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편에 달하는 사기열전 중에서도 명편으로 알려진 12편을 뽑아 역사가의 기록과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삶에서 내린 몇몇 결단이라는 엄정한 사실을 통해 복잡하고 자질구레한 현대인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해당 열전을 독해하는 포인트를 제시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격주로 <사기열전>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필자)
이런 저런 이익의 다툼으로 가득 찬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고파 <사기열전>을 펼치니 저 옛날 왕위를 양보한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마천이 살았던 한 무제 시기는 시대의 소음이 요란했다. 70편에 달하는 열전 중에서 사마천은 양보의 미덕을 실천한 백이를 가장 중요한 첫 편에 배치했다. 단지 시간 순서에 따른 배열만은 아니다. 세가와 본기도 시기는 다르지만 모두 왕위를 양보하거나 선양한 오태백이나 요순의 이야기를 첫 번째로 다뤘다.
사마천이 백이와 숙제를 첫 번째 열전의 주인공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 양보의 미덕을 선양하기 위해서였다. 남이 이미 차지한 것을 내놓게 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자신이 먼저 차지하거나 확보한 것은 버스나 지하철에서 잠시 앉아가는 자리라도 양보하기 힘든 법이다. 나라를 양보함이 어떤 것인지 보통 사람으로서는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더구나 백이가 양보한 고죽국은 상나라에 속했던 제후국으로 북방의 대국이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안녕! 스튜어트'라는 글에서 백이를 두고 자기 인민을 책임지지 않고 도망갔을 뿐만 아니라 무왕이 이끄는 인민해방전쟁에 반대한 개인주의자라고 비판했다. 혁명의 시대에 혁명가의 안목으로 가할 수 있는 비판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왕위나 권력을 양보해서 문제인 경우보다 집착해서 문제다.
'백이열전'은 루쉰이 "사가(史家)의 절창(絶唱)이요, 무운(無韻)의 이소(離騷)"라고 평한 사기 중에서도 늘 명문으로 뽑히거니와 다른 열전에 비교해볼 때도 아주 특별하다. 앞서 밝혔듯이 첫 열전이다. 두 번째로 매우 짧다. 전체 분량도 짧지만 전주(傳主, 전기의 주인공)를 다룬 부분은 더 짧다. 대략 전체 분량의 삼분의 일 정도고 나머지는 공자의 말을 주로 인용하면서 펼치는 사마천의 의론이다. 달리 말하면 사마천의 '넋두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넋두리가 일품이다. 다른 열전에서 대부분 전주의 일생 사적을 서술하고 나서 맨 마지막에 사마천 자신의 평가를 '태사공왈' 이하에 간략하게 서술하는 형식을 띠는 것과 선명하게 대조된다. 열전 전체의 서문이자 범례라고 평가받고 있다. 세 번째로 '백이열전'은 사마천의 일반적 태도와 다르다. 사마천이 말하고자 하는 논지는 하늘의 구름과 같이 변화무쌍해서 파악하기 쉽지 않지만, 파도가 일 듯 마음을 격동케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 그래도 잠시 고요한 부분이 백이와 숙제의 전기다. 대략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길지 않기에 인용해본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의 두 아들이다. 아버지는 셋째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백이에게 양보했다. 백이는 '아버지의 명'이라고 하고 달아났다. 숙제 또한 왕위에 오르려 않고 도망가 버렸다. 나라 사람들이 둘째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이에 백이와 숙제는 당시 서쪽 제후의 우두머리였던 창(西伯昌)이 늙은이를 잘 돌봐준다는 소문을 듣고 그리로 갔다. 이르고 보니 창은 죽었고,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무왕이 선친에게 문왕이란 시호를 붙이고 그 위패를 실은 채 동쪽으로 가서 (상나라 마지막 폭군인) 주를 치려고 했다. 백이 숙제가 말고삐를 잡고 간언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지도 않고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효라고 할 수 있으며,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는 것을 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좌우에서 그들을 해치려 하자 (강)태공이 "이 사람들은 의인이다"라고 하고는 부축하여 가게 했다. 무왕이 상나라의 난을 평정하자 천하가 주나라를 떠 받들었다. 백이 숙제는 이를 부끄러이 여기고 의리를 지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는다며 수양산에 숨었다.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기에 이르러 노래(채미가, 采薇歌)를 지었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도다.
폭력으로 폭력을 대신하고도 그 잘못을 알지 못하네.
신농과 우·하나라가 모두 사라졌으니, 나는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아아 떠나련다. 운명이 다한 것을!
