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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일으키는가?"

홍기빈의 '현미경과 망원경' <26> '인플레이션과 사회적 위기'

***IV. 다가오는 세계: 군사화, 인플레이션, 불황**

***3. 인플레이션과 사회적 위기**

***인플레이션과 경제 성장**

인플레이션에 관하여 경제학 교과서까지 뒤질 것도 없이 아예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만유인력의 법칙 만큼이나 굳어져 있는 통념이 있다. 그것은 "인플레이션은 경제 성장과 경기 과열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며, 성장 부진과 경기 침체는 물가 하락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도 실로 그 유래가 깊은 것이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입증하는 논리는 20세기의 케인스 경제학에서 성립하였다. 소비, 투자, 재정 지출 등이 증가하여 '총수요' 곡선이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전체 경제의 고용 수준도 올라가고 총 산출도 늘어 성장이 이루어지지만 그 대신 가격 수준이 올라가게 된다. 그리하여 완전 고용 상태를 넘어설 만큼 총수요가 늘어날 경우엔 가격의 증가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이러한 케인스 경제학의 이론은 필립스 곡선(Philips’ Curve)이 발견되면서 경험적으로도 입증된 것으로 여겨졌다.

이리하여 "인플레이션은 경제 성장 디플레이션은 경기 침체"라는 통념은 한 때 신앙과 같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여기에서 전형적인 케인스주의적 경제 정책의 지침이 나온다. 경제 성장과 물가 안정이라는 두 개의 바람직한 목표는 동시에 추구할 수가 없다. 하나를 추구하려면 다른 쪽을 희생해야 하는 두 마리 토끼 같은 것이다(경제학자들이 즐겨 쓰는 영어로, 'trade-off' 관계에 있다고들 한다). 따라서 정책 결정자는 상황에 따라 금리 인하나 재정 지출 확대 등의 '성장' 위주 정책을 할 것인지 금리 인상과 긴축 재정 등의 '안정' 위주 정책을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엄숙한 결론을 도출한다. 경제학자들이 좋아하는, "비스켓을 먹고 또 가질 수는 없다"는 자연의 섭리가 다시 한번 장엄하게 확인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1970년대 초에 나타난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은 이러한 비장미 넘치는 케인스주의자들의 의식(儀式)에 한바가지 찬물을 끼얹은 격이었다. 물가는 엄청난 속도로 상승하고 있건만 세계 경제는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경기 침체로 처박히는,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최악의 조합이 나타난 것이다. 한때 케인스 경제학에 밀려나 있던 (신)고전파 전통은 밀턴 프리드먼 등의 통화주의(Monetarism)의 모습으로 부활하여 맹공을 가한다. 앞에서도 나왔듯이, 이들은 원래 경제의 고용 수준은 '실물' 부문의 상황에 따라 고정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금리를 올리고 내리는 등의 '화폐' 부문에서의 정책으로 좌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어리석은 케인스주의자들이 이러한 진리를 무시하고 "완전 고용을 달성한다"는 미명 아래 방만한 통화 정책을 계속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보듯 실제의 고용 수준은 그런 바람은 전혀 아랑곳 않고 떨어지고 있으며, 방만한 통화 정책으로 인해 인플레이션만 잔뜩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실에서의 고용 수준은 인간의 뜻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물' 시장의 법칙으로 나타나는 신의 뜻이다. 현실의 산출 수준과 고용 수준은 바로 그 신의 뜻에 의해 결정된 '자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정책 결정자들은 이제부터라도 "통화 정책을 통한 완전 고용 달성과 경제 성장"이라는 헛된 꿈을 버리고 '자연적 실업률'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 통화 가치 안정에나 주력하여라.

결국 전혀 반대되는 두 개의 주장이 각자 '신의 섭리'라는 거창한 차원의 옷을 입고 맞부딪히는 형국이다. 한쪽은 경제 성장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인플레이션이 벌어지는 것이 섭리라고 주장한다. 다른 쪽은 경제 성장이란 '자연적' 실업률 수준에서 고정되는 것이니 운명으로 받아들이라고 주장한다. 서로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느 쪽 신이 경제를 지배하는 분인지 판단할 수 있도록 실제의 경험을 보도록 하자.

