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의 말이다. "공자는 덕과 학식이 뛰어났고 신의 섭리에 의해 중국에 선물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공허한 명예욕에 유혹당하지 않고 백성의 행복과 복리를 위해 노력함으로써 자기의 재능을 전적으로 발휘했습니다. (중략) 중국의 옛 황제들과 제후들은 정치가인 동시에 철학자이기도 했는데 철학자들이 다스리고 제후들이 철학하는 곳에서 국민이 행복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중국의 오제(五帝) (황제, 전욱, 제곡, 요, 순)는 플라톤이 말한 이상적인 철인정치가들입니다." 별다른 특기할만한 내용은 아니다. 볼프의 말을 더 들어보자.
"공자의 언행은 우리가 그리스철학으로부터 얻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도덕철학과 국가철학의 보고로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에서 윤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신을 전제로 한다. 신이 배제된 공자의 윤리는 유럽 경건주의자들에게 참을 수 이단적 주장이었다. 게다가 중국 사상을 유럽 문명의 기원으로 간주되는 그리스철학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리스철학을 바탕으로 구축된 기독교 신학에 대한 거부의 에두른 표현이었다. 볼프는 이임사가 불러온 파문 때문에 대학을 떠나야 했지만, 그의 말은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할레대학을 떠난 볼프가 마르부르크대학에 자리를 잡자 학생 수가 50%나 늘어났다고 한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당시 기독교적 보수주의에 질식할 지경이었고 그들은 공자로부터 구체제에 대항할 사상적 무기를 찾고자 했다.
공자에 대해서 환호하든, 반발하든 한다는 것은 청중들 역시 이미 공자에 대해서 일정 정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어떻게 유럽에 전해지게 된 것일까? 예수회는 중국선교를 시작하면서 적응주의를 선교 전략으로 삼았다. 적응주의란 가톨릭의 현지화를 의미했다. 현지화하기 위해서는 선교지의 사상, 역사를 알 필요가 있었다. 선교사들은 중국에 대한 막대한 정보를 유럽으로 보냈고 유학 관련 경전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들에 의해 명예혁명 이전에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주역> 등 대다수 유교 경전의 라틴어 번역이 완료되어 있었다. 이런 라틴어판 유교경전을 토대로 저명한 정치학자 존 아서 패스모어(J. A. Passomore)가 '유럽철학의 공자화'라고 규정한 사태가 17, 18세기 유럽 사상계에 휘몰아친다.
유럽 사상의 공자화를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은 공자 사상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공자에 대한 상(相)이 서 있지 않으면 유럽의 '공자 열풍' 을 논할 수 없다. 현대 한국인 대다수가 공자를 고리타분한 예절교육 강사쯤으로 알고 있는데, 유럽의 일급 사상가들이 이런 공자에게 열광했을 리 없다. 먼저 공자로 대변되는 동아시아의 전통사상에 대해 알아보자. 책을 기본으로 하되 황태연의 논문 '서구 자유시장론과 복지국가론에 대한 공맹과 사마천의 무위시장 이념과 양민철학의 영향'(2012)의 내용을 참조해 설명한다.
유교에 대한 가장 뿌리 깊은 선입견은 물질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교가 물질적 풍요를 천시한다는 고정관념은 끈질기다. 현대 중국의 대철학자 리쩌허우는 '중국고대사상사론'에서 이런 설명을 한다. "원형적인 공자학은 생산수준이 매우 낮은 고대의 조건 속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생산발전이나 생활 수준을 높이려는 문제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황태연은 이런 생각은 유가 사상에 대한 선입견일 뿐이라고 말한다.
황태연은 공자의 인(仁)사상의 최종목표는 은혜를 널리 베풀어 뭇사람들을 구제하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이라고 한다. 인(仁)사상에는 두 가지 기둥이 존재한다. 공자는 백성을 물질적으로 부양하는 양민(養民)이 국가의 제1 책무이고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교민(敎民)을 제2 책무로 규정했다. 이점은 백성의 먹고사는 문제를 개인사로 간주해 국사에서 추방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관과 대척적이다. 군자가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이 풍족하지 못함에 대해서 공자는 비판한다. "백성이 유족하지 않다면 군자는 이를 부끄러워해야 하고, 백성의 수가 많고 적음이 균등한데도 다른 편이 우리보다 갑절을 이룬다면 군자는 이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가 알던 공자가 아닌 것 같다. 공자는 가난을 찬양하는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읊조리는 사람 아니었나? 황태연은 공자, 맹자의 경전 어디에도 '안빈낙도'라는 표현은 없다고 말한다. 공자의 '군자'는 어쩐지 인격과 능력을 겸비한 행정책임자를 연상케 한다.
