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은 항상 '영감'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졌지만, 세상은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은 노회찬재단과 함께 노회찬이 만난 사람, 노회찬의 생각, 노회찬의 꿈에 대해 되짚어보는 '노회찬 OOO를 만나다' 연재를 진행해 왔습니다. 이 글이 마지막 연재글입니다. 편집자.
"체포 26회, 10년간의 수배 생활, 구류 7회, 5년6개월에 걸친 두 차례 투옥과 숱한 가택연금…. 그의 굴곡진 삶은 이름 앞에 항상 민주화운동의 '대부' 또는 '큰형'이란 수식어를 붙게 했다. 그는 좌우 이념을 뛰어넘어 존경받는 정치인이었다."(중앙일보, 2011년 12월 31일)
'그'의 이름은 김근태(金槿泰 1947.2.14.~2011.12.30.)다.
2011년 12월 30일 오전 5시 31분 '민주화의 대부'로 불리는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운명했다. 그의 죽음은 결국 고문후유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의료계의 대체적인 견해다(한겨레 2011년 12월 31일).
"2012년을 점령하라." 고문의 후유증으로 수년째 투병생활을 해온, 많은 사람들에게 특정의 직함보다는 '선배'라고 불렸던 김근태가 남긴 유지다.
이게 웬일입니까? 아침 5시에 김근태 선배님 생각하며 이렇게 가면 안 된다고, 제발 일어나시라고 트윗글을 올렸는데 5시 31분에 눈을 감으셨다는 소식이군요. 황망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군요. 잘 가시란 말이 아직은 나오지 않습니다.
박근혜 위원장은 조의만 표할 것이 아니라 한나라당을 대표해 공식 사죄해야 마땅합니다. 김근태의장을 죽음으로 내몬 고문후유증의 책임은 일개 고문기술자가 아니라 민정당정권에게 있고 민정당의 법통을 계승한 것이 한나라당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추모의 글들이 올라오고, 조문 행렬이 이어진다.
"아름다운 별이 졌다. 김근태라는 깃발은 내려졌지만 수백 수천만의 가슴 속에 해방의 불길로 타오를 것이다. 김근태 그의 이름을 민주주의 역사의 심장에 새긴다." - 이인영(민주통합당 전 최고위원)
"모두가 침묵하던 시대, 홀로 고된 십자가를 진 우리 시대의 영웅이었다. 이 시대가, 우리 모두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앞으로 그 빚을 갚겠다." - 한명숙(전 국무총리)
"김근태. 폭력과 불의에 저항하는 인간정신이 절멸하지 않는 한 행동하는 햄릿, 그 이름은 살아 있으리라. 오오, 진정 아름다운 별이 지고 말았다." - 유시춘(작가,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민주주의자 김근태! 우리의 맨 앞에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던 큰 형, 김근태 동지를 떠나보냅니다. 정말 당신을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 원혜영(민주통합당 공동대표)
"김 의장이 뿌려놓은 씨앗이 싹트고 자라 수백만 '김근태'들이 촛불이 되고 '나꼼수'가 되어 <2012년의 큰 일>을 치러내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김 의장, 들리십니까, 촛불로 빛나는 저 함성이!! 보이십니까, 수백만 '김근태'들이 행진하는 저 장엄한 역사의 물결이!!" - 이부영(민주.평화.복지포럼 상임대표)
"민주화 역사에 가장 굵은 글씨로 새겨질 이름, 김근태" - 김종철(한겨레 선임기자)
12월 30일 조문을 마친 노회찬은 "민주진영과 진보진영을 잇는 유일한 가교 역할을 한 분이셨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한다.
1월 3일 발인식은 지인 100여 명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명동성당 본당에서 1000여 명의 추모객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영결미사는 고인이 생전에 애창하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함께 부르는 것으로 마친다. 영결식 후 김근태는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된다.
김근태는 누구?
1947년 2월 14일에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난 김근태는 1965년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한다. 1960년대 무렵에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손학규, 조영래와 함께 '서울대 65학번 운동권 3총사'로 불리기도 한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까지 각종 재야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수배와 투옥을 반복한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1년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으로 수배를 받고, 1974년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를 받았다. '공소외(外) 김근태'라는 별명은 이때 붙었는데, 체포하지 못한 그를 판검사가 법정에서 그렇게 호칭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던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의장과 2대 의장을 지냈다. 1985년 9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23일간 경기도경찰청의 공안분실 실장이자 '고문기술자' '성명불상자' '반달곰' '저승사자' '인간백정' '지옥에서 온 장의사' '공안목사' 등의 악명을 지닌 이근안에게 고문을 받는다.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정책기획실장과 집행위원장으로 활동 중 1990년에 2차 구속기소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를 거쳐 홍성교도소에서 복역한다.
출옥 후 1995년 민주당에 입당하여 민주당 부총재와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를 지낸다. 1995년 사면복권된 김근태는 1996년부터 2008년까지 15, 16, 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보건복지부 장관(2004년 7월~2005년 12월), 열린우리당 최고위원(2006년 2월~5월)과 의장(2006년 6월~2007년 2월) 등을 지낸다. 2008년 제18대 선거에서 낙선하고, 2011년 12월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역임하던 중 12월 30일 65세의 나이로 운명한다. 2012년 6월 '제2회 진실의 힘 인권상'을 수상한다. 2016년 5주기를 맞아 그를 기리는 '민주주의자 김근태 상'이 제정된다. 제정취지문은 "삶 전부가 온전히 민주주의인 한 사람"이라고 지칭하면서, "김근태의 이름을 빌려 민주주의의 한 영역이 열리길 소원한다. 이 상은 그 묵묵함에 드리는 함성이고 향기"라고 적는다.
어린 시절 ~ 대학 시절 김근태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검색해보면, 서울시 '시비 장학금 급여 합격자 명단'(동아일보, 1959년 6월 5일) 53명 가운데 광신중학교 김근태라는 이름이 보인다. 이들 시비 장학생은 앞으로 1년 동안 서울시 교육위원회로부터 매월 5천환(매인당)을 받게 되는데 장학생 중 13명은 중학교 1년생 나머지 40명은 고등학교 1년생이다. 중학교 3학년 때 1961년 김근태는 5.16쿠데타를 목격한다. 강제로 교직을 그만두게 된 그의 아버지는 충격을 받고 곧 심장판막증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어머님은 동대문 시장에서 스타킹과 양말을 받아다 팔아 김근태를 키운다. 김근태는 1962년 경기고등학교 입학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1965년 김근태는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한다.
1971년 11월 13일 중앙정보부는 학생데모를 주동한 혐의로 수배를 받아온 이신범군(24.전 서울법대 4년.자유의종 발행인) 심재권군(25.전 서울상대 3년.민주수호학생투위 위원장) 장기표군(전 서울법대 3년) 등과 조영래씨(사법연수원) 등 4명을 반국가단체 구성 내란예비음모혐의로 구속하고 김근태 군(서울 상대) 등을 같은 혐의(이른바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로 수배한다. 경향신문 1971년 11월 13일자 기사는 이렇게 보도한다.
"수사기관에 의하면 이들은 지난번 대통령선거를 전후해서 학생데모를 주도해오며 현 정부전복을 위해 사제폭탄을 만드는 등 데모수단을 극렬화시켜 11월 3일을 D데이로 잡고 전국 19개 대학교 5만여명의 학생을 동원, 중앙청 등 정부기관을 점령하려는 음모를 했다는 혐의다.…이들은 이를 위해 학생 데모 등으로 경찰과 자주 충돌케 하는 등 학생들의 반정부 의식을 고취하기도 했다는 것이고 국정을 장악한 뒤 이들은 부정부패 처벌법 등 혁명입법까지 미리 구상해놨다는 것이다."
