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일은 아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정진석 추기경까지, 이제 두 명의 추기경을 보유하게 됐다. 어쨌거나 한국 사람이 좀 더 높은 지위에 올랐다는 것이고, 또한 한국의 일부인 한국교회가 국제적으로 좀 더 인정받게 됐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추기경 임명을 전후로 왜 한국에 추기경이 하나 더 필요한가를 주장한 근거들을 보면 의문스러운 것들이 있다. 우선 일본과 비교하는 것이다. 신자수가 일본 교회보다 몇 배나 되는데, 어떻게 된 것이 일본은 추기경이 두 명이고 한국은 하나뿐이란 말이냐, 라는 것이었다. 이 논리에 숨은 물량주의적 사고부터 문제지만, 더 따져보자. 이번에 정진석 추기경과 함께 필리핀에도 새로 추기경이 한 분 임명됐다. 필리핀은 알다시피 아시아에서 최대의 가톨릭 국가다. 한국보다 신자수가 열 몇 배나 많다. 그럼에도 이번에 새로 추기경으로 임명된 마닐라대교구 대주교를 포함해서 합계 세 명뿐이다. 그나마 한 명은 로마교황청에서 근무하니, 실제 필리핀교회 대표는 2명이다. 진짜 푸대접 받는다고 불평해야 할 것은 한국이 아니라 필리핀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논법이 한국 사람들에게 별 문제없이 통하는 것은 바로 일본과 비교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의 몹쓸 민족주의적 경쟁심일 뿐이다.
***'가톨릭 교회의 유일한 민주주의 장치' 콜클라베에 발언권 확보**
지난해 3월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죽고 새 교황을 뽑는 추기경 선거에 한국의 하나뿐인 김수환 추기경이 80살이 넘어 투표권이 없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교황 선거 같이 중요한 자리에서 발언권을 갖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맞는 말인지 틀린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는 것이 바로 가톨릭교회 안의 정치다.
이때 민주주의란 말 그대로 사람 머리수대로 의견을 결정하는 데모크라시(democracy)다. 데모크라시를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그 본뜻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은 "머리수대로 하는 정치"다. 사실 이런 머리수대로 하는 인두정치로서의 민주주의의 본질을 한국에서 가장 정확히 이해하는 집단이 바로 가톨릭교회다. 제대로 이해하기 때문에 거부한다. 심지어는 현 정권의 핵심을 비롯해 지난 수십 년간 이른바 민주화운동을 이끌어 온 이들조차 "민주주의는 사람 머리수"라는 간단하고도 본질적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어쨌거나, 가톨릭교회에서 민주주의 개념은 통하지 않는다. 보기를 들자면 세계의 각 주교 대표들이 모여 교회의 중요 사안에 대해 토의하고 투표를 통해 의견을 결정하는 시노드 같은 여러 자리가 있지만, 이 모든 자리에서 결정된 것은 교황에게 '건의'될 뿐이지 결코 그 자체로는 아무런 결정의 의미가 없다. 각 성당 단위를 봐도 주요 평신도들로 사목위원회가 구성돼 있지만, 엄숙한 교회법상, 이 사목위원회는 성당의 주임사제에게 건의할 권한만 있지 모든 결정권은 주임사제에게만 속한다. 신자 1만 명, 사목위원 100명의 의견보다 주임사제 1명의 의견이 본질상 우월한 것이 가톨릭이다. 그런데 가톨릭 안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머리수 그대로 의견을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가 있기는 있으니, 그것은 바로 무한의 권력을 행사할 새 교황을 뽑는 추기경선거(콘클라베) 단 한 가지뿐이다. 그러므로 그간 한국의 가톨릭에서 "한 표의 권리"를 안타까워했다는 것은 참 여러 모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역교회의 대표인 동시에 세계시민인 추기경**
일정한 규모와 역량을 갖춘 지역단위 교회에 로마 교황청이 추기경을 하나 배정하는 것은 물론 인정의 의미가 크다. 일종의 대표 개념이다. 그러나 추기경이란 지역대표이기 전에 바로 교황의 최측근이란 점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추기경이란, 교황이 필요로 하는 어떤 보편교회의 문제에 대해 보좌할 개인 능력을 갖추는 것이 우선이다. 일본교회에서도 수도인 도쿄대교구 대주교였던 시라야나기 세이이치 추기경은 일본교회의 수장으로서 대표 개념이 강하지만, 다른 추기경인 하마오 후미오 추기경은 일단 로마교황청으로 불려가 중임을 맡은 뒤 그 부서의 수장이 되면서 관례대로 추기경이 된 것이다. 일본인이기는 하지만, 그가 추기경이 된 것은 그의 능력을 로마가 필요로 한 때문이지 그가 일본인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추기경은 그가 어느 나라에 속하든, 본질상 전 세계의 보편교회에 대해 똑같은 책임을 진다. 그는 어느 한 나라의 국민이기도 하지만, 바로 세계시민인 것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추기경이란 본질상 지역구 의원이라기보다는 전국구 의원에 가깝다는 것이다. 추기경들에게 여러 나라 말을 할 능력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언제 어떤 자리에 교황을 위해 파견돼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 나라만을 위해 발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과는 별 상관없는 다른 나라 교회와 로마, 그리고 정부들, 또는 지역교회와 지역교회를 이어주는 의사소통에도 주도적 구실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 뽑힌 서울대교구의 정진석 추기경은, 물론 한국교회를 대표하기도 하겠지만, 아시아를 대표하기도 하며, 또한 세계교회 전체의 한 지도자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계시민으로서 정진석 추기경에게 바라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한국이란 국지적 관심사에만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며, 세계적, 보편적, 범인류적 차원의 소망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교회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요 며칠 사이 여러 신문은 사설이나 칼럼에서 한국의 공적 대외원조(ODA)가 국민총소득(GNI)의 0.06%에 지나지 않는다며, 이를 세 배로 늘리겠다는 정부 발표를 앞 다퉈 환영했다. 