[그림 1]

(캡션) 불변 가격 GDP에 대한 당시 가격 평가 GDP의 비율. 주의: 계열은 20년 이동 평균으로 그려져 있다. 관측치들 사이를 지나는 부드러운 곡선은 이해를 돕기 위해 손으로 그린 것이다. 출처: 1928년까지의 자료는 The Bank Credit Analyst Research Group. 1929년 이후는 U.S. Department of Commerce through WEFA (series codes: GDP for GDP; GDP96 for GDP in constant prices).

닛잔과 비클러가 작성한 [그림 1]은 지난 1890년에서 2002년까지의 1백12년간 미국 경제의 실질 GDP(가로축) 성장률과 인플레이션(세로축)의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만약 케인스주의자들이 옳다면 인플레이션이 높을수록 경제 성장률도 높아야 하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증가하는 모습을 띠게 될 것이다. 그리고 통화주의자들이 옳다면 경제 성장률은 인플레이션과 무관하게 '자연적인' 수준에서 결정되므로, 아래위로 곧바로 선 막대(혹은 막대들)의 모습을 띠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민망하게도 결과는 양쪽 다 빗나간 것 같다. 강한 상관관계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림 1]은 그 둘의 관계가 분명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소하는 음(-)의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과 신의 싸움은 코미디로 끝난 느낌이다.

지난 1백년간의 미국 경제가 "예외적인" 경우일까? 닛잔/비클러는 절대 아니라고 한다. 선진국, 개발도상국에 걸쳐 다양한 나라들의 경우를 조사해보지만, 위와 같은 패턴은 항상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①. 게다가 20세기 후반의 경제학은 거의 암묵적으로 미국 경제를 '표준'적인 모델로 삼아왔다는 점을 볼 때에 더 더욱 당혹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케인스주의자이건 통화주의자이건 이렇게 간단하게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사실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고 있다는 점도 사실 현대 경제학의 스캔들의 하나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림 1]이 보여주는 현실의 경험은 결국 통념과는 정반대로, "경제 성장은 물가 안정이나 하락을 수반하며, 인플레이션은 경기 침체와 함께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되면 저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은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20세기 내내 미국 경제에 나타났던 일반적인 경향에 불과했던 셈이다.

이는 케인스 이론이나 (신)고전파 이론에서는 납득하기 힘든 현상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닛잔/비클러는 도스타인 베블렌(Thorstein Veblen)의 이론에 입각하여 보면 이는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설명한다②. 이 연재의 앞에서 보았지만, 베블렌은 19세기 말 폭발적인 생산력 증대를 가져온 2차 산업 혁명 이래 현대 자본주의는 만성적인 '과잉 설비' 상태에 있다고 본다. 그로 인한 '과잉 생산'으로 인해 가격 인하와 과당 경쟁이 벌어지게 되면 자본의 이윤은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생산 설비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행사하여 증대되는 사회적 생산에 "깽판을 놓는(sabotage)" 것이야말로 영리활동(business)의 핵심이요 이윤의 원천이라는 것이 베블렌의 관점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생산이 마구 증대되고 생산 설비가 증대되는 경제 성장기에 가격 수준이 안정되거나 떨어지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반면 사회적 생산의 핵심 주요 부분을 장악한 대자본이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회 전체의 생산과 고용 증대를 억제하고 자신들 상품의 가격을 마구 인상하는 일이 동시에 벌어지는 것도 또한 필연적이다. 요컨대, 베블렌의 관점에서 보면 스태그플레이션이야말로 대자본의 "깽판놓기"가 본격적으로 보여지는 '당연한' 현상인 셈이다.

하지만 베블렌이 옳다고 한다 해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인플레이션은 분명히 몇몇 대기업의 가격 인상에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라 전 경제 때로는 전 세계 경제에 걸친 전반적인 가격 수준의 상승인 것이다. 그 대기업들이 제 아무리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해도, 또 그들의 생산물이 전 사회적 생산에 있어서 제 아무리 비중이 큰 것이라 해도 그들 몇몇의 경제적 영향력의 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심지어 원유와 같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상품조차도 그 하나의 가격 인상으로 곧바로 인플레이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 자본주의에서의 가격 결정은 시장이라고 하는 일종의 무정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몇몇 행위자들이 섣불리 가격을 인상하는 등의 행동을 했다가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경쟁자들에 의해 값비싼 대가를 치르기 십상이다. 따라서 아무리 인플레이션이 지배적 자본 집단에게 매력적인 축적 방식이라고 해도, 마치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 마음껏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닌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전체 경제에 보편화된 정상적 행위(norm)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사회적 조건을 창출해야 한다. 그 조건은 무엇인가.

