복합적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했다.
새만금공사 추진은 절대선이고 그 반대는 절대악인 듯한 인식체계를 전북도민에게 정착시켜 일체의 구체적·합리적 검토를 차단케 하는 오묘한 방패막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언론의 차단이다.
그러나 이 언론의 차단막은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극소수의 농락에 불과하다. 아마도 방조제 공사를 목숨 걸고 자신 있게 추진하는 사람들은 구체적 이권이 걸린, 한줌 안에 들어오는 극히 적은 몇몇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찬성한다 할지라도 소신 없는 막연한 기대에 내맡기거나 구체적 대안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것의 부당함을 숙지하면서도 나의 닥치는 하루하루 생활의 긴박성 속에서 나와는 무관한 일로서 방치하여 버리고 있는 것이다. 환경문제란 본시 그 거시적 전체를 긴박하게 파악하지 않는 한 리얼한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새만금 문제는 결코 방조제를 막느냐 트느냐의 문제도 아니며, 개발을 하자든가 하지 말자든가 하는 얘기도 아니다. 그리고 경제개발과 환경보존의 대립적 시각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양자택일의 '아이더 오아(이것 아니면 저것)'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본질적인 합리적 토론의 대상이며, 무엇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를 묻는 우리 민족 내지 인류의 공동체적 관심의 대상이다. 그런데 일차적으로 지역언론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토론이 그 당초로부터 발전적·보편적 양상을 지닐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누가 땅 투기꾼들의 꿈을 부풀리는가?**
현재 한국농촌공사에서 추진해야만 하는 새만금 기본계획은 그 명분상 농토의 확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새만금에 계화미를 생산하는 것과도 같은 광활한 논 농사 지를 꿈꾸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없다. 우리나라는 지금 연간 1천만 석에 가까운 쌀의 재고가 푹푹 쌓여 골치를 썩고 있는 나라이고, 따라서 휴경농과 농지축소 정책을 계속 추진할 수밖에 없는 나라다.
농촌은 이농 현상으로 텅텅 비어가고 고령화되며 삶의 터전은 피폐화되어가고 가옥과 토지가 버려지고 쌀 생산이란 천하지대본이 아니라 무가치로 인한 분노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있는 터에 과연 지금 누가 농토의 확보와 확충을 운운하리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시대에 역행하는 무의미한 짓거리를 무리하게 감행하려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광막한 땅이 새로 생긴다는 것은 좋은 것이고, 그렇게 되면 특별법을 제정하여 땅의 용도를 변경하여 농지 외의 고부가가치적인 산업용도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이런 복안에 대한 기대로 꿈이 부풀어있는 것이다. 1억2600만 평의 신천지! 땅 투기꾼들은 평생 풀어 다 못 푼 한을 여기서 풀려고 덤벼들 것이다.
우선 용도변경은 도덕적·법제적 명분에서 어긋나는 것이지만, 설사 우리가 산업용·공업용, 혹은 관광용으로 이 땅을 활용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목적으로는 지금 그만큼의 어마어마한 땅이 도저히 필요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새만금 위에 똑같이 매립해서 만들어놓은 군장산업단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입주율이 30%도 되지 않으며, 그밖의 우리나라 전 지역의 공단이 텅텅 비어있는 실정이다. 민주를 빙자한 노동정책의 빈곤과 고임금 추세로 이 땅에서 공장 짓고 사업하려는 중소기업주는 스러져가고만 있는 것이다.