서울대 제적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국가 전복을 위해 내란 음모를 모의했다는 것이 핵심 요지인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이 학생운동의 지도자들을 사전에 탄압하여 민주화운동세력을 약화시키고, 더 나아가 1972년 10월유신을 위한 비상사태를 선포하기 위해 용공 혐의를 조작한 사건이었다고 평가"(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된다.
민청련 의장 김근태와 '두꺼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실무간사 일을 맡아 노동운동을 하던 김근태는 새로 들어선 전두환 군부독재에 맞서 선명한 정치투쟁의 기치를 내걸고 1983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 초대와 2대 의장을 지낸다.
민청련은 조직의 상징물로 '두꺼비'를 내세운다. 이 두꺼비의 비유는 민청련 사회부장 연성수가 전래 민담에 나오는 두꺼비 설화에서 따온 것이다.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어요. 하나는 어렸을 때, 손에 흙을 덮고 두드리며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하며 놀던 생각이 났어요. 우리가 지금 처한 현실이 헌집이고, 우리가 원하는 새 세상은 새집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또 하나는 두꺼비는 대개 알을 품으면 독사한테 가요. 일부러 독사 앞에 가서 약을 올려서 자기를 잡아먹게 만들어요. 잡아먹히면 자신은 죽지만 독사를 영양분으로 해서 새끼가 부화하거든요. 그게 우리 공개운동의 취지와 딱 맞는다고 생각한 거지요. 우리가 앞에 나서서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면 탄압을 받겠죠.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전두환 정권의 본질이 폭로되고 그로 말미암아서 전두환 정권이 끝장이 날 거다, 그런 걸 상징한 거였죠." (민청련 동지회, 「전두환은 '독사', 우리는 '두꺼비'」, <오마이뉴스>, 2017년 9월 18일)
이 두꺼비 이야기는 연성수의 부인 이기연이 판화로 새겨 민청련의 공식 로고가 된다. 그리고 이듬해 초부터 발간되는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도 이 두꺼비 판화가 표지를 장식한다.
이 자리에서 김근태는 "70년대의 민주화운동이 내건 평등 분배 문제는 정치 이슈로 제기된 것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구원 문제라는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밝히면서, 민주화운동권 내의 권위주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 "이는 현단계에서 민중을 열등감에 빠뜨리는 지배자의 논리"라고 반박한다. 또 "갈등집단들 간의 대화와 타협의 가능성을 매개해주는 것이 올바른 지성인의 역할"이라는 몇몇 교수들의 제안에 대해선 "지성인이 민중을 위해서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각오가 없이는 언젠가는 민중을 배신하고 만다"고 꼬집기도 한다(「스케치 4.19세대끼리 모여 민주화 논쟁」, 동아일보, 1985년 4월 22일).
용접노동자 노회찬의 <노동자와 노동절>, 메이데이의 참뜻
"노동자들이 조직화, 세력화되어 앞장설 때만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노회찬은 1983년 2월 26일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에서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한다. 첫 직장은 기아자동차였으나, 예비군 훈련 관계로 대학생 신분인 것이 탄로나 해고된다. 제대로 처음 들어간 곳은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있던 산업용 보일러회사(대림보일러)로 30-40밀리짜리 두꺼운 철판을 써서 목욕탕 보일러나 합판공장용 보일러 등 산업용 보일러를 만드는 곳이었다.
용접을 해도 아주 열심히 독하게 했다. 용접하고 1년 만에 용접 5년 경력의 사람하고 기술이 비슷했다. 왜냐하면 실력이 없으면 현장에서 말이 안 먹혔기 때문이다. 용접 실력은 형편이 없는데 점심시간에 "요즘 세상이 말이야"라고 하면서 떠들어봐야 먹히지 않는다. 일단 실력으로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집에 오면 펜치로 붓을 물어서 연습을 하기도 했다. 1년 만에 5년 경력 용접실력으로 돈도 많이 벌었다. 당시 키친아트 같은 회사 직원이 일당 1700원 받을 때, 나는 5000원을 받았다. 직업으로서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여러 공장을 전전하면서 알게 된 노동자들, 대학 출신 위장취업자들과 모임을 갖기 시작해 정치적인 서클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던 중 산업재해로 몇 달을 쉬던 중 1985년 3월 10일 최형기라는 가명으로 최초의 저서인 <노동자와 노동절>(석탑)이라는 책을 출간한다.
최형기는 황석영의 <장길산>에 등장하는 인물인데, 마치 장발장을 쫓는 자베르 경감처럼 장길산을 체포하기 위해 끝까지 추적하는 무관(좌포도청의 포도종사관)이다. 당시 수배생활을 하던 나의 처지를 풍자하기 위해 그 이름을 썼다.
<노동자와 노동절>은 "노동절을 통해 노동운동을 조명한 한국 최초의 책"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른 나라와 우리나라의 노동절에 관한 이야기 속에는 앞서간 사람들의 소중한 경험이 담겨 있다. 또 해마다 노동절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기숙사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으로 책을 보아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야간 일 끝내고 돌아와 지친 몸으로 내일을 준비하는 노동자들에게 이 조그마한 책자가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라고 시작하는 이 책은 메이데이의 참뜻을 이렇게 말한다.
이 지구상에서 노동자의 노동이 멈춰지는 순간이 없듯이 노동운동의 맥박도 쉬지 않고 뛰어야 합니다. 365일 계속되는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하루, 이것이 바로 메이데이인 것입니다. 고난에 찬 노동운동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선배 노동자들의 위대한 희생을 추모하는 날, 노동자의 근로조건과 생활상태의 개선을 위한 대열에 앞장 설 것을 굳게 다짐하고 그 확고한 신념을 표명하는 날, 노동운동에 대한 일체의 탄압, 그 음모와 폭력의 장본인들에게 정기적으로 경고하는 날, 전 세계 노동자는 같은 처지에 있는 한 형제이며 굳게 단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날, 그리고 그 단결을 과시하는 날, 이것이 바로 메이데이의 참뜻입니다.
남영동 대공분실과 '얼굴 없는 고문기술자' 이근안
김근태를 눈엣가시로 여긴 전두환 정권은 1985년 9월 4일 구류에서 풀려나 서울 서부경찰서를 나오던 그를 곧바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위장 명칭은 '국제해양연구소')로 끌고 간다. 9월 10일 치안본부는 김근태(전 민청련 의장)를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한다. 구속영장은 서울형사지법 박만호 수석부장판사에 의해 비밀영장으로 발부된다(경향신문, 1985년 9월 10일).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간 김근태는 9월 4일부터 26일까지 23일 동안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8번의 전기고문, 2번의 물고문 등 모진 고문을 당한다.
10월 16일 서울형사지법 5단독 판사 김오수는, 김근태 변호인단이 낸 김근태의 신체에 남아 있는 고문 흔적에 대한 증거보전신청을 이유없다고 기각한다(동아일보, 1985년 10월 16일).
1985년 12월 19일, 민청련 사건으로 서울지방법원 재판정에 선 김근태가 떨리는 목소리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고문을 폭로한다.
"본인은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 가방을 갖고 다니면서 그 가방에 고문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본인에게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다. 이재문(남민전사건 관련자, 옥사)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 이러한 참혹한 이야기를 하며 본인에 대한 동물적인 능욕을 가해왔습니다.…"
1986년 3월 6일 서울형사지법 합의11부(재판장 서성 부장판사)는 김근태에게 집시법 위반죄와 국가보안법위반(이적단체 구성)죄를 적용, 징역7년에 자격정치 6년을 선고한다. 재판부는 이날 판결문에서 "피고인은 경찰의 가혹행위로 이루어진 수사에 따라 이 사건 기소는 원인불법에 의한 무효라고 주장하지만 법률의 규정과 대법원의 판례에 따르면 수사과정의 가혹행위 문제는 증거능력에 관한 문제이지 공소의 적법 여부 문제는 아니다"라고 밝힌다(동아일보, 1986년 3월 6일). 1986년 7월 4일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한 대현 부장판사)는 김근태에 대해 1심보다 형량을 낮춰 징역5년에 자격정지5년을 선고한다. 1986년 9월 23일 대법원 제2형사부(주심 이병후 대법원 판사)는 김근태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상고심에서 원심대로 징역5년에 자격정지5년을 확정한다.
