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 추기경께,
먼저 새 추기경으로 서임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번 서임이 정 추기경 개인과 한국 가톨릭교회의 영광이 되는 동시에, 나아가 하느님의 역사를 이 땅에 이루고자 하는 가톨릭교회 전체에 의미 있는 씨앗이 될 것을 빌어마지 않습니다. 그 뿌리에서 가지가 무성하게 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날을 기대해 봅니다.
사실 "한국 가톨릭 37년만의 최대 경사"라거나 "450만 한국 천주교도 소원 풀었다"는 식으로 지난 며칠 간 호들갑스럽게 언론을 통해 되풀이 전파된 세속적인 평가에는 다소 반발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사제에게 성직이란 개인과 공동체의 영광 이전에 절대자의 뜻을 이루는 길목에서 더 많은 일을 맡으라는 소명의 의미가 훨씬 강하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덧붙여 정 추기경 개인이 겪어 왔을 인고의 세월이 동시에 떠올랐습니다. 그 동안 한 인간으로서, 사제로서 가슴 속에 담아 두고 애 끓이며 온축해 왔을 염원을 이제 생전에 실천해볼 기회를 얻었구나 하는 생각에 자못 감격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개인의 염원과 공동체의 비전이 일치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절대자의 뜻에 순명하는 길이라면 그것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때마침 각종 기자회견 등에서 나타나듯 정 추기경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중심을 잡아주십사 하는 기대 못지않게 '북한 선교' '북한 지원' '북한 방문' 등 시쳇말로 '북한' 코드를 중심으로 하는 것들이 예상 외로 많았습니다. 제가 주제넘게도 노사제께 '인고' 염원' 운운한 것도 바로 이 대목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정 추기경께서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임하고 계시다는 의례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서울대교구장으로서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임하셨던 분이 여러 분 계셨을 텐데 굳이 이 시점에, 그것도 정 추기경께서 두 직책을 동시에 맡으신지 8년이나 지난 시점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북한 문제에 대한 정 추기경의 시각과 대응 방향에 관심을 보이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아마도 국내외적인 상황 자체가 이제는 북한이라는 존재가 남한 사람들의 의식 속에도 구체적인 실체로서 들어오고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요소로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북한을 신화와 허구의 자리에서 이끌어내 현재화해가는 일 자체가 통일의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정 추기경이야말로 민족이 용서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게 만드는 데에 적임자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것은 정 추기경 개인의 가족사와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을 이렇게 공개리에 언급하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나 저는 이런 언급 자체가 공동선에 기여하리라는 나름의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하던 정 추기경의 부친께서는 일찍이 추기경이 태중에 계시던 1931년 여름 '조선공산당 재건 국내공작위원회 사건'이라는 대단히 긴 명칭의 사건으로 구속되어 가족의 곁을 떠나셨고, 3년의 옥고를 치른 뒤에는 아예 다른 가정을 꾸리는 바람에 정 추기경께서는 부친의 얼굴도 못 본 채 성장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1944년 다시 '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으로 구속돼 조사 받던 중 광복을 맞아 경기도경에서 석방된 부친께서는 북쪽을 조국으로 선택해 가신 뒤 요직을 거쳐 1950년대 중반엔 공업관련 부서의 차관 직까지 역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런 경력은 모두 부친께서 남로당 계열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인 것 같습니다만 50년대 말 결국 숙청의 칼날을 피해가지 못하고 북한 사회의 공직에서 종적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이상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북한 방문 논의가 이뤄지면서 "평양교구장 대리인 정진석 대주교께서 미리 북한을 방문할지 모른다"는 전망이 힘을 얻어가던 무렵 정 추기경의 먼 인척으로부터 듣고 이러저러한 경로로 확인했던 내용입니다. 그 때 그 분은 "정 대주교가 북한에 가게 되면 육친은 돌아가셔서 만나지 못하더라도 이복형제라도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며 회한 어린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보기에 따라선 반세기 이상 지난 얘기들을 지금 해봐야 부질없는 일 아니냐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무엇을 '들춰낸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개인적인 이산(移散)의 아픈 역사, 그것도 이념과 분단으로 인한 고통이 추기경 개인의 내면에서 어떻게 정리되고 승화되었는지를 여쭙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런 상흔을 안고 있는 분이 어디 추기경뿐이겠습니까? 그러나 시정의 갑남을녀에게라면 이렇게 묻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저 부친과 생면부지의 관계인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에 그치겠지요. 그렇지만 오늘날 정 추기경께서 북한과의 관계를 일보 전진시켜야 한다는 역사적인 책무를, 본인의 뜻이든 아니든, 맡으신 이상 도저히 여쭙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아픈 역사가 민족의 역사와 어떤 연관 속에 있으며, 그 아픔은 어떤 경로를 거쳐 치유될 수 있는지를 듣고 싶은 것입니다.
달리 말씀드리자면, 지금 민족의 용서와 화해를 말씀하시는 저변에 정 추기경 개인의 용서와 화해는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그리고 이미 다 용서하고 화해하셨다면 당초의 아픔과 회한이 어떤 좁은 문을 거쳐 그런 드넓은 마당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 가르침을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범인(凡人)들의 좁은 심사에 그런 메시지가 새겨질 때 화해와 용서는 말과 소리의 단계를 훌쩍 넘어서서 우리의 가슴을 흔들고 통일의 가장 튼실한 토대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시 수 년 전의 일을 한 가지 더 기억납니다. 바로 위에 말씀 드린 내용들을 당시 대주교이던 정 추기경께 질문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비서 수녀님을 통해 돌아온 대답은 단 두 마디였습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다."
여기서 '그 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2월27일의 기자회견에서 추기경께서 밝히신 내용 중에 북한 측에 성직자의 상주를 요청했으나 돌아온 답은 "아직 때가 아니다"는 것뿐이었다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때'와 관련된 이 두 가지 이야기가 지금 저에겐 묘한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과연 그 때는 언제입니까? 언제까지 그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답답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용서와 화해에는 순서가 없다는 말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중책을 맡으신 정 추기경께서 부디 신앙인으로서 민족의 화해에 가슴 벅찬 새 길을 열어보여주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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