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대 인근에서 9년째 미용실을 운영 중인 홍명기 씨. 지난 18일 오후 2시께였다. 중년 남성과 함께 온 젊은 남성이 새치 염색을 해달라며 자리에 앉았다. 이 남성은 예약 손님이었다. 이 손님 머리를 살펴 본 홍 씨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새치 염색을 해달라는 머리에 흰 머리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혹시 강제집행을 하기 위해 손님으로 가장하고 들어온 '용역'이 아닌가 싶었다. 이미 두 차례나 강제집행을 당할 뻔 홍 씨였다. 이후 홍 씨는 몇 달 째 가게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가게 문을 잠그고 예약 손님만을 받고 있다.
염색 할 필요가 없다고 하자 손님은 커트라도 해달라고 요구했다.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손님의 머리를 자르던 홍 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봉변을 당했다. 누군가 내부에서 잠긴 문을 열은 뒤, 사복 차림의 덩치 좋은 젊은 남성 대여섯 명이 가게로 들이닥쳤다.
홍 씨는 이들에게 순식간에 제압당한 뒤, 한쪽 벽으로 떠밀려졌다. 그렇게 홍 씨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사이에 미용실 안으로는 '집행'이라 적힌 형광색 조끼를 입은 남성들이 들어왔다. 그리고는 덩치 좋은 이들에게 제압당한 채 있던 홍 씨는 가게 밖으로 짐짝처럼 던져졌다.
이후 일사천리였다. '집행 조끼를 입은 이들은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과 직원들도 밖으로 내보냈다. 대략 서른 명 정도의 집행관들이 미용실을 가득 메웠다.
홍 씨는 그렇게 자기 가게에서 쫓겨났다. 10분 남짓한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리모델링한다며 나가라는 건물주
20년 경력의 미용사인 홍 씨가 건대 사거리에 자신의 가게를 낼 당시, 보증금과 월세 외에도 2억 원의 '권리금'을 줘야 했다. 이전에 영업하던 사람이 설치한 설비와 상권 등 무형의 가치를 평가한 금액이었다. 상인들 사이에서는 '상식'으로 통용되었지만 법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던 권리금은 2015년부터 상가임대차보호법에 의해 인정됐다.
홍 씨의 상황이 달라진 것은 대략 4년 전, 건물 주인이 바뀌면서다. 바뀐 건물주는 건물을 리모델링하겠다고 했다. 건물주가 리모델링을 할 경우, 세입자는 계약 연장을 못하고 나와야 한다. 지금이야 10년을 보호하지만, 당시 상가임대차보호법은 임차인의 계약갱신청구권을 입점한 날로부터 5년까지만 인정하고 있었다. 홍 씨의 가게도 입점한 지 5년이 안 될 시기였다. 건물주는 홍 씨에게 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홍 씨는 건물주에게 권리금을 받아야만 다른 곳에 가게를 낼 수 있다며 권리금 보장을 요구했다. 건물주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홍 씨의 요구를 거부했다. 홍 씨와 같은 건물에 입점한 다른 상인의 상황도 비슷했다. 결국,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뇌출혈로 쓰러진 세입자도 발생했다. 이전에도 같은 방식으로 쫓겨난 경험이 있는 세입자였다.
임차 상인들과 계약을 해지하고 건물을 리모델링한 뒤 월세를 올려 새로운 임차 계약을 맺는 것은 건물주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리모델링 후 입점하는 새 임차인들의 경우, 건물주와 맺는 새 계약이라 상인들 간 주고받는 권리금은 사라진다. 그렇게 사라진 권리금으로 건물주는 세입자를 끌어들인다. 대신 보증금과 월세를 기존의 몇 배 수준으로 올린다. 권리금의 기회비용인 셈이다. 게다가 해당 지역은 재개발 소문이 돌고 있었다. 건물주는 건물 시세차익까지 얻을 수 있는 상황이다.
결국, 권리금을 받아야 하는 홍 씨는 다른 세입자에게 자기 가게를 양도하려고 했다. 새 세입자가 홍 씨로부터 가게를 양수하며 건물주와 새로운 임대차 계약을 체결해야 홍 씨는 투자한 권리금을 회수할 수 있다. 그러나 건물주는 새 세입자가 들어오는 것을 거절했다. 홍 씨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상가임대차보호법상 건물주는 홍 씨가 새로운 세입자를 구해 권리금을 회수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게 돼 있다(상가임대차보호법 제10조의 3 내지 제10조의 8). 계약 거절도 권리금 회수 방해 행위의 하나였다. 그때부터 홍 씨와 건물주와의 길고 긴 법정 싸움이 시작됐다.
지난 7월, 1심은 건물주 손을 들어줬다. '리모델링을 이유로 한 계약 거절은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이례적인 판결이었다. 지난 5월 16일 대법원도 "임대차 기간과 상관없이 권리금은 건물주의 책임"이라고 판결한 바 있다. 계약갱신청구권이 소멸해도 건물주가 임차 상인을 내쫓으려면 권리금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다.
건물주에 따라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세입자
홍 씨가 입점한 건물은 복도를 기준으로 양쪽의 건물주가 다르다. 홍 씨 건물의 소유자는 두 명이다. 홍 씨 가게가 자리한 쪽에는 건물주가 리모델링을 이유로 모두 계약해지를 통보하면서 새 세입자와의 계약도 거절했다. 반면, 또다른 건물주가 관리하는 복도 반대편 자리는 새 세입자가 입점을 마친 상태다. 홍 씨는 "말 그대로 '건물주 마음'"이라며 "누군가의 생계가 한 사람의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홍 씨는 항소를 제기하며 건물에서 버텼다. 그러자 지난 9월, 건물주는 협의하자고 제안했다. 우여곡절 끝에 건물주가 홍 씨의 권리금 2억 원을 보상해주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합의안을 서면으로 작성하기로 한 날, 건물주는 돌연 연락을 끊었다. 홍 씨 측은 이미 건물주의 요구대로 명도를 넘길 준비를 다 한 상태였다.
그렇게 연락을 끊은 건물주는 11월, 다시 강제집행을 시도했다. 홍 씨가 가게 문을 잠그고 강제집행에 맞서기 시작한 이유다. 홍 씨는 "건물주는 건물을 매입하기 전까지 인근 다른 건물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사람"이라며 "자신도 임차인이었고 권리금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면서 다른 임차인들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답답해했다.
쌔미(활동명) 맘상모 활동가는 "재판이 아직 진행 중이고 구두 합의까지 마친 상황에 건물주가 마음이 바뀌어 임차인을 내쫓은 경우는 처음"이라며 "상임법(상가임대차보호법)이 계속 개정되면서 임차인을 보호해주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여전히 사각지대가 존재하고 이를 교묘히 악용하는 건물주도 있다"고 설명했다.
홍 씨는 "하루아침에 생계 수단을 빼앗겼다"며 "막막한 상황"이라고 울먹였다. 현재 홍 씨는 지인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재판은 2심이 진행 중이다.
관련해서 건물주는 "법원판결에서 주지 않아도 되는 권리금을 (세입자에게) 주겠다고 했다"며 "만약 법원에서 (홍 씨 가게 관련) 감정한 권리금이 1억9000만 원이라면 그것도 주겠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건물주는 "다만 권리금 1억9000만 원을 달라고 한다면 그동안 세입자가 내지 않은 임대료를 감정임대료로 내라고 했다"고 밝혔다.
건물주는 "그랬는데, 세입자 측에서 갑자기 권리금을 2억2000만 원 달라고 했다"며 합의가 틀어진 것은 세입자 측에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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