1987년 1월 6일 서울지검은 김근태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고문과 불법감금을 한 혐의로 대한변협에 의해 고발된 박배근 전 치안본부장 등 관련자 13명에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혐의 결정을 내린다.
1988년 12월 21일자 한겨레는 김근태를 직접 고문한 '얼굴 없는 고문기술자'의 실체를 얼굴 사진과 함께 처음 보도한다. 1989년 2월 21일,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어머니들은 '고문경관 이근안 국민수사선언'과 함께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전국에 현상수배한다. 이근안에 대한 현상수배와 국민수사가 전개되자 고문피해자인 남민전, 반제동맹사건 등 관련자와 가족들이 50여만 원을,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이 100만원, 일반 시민들이 현상금을 기탁한다. 민가협은 이근안을 검거하기 위해 전단 10만장, 스티커 2만장을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고, 신문과 TV보도 등을 통해 널리 홍보한다(「어머니들의 수배전단-고문경찰 이근안을 잡아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이근안은 11년간 도피생활 끝에 1999년 10월 검찰에 자수해 7년형을 선고받고 여주교도소에서 복역한 뒤 2006년 11월 출소한다.
2011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근안은 "임금이 바뀌면 충신이 역적 되고 역적이 충신 되는 수난의 역사 속에 두 시대를 사는 죄가 이렇게 무거운 것이냐"라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훈장을 타서 매달 10만원씩 받을 수 있는 돈도 안 받았다"면서 "내가 그 돈을 받기 위해서 애국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돈 받으려고 그랬나. 마찬가지다"라고 자신을 안중근 의사에 비유하기도 했다.…이 전 경감은 2005년 여주교도소에 면회를 온 김 상임고문에게 용서를 구했다. 김 상임고문은 당시 사죄하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씨를 보고 진정성이 의심돼 차마 "용서한다"고 말하지는 못한 채 "당신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이 자리에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조선일보, 2011년 12월 31일).
2012년 출간된 김근태의 <남영동>(중원문화)은 1985년 여름 서울시 용산구 남영동에 자리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20여 일에 걸쳐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10여 번의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을 고문을 당하여 몸과 마음이 완전히 파괴된 상태에 이른 저자의 고문기록이다. 고문이 남긴 육체적·정신적 아픔을 추스르고 다시 깨어 일어난 한 인간의 회생의 과정도 밝히고 있다.
2012년 11월 22일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영동 1985 National Security>가 개봉된다. 이 영화는 김근태가 민주화 운동 시절 민청련 사건으로 1985년 9월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22일 동안 받은 고문에 관해 다룬 영화이다.
※ 노회찬이 인용한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민주주의에 관한 유명한 금언이다.
독립전쟁이 일어난 지 5년이 지난 1781년, 극심한 차별에 펜실베이니아 부대 병사들이 들고일어난 '셰이즈의 반란'(Shays's Rebellion)이 터진다. 이 소식을 듣고 프랑스 대사로 파리에 머물고 있던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이 "가끔 조그마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고 정치세계에 있어서는 이것이 필요하기도 하다. 마치 자연계에 가끔씩 폭풍이 부는 것이 필요하듯이.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라고 썼던 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제퍼슨이 수긍한 '피'는 그가 예상했었음직한 수준을 넘어 너무 많이, 너무 자주 흘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럼에도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은 맥락을 제거한 채 독립적인 명언이 되어 훗날 피를 흘리며 독재와 싸워야 했던 많은 나라들에서 자주 인용된 말이다.
시인 김수영은 4·19혁명 뒤 노래한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푸른 하늘>)
형식만 민주주의인 경우는 피를 먹고 자랄지 모른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그렇지 않다. 절차를 먹고 자란다.
다음날인 11월 13일 노회찬마들연구소(이사장 노회찬)는 "정지영 감독과 출연배우들이 함께하는 '남영동1985' 국회 시사회 안내" 포스터와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다.
정지영감독과 출연배우들이 함께하는 '남영동1985' 국회 시사회 안내
개봉되기도 전 대한민국을 이미 움직이고 있는 문제작 '남영동1985'는 1985년 공포의 대명사로 불리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벌어진 22일 간의 잔인한 고문의 기록을 담은 실화로 고(故) 김근태 의원의 자전적 수기를 바탕으로 영화화 한 작품이다. 11월22일 개봉.
* 국회 시사회 일시: 2012.11.14.(수) 저녁6시 30분
* 장소: 국회헌정기념관 대강당
* 주최: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의원모임(노회찬의원 등 30인)
민주평화국민연대(대표 국회의원 인재근)
* 주관: 국회의원 최민희
남영동('국제해양연구소')과 홍제동('충의회중앙회')
김근태가 민청련 사건(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남영동'에 끌려갔다면, 노회찬은 1989년 12월 23일 인민노련 사건(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홍제동 대공분실로 끌려간다. 수사도중 "노동운동이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증거를 대라"고 따졌다가 몇 대 더 맞기만 했단다(「국회의원들이 겪은 황당사건 5」, <인천투데이>, 2005년 1월 19일). 한편 인민노련의 경우 이른바 '신노선'(1991.9.29.)으로 전환 이후 민중당과의 통합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한국사회주의노동당창당준비위'(한사노창준위)가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라는 이유로 1992년 1월 17일 주대환(위원장), 민영창, 이용선, 전성 등 지도부가 전격 체포되어 홍제동 대공분실로 연행된다. 1월 18일 이들의 구속을 시작으로, 4월 1일 구인회, 이상민, 최정식, 여을환, 정광필, 임영탁 등이, 4월 28일 신형록, 송은하, 이호성, 이지연, 한삼현, 이정태 등이 구속된다.
1948년 이승만 정부 시절에 만들어진 대공분실이 악명을 떨친 것은 박정희부터 전두환에 이르는 군사독재 정부 시절이었다. 이 시절에 수사관들은 국가보안법을 앞세워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을 잡아다 이곳에서 고문하고 허위 자백을 받아내고 간첩 사건을 조작했다. 경찰의 보안수사 부서가 경찰청 본관에 있지 않고 분실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비밀 수사나 고문과 관련이 깊다는 지적도 계속돼왔다. 합법적으로 조사한다면 비밀 수사도, 분실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경찰개혁위원인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이제 전국 27곳의 대공분실은 완전히 문을 닫고 지방경찰청으로 들어가야 한다. 민주화된 사회에서 더이상 분실 형태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한겨레, 2018년 5월 15일).
용산구 갈월동 98-8번지(용산구 한강대로71길 37)에 위치한 '남영동 대공분실'은 '남산'으로 불리던 구 중앙정보부, '(서)빙고호텔'로 불리던 보안사 대공분실과 더불어 고문수사로 악명 높았던 곳이다. 치안본부가 경찰청으로 승격 독립하면서 대공분실에서 보안분실로 이름을 바꾼 '남영동 대공분실'의 공식명칭은 '경찰청 보안3과'다. 홍제동에 있는 보안4과와 함께 보안경찰의 외근 부서 중 하나인 남영동 분실은 소위 '안보 위해 사범'을, 홍제동 분실은 '방첩' 분야를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청년민주주의현장탐방 '민주야 여행가자'」). 이와는 달리 "경찰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방첩을, 홍제동 대공분실에 좌경단체를 맡겼지만 사실상 업무가 중첩되는 경우가 많았다."(동아일보, 2018년 1월 16일)는 기록도 있다.