그러고는 마침내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이게 전부다. 아무리 순후하고 질박한 옛날이라고는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일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존재했다면 이런 삶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루쉰은 <새로 쓴 옛날이야기(故事新編)>(그린비 펴냄)에서 수양산에 숨어든 백이 숙제가 굶주림을 해소하고자 고사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요리해먹다가 산 속에서 우연히 만난 어떤 처녀로부터 그 고사리는 주나라의 것이 아니냐는 힐난을 받고 어쩔 수 없이 굶어 죽게 되었다고 풍자한 일이 있다. 이상만을 쫓은 자의 말로를 냉소적으로 각색한 이야기다. 청대의 양옥승(梁玉繩)은 아예 무려 열 가지 근거를 들어 사마천이 정리한 내용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것을 일일이 나열할 필요는 없겠지만, 백이 숙제가 무왕이 폭군 주를 치러가는 것을 저지했다거나 나중에 수양산 아래에서 굶어죽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무왕이 상나라를 토벌한 것은 백이가 주나라에 온지 한참 후의 일이다. 또한 백이 숙제는 강태공과 기산, 풍호 일대에서 같이 지냈으므로 그들이 거사를 꾀한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계획 단계에서 말리지 않고 출병할 때를 기다려 말꼬리를 잡고 간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 백이 숙제가 수양산 아래에서 굶어 죽었다는 말은 <논어>에 나오지 않는다. 수양산 아래서 굶었다는 표현만 나온다. '채미가'로 이름 붙여진 절명시도 그들이 지었다는 다른 문헌적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천이 근거도 박약한 이 절명시를 인용한 이유는 백이와 숙제에게 원망이 없을 수 없다는 암시하기 위해서다.
사마천에게 사실과 가치판단의 최종심급 기준은 유가의 <육경>과 공자인데, 백이 숙제가 원망함이 있었느냐는 제자 자공의 질문에 공자는 분명히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인을 구하다 인을 얻었는데 무슨 원망이 있었겠냐고 단언했다. 사마천이 공자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모를까, '백이열전'의 서두에서 "배우는 자들은 전해 오는 책이 아무리 많아도 육경에 의거하여 그 신빙성을 판단한다"고 선언하고서 공자가 이미 결론을 내린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이 문제에 집착하는가?
<노자>에 "하늘의 도는 특별히 편애함이 없지만 늘상 선한 이와 함께 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천도가 존재할까? 존재한다면 왜 백이와 숙제와 같이 어진 덕을 쌓고 행실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 굶어 죽고, 도척 같이 매일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 고기를 먹기까지 한 악인은 떵떵거리고 잘 사는가? 잘 사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천수를 누리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왜 의인은 늘상 수난을 겪고 악인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이 많은가? 가슴 속에 응어리져 풀리지 않는 이런 울분을 던지기 위해 사마천은 '채미가'에 배어 있는 백이와 숙제의 원망에 주목한 것이다. 아니 자신의 울분을 백이 숙제에 투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시대에도 법도에 벗어난 행동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나쁜 짓을 골라서 하고도 종신토록 호강하고 자손에게까지 그 부귀가 이어지는 예가 적지 않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한 걸음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내딛고 말도 가려서 하고 길을 갈 때도 지름길을 택하지 않고 공정한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음에도 오히려 화를 당하는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역사가 진보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사마천이 개탄한 현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한평생 공적인 일에 종사한 일이 없는 이가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해 초강대국의 대통령이 되어 자기 나라를 분열로 몰아가는데 그치지 않고 세계를 호령하며 갖은 명분과 협박으로 온갖 잇속을 차리면서 우리의 삶을 제약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파렴치한 인간이 영웅으로 둔갑해서 환영을 받거나 사실적 근거도 박약하고 옳지도 않은 맹랑한 주장이 버젓이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되어 유통되는 일이 어디 한 둘인가? 천도 따위는 애초에 없는 것이고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냉소하면 그 뿐인가? 이런 허무주의적인 길을 택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현실의 불공정과 부조화를 참아내면서 어떻게 공정과 조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사마천은 공자의 언설을 통해 균형을 잡고자 시도한다. 추구하는 도가 각기 다른 것이니 뜻이 다른 사람과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각자 자기 뜻을 좇아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부귀를 추구할 사람은 부귀를 추구하면 된다고. 부귀를 추구해도 안 된다면? 그럼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고.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잎이 늦게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듯, 맑은 선비는 온 세상이 혼탁해진 이후에 드러나는 것이라고 사마천은 자신과 우리를 격려하고 있다.
맑은 선비가 진정 중시해야 할 것은 부귀가 아니라 이름이다. 공자에게 내세란 역사이며 불멸이란 다른 이의 기억 속에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군자는 죽은 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음을 미워한다. 탐욕한 사람은 재물을 위하여 죽고, 권세욕이 강한 사람은 권력을 쫓다가 죽지만, 열사는 이름을 위해 죽는 법. 백이 숙제는 왕위를 양보한 선인이지만 이를 알아본 공자를 통해 그 이름이 더욱 드러났듯이, 나 사마천도 훌륭한 인물들의 이름을 전해야 하리라. 사마천은 저술을 통해 공자의 과업(춘추를 저술했던 일)을 계승할 포부와 자신감을 피력하는 것으로 '백이열전'을 마무리하고 있다.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았지만 청운의 선비를 만나지 못해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슬픈 일이다. 천하를 양보했다는 허유(그가 순임금 때의 법무장관이었던 고요라는 설이 있다)가 바로 생생한 증거다. 그는 <장자>에서 신화적 인물로 거론되었기에 사마천 자신도 그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곳을 직접 답사하고도 전설로 치부했을 뿐이다.
백이와 숙제는 왕자로 태어나 수양산 아래서 굶어죽는 낙차 큰 비극적 생을 살았지만, 왕위 양보를 결단한 선인이다. 사마천이 이들의 삶을 기록해 불멸을 얻게 만든 것은 시대의 소음을 조화로운 음악으로 바꾼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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