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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 바디스(Quo Vadis),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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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 바디스(Quo Vadis),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홍기빈의 '현미경과 망원경' <18> '지구 정치경제의 향방' 연재를 속개하며

작년에 연재하다가 중단된 "세계적 자본 축적과 지구 정치 경제의 향방"을 계속 연재하기로 한다.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물론 그 당시 막 시작되고 있었던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있었다. 이 전쟁이 아무런 명분도 정당성도 없는 세계 초강대국의 일방적 폭력이었음은 지금은 명백하게 밝혀진 바 있고 이미 그 당시에도 수많은 이들이 지적했던 바이다.

하지만 이 연재를 시작했던 것은 그렇게 거의 과잉으로 차고 넘치던 도덕적 비판에 또 한마디를 덧붙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필자가 보기에 이 전쟁은 약간 멀리 떨어져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좀더 긴 시간 지평에 놓고 볼 필요가 또한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논의가 이라크 전쟁의 도덕성 문제에만 집중되다보니 그러한 역사적 의의가 수이 간과되고 있다는 경계심이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된 원인이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과 지구 정치-경제의 변형**

1990년대의 세계는 정말로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주장처럼 '역사의 종말'에 가까웠던 듯한 세계였다. 20세기 후반기의 지구를 찢어놓았던 냉전도 끝난 이상, 이제 인간 세계에는 큰 갈등의 동기가 사라지고 마침내 '역사가 완성'되었다는 낙관론이 팽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낙관론은 곧 냉전의 승리자인 자유주의적 정치 및 경제 체제에 대한 신격화로 이어졌고, 이제 세계 역사에 마지막 남은 일거리는 그러한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의 이상을 전 지구로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믿어졌다.

여기에 덧붙여 소위 기술 정보 혁명이라는 하이테크붐이 나타나면서 국제 금융의 흐름은 그 혜택으로 바이트와 비트에 실려 전 세계를 휘어감는 지구적 금융 시장을 형성하였다. 여행업(tourism business)과 엔터테인먼트 및 미디어 산업도 눈부시게 성장하였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던" 크레믈린의 북극곰도 사라진 이상 인류의 공적(公敵)이란 기껏해야 반인권적 반평화적 분란을 일으키는 지역의 불한당들 정도였고, 또 그러한 불한당들이 도를 넘어 준동할 때면 미국을 맹주로 한 유럽과 일본 각국의 공조 체제가 가동되어 '정의의 불벼락'을 안겨주곤 했었다. 아시아, 남아메리카, 동유럽의 신흥 경제(emerging market)가 성장 엔진이 되어 세계 경제도 주식 시장도 활황을 이루었고, 중상류층들은 뮤추얼 펀드에, 세계적 대기업들은 엄청난 규모의 인수 합병에 몰두하게 되었다.

대략 이러한 모습이 90년대의 지구화 시대의 풍경이었다. '쥬라기 공원'과 같은 모습이다. 내리쬐는 햇볕과 푹푹찌는 더위 덕분에 사방에서 시퍼런 양치 식물들이 마구 자라난다. 그러면 다이노사우루스처럼 엄청난 크기로 살이 찐 대기업들은 그것을 뜯어먹으며 뒤뚱뒤뚱 걸어다니면서 더욱 덩치를 키운다. 게으른 하품이 절로 나오는 중생대의 어느 평화로운 오후의 풍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2000년의 주가 폭락은 빙하기로 접어드는 불길한 조짐이었다. '닷컴 붐'과 '신경제(New Economy)'라는 시대의 총아는 상당한 과대포장이었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또 이제 더 이상 합병할만한 기업의 풀도 소진되어 간다. 그리고 1990년대의 신흥 경제 특히 중국 등의 아시아 국가들의 급속한 산업화의 결과 나타나게 된 '과잉 생산'으로 디플레이션의 공포가 세계로 번져간다. 2001년 9월11일의 참극이 터지게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그날 오전 뉴욕의 국제 무역 센터 빌딩이 무너지는 뉴스 화면을 보고 어떤 이들이 직감적으로 '이제 어제의 세계는 영영 끝이 났구나'라고 느꼈던 것도 그래서 무리가 아니다. 덩치 큰 초식 공룡들이 평온하게 양치 식물을 뜯던 '쥬라기 공원'은 이제 곧 입에 피칠갑을 하고 다른 짐승들의 내장을 파헤치는 티라노 사우루스들에게 점령될 것이다.