더구나 젊은 부부들의 출산율은 세계 최저의 금메달을 보유하고 있어서 2050년 우리나라 인구는 3천만밖에 되지 않으며 그것도 45%가 실버인구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초고령 사회에 진입해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근원적으로 땅이 새롭게 필요한 나라가 아니다. 산업구조가 점점 유형적 가치에서 무형적 가치로 전환되고 있으며 노동의 양보다는 질이 요구되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그런데 무리하게 땅을 만들어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도지사 선거에 난발하는 공약 망언처럼 방조제에 세계 최대최고의 타워나 세우고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자기부상 열차나 만들자고 지금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지금 문제의 본질을 얘기해야 한다. 도민들은 더 이상 정치 모리배들의 술수에 기만당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누가 새만금 갯벌 가치를 무시하는가?**
개발하자! 그래, 개발하자! 땅이 없나? 그럼 땅을 만들자! 그런데 널려진 게 땅이라면 왜 지금 새만금 공사를 강행해야 하는가? 아무 용도도 없었던 쓰레기매립지 같은 곳을 활용한다면 그것은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새만금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강 하구 갯벌(estuary)로서는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지구환경의 보고인 것이다.
강 하구 갯벌은 육지의 모든 영양염이 바다로 유입되는 곳이다. 그리고 새만금은 서해안의 지질학적 특성에 따라 경사각 1°밖에 되지 않는 천혜의 지형이다. 밀물·썰물에 따라 생존조건의 변화가 다양하고 활발한 광합성이 이루어지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곳이야 말로 지구의 생명체가 탄생된 최초의 어미 대지의 자궁이이다. 또 대지의 모든 오염의 여과가 일어나고 또 이 여과과정을 거쳐야만 근해의 모든 앞바다의 생태계가 존속가능해지는 것이다.
호남평야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만경강·동진강 양대 하천의 부유물질의 영양소를 분해시키는 갯벌 과정이 없이는 육지도 죽고 바다도 죽는다. 그 규모가 과거의 소규모 만 중심의 세립질 퇴적물인 점토지역 간척사업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그것은 대지 어미의 똥구멍을 막아 똥독으로 어미를 죽이는 살해행위요, 또 여과 없이 똥을 방출시켜 지구생명의 근원 터인 바다를 죽이는 살상행동인 것이다.
국민 여러분, 한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시라! 〈네이처〉의 과학적 평가에 의하면 강 하구 갯벌의 가치는 ㏊당 2만2832달러다. 그런데 그것을 논으로 만들 때 그 논의 가치는 불과 92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산업용 기지로 써도 대동소이하다.
다시 말해서 지금 현존하는 새만금 갯벌의 가치를 248분의 1로 격하시키기 위해 5조의 국민세금을 퍼부으려고 발악하고 있는 것이다. 황금덩어리를 부숴 똥 덩어리로 만드는 역연금술의 새로운 중세기시대를 구가하려고 지금 도지사와 도민은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33Km 방조제 공정 중에서 이제 겨우 2.7Km밖에 안 남았는데, 그 까짓 것 막아버릴 것이지 중단키도 애매한 일 아닌가? 어차피 다 된 일인데 눈 딱 감고 막아버립시다. 도올 선생! 세상일이란 저질러놓고 보면 또 새 길이 열리는 법이랑껭. 그리 괘념 마쇼. 한번만 눈 딱 감아 주쇼잉! 바로 이러한 멘탈리티(Mentality)가 이 새만금공사의 구원한 파장의 심각성을 은폐하고 정당한 언론의 발양을 밀폐시키고 있는 것이다.
현재 건설되어 있는 방조제 위 면적만을 합쳐도 맨해튼의 크기를 넘는다. 우리는 이 일직선의 방조제와 갯벌 주변의 군산항·김제·부안·변산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개발계획만 수립해도 현재 새만금 신 토지에 집중되는 개발계획의 수십 배가 되는 풍요로운 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갯벌만은 살리자는 최소한의 원칙을 고수하자는 것이다.
***도대체 1조9000억 원 누구 주머니로 들어갔는가?**
우리나라의 진보와 개혁의 양대 축은 남북문제와 환경문제다. 그러나 개혁을 표방하고 나온 386세대나 노무현 정권의 출범이 유감스럽게도 이 두 핵심적 축에 있어서 아무런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하지 못했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신장이라는 측면에서 나는 노무현 정권의 역사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두 축에서 확고한 실체적 성과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들의 절차적 신념은 무능과 방기로 역사에 서술될 수밖에 없다. 사회정의란 절차적 정의도 중요하지만 실체적 정의도 중요한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체제를 확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의로운 인간이 되는 것은 더 중요한 것이다.
