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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죽으라'고 저주를 퍼붓는 이들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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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죽으라'고 저주를 퍼붓는 이들의 정체"

[기고] 지율과 '안티 지율'

2005년 5월부터 시작된 지율 스님의 목숨을 건 3차 단식이 100일을 넘을 무렵, 정부가 천성산에 대한 환경영향평가 공동조사를 수용한다는 발표를 들었을 때, 나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공동조사단에 참여한 한국철도시설공단 측의 반칙으로 그해 가을쯤 지율 스님의 잠적 이후 4번째 단식이 또 다시 100일을 넘겼을 때, 솔직히 나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도 많다는 씁쓸함을 가진다.

그 씁쓸함은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한없이 힘없고 순진한 '단식'이란 '저항의 불가항력' 때문이 아니라, 지율 스님이란 인간의 몸으로는 그 진정성을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이해관계자들의 끔찍한 태도 때문이다. 경부고속철도 공사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자들인 한국철도시설공단과 시공업자, 그리고 그 사업을 국가적 차원에서 책임지고 있는 정부와 청와대가 야기한 끔찍한 사태만이 아닌, 수구 언론과 오피니언 리더들, 그리고 일부 지율 스님의 행동을 극단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이른바 '안티'들의 야기한 끔찍한 사태. 이 끔직한 사태의 정점은 바로 인간의 진정성을 극단적 파시즘으로 반전시키고 조롱하는 '안티 지율주의자'들의 정신 속에 있다.

***진짜 큰 악을 외면하는 '안티 지율주의자'**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현재 지율 스님은 시력이 회복 불능에 빠졌고 하반신도 마비된 상태라고 한다. 언제 입적할 지 모르는 상황이다. 안타까운 것은 지율 스님의 신체와 마음이 죽음의 영도를 향해 내리막길을 걸어가면 갈수록 스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더욱 극단화된다는 점이다. 마치 이를 당연한 업보로 생각하는 것처럼.

왜 사람들은 지율 스님을 싫어 할까? 도대체 지율 스님이 어떤 잘못을 했기에 안티 지율주의자들로부터 지독한 저주와 언어폭력에 시달려야 할까? 나는 '안티 지율'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려진 참담한 글들이 온라인 안티문화의 특성을 반영한 과장된 표현을 담고 있다 해도, 자연과 생태에 대한 비교적 올곧은 소신을 '타협할 줄 모르는 독불장군', '이기주의자의 독선'으로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데에서는 지율 스님과 그의 행동을 대면하는 안티 지율주의자들의 그럴만한 오랜 정서적 메커니즘을 읽을 수 있다.

안티 지율주의자들이 지율 스님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국민의 혈세 낭비와 국익 손해라는 논리다. 이는 새만금 간척사업 사태를 비롯해서 큼직한 공사에 대해 환경 생태 운동이 반대할 때면 늘 등장한다. 지율 스님 한 사람의 반대 때문에 수조 원의 국고가 낭비되고, 국가 개발 정책이 물거품이 되고 있다는 분노.

이는 단지 경제적 실익 계산에서 비롯된 합리적인 주장이라기보다는 건설과 개발로 국가를 부흥하려 했던 유신 시절의 개발주의의 망령의 신념 체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환경과 생태보다는 개발과 건설이 국가 중흥의 최우선 과제들이라는 신념 체계가 우세하다. 안타깝게도 지율 스님의 반대 논리로 제시되는 국익 우선주의 혹은 국민의 혈세주의는 국민의 당연한 권리와 주장이라기보다는 국민을 국가 권력의 망령 속으로 끊임 없이 동원시킨 파시즘적 국가주의의 망령을 떠오르게 한다. 국익 논리로 지율을 반대하는 안티 지율주의자들은 노무현이란 대통령을 혐오할지언정,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절대 혐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 안티 지율주의자 중 일부 극우들은 과거 잘못된 국가 프로젝트로 인해 수조 원, 수십조 원의 국민 혈세가 낭비된 일에 대해서는 지율 스님에게 보인 극렬한 매도는커녕 그 행위를 애써 정당화하는 예의를 갖춘다.

***안티 지율주의자들이 보이는 강한 성차별적 입장**

그런데 지율 스님을 반대하는 안티주의자들의 논리에는 좀 더 독특한 면이 보인다. 그것은 바로 지율 스님을 이른바 '재수 없는 여성'으로 대하는 가부장주의 태도다. 안티 지율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면, "중년", "지율 아줌마", "계집 중"이라는 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지율에 대한 반대 의사를 더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사적 전략인지는 모르겠지만, 안티 지율주의자들의 발언 속에는 "감히 여승 주제에 국가 사업을 반대해?"라는 성차별적인 무의식이 들어가 있다. 아니 어떤 글에는 개발주의적인 입장이 아니라 성차별적인 입장이 더 강한 정서를 공공연하게 느낄 수 있다.

만일 비구니가 아닌 남자 스님이 천성산 터널공사를 반대했으면 어떠했을까? 지율은 안티 지율주의자들에게 환경생태주의자이면서 불교 수행자면서 여자라는 삼중의 비난과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안티 지율주의자들의 정서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끔찍한 또 하나의 사태는 일종의 타인의 진정성을 존중하기를 원치 않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에서 비롯된다. 아마도 내가 가장 서글펐던 것이 이것이다. 개인의 진정한 소원과 마음을 마치 아무 일도 아닌 듯이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개인주의를 넘어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왜곡하고 비난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의 입과 생각들.

설사, 지율 스님의 소신에 동조하지 않는다 해도, 한사람의 진정성이 그러한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이를 수 있구나 하는 사태의 맥락을 이해하는 마음 없이 그것을 조롱하고 의심하고 심지어는 왜곡하는 대중들의 심리 속에는 갈수록 극단화되는 우리 사회의 냉소적 개인주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지율 스님 역시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신과 이기주의는 다르다. 지율 스님 역시 자신의 이기주의를 경계하기 위해 스스로 환경영향평가 공동조사에 동의한 것이다.

지율 스님이 3차 단식 때까지 주장한 것은 천성산 공사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터널 공사를 하는 것이 주변 자연환경을 훼손하는지를 현재 법으로 규정한 환경영향평가를 통해 규명하자고 호소한 것일 뿐이다. 4차 단식은 그러한 합의가 깨지고 반칙이 벌어지면서 스스로의 살신의 결단밖에는 없다는 자기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지율 스님이 과연 극단적으로 이기적일까? 지율 스님의 소리를 수구언론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왜 타인의 '진정성'을 불편해하는가**

누구나 어떤 사상과 신념, 혹은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반대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반대와 반대의 투쟁은 인류 역사의 발전을 가져온 힘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인의 소신과 진정성을 왜곡하면서까지 반대할 권리는 없다. 그것은 바로 파시즘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말하는 환경 파시즘도 우리가 경계할 이데올로기다.

지율 스님의 독단 때문에 환경운동 전체가 위기에 빠졌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지율 스님의 싸움은 환경보존 운동이기에 앞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신뢰와 애정을 회복하는 운동이라는 정서가 있다고 본다. 지율 스님 싸움의 진성성이 정말로 환경운동으로 귀결되는 것이었을까?

나는 감성적 이해와 배려의 회복에 대한 우리 사회의 충분한 토론이 지율의 사태를 바라보는 중요한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지율과 안티지율의 경계는 그런 점에서 환경과 반환경의 경계를 넘어서 인간과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삶의 가치의 경계다. 지율을 반대하는 안티주의자들이 이 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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