유엔이 권하는 기준인 0.7%에 턱없이 모자랄 뿐 아니라 OECD회원국 가운데는 꼴찌라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에 맞춰 나오는 이런 주장은 또 곧 잊힐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은 가난한 이의 교회,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기를 추구하는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진작부터 나온 소리다. 다만 이 소리가 로마에서는 나와도 한국교회의 입에서는 잘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새 추기경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인 한국이 이처럼 국제적 노랑이가 된 현실을 냉정히 지적하고, 아울러 먼저 자신이 속한 교회부터 이끌고 해외원조에 앞장서기를 바란다. "한국에도 어려운 사람이 많은데 왜 남까지 도와야 하느냐"는 반론이 있기는 하다. 원래부터 학교 앞에 사는 학생이 학교에는 제일 늦게 가는 법이다. 반대로 멀리 사는 학생이 학교에는 일착으로 등교한다. 나와 직접 관계없고 멀리 사는 이들을 도울 줄 알 때 가까운 이웃을 절로 돕는다. 민족주의 정서가 뿌리 깊은 한국에서 가톨릭이 해야 하고 또 가장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의 한국인이 한 사람의 세계시민으로 자각하고 성장하며, 세계 정반대편의 사람을 바로 자신의 친형제처럼 여기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고 추기경이란 자리는 바로 그 지향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정 추기경은 자신이 로마의 추기경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추기경은 가톨릭교회에서 교황 다음가는 지위다. 당연히 가톨릭의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정적 문헌인 '현대세계의 사목헌장'을 이렇게 선언함으로써 시작한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도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그렇다, 현대 가톨릭교회는 교회 안과 밖을 따지기 전에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현실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 추기경도 마땅히 "나는 교회를 대변해야 한다"는 당연해 보이는 전제를 넘어 한국과 한반도, 동북아, 아니 전세계 모든 민중의 고통을 성찰하고 여기에 대해 답변함으로써 가톨릭교회가 진정 신자들만을 위한 집단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집단인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정진석 추기경은 자신의 모토인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가 로마만을 위한, 가톨릭교회만을 위한, 한국인만을 위한 추기경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정 추기경 가족사의 아픔이 승화되면 '화해'에 이른다**
물론, 그가 세계시민으로서 세계를 이끄는 데에는 그의 한국적 배경을 잊을 수 없다. 보기를 들자면, <프레시안>이 밝힌 정진석 추기경의 아버지인 공산주의자 정원모에 얽힌 비극의 가족사는 본인의 아픈 말 그대로 다만 한 개인과 가정의 비극이 아니라 이 민족의 비극이다. 정 추기경이 이런 큰 아픔을 잘 승화시켰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결론은 화해다. 그의 아픔을 보듬어 만져주기 전에, 그의 아픔이 큰 만큼 더 높은 이상, 더 원대한 비전을 요구하는 것은 그가 천주교 고위성직자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화해의 제스처가 아니라 저 휴전선 철조망이 예리코의 성벽처럼 절로 무너질 정도로 하느님을 감동시키기를 바란다.
한국 천주교회의 대북 관심이 성직자가 하나도 없는 북한에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이라도 상주 사제를 들여놓느냐 하는 데 쏠린다는 느낌이다. 물론 신부가 없음으로써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북한 측의 태도에 무리하고 또 석연찮은 모습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평양교구장인 정 추기경의 평양 방문에 북한 측이 큰 성금을 요구하고, 평양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드린 남한 사제는 북한 신자와 자유로운 대화를 할 수 없다.
그러나 북한에 가톨릭 성직자가 상주하는 문제는 가톨릭 내부 문제보다는 남북간 정치 상황에 더 크게 달렸다. 남한 교회로서, 그리고 북한의 가톨릭조직과 상대해서,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보다는, 북한 사회 전반의 빈약한 종교적 문화, 심성이 충분히 자라나도록 돕고 촉진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또 가능한 일일 수 있다. 직접 북한 인민을 상대로 하는 지원, 문화 선교 등을 고려하기를 바란다.
***'신자 불리기'를 넘어서…'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기 위해**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지름길일 수 있다. 남한 가톨릭교회의 대북 관심이 북한인 신자 확보하기에 매달리지 않고, 오히려 북한 인민 전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빈다. 그럴 때 진정한 가톨릭의 본 모습이 수많은 북한 인민의 마음 깊이 자리잡을 것이다. 물론 당장 남한 내의 적지 않은 탈북자 지원부터 적극 나서는 것도 중요하다.
결론으로서,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 정진석 추기경은 우선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기를 바란다. 남과 북은 물론, 무신론과 유신론이라는 금도 넘어야 한다. 한국인이라는 것을 잊어야 한다. 성직자와 비성직자라는 구분을 넘어 스스로 평평해져야 한다. 추기경이라는 것을 잊어야 한다. 어리석은 나는, 모든 것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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