'평화 배당금(peace dividend)'이라는 지구화(globalization)의 이데올로기 대신 혼란과 갈등, 전쟁, 암살, 군비 강화, 원자재 가격 상승, 실업과 인플레, 보호 무역 등등의 시대가 올 것이다. 지구화도 신자유주의적 상품화도 더 이상 히쭉 웃는 호색한 클린턴의 얼굴을 내세운 90년대의 이미지와 방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예감은 사실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주장하거나 말할 수 있는 것은 못된다. '말이 씨가 될' 위험도 있지만, 이렇게 큰 규모에서의 세계사적인 전환이라는 주제는 사실 역사의 섭리를 이끌어가는 '신의 옷자락'이나 비슷한 영역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감히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역사 철학에다가 슈펭글러 류의 문명비평 등 오만가지 차원의 담론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올 크고 막연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2003년의 이라크 침략이라는 사건의 메시지는 아주 분명하고 또 도전적인 것이었다. 먼저 그 불길한 예감이 더 이상 예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화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소위 '알 카에다'와의 관련을 내세운 아프가니스탄 침략까지는 그 9.11이라는 '우발적'인 - 최소한 공식적 담론은 그렇게 주장한다 - 사건의 귀결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누구의 눈에도 터무니없는 이라크 전쟁으로 상황이 이어지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째서 아시아의 냉전 구조와 한반도 분단 체제는 해체되기는커녕, 미사일 방어 체제(Missile Defense System)나 일본의 군사 대국화에서 보듯 미증유의 긴장으로 치달아간단 말인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원유가는 드디어 배럴 당 40달러를 넘어서고 있다. 미국의 정부 관료들이 '현직' 이사로 참여하고 있는 미국의 몇 개 기업들은 이라크 전을 계기로 엄청난 규모의 수주를 따내고 있다. 90년대 말 세계 총 생산의 10%를 넘던 여행업종은 심각한 타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라크 갈등은 한없이 장기화되고 있으며, 동북아의 한-미-일 군사력은 지금 체계적인 재조직화를 겪고 있다. 부시의 경쟁자로 나온 존 케리 후보는 "핵 확산을 막기 위해 발전용 핵물질도 국제적으로 통제하겠다"면서 북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으며, 그 와중에서 수백 기의 핵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이스라엘 정부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조롱하며 모든 감사를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이 나타나는 메카니즘은 무슨 '세계사를 인도하는 불가해한 신의 섭리(mysterious Providence)' 따위와 같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다. 이 북새통에서 뚜렷한 이익과 권력을 축적해가는 아주 구체적인 인간 집단들이 아주 구체적인 책략을 통해 추진하고 있는, '빤히 보이는' 정치적 역동일 뿐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지구화의 방식도 또 자본 축적의 양식도 모두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인 '지구 정치경제학'을 찾아서**

'지구화'가 새로운 역사적 현상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겠으나, 분명한 것은 전 인류의 삶과 안녕의 조건이 오늘날처럼 밀접하게 서로 연결된 시절은 없었다는 점이다. IMF 당시 직업과 가정을 잃어야 했던 이들을 생각해보라. 이제 각 개개인의 인생과 운명에 있어서 그러한 지구화된 삶의 조건이 규정하고 들어오는 영역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의 세계'가 지금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를 항상 불안한 눈으로 보는 이들의 숫자는 점점 불어나고 있으며, 한 때 소수의 학자 및 전문가들의 관심사에 불과했던 세계 정치나 정치경제 같은 사안들은 이제 많은 시민들이 알고 싶어하는 관심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방금 설명한 것과 같은 '이라크 침략' 사건의 중장기적 의의 또한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있는가? 적어도 '공식적 담론'에서는 그러한 일은 거의 일어나기 힘들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가 '공식적 담론'이라는 말로 지칭하는 바는 우리 생활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해석하고 음미하여 보통 사람들에게 '믿어야 할 바'를 안내해주도록 마련된 제도적 장치에서 발표되는 담론을 뜻한다. 오늘날 그 '공식적 담론'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서방의 정부 및 준정부 조직의 담화, 둘째 미디어의 보도와 사설, 셋째 대학과 학계의 주류적 해석 등이다. 2001년의 9.11 사태 이후 2003년 이라크 침략 당시 이 세 가지 요소 모두가 이러한 지구촌의 현 상황의 의의를 밝혀주기는커녕, 그러한 혼란을 만드는 정치적 책략의 한 도구로 전락해가는 모습을 익히 본 바 있다.

