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 사태가 좀처럼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아직은 방역 전문가와 의학 전공자, 자연과학자의 시간이다. 삼류 정치인이나 언론을 참칭하는 선동꾼들이 아니라 이들 전문가의 말에 귀 기울이며 모두 한 마음으로 견뎌내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그저 견디고 넘어가면 될 시간만은 또 아니다. 한국인만도 아니고 동아시아인만도 아니라 말 그대로 세계인이 직면한 재난인 만큼 여기에는 틀림없이 세계사적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의미를 건져내야 한다. 잊고 싶은 이 경험에서도 뭔가를 배우고 깨달으며 이를 성숙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우리 이전의 인간들이 매번 그래왔기에 지금 우리 삶이 이만큼은 됐을 것이니, 우리 역시 이 정도는 해내야 한다. 재난 이후에 뭔가 이전보다 나아진 삶을 살아가는 일 말이다.
위험을 가려야만 가능했던 자본주의적 번영
코로나 바이러스는 왜 하필 다른 곳이 아니라 중국 우한 시에서 코로나19로 변형돼 확산되기 시작했을까? 나는 이 물음에 답할 능력이 없다. 유독 요즘 들어 이렇게 새로운 바이러스나 세균이 빈번히 출현하는 이유(주요 가설 중 하나는 기후 급변과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와 함께 이는 자연과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 그러나 사회과학자들이 답할 수 있고 또 답해야 할 물음이 있다. 이런 의문이다. 중국 내륙에서 발생한 바이러스가 왜 이렇게 빠른 속도로 전 세계인의 재난이 됐는가?
불과 두 달만에 우한의 고난은 한국과 일본에서 고스란히 반복되는 중이고, 심지어는 멀고 먼 이탈리아까지 이 대열에 합류했다. 게다가 대규모 검사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미 미국에도 감염자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아마 역사상 가장 빠른 바이러스 전파일 것이다. 이는 지구 위 대도시들을 마치 옆 동네마냥 서로 가깝게 엮고 있는 우리 시대의 네트워크를 선명히 가시화한다. 한국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대형 교회, 광신적 소수 종파들이 활개 치는 시민사회 구조를 드러내는 엑스레이 구실을 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 시대의 이 전 지구적 네트워크의 가장 커다란 교차점 중 하나가 바로 중국이다(다른 한 교차점은 물론 미국일 것이다). 이미 상식이 돼 있는 '세계의 공장'이라는 말이 뜻하는 대로, 중국은 상품 생산과 교역의 전 지구적 사슬들이 한 번 이상은 꼭 거쳐 가는 핵심 고리가 돼 있다. 그리고 코로나19의 대확산 이전까지 중국이라는 이 고리의 존재는 수많은 이들에게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었다. 지구자본주의 질서의 패자보다는 승자 쪽에 더 가까운 이들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돌이켜 보면, '사회주의' 중국이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장에 뛰어든 때야말로 시장자유주의 승리의 결정적 계기였다. 소련, 동유럽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보다 훨씬 더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이를 계기로, 자본주의 각국에서 노동운동이 내부로부터 구축한 친노동적 체계와 장치들은 전보다 더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구자본주의 노동시장에 수억 명의 신참자가 쏟아져 들어왔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오늘날 노동 세력의 하염없는 후퇴를 상당 부분 설명할 수 있다.
노동자들에게는 그러했지만, 그들의 반대편이 마주한 결과는 정반대였다. 심지어는 노동자들조차 소비자라는 또 다른 얼굴을 통해 이 정반대 결과를 향유하는 대열에 낄 수 있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번영을 위풍당당하게 과시하는 대형 상점 진열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더 정확히는, 거기에 진열된 상품들의 사랑스러운 가격으로 나타났다. 수십 년째 오르지 않은 실질임금이 별로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가격의 수많은 상품들. 그 상품들 가운데에 중국이라는 고리가 그림자로라도 엮이지 않고 거기에 그렇게 당당히 설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번영은 어떤 이들에게는 천문학적인 부와 권세를 안겨주었다. 그런 그들에게 가격 체계는 세상의 진보와 정의와 공동선을 지탱하는, 마침내 발견된 유일 지표였다. 그러나 가격은 이야기하는 바가 그리 많지 않은 지표이기도 했다. 거기에는 노동의 이야기는 빠져 있었다. 헐값에 삶을 기계에 갈아 넣은 중국 노동자들과, 그들이 그러는 만큼 이전에 당연시했던 권리들을 하나, 둘 다시 빼앗긴 다른 나라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거기에 없었다. 사랑스러운 가격의 향연은, 실은 그래서 가능한 것이었다.