'남영동' 건물을 보면, 직원이 사용하는 정문으로 통하는 일반 계단과 수용자를 들일 때 사용하는 건물 뒤 쪽문이 따로 존재한다. 왼쪽 사진은 구 남영동 대공분실의 정문을 막고 있는 철제 벽이고, 오른쪽 사진은 김근태 등 끌려온 사람들이 눈을 가린 채 차량을 타고 들어온 건물 뒤편의 잘 보이지 않는 쪽문이다.
2018년 12월 26일 남영동 대공분실 운영을 경찰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넘기는 이관식 자리에서 민갑룡 경찰청장은 "지난날 국민에게 고통을 안기고 공분을 일으켰던 경찰의 뼈아픈 과거에 대해 15만 경찰을 대표해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 경찰의 부끄러운 역사가 새겨진 자리가 인권의 장소로 재탄생하는 것을 계기로 경찰도 제복입은 시민으로서 민주·인권·민생 경찰로 거듭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한다.
한편 '홍제동'의 이름은 2017년 3월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가 작성한 「계엄 대비계획 세부자료」에서 '경찰청 홍제동 수사분실'이 언급돼 논란을 빚는다. 2018년 7월 24일 기자회견을 통해 군인권센터가 공개한 해당 자료의 '계엄법 위반자 사법처리' 부분에는 각 기관별 계엄사범 수사처리 대상이 적혀 있었다. 반국가사범 등 주요사범은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에서 직접 처리하고, 기타 사범은 헌병과 경찰, 국가정보원 등 기존 수사기관에서 수사한다는 내용이다. 문건에는 '계엄법 위반자 사법처리' 지침이 담겨 있는데 주로 민간인을 관장하는 수사 3국(경찰)의 위치를 '경찰청 홍제동 수사분실'로 적시하고 있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통상 시위가 발생하면 해당 지역 경찰서 혹은 해당 지역 경찰서에 소요가 발생할 경우 여러 곳에 분산해 수용한다. 서울시내 경찰서가 그렇게 많음에도 왜 홍제동 대공분실을 수사 받는 기구로 설치해놨는지 매우 의심스럽다"라고 강조한다(「67쪽 기무사 계엄령 문건, 박근혜 가담 암시하는 핵심증거」, <오마이뉴스>, 2018년 7월 24일).
1987년 6월항쟁, 87년 대선(12.16), 88년 총선(4.26)을 감옥에서 맞은 김근태는 1988년 6월 30일이 돼서야 석방된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을 주도하고 정책기획실장, 집행위원장을 지내다가 5월 또 다시 구속, 1992년 8월까지 옥살이를 한다. 이 때 김근태와 노회찬은 서울구치소에서 함께 수감생활을 한다. 1989년 12월 24일 인민노련 사건으로 체포된 노회찬은 서울구치소, 안양교도소를 거쳐 청주교도소에서 1992년 4월 1일 만기 출소한다.
※ 이진경이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박태호(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사회학)는 1990년 2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된다. 그는 이런 기억을 갖고 있다(정혜윤, 「이진경-"저는 내면이 없는 인간이에요."」, <채널예스>, 2008년 1월 10일).
"감옥에선 바빠서 처음 일 년 반은 책을 못 읽었어요. 서울구치소에 정치범이 300명 있었어요. 윗방에 김근태, 아랫방에 노회찬 등 밖에선 결코 못 만날 사람들을 만나서 토론하고 놀았죠. 너무 바빠서 아침에 배달되는 한겨레신문을 저녁에야 겨우 봤어요. 91년 청주교도소에 노회찬 의원이랑 같이 있는 동안 소련이 망했죠. 우린 사회주의자로 잡혀갔는데 사회주의가 붕괴됐다니까 우리 앞날은 어떻게 될까 답답해서 계속 신문을 뒤져봤어요. 그러다가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하잔 생각을 했어요. 맑스주의 안에선 사회주의 붕괴를 이해할 방법이 없으니까 맑스주의 바깥을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비판적 지지'의 김근태와 '독자 창당'의 노회찬
1987년 민주화와 1989년-1990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운동권들은 '거리 혁명'에서 '선거 혁명'으로 노선 전환을 했고, 그중 다수파는 김대중, 김영삼과의 연합을, 소수파는 '독자 창당 노선'을 택했다. 전자의 대표적인 인사가 김근태였디면, 노회찬은 후자의 대표적 인사였다. 진보정당 창당과 관련해 대표적인 시기상조론자인 김근태는 독자정당 노선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재야 운동 침체의 첫 번째 원인은) 87년 6월 항쟁 이후 지배 세력의 전술적 후퇴로 조성된 유리한 조건 속에서 재야 세력이 제반 민주 세력과의 단결에 기초하여 국민적 지지와 동의를 넓혀 나가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세력화를 둘러싼 분열로 인해 국민 대중으로부터 정치적‧도덕적 권위와 신뢰를 상실한 데 있다. 제도 야당을 지배 세력과 동일시했던 보수 대 진보의 정세관에 입각한 독자 정당 노선은 재야 운동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분열을 초래했고 국민 대중으로부터 전체 재야 운동이 고립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김근태, <희망의 근거>, 당대, 1995, 201쪽).
대표적인 독자 창당론자인 노회찬의 정세판단과 생각은 김근태와 달랐다. 노회찬은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김근태 선배나 장기표 선배에게 진보정당을 실현하는 데 힘을 함께 해줄 것을 강하게 요구해왔다. 김근태 선배는 "지금은 민주정부를 세우는 게 중요하다, 민주정부가 세워지면 바로 진보정당으로 가겠다. 그러니 일단은 김대중 정부를 세우는 데 힘을 합치자"고 역으로 제안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김근태 선배는 진보정당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진보정당이 재야운동을 계승한 측면이 있지만 이렇게 재야운동의 힘이 한 곳으로 다 모이지 못해 진보정당운동이 매우 어렵게 시작하고, 연명해온 측면도 있다. (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113-114쪽).
노회찬은 '혁명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그는 기존 야당에 젊은 피로 영입되는 손쉬운 방식 대신 진보정당을 창당하는 정공법을 택한다. 지금이야 진보정당이 낯설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왜 소수파가 독자 정당을 만들어 보수 정당만 도와주느냐"는 비판이 드셌다. "CIA 간첩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노회찬 같은 '독자파'들은 운동권에서는 '분열주의자'로, 보수 정파에서는 '용공 좌파'로 비판받았다.
현실정치의 길에 들다
현실정치로 눈을 돌린 김근태는 1995년 민주당 부총재로 입당한 뒤 정계에 입문한다. 이후 김대중이 정계복귀와 함께 꾸린 새정치국민회의의 부총재직을 맡는다. 1996년 15대 총선에 서울 도봉갑에서 당선, 17대까지 3선 국회의원을 지낸다.
1995년 12월 22일 노회찬, 김근태 등 여야 정치인 25명은 컴퓨터 통신을 통해 정견을 알리고 국민들의 의견을 수렵하는 무대를 공동으로 마련해 운영한다. 천리안에 '전자민주주의 광장-POL NET'란 이름으로 마련된 이 무대는 젊은 층 중심의 참여민주주의 요구를 반영해 '열린 정치'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참여자는 김근태(국민회의)와 노회찬(민주) 외에, 김형오 이명박 최형우 의원과 김영춘 이원복 김찬진씨(이상 신한국), 임채정 김원길 의원과 김영환 천정배 한기찬씨(이상 국민회의), 박계동 김원웅 홍기훈 의원과 홍성우 이부영 노회찬 서상섭 장기표 성유보 정태근씨(이상 민주), 조일현 의원과 심양섭 장일씨(이상 자민련) 등이다(한겨레, 1995년 12월 22일).
1996년 4월 25일 저녁 한국프레스센터 국회회의장. <매일노동뉴스> 지령 1000호 및 한국노동정책정보센터(대표 노회찬) 창립 3주년 기념식이 개최된다. 김근태는 국민회의 부총재 자격으로 참석해서 축하한다.