***인플레이션과 정치 경제학: 누가 이익을 보며 누가 일으키는가**

인플레이션을 둘러싼 1970년대 케인스주의자와 통화주의자들의 논쟁은 단순한 경제 이론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위기의 70년대'를 통과하던 서구 사회가 겪고 있던 정치, 외교, 사회 전반의 위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진단할 것인가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다.

케인스주의 정치경제학은 사회의 '총수요'를 진작시키는 것을 주요 모토로 삼는다. 이를 위해 금리를 인하하고 재량적인 통화 정책을 통하여 금융 자본의 횡포를 막고 실물 투자를 조성하여 고용을 창출하고 또 재정 확대를 통해 사람들의 소득을 늘리는 길을 택한다. 이러한 경제 정책은 전후 서구 국가에 보편화되었던 "조합주의적 복지 국가" 모델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노동은 강력하게 조직되어 임금 인상 등의 경제적 사안은 물론 국가 기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시장의 실패'로 인해 왜곡된 분배를 시정하기 위해 정치 사회적인 논리와 명분을 앞세워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정당화된다.

그래서 케인스주의 경제 이론에 대한 통화주의자들의 공박은 이러한 '복지 국가' 정치 경제 모델 전체에 대한 것으로 이어진다. 경제는 '실물' 부문에서의 시장의 자연적 조화에 의해 지배되는 것인데 국가가 이리저리 개입한 것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이들의 주장은 앞에서 보았다. 이들은 그러한 국가 정책의 어리석음의 원인을 지나치게 강한 노동조합과 각종 '이익 집단'들이 국가 기구를 장악한 것에서 찾는다. 시장의 자연적인 균형과 규율에 따르기보다 정치적 논리를 앞세운 이들 다수가 숫자를 앞세워 정치와 사회 제도 곳곳을 장악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논리는 비슷한 시기에 사뮤엘 헌팅턴 등이 내걸었던 '민주주의의 과잉' 명제와 연결되어 정치적 이념으로 변모한다. 사회 전체의 기강이 무너지고 노동자 학생 빈민 할 것 없이 모두 지나친 요구를 서슴지 않아 시장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가 유린된 것이 경제 위기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하나의 정치적 이념과 노선으로 갈무리되어 우리 눈앞에 나타났던 모습은 1070년대 말 경찰과 법을 앞세워 노동조합을 분쇄하고 소위 '영국병'을 치유한 '철의 여인' 마가릿 대처 수상에게서 볼 수 있다. "오직 개인들만 있을 뿐이다. 사회란 없다(there is no society)"라는 유명한 모토를 앞세워 시장과 사유화의 원리 이외의 복지 재정 상호 부조 등 모든 사회적 정치 경제 제도를 분쇄해버린 이 대처 정권이 바로 이후 전 세계를 휘감게 되는 신자유주의의 원형이라고 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이러한 논쟁은 시장 자본주의의 실패, '수정 자본주의'의 대두와 신자유주의로의 역전이라는 지극히 20세기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논쟁에서 드러난 "인플레이션의 주범은 민주주의이다"라는 비판의 논점은 사실 대단히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서구 사상사에서 '민주주의'가 긍정적인 말로 변한 것은 극히 최근인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원래 민주주의란,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을 벗겨먹기 위해 숫자로 밀고 들어오는 정치 체제"라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정의가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성립된 민주주의 정부가 부자들을 벗겨먹는 방법이 바로 멋대로 싸구려 화폐를 남발하는 것 즉 인플레이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 시대 숱하게 남발되었던 악화(惡貨)의 가장 큰 원인은 황제들이 평민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과다한 재정 지출에 있다는 비판이 옛날부터 있었다.