아니, 노동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자연의 이야기도 빠져 있었다. 물론 바이러스도 그 이야기의 일부다. 사실 지구화가 곧 전염병의 지구화를 의미한다는 경고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역사가들에게 그것은 1 더하기 1이 2인 것만큼이나 자명한 진리였다. 역사상 인류가 지구화를 향해 성큼 나아갈 때마다 그 대열의 선두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세균과 바이러스도 있었다. 한 지역의 풍토병이 다른 지역에서 대참사를 낳거나(흑사병), 다른 문명을 파괴하는 수단이 됐다(천연두). 가장 최근에는 세계 전쟁(제1차 세계대전)이 전사자보다 더 많은 병사자의 원인이 됐다(스페인 독감). 역사학자들은 이미 다 이야기했다.
그러나 가격 체계에는 이런 이야기는 없었다. 노동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이야기 역시 생략돼야만 가격은 부와 권력과 번영의 유일 지표일 수 있었다. 전염병을 둘러싼 역사책의 불길한 경고 따위는 가격 계산에 잠깐의 잡념으로도 절대 끼어들 수 없었다. 말하자면 시장 가격의 매끄럽고 매력적인 세계는 엄연히 존재하는 비참과 위험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려져야만 존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과 자연의 모든 위험을 가림으로써 지속된 자본주의적 번영, 이것이 우리가 코로나19로 갑작스레 깨어나기 전의 꿈같은 세상이었다.
위험의 대비가 일상이 되어야 할 새로운 세상
꿈에서 깨어나 보니 우리가 마주한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마스크를 쓰고 보호복을 착용한 의료 요원들이 끝없이 밀려오는 환자들을 맞이하는 장면이다. 가려졌던 위험은 이렇게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재난이 되어 돌출한다. 쿠데타군 앞에 선 어느 가난했던 나라의 무능한 대통령처럼 우리는 탄식할 수밖에 없다. "올 것이 왔다."
그러나 우리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그저 처참하고 삭막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느 재난에서나 그렇듯이 여기에도 인간의 가장 고귀한 운명을 떠맡은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생업도 마다하고 다른 도시에서 대구로 달려온 의료인들이 있다. 느닷없는 재난에 어수선하기만 한 자매도시에 구호 물품을 챙겨 보내는 시민들이 있다. 바이러스에 맞서는 힘이 면역 체계가 아니라 끝 모를 혐오에서 나온다고 믿는 이들에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또 다른 이들이 있다. 재난으로 학교가 문을 닫은 대신, 우리 삶 전체가 학교가 된다.
하지만 이런 아름답고 벅찬 장면들 속에서도 안타깝고 아쉬운 구석들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 집단 감염 사태에 대처할 준비된 의료 인력이 부족한 점이 그렇다. 다른 분야에 비해 감염내과 전공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한 지방으로 갈수록 부족의 정도가 더 심해진다. 갑자기 늘어난 환자들을 수용할 병상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이 나라에서 공공의료시설이 현재의 10% 수준보다는 더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면, 신종 바이러스에 대한 응전은 좀 더 여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참에 돌아봐야 한다. 부족한 감염내과 전공의, 지방 의료 인력, 공공의료시설, 이 모두는 지금껏 이 사회가 '비용'으로 여겨온 것들이다. 당장에 수익을 내지 못하면, 모두 이렇게 비용으로 처리된다. 비용이 늘어나면 장부에 붉은 글자가 늘어나고, 이는 자원을 부실하게 사용한 증거로 치부된다. 정부가 이런 쪽에 돈을 많이 쓰면 세금을 낭비한 게 되고, 공공기관이 무슨 이유에서든 적자를 늘리면 폐지 대상이 된다. 실제 그래서 멀쩡한 공공의료시설을 없애버리고는 치적이라며 자랑한 극우정당 소속 도지사도 있었다.