이미 90년대 중반 이후 서방 국가들이나 그 영향 하의 국제 기구의 담화들은 '지구화의 불만'이나 '경제적 공포'에 가득찬 사람들의 근본적인 불신과 도전에 직면한 바 있다. 미국의 대학들이 주도하는 주류 사회과학계의 담론은 90년대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정당화 이후 21세기의 변모된 상황에 대해 침묵 혹은 기성 권력에 대한 정당화로 일관하고 있다. 몇 개의 서방 매체가 장악해버린 오늘날의 세계 미디어 업게에 고전적인 '독립적 언론의 사명' 따위를 기대하는 것은 이미 시대착오가 되고 말았다. 비록 인터넷이나 반지구화 운동의 힘을 빌어 나타난 여러 가지 대안 매체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정보와 역량의 미비로 아직 즉자적인 도덕적 비판과 폭로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고 있지 못하다.

눈앞에서 숨가쁘게 변화하고 있는 현실을 포착하면서도 그것을 좀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이론적 분석을 가하여 풍부하게 이해시켜 줄 수 있는 현실적인 '지구 정치경제학'은 없을까. 그리고 그것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서 변해가는 세상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를 함께 논의하도록 만들 수는 없을까. 공부도 고민도 부족한 필자의 역량으로 크게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필자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접했던 죠나단 닛잔(Jonathan Nitzan)과 심숀 비클러(Shimshon Bichler)의 정치 경제학 연구는 그러한 필요를 크게 충족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 연재를 시작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의 이론과 현실 분석을 가급적이면 풍부하고 쉽게 소개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필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음모 이론'의 전성 시대**

그래서 이 연재를 처음 시작하던 2003년 당시 주력했던 바는, 특히 90년대에 더욱 굳어지게 된 일종의 통념, 즉 "지구 정치경제의 변동은 기술 진보, 경제 발전, 자유의 진보 등과 같은 거시적 메카니즘으로 설명된다"는 사고 방식에 일단 도전하는 것이었다. 또 당시의 이라크 침략이라는 사태는 오히려 지구 정치경제란 구체적인 인간 집단의 구체적인 권력과 이익의 관점에서 움직이고 뒤집히는 것이라는 사고 방식이 훨씬 설득력있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계기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과 시각을 '음모이론'이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주류 사회과학과 공식적 담론이라는 것을 공격하는 것이 필요했었다. 그것이 이 연재를 "음모 이론이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에세이로 시작하게 된 이유였다.

그런데 이러한 필자의 걱정은 기우(杞憂)가 되었고, 오히려 그 이후 지금까지의 상황은 반대의 편향을 걱정해야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 하다. 역사의 전환기에서 항상 현실의 변화의 속도는 예측을 뛰어넘는다. 원래 "이라크 침략은 석유와 각종 잇권을 노린 군수 석유 자본과 부시 집단의 준동일뿐이다"는 담론은 아직도 반전과 평화를 외치는 저항 담론의 울타리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이라크 전에 대한 미국 측의 '공식적 담론'도 지구촌의 시민들에게 설득력을 거의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를 제일 먼저 감지한 것은 미디어였으며 특히 부시가 이끄는 일방적 미국주도의 세계 질서에 불만을 품은 유럽 쪽 주류 언론들이 우선 이러한 폭로와 담론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미국 외교 정책 연구자들에게는 1970년대부터 잘 알려져 있었던 어빙 크리스톨(Irving Cristol) 등의 '신보수주의자들(Neo-Conservatives)'이 이들에 의해 '네오콘'이라는 이름으로 재발견되어 질타를 받기 시작하였고, 부시 집단 구성원들이 미국의 유태인계 인맥, 기독교 근본주의 집단, 석유 자본, 군수 자본 등등과 인적으로 이념적으로 정책적으로 어떻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폭로가 주류 미디어와 출판계에 범람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제 더 이상 '부시와 네오콘의 책략'이라는 주제는 새로울 것도 위험할 것도 없는 꼭지가 되고 말았다. 동경, 파리, 뉴욕의 서점가에는 부시 집단의 과거와 행적에 얽힌 온갖 폭로가 차고 넘치고 있으며, 칸느와 미라맥스와 미국 민주당의 존 케리 선거 운동 본부는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타리 <화씨 9.11>을 지구촌의 '올해의 영화'로 만들고 있다. 몇 번에 걸친 영국과 미국 정부의 자체 조사 위원회의 보고를 통해 전쟁의 합리적 정당성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으며, 그 와중에서 각국 정보 기관, 범죄 조직, 브로커 등등이 엮여 이루어지는, 로버트 콕스(Robert Cox)가 "지하 세계(Covert World)"라고 부른 것들이 슬쩍 모습을 비치고 있다①. 게임 이론, 포스트 모더니즘 등 온갖 현란한 수식으로 다가오는 '지구적 통치(global governance)'의 시대를 노래하던 사회과학 학계는 완전히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②.