선호도 높은 정치인, 김근태와 노회찬
각종 여론조사 '차세대 지도자' 1위 김근태
김근태는 1998년 8월, <신동아>가 실시한 정치부 기자 100명이 뽑은 '차세대 정치인' 1위에 선정되고, <뉴스피플>의 1999년 1월에 '가장 기대되고 호감가는 정치인' 1위에 뽑혔으며, 4월에는 <일요신문>의 정치부 기자 100명이 뽑은 '차세대 리더' 1위에 오른다.
2000년 6월 25일부터 4일간 사이버 정치증권 시장인 포스탁(www.posdaq.co.kr)이 시민 1,031명을 대상(복수응답 7,217표)를 상대로 실시한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20~30대 네티즌들은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후보 가운데 김근태를 가장 선호한 것으로 나타난다.
2004년 9월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소장 김현태)가 발표한 '오피니언 리더가 보는 한국정치' 여론조사 결과 김근태는 23.7%의 지지를 얻어 1위를 차지한다. 2위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13.3%), 3위는 손학규 경기도지사(12.6%), 그 뒤를 고건 전 국무총리(11.9%)가 자리잡는다.
정신과전문의 정혜신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정혜신, 「(정혜신의 인간탐구) 김근태의 이상주의 이인화의 영웅주의」, <신동아>, 2001년 9월호, 361쪽).
"정치부 기자나 지식인 집단을 대상으로 한 '차세대 지도자' 선정 조사에서 그가 몇 년 째 1위를 차지한 것은 반갑다. '믿어 줄 만한 가치'가 있는 정치인으로 대접받고 있다는, 또 민주화운동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성으로 해서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는 인정을 받고 있다는 한 징표라는 분석 때문이다. 지도자로서의 자질에 대한 평가와 대중적 인지도를 일치시키는 일은 정치 전략적으로 해결할 문제이므로 필자의 영역 밖이다. (…) 더 개인적인 이유로 필자는 김근태가 정치인으로 꼭 성공하길 바란다. 김근태 같은 사람마저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 정치에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라는 인간적인 걱정 때문이다. 김근태는 그런 '희망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진보지식인 차기 대선 '선호 1위' 김근태, '선호 2위' 노회찬
2005년 12월 27일 한겨레와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소장 김헌태)가 진보지식인 100명(전공별로는 정치·법학 24명, 경제·경영학 26명, 사회·신문방송학 23명, 철학·문학·역사 27명 등)을 상대로 차기 대선후보 선호도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김근태는 34.4%의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한다. 2위와 3위는 민주노동당의 노회찬(15.1%), 권영길(12.9%) 의원이 차지했으며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도 11.8%의 선호도를 보였다.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8.6%를 기록했고 이명박 시장은 1.1%에 머물렀다. 이밖에 민주노동당 심상정, 단병호 의원과 이해찬 국무총리,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이름도 있었다. 그러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꼽은 이들은 1명도 없었다. 김근태가 민주노동당 의원을 제치고 진보적 지식인들의 호감을 산 이유는 '도덕성'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의 산 증인인데다 정치 입문 이후에도 일관된 행보를 보였다는 점은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김근태는 '선생님'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는 비판이 여전하다. 대중이 쉽게 다가가기 힘든 정치인이라는 것이다. 또 정치적인 순발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한겨레, 2006년 1월 2일; <미디어오늘>, 2006년 1월 4일).
민주화 출신 인사들의 모범적인 성과로 거론된 것들은 민주주의의 정착(김영삼)과 남북화해(김대중), 권위주의 완화·정치자금 투명화·지역균형발전, 언론유착단절(노무현), 민중세력의 정치화(권영길), 여성계의 약진(한명숙), 시민운동의 정치화(유시민), 법조개혁(강금실, 천정배) 등이다. 반대로 대표적 실패 사례로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김대중), 3당 합당·IMF 초래(김영삼), 지역주의 확산(김대중·김영삼), 민주화 세력통합 및 부동산·비정규직 정책 실패(노무현, 김대환), 과반수 의석확보에도 개혁추진 실패(노무현)를 꼽았다.
<리더십 청문회>(2007) : 김근태의 '비대중적 진정성'과 노회찬의 '실용적 변혁운동가의 리더십'
2007년 대통령 예비후보들의 리더십을 연구한 책인 호남정치학회의 <리더십 청문회 2007 대통령 후보>(부키, 2007)는, 정치학자들이 대통령 후보로 꼽는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 김근태, 노회찬의 리더십을 다양한 각도에서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김근태는 '포퓰리즘과 대중적 지지도', 노회찬은 '이데올로기와 조직·개인'을 핵심 쟁점으로 삼아 집중 탐구한 뒤 이렇게 말한다.
- 「김근태의 리더십-비대중적 진정성」: "여론 주도층에 비친 김근태의 개인적 특성만을 판단 기준으로 한다면 그는 도덕성을 내용으로 하는 민주적 리더십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하지만 정치와 수사(修辭)의 관계에서 볼 때 대중 정치인 김근태의 리더십 분석은 의미가 없다. 그는 대중성이 극히 저조하기 때문이다. 김근태의 비대중성은 다른 무엇보다 대중 정치인으로서 정치와 수사에 대한 관계를 잘못 설정한 탓이다. 그는 대중과의 교감을 '전달의 문제' 혹은 '연기나 연출'의 문제로 이해한다. 때문에 그는 대중 연설을 싫어하는데, 그것은 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이성적인 지식인으로 상정하면서, 대중 정치인은 선동가와 일치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대중적 수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 「노회찬의 리더십-실용적 변혁운동가의 리더십」: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을 다섯 가지 기준에 입각해 측정할 때, 노회찬은 정책 능력, 대자적 사유 능력, 전략적 유연성, 절차주의의 내면화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연고나 명망 및 민주노동당의 집권 가능성에 대한 일반적 기대감 등이 포함된 정치적 자원이란 면에서는 평균치에 비해 많이 낮다.…이제 사회주의라는 구호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가치의 상징이 아니라 빈곤과 폭력의 상징으로 암울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더 많다. 좌파 진영의 전투적인 이론과 행태에 많은 수의 국민들이 싫증을 느끼는 것이 수구 언론의 색깔 덧씌우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권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성향의 스펙트럼에 견주어 볼 때 주변 또는 바깥에 위치하는 노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신조를 지키기 위해 생존을 포기하는 순교자 취향에나 적합하다. 현실 정치에서 지지 기반의 확보라는 요소를 배제해서는 노무현식 실험의 실패가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회찬이라는 특정 정치인의 리더십을 논하면서 상황을 가장 중요시하고, 다음으로 행위, 그리고 개인적 특성을 가장 나중에 고려하는 것도 바로 그래서이다."
2002년 '아름다운 꼴찌' 김근태와 2007년 '제7공화국 건설'의 노회찬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 경선에 참가한 김근태는, 이인제 후보와 경쟁하던 노무현 후보에 힘을 실어주면서 후보직을 사퇴한다. "2000년 전당대회 때 권노갑 고문에게 2천만원을 받았으며, 2억4천만원을 선관위 신고에서 누락했다"고 양심선언을 하고 '아름다운 꼴찌로 기억해 달라'며 자진 사퇴한 것이다. 이른바 '노풍'이 불기 시작한 광주 경선(3월 16일) 직전의 일로, 노무현으로 개혁 후보를 단일화해 정권 재창출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노무현 후보의 광주 경선 승리는 참여정부 탄생의 결정적 계기로 기록되는데, 이후 여러 숱한 난관을 뚫고 노무현 정부가 등장한다. 노무현 캠프에서 김근태는 인터넷선거특별본부 기획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다 열린우리당에 합류한다.