대통령 자신이 정의로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가치적 신념을 표방치 않는다면 그것은 편협한 정치술의 한 순환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선거구개편에 관해서는 상황의 적합성 여하를 불문하고 무리하게 소신을 표방하면서도, 이러한 환경문제나 대한국민의 삶의 질에 관한 중대 문제에 관해 절차적 방치만을 종용하고 있다면 대통령 자신의 인식체계의 협소성을 방증할 뿐 아니라 그것은 우리나라 진보개혁 세력의 전체적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여태까지 15년 동안 이 방조제공사에 투입된 돈이 1조9000억 원이다. 그런데 앞으로 15년 동안 3조 정도가 더 투입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전북 도정은 30년 동안 겨우 5조 남짓한 국책사업비만을 보조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라남도의 경우 전라북도의 환경재해 가능성을 거울 삼아 수립한 서해안 S프로젝트만 해도 50조가 되며 남해안쪽의 J프로젝트는 30조가 된다.
전라북도는 새만금에 광분하고 눈이 멀어, 그것만이 도민의 살 길이라고 도지사와 지역 언론이 아옹거리고 있는 동안에 전라남도는 불과 앞으로 10년 동안에 80조의 국책사업을 획득하였던 것이다.
그것도 영산강 하구언으로 막혀버린 영산강 전체 지역의 환경생태계를 복원한다는 역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나주만 해도 혁신도시의 신구상과 더불어 나주읍성 전체를 복원하여 왕건의 시대로부터 찬란했던 천년목사골 나주의 원형을 되살리는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다. 광주는 광주비엔날레 등 국제적 문화감각을 키워가면서 문화수도로서의 새로운 꿈을 부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전북도정은 전국 16시도에서 재정자립도 16위 최하의 바닥을 맴돌면서도 우리의 살 길은 오로지 새만금이라고 외쳐대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그 놈의 공터가 전북도민에게 무엇을 가져다준다는 것인가? 그 놈의 곡마단 요술에 눈이 멀어있는 동안에 도민은 실리를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다. 갯벌을 살리는 조건으로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대해서 일체의 인식통로를 차단시키고 있는 것이다.
왜? 그것은 변통을 모르는 편협한 비전의 도지사의 소견과 그 주변에 형성된 관료주의, 한국농촌공사의 관료이기주의적 관성, 그리고 이러한 도정과 관료주의에 밀착된 지역언론, 그리고 진정한 비즈니스가 무엇인지 모르는 지역토호들의 발호 때문에 전북도민들의 삶이 희생의 제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장사라면 기껏해야 건설업이나 땅장사, 음식장사 수준의 비전밖에 못 가진 사람들의 머리 속에선 그저 아직도 새만금의 공터가 황금덩어리로만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어찌 딱함을 이루 다 말로 할 수 있으리오?
여태까지 15년간 투입된 1조9000억 원의 돈은 어디로 갔나? 과연 그것이 전북도민의 삶을 살찌우는 데 쓰였나? 그 돈의 대부분은 현대·대우·대림 등의 대기업과 레미콘업자 등의 군소하청업자들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이 돈은 전북도민의 삶과 무관한 돈이다.
건설비용의 30%는 공사현장 음식장사 등의 부수 상행위로 그 지역에 떨어져야 하는데 그러한 효과는 전혀 부안지역에 나타나지 않았다. 6000억 원이 부안지역에 떨어졌는가? 그리고 연인원 100만 명의 고용효과가 있다고 도민들을 꼬여왔는데 전혀 그러한 고용효과는 산출되지 않는다. 모두가 정치선전을 위한 허수에 불과한 것이다. 전북도민은 철저히 기만당하고 있는 것이다.