이제 '부시와 네오콘의 책동'이라는 줄거리는 우리나라에서도 '유시민의 면바지'만큼이나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것이 되고 말았다. 김선일씨 사건이 벌어지자 "부시 집단의 음모가 아니냐"는 의혹이 인터넷을 메우고, 일부 시민 운동가들은 "살인자는 부시 집단이다"고 외쳐댄다. 정부 여당의 중진 정치가들의 입에서도 "네오콘의 준동" 어쩌고 하는 말이 마구 튀어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라크 파병을 하지 않으면 부시 집단의 괘씸죄에 걸려 북한 폭격과 한반도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라는 말도 이젠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정해진 방식으로 수식과 수치를 다루는 것을 주업으로 하는 대외경제연구원(KIEP)의 경제학자들조차 이렇게 말한다. "국제 신용 평가 기관들은 백악관의 직접적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으므로, 장기적인 한미 동맹의 약화는 한국 신용 등급의 악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1851년의 저 험악했던 미국 철도 채권의 북새통부터 3세기에 걸쳐서 까다롭기 그지없는 "객관적" 신용 평가 절차를 발전시켜온 무디스(Moody's) 등이 들으면 실로 분기탱천할만한 '음모 이론'이다. 점입가경으로, 이것을 청와대의 위정자들은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자료로서 웹 싸이트에 당당히 걸어 국민 상식을 만들고 있다③.

이러한 '음모 이론'식 사고의 범람은 한편으로는 '공식적 담론'의 지적 도덕적 헤게모니가 완전히 파산하고 근본부터 도전받고 있는 현재 지구 정치 경제 체제의 위기 상황을 반영한다 하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공식적 담론'을 대체하여 포괄적 체계적인 세계상을 제시할만한 이론이 아직 나오지 못한 혼란상을 동시에 반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이 '자유의 여신상' 너머에 있는 무기상, 석유 자본의 정치 세력들을 주목하게 된 것은 소중한 지적 고양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서두에 함께 보았던, 현재 세계가 처한 역사적 국면의 의미를 상기해보라. 과연 "악의 무리 부시 집단을 몰아내자"라는 식의 인식으로 충분한 것인가?

***존 케리가 구세주?**

마이클 무어 감독은 부시 대통령 낙선을 위해 공공연히 존 케리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 배우, 지식인 할 것 없이 미국 내의 최소한의 양심 세력들은 일제히 존 케리의 뒤를 따르고 있다. 이러한 "존 케리 당선을 통한 부시 낙선 운동"은 미국을 넘어 유럽, 일본 그리고 우리 나라의 시민 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확산되고 있다. 이 운동을 하는 이들의 선한 동기와 진심을 모르지 않으며, 부시가 재선되는 것이 끔찍한 사태임도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있다.

2000년 이후 우리가 한반도에서 이라크에서 또 지구 도처에서 겪고 있는 이 혼란이 과연 부시라고 하는 일개 "미치광이 집단"이 백악관을 장악했다는 이유에서 비롯되었는가? 그렇기 때문에 백악관의 주인을 교체한다면 해결될 것인가?

"호전적인 공화당, 평화적인 민주당"이라는 사실 여부가 의심쩍은 신화는 상당히 유래가 깊다. 특히 1990년대의 "좋았던 옛날"에 향수를 느끼는 이들이 더욱 이러한 신화에 잘 끌리는 것 같다. 그래서 지난 4년간의 미국 정부의 "일탈"은 존 케리의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서 그 이전 90년대 클린턴 정권과의 연속선을 다시 이음에 따라 제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사고 방식은 대중적 담론의 '음모 이론'으로의 편향에서 생겨난 부작용이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대외 정책 결정 과정도 유래가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하며, 현재의 세계 정치 경제를 이루는 각각의 틀들 그리고 그것들이 상호 연결되는 방식은 더욱 더 복잡하다. 그런데 이러한 복잡한 메카니즘과 구조에 대한 고려와 통찰이 없이 그저 하나의 집단을 다른 집단으로 바꾸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는 사고 방식이 나오는 것은 실로 위험한 일이라고 보인다. "자연에는 비약이 없다"는 것이 자연 과학의 모토라면, "역사에는 우연이 없다"는 것이 사회 과학의 모토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회 현상이 나오게 된 인과 관계를 총체적인 사회적 관계 전체의 맥락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 기본적 임무이다.