노무현 탄핵 열풍을 딛고 '주류'로 올라선 열린우리당의 창당에 참여했지만 김근태는 여전히 '비주류'의 길을 걷는다. 2004년 6월 아파트 분양원가 논쟁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던 김근태는 17대 총선공약으로 열린우리당이 내걸었던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시장논리에 어긋난다"며 노무현이 반대하자 개인성명을 내 "계급장 떼고 토론해보자"고 정면으로 맞선다. 그런 그를 노무현은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한다. 그러나 장관을 지내면서도 그는 영리병원 도입과 국민연금 주식투자 동원 움직임을 반대하며 청와대와 각을 세운다. 노무현 정부의 한미FTA 추진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다.
2007년 3월 11일 노회찬은 '제7공화국 건설'을 기치로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민주노동당 출신 대통령이 되겠다.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라는 정치경력을 쌓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당 집권의 꿈'을 실현하겠다."는 출사표를 던지며 민주노동당 대선 경선에 뛰어든다.
9월 9일 민주노동당 중앙선관위가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경선 개표 결과를 발표한다. 권영길 후보(1만9053표, 49.37%), 심상정 후보 (1만64표, 26.08%), 노회찬 후보(9478표, 24.53%) 득표. 과반수 획득 후보가 없는 관계로 1위 후보와 2위 후보의 결선투표가 실시되는데, 노회찬은 "저와 심상정 후보의 표는 당의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표"라며 심상정 후보 지지를 표명한다.
당시 노회찬에 대한 거짓 흑색선전이 난무한다. 노회찬 후보의 선거운동에 함께 한 나경채는 이렇게 회고한다(나경채 페이스북 글, 2019년 3월 25일).
"노회찬 후보가 마치 미군 장갑차에 의해 희생당한 신효순 심미선 추모 촛불집회를 폄훼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동영상이 나돌았고, 곧이어 서강대 박홍총장과 함께 노회찬 의원이 반주사파 색출을 위한 공안정국을 만든 것처럼 책임을 씌우는 동영상도 뿌려졌다.…선본은 흑색선전과 비방전을 당해내지 못했다. 선거가 마무리되고 선거운동에 열성이었던 사람들이 허름한 냉면집에 모였다. 노회찬 의원과 김지선 선배도 당연히 자리를 함께 했었다. 다소 무겁지만 홀가분한 자리였는데, 노회찬 의원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동지들 모두 헌신적이었고, 빛나는 선거운동을 해주었습니다. 이 결과에 대해 다른 사람들을 탓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그는 이 선거의 결과가 당 안에 심각한 생채기를 남길 것을 걱정했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그런 우려를 공유했으면 하는 마음을 내비쳤다. 함께 했던 한 사람이 갑자기 노의원의 말허리를 잘라먹고 기어이 한마디했다. '왜 이것이 당신 때문입니까? 저 사람들의 비겁한 선거운동을 이번에도 넘어가실 겁니까? 매번 그러니까 당하는 것 아닙니까?' 노의원은 다른 말을 하지는 못했고, 연신 그저 '어허~~'라는 말만 내뱉었다. <어허...어허...거....참> 이 말이 아닌 단어들은 그 뒤로 내가 노회찬 의원을 생각할 때면 맨 먼저 떠오르는 말이었다. 어허..어허.."
9월 15일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결선투표 결과, 권영길은 1만9천109표(52.74%), 심상정은 1만7천122표(47.26%)를 획득해 권영길 후보로 확정된다. 10월 14일 민주노동당 대통령선거대책위원회가 출범하고 노회찬은 선대위원장을 맡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제 제 이름은 노회찬이 아니라 '권영길'입니다. 10만당원들도 '권영길'이 되어 대선 승리를 만들어냅시다. 10만 당원의 이름이 무엇이냐? 우리 모두가 권영길이 될 때, 17대 대통령 선거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2008년의 '지·못·미', 2010년 극우에 의한 '친북·반국가 행위자' 낙인
2008년 4월 9일 18대 총선에서 수도권의 한나라당 돌풍에 휩쓸려 석패한 통합민주당의 김근태 후보와 진보신당의 노회찬 후보 등 진보적 성향의 후보들에 대해 온라인을 중심으로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현상이 나타난다(「"노회찬·심상정·김근태 '지·못·미~'" 낙선 후 지지 쇄도…'제2의 노무현' 현상?」, <프레시안>, 2008년 4월 11일).
신지호(한나라당)에게 1060표 차이로 낙선한 김근태의 홈페이지 응원게시판에는 낙선 후 이틀간 위로와 격려의 글이 200건 이상 올라온다. "성원에 감사드린다. 여러분이 곁에 있어 늘 행복하다"는 짧은 낙선사례에 지지자들은 "종착역이 아닌 정거장으로 여기라", "다음은 대선에서 만나자" 등의 격려 글을 남긴다.
'서민-귀족' 대결에서 석패한 노회찬 후보 사무실은 선거 이후에도 북적거리고 있다. 노원 주민은 물론 강남구와 서초구 주민들까지 사무실을 찾아 "안타깝다"는 격려의 말과 회식비까지 건네고 있는 것. 노회찬의 홈페이지에는 '지켜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제 생각엔 당신은 이미 성공한 정치인입니다', '우리 동네지만 화가 나네요' 등의 글이 쏟아져 일시 정지될 정도였다. 이에 대해 노회찬은 "노원구 주민들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격려해주시는 국민들에게 감사한다"면서""노원 주민들께 약속한 대로 노원에서 다시 진보정치를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선거운동 때와 같이 상가 방문, 지하철 퇴근인사 등 '낙선사례'를 시작한다.
한편 2010년 3월 12일 '극우' 계열 민간단체인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위원장 고영주)가 친북·반국가 행위자로 100명을 선정, 명단을 발표한다. 선정 기준은 북한 당국의 노선인 '주체사상' '선군노선' '연방제 통일' 등을 지지·선전한 행위(친북행위)와, 헌법질서를 부정하고 국가변란을 선동한 경우(반국가행위)로 했다고 설명한다. 100명 가운데 김근태와 노회찬의 이름이 '당당히' 들어가 있다. 1차 명단 등재를 놓고 내부에서 논쟁이 벌어졌던 김대중과 노무현은 빠졌다.
위원장인 고영주에 대해, <헌법제정 70주년 반(反)헌법행위자열전 편찬 1차보고회: 헌정사 적폐청산과 정의로운 대한민국>(2018년 7월 12일, 105쪽)은 "문재인도 공산주의자"로 확신한 '빨갱이 감별사'이자 「부림사건 담당검사이자 빨갱이 낙인의 전문 공안검사」라며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영주는 대한민국 검사 출신 법조인으로 27년 5개월 동안의 검사 생활 대부분을 공안 분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공안검사 가운데 한 명이다. 검사 옷을 벗은 뒤에도 고영주는 자칭 '애국세력'의 선봉에 서서 ("남보다 먼저 국가적 위험을 인식"하는 남다른 능력과 불타는 열정으로) '마지막 구(舊) 공안검사'답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적', '극우 편향주의자'라고 부른다. 반면에 그를 옹호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 감별사', '아스팔트 우파의 자존심'이라는 별칭을 그의 이름 앞에 붙인다."
고영주와 같은 극우 계열 인사들의 특징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의 오류와 '파에톤 콤플렉스'(Phaethon Complex)가 결합된 인물 유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 즉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행동경향성"을, 후자는 "성취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강박적 욕망"을 뜻한다.
<헌법제정 70주년 반(反)헌법행위자열전 편찬 1차보고회 자료집>은 '한국판 괴벨스'‧'고벨스'(고영주+괴벨스)로 불리는 고영주의 쉴새없는 망언과 거짓말 제조는 그의 철저한 '공안적 사유'의 결과물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공산주의자 감별 전문가'인 자신이 누구든 지목하면 무지한 국민은 그런 줄 알고 따르라고 강변한다. 실체적 진실의 무시와 왜곡이야말로 공안적 사유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이처럼 좌든 우든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떤 낙인을 찍어 침묵시키거나 응징하는 것이야말로 고영주가 온몸으로 지키겠다는 자유민주주의의 적이자 전체주의적 광기라고 할 수 있다.