***새만금도 살리고 전북도 살릴 길은 없는가?**
이뿐 만인가? 만약 성공적으로 농지조성이 되어 이 새만금 농토에서 쌀이 소출된다고 한다면 그나마 김제·만경평야에서 근근이 유지하고 있는 농민들은 생계를 잃어버릴 것이다. 새만금은 대규모 기계농이 될 것이며 쌀의 품질과 맛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쌀 생산에 대한 수요는 계속 감소하고 있다.
또 방조제 공사를 완성하고 그것이 쓸 수 있는 땅으로 변하는 데만 해도 정확하게 30년이 걸린다. 이것은 박홍수 농림부 장관이 공언한 것이다. 그리고 복토해서 농지 조성하는 데만도 150개의 남산이 사라져야 한다. 육당 최남선이 금강산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표현한 변산반도의 산들이 사라져가고 흉물로 변해가고 있다. 참으로 우매의 극치다.
지금 방조제를 막고 그곳에 거대한 담수호를 만든다고 생각해보자! 그 물은 고군산군도의 신시도 쪽에 만든 거대한 배수관문을 통해 여과없이 방류될 것이다. 그러면 그 선유낙조(仙遊落照), 명사십리(明沙十里)의 고군산군도의 선유팔경이 똥물천지로 화하게 될 것이며 대한민국 최고의 서해안 바다절경을 상실케 될 것이다. 그리고 뻘이 퇴적되어 고군산군도의 해변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전주시 권역의 생활오수와 왕궁축산단지 등의 축산폐수가 직접 신선만이 노닌다는 선유도에 퍼부어지게 되는 것이다. 갯벌을 없앤다는 것은 갯벌이라는 자연경관을 망가뜨리는 것일 뿐이 아니다. 그 자연 속에 장치된, 울산정유공장이나 화학단지보다 더 정교한 수천 개의 하이테크의 정화 공장을 파괴시키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전북도민들은 지금 이 지역에 거대한 자동차 생산라인을 유치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장소가 꼭 새만금이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방조제공사를 끝내려고 서두를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상태에서 더 많은 것을 따내기 위해 오히려 환경단체들과 연대해서 활동해야 한다.
방조제를 일단 막아버리면 새만금은 우리의 관심에서 잊혀져버리고 만다. 애타게 소리칠 사람도 없어진다. 그것이 완전히 전북도민에게 방치되어 버릴 것이다. 느그들 소원대로 막았으니 느그들 마음대로 해라! 후 케어즈? 전북도민은 협상카드를 상실케 되는 것이다. 지구환경의 파괴라고 하는 영원한 불명예와 함께!
전북도민들이여! 생각해보라! 도올 김용옥은 결코 전북의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나도 그곳에서 6년간을 산 도민이요, 인사이더다. 익산 신용동에서 4년, 전주 덕진구에서 2년을 살았다. 요새 감각에 6년 도민이면 결코 시시한 도민이 아니다.
나 도올은 환경단체에 소속된 운동가도 아니요, 무슨 대단한 혁명가도 아니다. 나 도올은 오직 한 인간으로서 양심에 따라 우리민족의 보편적 선을 추구하는 사람이요, 무엇보다도 전북도민들의 긴박한 삶의 요구와 이 새만금사업에 얽혀있는 내부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안타깝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새만금 갯벌을 죽이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그것을 살리면서도 얼마든지 그 몇 천 배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대안은 무궁무진하게 있다. 우리는 새로 도래하는 서해안시대, 그리고 명나라 때부터 600년 동안 폐쇄되어 있었던 황해가 새롭게 열리면서 황해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9억 인구의 황해연안 공동체문화권의 포괄적 글로발 네트워크의 구상 속에서 우리의 문제를 재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변통을 모르는 편협한 관료주의의 관성과 타성과 독선과 독주에 우리의 운명을 맡겨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이제 대법관들이 나서야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영화 〈왕의 남자〉의 자막 영역이라는 막중한 과업으로 사흘 밤을 꼬박 새웠다. 나의 본령은 이러한 문화적 행동이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 화요일 밤 10시면 어김없이 이 땅의 중고생을 위한 논술과 관련된 철학강의가 EBS 채널을 통해 방영되고 있다. 강의부터 편집까지 일주일 내내 꼬박 매달려야 한다.