그래서 화폐 경제가 확립된 19세기 이래 유럽과 미국의 유산 계급은 항상 민주주의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것이라는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의 한 사람인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신생 미국이 민중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될 경우 악화의 남발로 부르주아 질서가 위협 당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유명한 일이다. 이후 미국 역사에서 인민주의자들(populists)은 항상 '지폐 달러(greenback)'를 옹호하며 안정된 통화 가치를 요구하는 월 스트리트와 맞서는 이들이기도 하였다. 요컨대, 탐욕스런 빈민들의 염치없는 요구에 힘없이 끌려가는 민주정부야말로 화폐 가치 불안의 원인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일견 새로워 보이는 프리드먼 류의 주장은 사실 이 오래된 유럽 지배 계층의 사고방식을 표출한 것에 불과하다. 조금 다른 논리적 구조를 갖추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 이래 물가 불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어김없이 나오는 "물가 인상의 주범은 노동자들의 과도한 임금 인상"이라는 논리도 이러한 사고방식의 표출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잠깐만 생각해 보자. 인플레이션의 와중에서 이득을 보는 자들이 서민들 노동자들인가? 인플레이션은 분명히 기존의 경제의 분배 구조를 급격하게 재편하는 현상이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상 알고 있는 바는, 그러한 급격한 재편 뒤의 결과가 거의 예외 없이 '빈익빈 부익부', 즉 성경 말씀처럼 "가진 자는 더 가지고 없는 자는 있는 것조차 뺏기는" 것이라는 점이다. 70년대 이후 우리나라 경험도 그러했지만, 닛잔/비클러가 작성한 위의 [그림 1, 2]는 미국의 경우에도 분명히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 화폐 경제는 실로 복합적이고 복잡한 체제이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은 그 복잡한 화폐 경제에서 시작하여 사회 구조 전체의 재편으로 이어지는 더더욱 복잡한 현상이다. 그런데 그러한 복잡한 사정을 일체 무시해버리고 그 단순하기 짝이 없는 화폐수량설이라는 단선적 논리 하나를 내세워 인플레이션은 모두 빈민들에게 장악된 민주주의 정권의 통화 증발 때문이라고 몰아붙이는 프리드먼 류의 주장은 사실상 20세기 초 미제스(Ludwig von Mises)의 "집산주의자의 음모(Collectivists’s Conspiracy)"와 궤를 같이하는 '음모이론'에 가깝다.

하지만 이런 식의 주장은 '음모 이론'으로서도 어설픈 구성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음모 이론의 첫 번째 황금률은, "주모자는 항상 그 사건을 통해 최고의 이득을 보는 집단이다." 최소한 지난 50년간 미국 경제에서 인플레이션은 노동자나 중소 자본이 아닌 지배적 자본 집단에게 큰 이득을 안겨주는 재분배 효과를 낳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주도하는 추동력은 그를 통해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지배적 자본 집단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지 않은가?

***인플레이션, 사회적 위기, 전쟁**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플레이션은 단순히 몇몇 자본의 음모와 가격 담합 같은 것으로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경제의 행동 양식(regime) 차원에서의 변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쓰는 속어에 '개판'이라는 말이 있다. 그 정확한 어원은 알지 못하지만, 이 말이 뜻하는 상황은 정치ㆍ사회학적으로 음미해볼 만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경향을 제멋대로 풀어두게 되면 전체에 혼란이 벌어질 수 있다. 그래서 그러한 경향을 억제하는 것이 전체 집단 차원에서의 규범(norm)이 되고, 이를 어기는 자에 대해서는 일정한 처벌이 따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촉발의 계기가 주어지고 그러한 규범이 흔들리게 되면 한 명 두 명 그 경향을 막 드러내게 되고, 이에 따라 모두 일제히 그 혼란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동참하여 전체의 규범 자체가 아예 그러한 혼란스러운 행동을 벌이는 것으로 바뀌고 만다.

노천극장 같은 곳에서는 모두 다 앉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는 것을 다 알기에 보통 평화롭게 앉아서 보는 행위 규범이 지켜진다. 그렇지만 꼭 중요한 장면만 되면 저 혼자 더 잘 보겠다고 일어서는 미운 자들이 있다. 그러면 그 뒤에도 일어서고 순식간에 모두 일어서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다. 그러면 그 때는 키 큰 사람이 '장땡'이며, 올라탈 수 있는 아빠의 어깨를 가진 꼬마가 '장땡'이다. 그리고 막 이렇게 혼란이 벌어지려는 찰나의 상황을 지칭하는 '개판 5분전'이라는 말도 있다. 즉 자신이 가진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전체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가하는 것이 일종의 행위 규범이 되어버리는 상황 그래서 모두 사람이 아닌 개가 되어버리는 상황이 바로 이 ‘개판’이라는 말이 지칭하는 바일 것이다.

