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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어떻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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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어떻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는가"

홍기빈의 '현미경과 망원경' <23> <권력자본론> 서평에 답하며

지난 7월24일 <프레시안>에 실린 <권력자본론> (심숀 비클러ㆍ조나단 닛잔. 홍기빈 옮김, 삼인, 2004)에 대한 박승호 박사의 서평은 책의 논지와 내용을 충실하고 깊이있게 추적한 글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진지하고 성실한 서평을 읽게되는 것이야말로 책을 준비한 사람들에게 그 동안의 피로를 잊게 하는 가장 큰 보상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서평에 대해 전해 들은 저자들은 물론, 책의 번역자인 필자도 박승호 박사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사회적 권력'이야말로 '자본'과 '이윤'의 근원"**

서평 후반에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서평자의 입장에서 <권력자본론>에 대한 비판이 개진되고 있다. 논지를 추리자면, 첫째, 서평자가 보기에 저자인 닛잔과 비클러는 권력을 '대기업들의 시장 독점력'과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둘째, 이렇게 권력이라는 개념이 경제적 개념으로 환원되었기 때문에, 저자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결국 <권력자본론>은 사회의 정치 경제 현상을 대기업의 시장 지배력으로 환원하는 또 하나의 경제주의로 귀결되었다. 셋째,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마르크스의 준거점이었던 자본주의적 계급 관계라는 사회적 관계의 패러다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미국의 소위 '제도주의' 학파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많이 나왔던 비판이며, 이에 대한 논의는 학술적이며 또 대단히 복잡할 것이기에 프레시안 지면에서 자세한 반론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인다. 또 필자는 책의 번역자에 불과하므로 저자들의 입장을 변호하거나 상술할 이유도 또 자격도 없다. 이 글에서는 단지 이러한 서평이 이 책에 대해 낳을 수 있는 불공평한 오해라고 생각되는 지점만을 지적하겠다.

첫째, 닛잔과 비클러가 강조하는 자본의 권력이란 대기업의 시장 지배력이 아니다. <권력자본론>의 2장에서는 자본의 권력이란 '사회적 관계의 상품화'에서 나온다는 점이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저자들은 베블렌의 논지를 따라 생산은 사회 전체에 걸쳐 이루어지는 과정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자본이란 그러한 사회적 생산 과정에 가장 결정적인 관건이 되는 유형 무형의 계기들-기계일 수도 있고 지식일 수도 있고 법적 규제일 수도 있다-에 대하여 사적 소유권을 설정하여 자신의 '자산(asset)'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자산에 대한 소유권이란, 곧 자기 수틀리는대로 그 자산을 생산에서 빼내어버림으로서 사회 전체에 고통을 가하여-이것이 베블렌이 말하는 '깽판놓기(sabotage)'이다-이윤을 뜯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약간의 비유를 들자면, 사회적 생산의 아주 중요한 '병목'에 해당하는 부분을 '볼모'로 잡아서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인질극'을 벌이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 전체로부터 '몸값'으로 뜯어내는 부분이 이윤의 원천이라는 것이 베블렌의 자본 및 이윤 이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윤의 근원을 '자본재의 생산성'에서 찾는 신고전파의 자본 이론 그리고 '잉여 노동 시간의 착취'에서 찾는 마르크스 이론 모두가 생산의 '기술적 과정' 자체에서 자본과 이윤을 설명하는 데에 반하여, 베블렌과 닛잔 비클러는 사회적 생산 과정을 "깽판놓을" 수 있도록 핵심적인 계기를 '자산'으로 움켜쥐어버리는 소유권이라는 사회적 권력에서 자본과 이윤의 근원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들이 자신들의 자본 이론을 "권력자본론"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사회적 권력'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는 비밀"**

이렇게 사회적 관계의 일부를 장악하여 현금의 흐름(cash flow)을 창출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바로 영업 기업(enterprise, going concern)이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들어오면 이 기업들은 자신들의 현금 흐름을 현재 가치로 할인하는 자본화(capitalization)의 기법을 통하여 소유권을 상품화시키는 증권 시장(securities market)을 발전시켰다. 이것이 현재의 금융 자본주의의 본질이요 발생이라는 것이 책의 주장이다.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첫째 그렇게 '자산에 대한 소유권'을 설정하여 '깽판놓기'를 가능케 함으로서 '현금 흐름'을 낳게 만들 수 있는 사회적 관계의 가지수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는 것, 둘째 따라서 그렇게 성공적인 현금 흐름을 일단 확보한 후 증권 시장에서 매매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의 가지수도 거의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이 후자야말로 미국 주식 시장 역사를 논하는 자들이 항상 입에 올리는 소위 '깊이(depth)'라는 것이다.