애초에 부시 행정부와 같은 집단이 어떻게 해서 집권을 하게 되었고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일방적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는지를 따져보지 않은 채 민주당의 집권에만 그야말로 '올인'을 하는 것은 과연 안전한 처사인가. 존 케리 측의 이스라엘 중동 정책은 부시 쪽과 대동소이하지 않은가. '핵 통제'를 앞세우고 북한에 더욱 큰 압력을 넣을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지 않은가. 민주당은 부시 정권에서 기득권을 챙기던 집단들과 맞서려는 계획과 의도가 있는가.

이것이 1년 가까이 중단되었던 "세계적 자본 축적과 지구 정치경제의 향방"의 연재를 다시 속개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이다. 지난 1년간 이념의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지겹게 이야기했듯이, 한반도의 삶에 있어서 미국과 지구 정치 경제의 영향력과 중요성은 실로 절대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미국 지배 세력의 성격과 그 작동의 논리를 구체적으로 해명하고 널리 이해하는 일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해야할 지적 작업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지구 정치 경제가 서두에서 논한 바 있는 중대한 역사적 전환을 겪고 있는 국면이다. 그 전환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과 집단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전환이 벌어지고 있는 구조와 전체의 작동 논리를 살펴보는 것도 똑같이 중요한 일이다.

닛잔과 비클러는 저널리스트도 폭로 전문가도 아닌 대학의 사회 과학자들이다. 따라서 기왕에 소개해 온 그들의 이론과 접근은 사실 어설픈 '음모 이론'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목적에 복무하도록 마련된 것들이다. 따라서 그것을 소개하는 이 연재가 지금 사뭇 다른 각도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이 연재를 끝까지 완결하도록 결심하였다.

이러한 연재 속개의 의도에 따라, 계획했던 순서도 약간의 변화를 가지게 되었다. 첫째, 곧 시작될 4부에 계획했었던 '부시 집단의 성격'의 부분은 위와 같은 상황에서 그 의미가 반감되었다고 보여 크게 축소되거나 삭제될 것이다. 둘째, 대신 결론인 5부 부분에서 존 케리와 민주당 대표의 대외 정책의 성격에 대해 살펴보는 부분이 첨가될 것이다. 셋째, 서두에서 논한 현재의 역사적 국면은 "지구적 규모에서의 군사화와 상품화의 병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경향이 비단 태평양이나 고비 사막 너머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사회의 변동을 규정하는 데에도 대단히 중요한 점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최근 일본에서 헌법 개정과 맞물려 진행되고 있는 군사 대국화와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이야기가 추가될 것이다.

독자들과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오랜 기간 연재가 중단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 재개될 연재에 관심 가져주시기를 부탁드리며, 현재 우리 세상이 처해있는 국면이 단지 몇 몇 개인이나 집단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근본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잊지 말아주시기를 또한 간곡히 부탁드린다.

이 연재에서 다루는 닛잔과 비클러의 연구에 대해 이론적으로 체계적인 이해를 원하는 분들을 위해 <권력 자본론: 정치와 경제의 이분법을 넘어서>(조나단 닛잔ㆍ심숀 비클러, 홍기빈 옮김, 삼인 펴냄)이 출판되어 있음을 참고로 알려드린다.

***<주(註)>**

① "Covert World" in Robert W. Cox, The Political Economy of a Plural World: Critical Reflections on Power, Morals and Civilization, (London: Routledge, 2002) 118-138pp.

② 2003년 2월 말 미국 포틀랜드에서 열렸던 가장 큰 국제 정치학 학회인 International Studies Association(ISA)의 연례 학회에서 5백 개가 넘는 발표와 논문 가운데에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다룬 것을 이 글에서 소개되는 닛잔과 비클러의 발표를 제외하면 단 한 건도 찾을 수 없었다. 이라크 침략이야말로 국제법, 국제 정치 경제, 군사 안보 등 국제 정치학의 낯익은 각각의 연구 영역은 물론 중장기적인 세계 정치 역학의 변화 전망과도 관련되는 중대한 사건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주류 학계의 침묵은 사실상 경악할만한 것이다.

③ <프레시안>, 2004년 7월8일자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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