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이 제도적으로 공인된 시대가 있었다. 바로 봉건시대이다. 중국에서는 주(周)나라가 봉건제도를 시행했었다. 중앙에 천자가 있고, 차례로 제후(公), 경(卿), 대부(大夫)가 서열을 이루는 피라미드형 권력구조였다. 이들의 작위는 모두 세습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공(公, 제후)은 공물(貢物)을 받고, 대부는 식읍(食邑)을 받으며 사(士)는 전(田)을 받았다. 서인은 노동력으로 살고, 공상인은 관부에 속해 살았다."(國語, 晉語4) 다시 말해 공경대부라 일컬어지는 귀족은 영토를 하사받았고, 당시에 서인이라 불렸던 농민과 공상인은 귀족들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이렇듯 귀족과 사농공상의 구분은 이미 3천여 년 전에 굳어져 있었다.
봉건제도하에서 계층상승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귀족들도 정해진 등급에 따라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의례에 차등을 두었다. 그것이 주나라의 예악(禮樂)이다. 완벽한 계급제 사회에서 정해진 직위를 대대손손 이어가며 맡은 일을 잘하는 것이 봉건사회의 미덕이었다.
사(士)라고 불리는 계층의 지위는 좀 특별했다. 그들은 약간의 땅을 하사받았지만 세습되지는 않았고, 그의 자식이 다시 사가 되면 그것을 이을 수는 있었다. 그들은 귀족과 서인의 중간에서 실질적인 사무를 보는 사람들이었다. 춘추전국 시대가 되자 그들의 신분에 변화가 생겼다. 자신을 중용하고 좋은 대우를 해주는 주군을 찾아 원래 속해있던 영지를 떠나는 일이 일상처럼 벌어졌다. 제자백가는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출현했다.
진나라 역시 상앙(商鞅), 이사(李斯), 정국(鄭國) 등 유능한 인재를 받아들였다. 게다가 전쟁에서 공훈을 세우면 농민에게도 작위와 토지를 주었으니 계층상승의 기회가 폭 넓게 주어졌다.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국가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신분상승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역량을 적극적으로 발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진시황의 등장과 함께 중국에서 봉건제는 끝이 났다.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중국의 왕조에서 귀족의 작위는 폐지됐다. 한나라 때는 찰거(察擧)라는 추천제로 관리를 등용했고,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구품중정제라는 계급제를 통해 관리를 뽑았다. 귀족출신의 명망 있는 가문은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관리를 배출해야 했으며 신분이 상승한 사 계층도 관직을 얻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이것은 권력투쟁이었다.
수·당대에 이르러 과거제도가 시행되면서 계층상승의 길은 넓어진 듯했다. 이제 나라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합격만 하면 관직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관직을 얻으려면 유교경전을 외우고, 성인들의 말씀을 내 생각처럼 말할 수 있으면 됐다. 시험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그 시험 하나로 신분이 바뀔 수 있으니 경쟁도 치열해졌다. 매우 명석한 사람도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려야 겨우 합격할 수 있는 그런 시험이었다. 주경야독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계층상승의 길은 열렸으나 오직 한 길이었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여러 가지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것과 신분상승은 아무 관련이 없었다.
중국에서 봉건제가 종식된 지 1천년 쯤 후에 서양에도 봉건제가 출현했다. 주나라의 봉건제가 혈연관계를 중심으로 이룩된 반면에 서양의 봉건제는 계약관계였다. 군주에게 토지를 부여받고 군사적 의무를 지는 것은 비슷하지만 계약당사자 간에만 유효한 계약이었다. "봉신(封臣)의 봉신은 나의 봉신이 아니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래도 영주와 장원의 농노가 세습신분 것은 마찬가지였다.
서양과 주나라의 봉건제가 다른 점은 제도 자체라기보다는 봉건제가 해체되는 과정에 있다. 서양의 봉건제도도 처음에는 자급자족을 목표로 하는 장원경제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장거리 무역이 성장하면서 변화를 맞았다. 도시가 발달하고, 도시의 기술자(장인)들도 성장했다. 결국 기근과 질병,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대규모 정치조직이 봉건제를 대체했다. 절대왕정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때 작위를 받으려는 야망을 가진 증간계층이 큰 영향을 미쳤다. 콜럼버스와 세익스피어도 그런 사람이었다. 20세기 중반에 '동양과 서양'이라는 책을 쓴 노스코트 파킨슨(Northcote Parkinson)은 부사관(sergeant)이나 수부장(swain)을 예로 들면서 기술도 갖추고 글도 깨우친 이들이 장교와 부하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학문을 소수의 특권층이 독점하던 다른 나라들에서는 이들과 동격인 계층이 생겨나지 못했다. 지금도 아시아에 그와 같은 계층이 정말로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다."고 했다.
파킨슨의 말과는 달리 그런 중간계층이 아시아도 있었다. 단지 중국에는 사(士)라는 계층으로 존재했지만 너무 오래 전 일이었고, 일본은 운 좋게 그들의 봉건제가 붕괴할 무렵에 하급무사들이 그런 역할을 했다. 일본의 경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근대화 과정에서 새로이 성장한 상인계층이 하급무사와 동맹관계를 맺은 것이다.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상인이나 돈놀이꾼들이 혼인이라는 공인된 방법으로 상류계급의 신분을 샀다고 했다. 엄격한 계층사회처럼 보이는 일본에서 계층 간 이동이 더 쉽게 일어난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양한 분야에서 기술과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신분상승의 야망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역사의 발전단계에서 봉건제를 거치느냐 아니냐보다 중요한 것이 계층 간 이동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활발히 이루어졌는가이다. 애석하게도 중국과 한국은 근대화를 맞닥뜨릴 때 신분상승의 통로는 과거제라는 극히 제한된 통로뿐이었다.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또 다시 세습의 시대가 도래했다. 삼성, 현대, LG 등 대기업이 그렇고, 거의 모든 중소기업도 그렇다. 로스쿨도 부의 세습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는 혐의가 짙으며 하다못해 유명한 맛집도 대학 나온 자녀가 가업을 잇는다. 괜찮아 보이는 돈벌이는 모두 세습이 되어간다. 공무원 시험은 청년들의 유일한 신분상승의 길이 되었다. 전국에 70만 명이 넘는 청년들이 공시생이라는 이름으로 시험공부에만 몰두한다. 사회는 활력을 잃었다. 계층상승의 기회가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이미 경험했는데도 벌써 잊은 듯하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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