인간 세상의 사회적 관계 중 이렇게 현금을 창출하는 목적으로 '자산'으로 자본화된 것들의 예는 역사적으로 실로 무궁무진하며 이 지구화의 시대에 폭발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가장 오래된 예라면 매춘부의 육체를 들 수 있겠고, 최근에 나타난 예를 들자면 미국과 유럽의 주요 주식 시장에 상장되어 있는 프로 축구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된다.

남자와 여자가 성욕을 느끼고 해소해나가는 전체의 사회적ㆍ자연적 과정에서 그 핵심 관건이 되는 남자와 여자의 신체 일부를 '자산'으로 쥐고 현금 흐름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노는 날 들판에 나가 공을 차며 뛰다가 걔중 잘하는 이들의 플레이를 감상하게 되는 자연스런 과정은 이제 스물 몇 개 정도의 다리통을 '자산'으로 보유한 구단주에게 황금알을 낳아주는 거위로 변하였다. 하물며 전기를 사용하는 과정, 쌀을 생산하는 과정 등등은 말할 것도 없다. 21세기의 인류 문명이 지금 당하고 있는 상태는, 이렇게 자본의 소유권이라는 사회적 권력에 의해 "황금알 낳는 거위"로 포획되고 있는 사회적 과정이 숨막히는 속도로 늘어가고 있으며, 그 결과 우리의 일상 생활 전체가 상품화에 포위되고 있다는 것이 이 <권력자본론>의 중요한 논점의 하나이다.

따라서 닛잔 비클러가 권력을 '대기업의 시장 독점력'으로 환원하고 있다는 비판은 사실상 책의 내용과 정반대로 빗나간 비판이 아닐 수 없다. <권력자본론>은 거꾸로, 세상에 존재하는 무궁무진하게 다양한 종류의 권력, 포주와 기둥 서방의 권력에서 시작하여 조세를 뜯는 국가의 권력, 여자들과 아이들을 저임금으로 일시키는 가부장 사회의 권력, 삼림과 천연 자원을 마음껏 팔아치우는 토호들의 지방 권력, 지적 소유권을 전 세계로 휘두르는 빌 게이츠의 권력, 비정규직의 사회 보장을 계속 유보시켜 자본 권력을 확장하는 국가자본의 권력, 인간 유전자에 대한 지식을 독점하는 선진국 대기업의 권력, 토플과 토익 시험을 강제하는 영미 세계의 문화적 권력 등등 무궁무진한 현실에서의 권력이 어떻게 하여 '자산에 대한 소유권'으로 '자본화'되고 또 증권시장에서 할인되어 '상품화'되는지의 과정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요컨대 "대기업의 시장력이 어떻게 사회적 권력이 되는가"가 아니라, "사회적인 다양한 권력이 어떻게 자본화되어 경제적 힘으로 변하는가"의 방향으로 논리가 전개된 것이다.

***"공장 밖 자본 축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권력자본론>은 서평자가 말하고 있는"노동자 자본가라는 자본주의적 계급 관계에 착목해야만 사회적 관계의 권력 관계가 총체적으로 드러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 대해 거꾸로 다음과 같은 비판을 내놓게 된다. "공장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자본의 축적 과정의 사회적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현대 자본주의에서의 기업의 행태를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생산 과정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로부터의 "절대적 상대적 잉여가치의 착취"와 거의 혹은 전혀 무관한 방식으로 자본이 축적되고 있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즉 자본 축적에 관련된 사회적 관계의 지평이란 공장이나 작업장에서의 공식적인 노자 관계의 틀을 훨씬 넘어서는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앞에서 본 베블렌ㆍ닛잔/비클러 자본 이론의 입장대로 그러한 자본 축적은 필시 일정한 사회적 관계에 대한 권력을 현금 흐름으로 상품화시키는 과정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 공장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축적 과정은 분명히 노동자 자본가라는 관계 이외의 종류의 권력 관계를 상품화한 것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권력자본론>의 입장에서 오로지 계급 관계를 '사회적 관계 일반'과 동일시해버리는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은 사실상 노자 관계 이외의 여타 사회적 관계에서 작동하는 권력에 대한 설명을 방기하는 것이며, 이는 노동자 이외의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이 자본 축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또한 도외시하는 결과가 된다고 비판하게 된다.

결국, 서평자의 비판의 논지와 <권력자본론>의 논지는 서로 정반대로 엇갈려 있다는 것이 책을 번역한 입장에서 뚜렷이 보이기에, 차후의 생산적인 논쟁을 위해서나 또 <권력 자본론>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를 피하기 위해서나 위의 점을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다시 한번 중요한 논점을 제기해주신 박승호 박사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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