이는 가격 체계의 논리를 사회 모든 영역에 확산시킨 결과다. 인간과 자연의 숱한 사연들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지워버려야만 경쟁의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그 논리를 온갖 군데에 들이민 결과다. 이 논리에 따르면, 만약에 있을, 아니 미구에 닥칠 재난에 대비하는 인력이나 설비, 자금은 지금 마땅히 수익을 내는 데 투입돼야 할 자원을 축내는 구멍들일 뿐이다. 가격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에 눈이 먼 사회는 이런 구멍들이 조금이라도 눈에 띄면 견딜 수 없어 한다. 구멍들을 정부 예산이나 공공기관 재무제표에서 지워버리지 않고는 참지 못한다. 지난 30여 년간, 한국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그래왔다.
그러나 코로나19를 겪고 난 뒤의 사회라면, 어떠해야 하는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과연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 아니다. 언젠가 이런 사태가 재발할 것을 염두에 두고 평소에 대응 인력을 늘려놓아야 한다. 늘 적자를 볼 게 빤하더라도 지방에 의료기관을 신설해야 한다. 주치의 제도를 도입하고 공공의료시설을 늘리는 데 정부 재정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시장 논리로 무장한 이른바 전문가들이 비명을 지를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도 이제 이 길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역사적 경험이 하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영국이다. 흔히 영국이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데 이 전쟁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강고한 자유주의 전통 때문에 보편 복지가 추진되기 힘들었던 영국에 국민건강서비스(NHS) 같은 공공의료체계가 구축된 것만큼은 전쟁 경험의 영향이 크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많은 이들이 총력전을 치르며 온 국민이 계급, 계층을 넘어 함께 나눈 연대감을 강조한다.
한데 이것만이 아니다. 전시에 영국인들은 그때까지 익숙했던 시장 가격 말고 다른 가치 체계, 어쩌면 더 중요한 가치 체계가 존재함을 실감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독일군 폭격기를 탐지하려고 온 종일 하늘을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어디에 폭탄이 떨어져 화재가 일어날지 알 수 없어 의용소방대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기다리는 이들 가운데는 폭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면 달려갈 의료 인력도 있었다.
이들 모두 평상시 기준으로 보면, 존재 자체가 쓸데없는 낭비였다. 그러나 위기의 시기에는 달랐다. 그리고 이 시기를 겪은 이들은 무엇이 꼭 필요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 일인지에 대한 감각부터 전과 같을 수 없었다. 전후 영국 복지국가는 그러한 새로운 감각과 이성, 상식에 바탕을 두고 등장한 것이다.
21세기의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있는 위험들도 없는 듯 가리며 지속되던 번영의 시대는 더 연장될 수 없다. 이제는 지난 시대가 불러온 수많은 위험들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아낌없이 대비하는 낯선 시대를 살아야 한다. 현재의 신종 바이러스 사태는 이 위험들 중 일부일 뿐이며, 더 거대한 도전은 기후 급변이 몰고 올 재난들이다. 이 미지의 새 시대에는 어쩌면 세계 전쟁을 겪고 난 영국 사회를 훨씬 능가하는, 상식과 기준,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에게는 지극히 안 좋은 소식이지만, 민주주의에게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과거에도 매번 그랬듯이, 위기와 기회가 함께 우리를 기다린다. 지금 겪고 있는 재난의 시련은 물론 고되고 힘겹지만, 재난 이후에 우리가 풀어야 할 시험은 이보다 더 거대하고 근본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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