닛잔/비클러가 이해하는 인플레이션의 사회적 메커니즘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개판'과 대단히 가깝다. 시장의 구조는 보통 기존의 경제적 사회적 권력 배치 상태에 따라 일정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대기업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구조의 균형 상태를 함부로 교란할 수는 없으며, 자칫하면 구조 전체에 의해 철퇴를 맞는 수가 있다. 그렇다면 지배적 자본 집단이 이러한 기존 상태의 족쇄를 벗어나 마음껏 가격을 올리는 축적 양식으로 전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존의 사회적 경제적 권력 구조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재구조화되면서 사회 전체가 일종의 '개판'과 같은 상황으로 들어서는 것이 필요하다. 점잖은 사회 과학적 표현으로 쓰자면, 총체적인 '사회적 위기(social crisis)'가 필요하다. 이것이 닛잔/비클러의 시각이다.

20세기에 걸쳐 나타난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그렇게 '개판'에 맞먹는 사회적 위기를 수반했던 경우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1차 대전 후 완전히 붕괴된 가운데 초유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은 1920년대 독일 사회가 그러했고, 1970년대 중동 전쟁 및 석유 위기가 그러했고, 1990년대 러시아의 정치적 혼란, 2001년 아르헨티나의 부채 지불 정지 등의 상황이 모두 그러했다. 그런데 사회 전체를 그러한 '개판'과 같은 총체적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는 최적의 계기는 무엇일까. 닛잔/비클러는 전쟁이나 군사적 분쟁이야말로 그 대답이라고 본다. 그들은 [그림 2]를 통하여 20세기 후반 선진국가들에서의 인플레이션과 무기 수출의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 2]

물론 스태그플레이션이 창궐했던 70년대가 세계적인 군사 분쟁과 갈등의 시기이기도 했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하지만 위의 두 계열이 보여주고 있는 긴밀한 상관관계는 그러한 상식적인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어떤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림의 세계 무기 수출량의 계열은 물품이 교부된 시점을 기준으로 측정된 것인데, 무기 시장에서 계약 성사에서 실제 교부 까지는 보통 3년 정도 걸리는 것이 통례이다. 그것을 감안하여 무기 수출량의 계열을 3년 정도 왼쪽으로 당겨서 겹쳐본다면, 두 계열은 거의 한 쌍의 신크로 수영 선수들의 다리만큼 절묘한 일치를 선사하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일치는 과연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세계적인 인플레이션과 세계적인 군사적 위기의 증대는 '사회적 위기'를 통하여 가격 결정력을 십분 이용하려는 지배적 자본 집단의 축적 전략이라는 동전의 두 측면인 것일까. 후자의 가능성이 함축하는 바는 실로 혐오스런 그림이다. 따라서 이 정도의 논리로 그것을 믿도록 설득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한 일이 분명하다. 정말 닛잔/비클러가 주장하듯이 인플레이션과 거기에 수반되는 군사 분쟁과 사회적 위기가 새로운 축적 전략을 노린 지배적 자본 집단의 주도하에 벌어지는 것이라면, 최소한 그런 일을 주도하는 '지배적 자본 집단'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의 집단이며 어떤 동기와 행동 패턴을 갖고 있는지는 설명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다음 회에 살펴볼 내용이다.

***<주(註)>**

① 선진국가들의 1968년 이후를 놓고 작성한 그림은 심숀 비클러, 조나단 닛잔 저, 홍기빈 옮김, <권력자본론 : 정치와 경제의 이분법을 넘어서>(삼인, 2004), 251쪽 참조. 필자는 어떤 세미나에서 닛잔 교수가 학생들에게 어느 나라이든 경제 성장률과 인플레이션이 양(+)의 관계를 보여주는 경우를 보면 현상금을 주겠다고 하는 것을 기억한다.

② 닛잔/비클러가 이해하는 바의 베블렌의 경제이론의 골자는 <권력자본론> 5장 참조. 또 베블렌의 자본 이론에 대해서는 홍기빈 편역, <자본의 본성과 축적에 관하여>(책세상, 근간) 참조.

이 연재는 Jonathan Nitzan과 Shimshon Bichler의 연구를 소개하고 있으며, 그들의 자료는 www.bnarchives.net에서 구해볼 수 있다. 특히 4부의 내용은 그들의 최근 논문 "Dominant Capital and the New Wars." Journal of World-Systems Research 10 (2, August): 255-327.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 논문은 http://jwsr.ucr.edu/archive/vol10/number2/ 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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