김근태의 스웨덴과 노회찬의 스웨덴,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한편 앞서 본 2005년 12월 27일 한겨레와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소장 김헌태)가 진보지식인 100명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국가모델에 대한 질문에 응답자의 60.6%가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를 꼽는다. 뒤이어 '독일식 사회적 시장주의'가 26.6%의 선택을 받아 2순위로 꼽혔다.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1.1%로 나타났다.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는 강력한 사회복지 체제를 기초로 하는 사회발전 모델이다. 독일식 사회적 시장주의는 스웨덴에 비해 시장 경제의 자율성에 좀 더 무게중심을 두고 이를 사회적으로 보완하려는 체제다. 두 모델 모두 20세기 후반 이후 또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평등과 연대의 질서를 기본으로 삼아 시장에 대한 사회의 통제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면서 효율과 형평, 성장과 분배 등의 가치를 동시에 달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결과는 2004년 5월 <한겨레>가 창간 16돌을 맞아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와 비교된다. 당시 응답자의 44.8%가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으로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응답자의 39.2%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했다. 2004년 조사는 정치사회체제에 비중을 둔 설문이었다는 점에서 경제사회체제를 강조한 2005년 조사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북유럽 모델에 대한 지식인과 일반 국민들의 호감은 공통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진보 지식인들의 경우 미국식 모델에 대한 호감이 일반 국민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가 큰 스웨덴이 될 것이냐, 작은 미국이 될 것이냐를 선택할 시점이다." 2006년 7·26 재·보궐 선거를 전후해 김근태(열린우리당 의장)는 사석에서 이런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고 한다. 이른바 '뉴딜'에 대한 고민을 스웨덴형 경제와 미국형 경제 사이의 선택 문제로 돌려 말한 것이다. 한국 경제가 활력을 잃은 원인에 대한 김 의장의 진단을 요약하면 '불안'과 '불신'이다. 먼저 '대마불패'의 신화가 깨진 대기업은 적대적 인수합병과 경영권 위협, 그리고 투자에 대한 안전장치가 없다며 저투자와 현금보유를 선호하고 있다. 반면에 '평생고용'이 사라진 노동계는 정리해고의 끔찍한 경험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데 한층 절박해졌다. 내일의 운명을 알 수 없기에 오늘의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비정규직과 하청 노동자들의 힘든 상황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 역시 미국 등이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논리에 밀려 계획과 조정을 포기하고 기업들과 노동자들을 '시장'으로 내몰고 있다고 본다. 지금의 상황이 이어진다면 자유방임과 시장원리에 충실한 미국형 경제로 가게 된다는 것이 김 의장의 생각이다. 이 때문에 김 의장은 현재의 상황에 '공공성'을 좀더 가미해 변화를 시켜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방향이 좀더 스웨덴 쪽으로 가는 것이다. 스웨덴은 잘 알려진 대로, 1930년대에 노-사-정의 대타협을 이뤄 사브-에릭슨-일렉트로룩스 등의 세계적 기업과 최고 수준의 복지를 누리는 노동자들의 조화를 이끌어 냈다. (한겨레, 2006년 8월 11일)
사단법인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창립 3주년을 기념하는 '복지국가 전진대회 및 후원행사'가 2010년 11월 17일 저녁 여의도 국민일보 CCMM 빌딩에서 열린다. 행사에 참석한 김근태(전 열린우리당 의장, 민주당 상임고문)는 축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맞는 복지국가 모델이 과연 무엇인지, 왜 그런 지를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누구와 손잡고 나갈 것인지를, 어떻게 시민과 국민으로부터 동의와 지지를 받을 것인지를 탐구하고 실천해내야 합니다. 저는 2000년대 중반에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나름대로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은 '작은 미국'이 아니라 '큰 스웨덴'으로 갈 수 있고 가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깃발을 내리고 싶지 않습니다."
한편 노회찬은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비아북, 2014, 286-287쪽)에서 '스웨덴 등과 같은 사민주의 복지사회'를 만드는 것을 '진보정당'의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사민주의는 개량주의이다. 혁명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혁명노선이 아니라 개량노선이다. 이제 이념적으로 NL도 PD도 버리고 사민주의에서 다시 만나야 한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사민주의인데, 옛날 족보를 가지고 NL과 PD로 나뉘어 계속 싸울 수는 없다. … 우리 안에는 트로츠키주의자도 있고, 혁명적 민주주의자도 있고, 사회주의자도 있고, 자유주의자도 있다. 그런데 우리의 공통점은 스웨덴 등과 같은 사민주의 복지사회를 만들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가 집권해서 만들려고 하는 사회는 이런 정도의 사회라는 것을 솔직하게 밝히는 것이 도리다. … 진보라는 말로 우리를 설명하는데 우리도 지쳤고 듣는 국민도 지쳤다. 설명이 안 된다.
'노동운동가'이자 '혁명가'였던 노회찬이 노선 전환 후 정치적 여정을 통해 도달한 것은 사회민주주의였다.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시절 노회찬은 최고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제 2단계 창당을 앞두고 있는 당사자로서 진보정의당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바는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정체성이 지금과 같이 애매하거나 또는 왜곡되기 쉬운 그런 지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저는 진보정의당이 이제 낡은 진보의 애매모호한 정체성을 과감하게 벗어던지면서 진보정의당의 노선, 활동방식에 있어서, 그리고 국가경영방식과 관련해서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는 길로 나설 때만이 한국정치에서 한 축을 담당하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2013년 1월 14일 진보정의당 13차 최고위 모두발언)
마지막 여정의 당부
- 김근태, "2012년을 점령하라"
- 노회찬,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2011년 10월 18일 마지막으로 그의 블로그('김근태, 희망을 말하다' http://gtcamp.tistory.com)에 'posted by 김근태'로 남아 있는 글에는 김근태의 인생이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다. 그가 남긴 마지막 글의 제목은 「2012년을 점령하라」였다.
"(월가 시위의 요인은) 무엇보다 1%를 향한 99%의 분노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1%인지 5%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처럼 전 세계가 공감한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제패했었다는 증거다. 선진국과 후진국, 강대국과 약소국, 민주국가와 비민주국가의 구분 없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세계적 대세였던 것이다. 그리고 2008년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월가의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희생도, 반성도, 징벌도 없는 불공평함에 분노한 것이다. … 2008년의 촛불국민들은 2009년엔 조문 행렬을 이었고 지금은 희망버스를 타야 한다. … 우리는 미국보다 사정이 낫다.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팜플렛 「민주주의자 김근태 사회장」에는 이런 김근태의 글귀가 적혀 있다.
- "희망을 의심할 줄 아는 진지함, 희망의 근거를 찾아내려는 성실함, 대안이 없음을 고백하는 용기, 추상적인 도덕이 아닌 현실적 차선을 선택해가는 긴장 속에서 우리는 다시 희망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95)
- "민주화를 위한 변하지 않는 믿음과 희망이 우리를 여기에 있게 했다. 꿈이 있어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됐다. (1997)
- "인간의 가치는 그가 품고 있는 희망에 의해 결정된다." (2001)
-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다. 거짓희망이다. 절망한 마음에는 희망의 불씨를 피울 수 있지만, 거짓희망을 품으면 다시는 희망의 불씨를 피울 수 없다." (2007)
- "인권은 하늘이 주신 권리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사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투쟁을 통해서 가슴 깊이 배웠습니다. 우리가 침묵하면 인권은 사라집니다. 우리가 침묵하면 인간사회는 불행해집니다. 우리는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우리는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2010)
트위터에 올린 마지막 글은 2018년 6월 27일 "박주민 의원님! 정말 축 생산(生産)입니다. 특히 귀한 따님 얻게 되어 부인께도 축하드립니다. 어깨가 더 무거워지셨으니 이젠 라면 드시지 말고 옥체 보전 잘 하십시오"다.