나는 올 1년 동안 온전한 고등학교 교사로서 우리나라 청소년의 사고력과 문장력과 가치관을 바로잡는 일에 헌신하기로 한 것이다. 새만금에 관해서 부당성을 시위하는 일보다는 이 땅의 어린 생명들이라도 새만금을 쳐다보면 도저히 이러한 바보짓을 해서는 아니 되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의 논리적 사고를 길러주는 구원한 정신사적 작업에 나의 생명가치를 발휘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현재 전남 광주MBC에서 매주 금요일 밤 10시면 광주시민들을 상대로 한 눈물겨운 강의를 계속 방영하고 있다. 전남지역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성원 속에서 나는 그 지역의 2만여 기 고인돌부터 광주민중항쟁에 이르는 피눈물 나는 역사를 계속 집중 강의해 나가고 있다. 이토록 처절하게 보이지 않는 정신적 가치를 위하여 1초의 여유도 없이 분골쇄신 노력하고 사는 내가 왜 새만금 제방에까지 가서 홀로 서서 시위를 해야만 할까?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을 굽어 보아도 흐르는 것은 뜨거운 눈시울의 눈물일 뿐이다. 과연 이런 행동을 통해서만 우리 사회는 진리가 소통되어야 하는가? 보다 더 본원적인 진리를 향한 마음의 열림과 대화와 타협의 가능성은 없을까?
이 순간 나는 생각한다. 개개인간이 생각하는 대로 만물의 척도라고 말한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의 궤변을, "그렇다면 돼지야말로 만물의 척도일 것이다"라고 항변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의 보편적 이성에 의한 진리기준을 호소하며 준법정신에 따라 사약의 독배를 들이키고 말았던 소크라테스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호소한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참여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사법권의 독립과 권위는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 법이 국민의 제재를 위한 형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이제 법이 우리가 사는 시대의 에토스를 규정하는 진정한 판례라는 생각이 보편화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법관들의 자율적 판단능력도 놀라웁게 향상되었고 대법원은 참심제 도입까지도 고려하겠다는 개방적 자세를 보이고 있다. 대법원은 결코 하급법원들의 법리적 절차의 정당성만을 심의하는 곳이 아니다.
본 사안은 결코 원고인 어민·환경단체와 피고인 농림부 사이의 승·패에 걸려있는 문제가 아니다. 새만금사업이란 승자와 패자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 국민 모두와 우리 국민의 삶의 터전인 국토라는 전체 생명의 기본권, 즉 생존권에 관한, 법리적 해석만에 국한될 수 없는 중대한 판결사안인 것이다. 이 땅에 법이 왜 존재하며, 이 법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리고 이 사회의 질서에 관하여 법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나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알고 있을 우리나라 대법관들의 양식을 굳게 믿으며 이 호소의 붓을 놓는다.
나 도올은 3월 6일 아침 7시에 출발하여 11시경에 새만금에 도착한다. 나는 그곳에 계속 서있을 것이다. 이 글을 보고 나의 수고와 명분과 양심에 동참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안 새만금방조제 입구로 와주면 감사하겠다. 진리의 연대감을 표시하는 행동도 이 시점에는 한없이 고귀한 것이다.
나는 나의 행동의 사회적 여파에 관계없이 나의 양심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할 것이다. 새만금공사가 도덕적으로 부당하다는 사실만은 역사에 확실히 새겨지길 바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먼 훗날 우리가 산 시대에는 이퇴계도 조남명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불명예를 우리는 감당할 길이 없을 것이다.
2006년 3월 6일 새벽
도올 김용옥
낙한재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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