노회찬이 남긴 마지막 공식 발언은 2018년 7월 23일 정의당 93차 상무위의 서면 모두발언이다.
삼성전자 등 반도체사업장에서 백혈병 및 각종 질환에 걸린 노동자들에 대한 조정합의가 이뤄졌습니다. 10년이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이 사안을 사회적으로 공감시키고 그 해결을 앞장서서 이끌어 온 단체인 '반올림'과 수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KTX승무원들 역시 10여년의 복직투쟁을 마감하고 180여명이 코레일 사원으로 입사하게 됐습니다. 입사한 뒤 정규직 전환이라는 말을 믿고 일해 왔는데 자회사로 옮기라는 지시를 듣고 싸움을 시작한지 12년 만입니다. 오랜 기간 투쟁해 온 KTX승무원 노동자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두 사안 모두 앞으로 최종 합의 및 입사 등의 절차가 남아 있지만 잘 마무리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봐도 산재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안을 10여년이나 끌게 만들고, 상시적으로 필요한 안전업무를 외주화하겠다는 공기업의 태도가 12년 동안이나 용인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번 합의를 계기로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 상'과 '노회찬 정의상/인권과평등상'
2016년 11월 14일 오전 독재정권 치하에서 고문을 당하면서까지 민주화 운동을 한 김근태 5주기를 맞아, <김근태의 평화와 상생을 위한 한반도재단>(김근태재단)과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연)는 서울 종로구 성공회서울대성당 프란치스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민주주의자 김근태 상'을 제정한다고 발표한다. 김근태재단과 민평연은 고인의 삶을 정치인·인권운동가·민주화운동지도자 등 특정 영역으로 규정하기 어려워 영결식 당시 김근태에게 부여한 '민주주의자'라는 칭호를 상의 이름으로 쓰게 됐다고 밝힌다. 제정취지문은 김근태를 '삶 전부가 온전히 민주주의인 한 사람'이라고 지칭하면서, "김근태의 이름을 빌려 민주주의의 한 영역이 열리길 소원한다. 이 상은 그 묵묵함에 드리는 함성이고 향기"라고 적는다.
<민주주의자 김근태상 선정위원회>는 2016년 제1회 수상자로는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를, 제2회는 '전대협 진군가', '헌법 제1조',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등을 만든 '작곡가 윤민석'을, 제3회는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대표: 이철)를 선정, 수상한다. 3회의 경우 본상과 더불어 일상 속에서 민주주의 가치를 높이고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모범을 보인 이들을 위해 '특별상' 부문을 신설,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리버스위트 입주민 일동'에게 수상한다.
"이탄희 변호사는 2017년 2월 당시 판사로서, 대법원 법원행정처의 소위 '판사 뒷조사 파일' 관리 등을 거부하며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그 후 대법원의 세 차례에 걸친 진상조사 과정에서 양승태 대법원의 판사 뒷조사 실상은 물론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과 재판거래 실상을 밝히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전국법관대표회의 설치 등 사법개혁을 위한 법원 내부의 실천을 촉발시키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김미숙님은 2018년 12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위험한 작업을 하다가 산업재해로 사망한 김용균 씨의 어머니입니다. 김미숙 님은 아들을 잃은 큰 슬픔에도 비정규직 차별, 위험의 외주화는 청년 비정규직 하청노동자의 노동현실을 바꾸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의 국회 본회의 통과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김미숙 님은 새로운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의 한계를 지적하며 제대로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의 필요성을 제기하였습니다. 김미숙 님의 <노회찬 인권과평등상> 수상은 노회찬 의원이 대표발의했고 현재도 국회에 계류되어 있는 <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책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 일명 '중대재해기업 등 처벌법'이 하루 빨리 제정되길 바라는 우리들과 많은 노동자 시민들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연재를 마무리하며: '생환'(生還)
1월 15일 신영복, 2월 14일 김진균, 3월 22일 오재영과 3월 30일 세종대왕, 4월 16일 세월호와 4월 19일 4.19, 5월 23일 노무현, 6월 23일 김종필, 7월 31일 조봉암, 8월 18일 김대중, 9월 24일 정운영, 10월 26일 박정희, 11월 13일 전태일. 11월 22일 김영삼, 12월 12일 이재영, 12월 30일 김근태.
2018년 11월 뜻하지 않게 시작한 <미완의 기록: 노회찬의 만남> 연재가 오늘로 일단락을 맺는다. 어떻게 마무리를 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두 개의 글이 떠오른다. 하나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 카(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적혀 있는 글귀다.
“현대인은 자기가 그곳으로부터 나온 어둠을 향해 되돌아서서 열심히 보고 있는데 그것은 그곳으로부터 비쳐오는 미광(微光)이 그가 들어서려는 어둠을 비쳐 주지나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 과거, 현재, 미래는 끊임없는 역사의 사슬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노무현 편>에 적은 신영복 선생의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헌시다. 이 헌시는 2000년 어느날 성공회대 민주자료관에 보내준 것이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역사는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환(生還)하는 것이다.
현재의 실천 속으로 생환된 역사만이 힘이 된다.
암울한 군사독재의 시절을 뚫고 맥맥이 이어온 반독재 민주화투쟁도
생환되지 않으면 역사가 되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은
각계각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
스스로 고난 속으로 뛰어든 거대한 물결이었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역사이다.
이 거대하고 줄기찬 민주투쟁을 증거하고, 역사를 일으켜 세우고,
나아가 오늘의 실천 속에서 생환하는 일은 그야말로 역사적 과업이다.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우는’ 참된 각성의 시작이다.”
반독재 민주화투쟁만이 아니라, ‘그’의 삶을 기억하고 기리면서 그 뜻을 이어갈 사람의 살아온 발자취를 생환(生還)하는 일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현재의 실천 속으로 생환된 역사만이”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된다.
이제 <미완의 기록, 노회찬의 만남>으로 함께 한 지난 1년여의 시간을 마무리하려 한다. 2019년 12월 30일 오늘, 그동안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노회찬은 어떤 신년 인사를 했을까 궁금해진다.
5년 전 오늘인 2014년 12월 30일 노회찬은 트위터에 이런 신년 인사 글을 올리며 유튜브 영상 링크를 건다.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음악도 흐르고 눈물도 흐르고 희망도 흘러갑니다. 뜻하신 바가 모두 이뤄지는 2015년이 되길 기원합니다. 올 한해 수고 많았습니다.
(영상 바로보기 : https://www.youtube.com/watch?v=1LGVGekPSzo&feature=youtu.be)
유튜브 영상은 앙드레 류(André Rieu)가 이끄는 요한 스트라우스 오케스트라의 <그리고 왈츠는 계속 된다 And The Waltz Goes On>라는 제목의 연주다. 영국의 명배우 앤서니 홉킨스(Anthony Hopkins)가 27살에 쓴 곡이라고 한다.
2년 전 오늘인 2017년 12월 30일 노회찬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면서, “2018년 새로운 365일! 보람찬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람을 귀중히 여기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늘 함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라고 신년 인사를 한다.
3년 전인 2016년 12월 31일 노회찬은 신영복 선생의 시화 ‘야심성유휘’(夜深星逾輝,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납니다)로 신년 인사를 건넨다.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를 꿈꾸며 실천한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 노회찬’이 남긴 말과, 그가 좋아한 대표적인 노래인 노찾사의 ‘그날이 오면’ 링크로 2020년 신년맞이 인사를 대신 전하며 ‘미완의 기록’ 글 연재를 마친다.
그동안 여러모로 부족한 저를 믿고 여기까지 함께 온 분들께 감사와 격려의 인사를 드립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가장 소중한 사람은 함께 손을 잡고 그 길을 걷는 길동무들이라 합니다. … 사랑합니다. (노회찬)
(영상 바로보기 : 노래를 찾는 사람들(1989) https://www.youtube.com/watch?v=--mZLgAKlv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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