백성을 부양하는 양민은 결국 백성을 잘살게 만드는 부민(富民)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부민의 방법이 특이하다. 공자는 부민의 방법으로 무위이치(無爲而治)와 유위이치(有爲而治) 두 가지를 제시한다. 여기에서 위(爲)는 '할 위'가 아니라 '하게 할 위', 즉 사역의 의미다. 무위이치는 백성을 책임지는 위정자가 하는 일 없이 논다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을 의미한다. 논어 '위령공'편을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무위이치자는 순임금이라! 무엇을 했는가? 몸을 공손히 하고 똑바로 남면(南面)했을 따름이다." 황태연은 남면을 "신하들의 자율적 국정 운영과 백성의 자유로운 생업활동을 보장하고 가만히 지켜보는 덕치"라고 해석한다. 유위이치는 무위이치가 통하지 않는 영역에서의 개입을 의미한다. 황태연의 설명이다. "무위시장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고 역기능성을 규제, 차단함으로써 부민을 완성하는 이 ‘유위이치’의 정책이 부민의 대도를 구현하는 두 번째 구체적 원칙이다." 유위이치는 복지정책으로 연결된다. 공자는 아픈 환자, 노인, 고아 등에 대한 민생복지를 강조했다. 공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적극적인 복지를 강조했다. 무려 2500년 전이었다.
공자의 친시장적 무위이치는 맹자의 세금감면을 통한 시장활성화 정책을 거쳐 사마천의 시장주의로 연결된다. 사마천은 <사기>의 '화식열전'에서 공자적 시장자유주의를 논한다. 사마천은 물자와 산물의 풍성함 없이 고립된 국가를 이상화하는 노자의 소국주의를 비판한다. 사마천은 경제를 관통하는 도(道)로 자연지험(自然之驗)을 강조한다. 자연지험은 경제 부문에서 정책당국의 작위적 개입을 제거해야 시장이 활성화된다는 주장이다. 그런 활성화된 경제를 움직이는 어떤 원리를 사마천은 자연지험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위정자의 인위적 개입은 사람들을 유족하게 만들지 못한다. 사마천은 계연의 사례를 든다. 월(越)나라가 오(吳)나라에 패한 후 등용한 계연(計然)은 지연지험의 도를 활용해 시장자유화를 발전시켜 월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무위이치, 자연지험의 친시장적 정책은 중국의 전통이 되었다. 시장이 발생시키는 부작용은 유위이치의 복지정책으로 개입했다. 정책적 일관성 덕분에 중국과 중국을 따라 한 동아시아는 세계적인 번영을 구가했다. 경제의 핵심은 현재도 과거도 제철이다. 중국의 제철혁명은 기원전 600년부터 시작되었다. 연간 주철 생산량이 1078년에 12만5000톤에 달했다. 유럽의 경우 1700년경에 도달한 수치다. 1750년경 동양의 국민소득은 서양보다 220퍼센트 높았다는 것이 폴 베이로크(Paul Bairoch)의 연구 성과다. 베이로크가 설정한 동양에 아프리카를 포함했음에도 그런 수치가 나왔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경제가 경이적이었음을 반증한다. 전성호와 제임스 루이스가 공동으로 진행한 연구는 더 극적이다. 1780~1809년 사이 조선과 유럽을 비교하자면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런던의 숙련노동자보다 조선의 숙련노동자가 더 나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영국은 식민지착취를 통한 잉여가 국가 전체에 흥성거리던 시대였다. 이에 반해 조선은 오로지 자신의 내포적 발전을 통해 이웃 누구를 괴롭힘 없이 달성한 성취였다. 이런 경제가 반전되는 것은 유럽의 군사적 침략과 식민지 착취가 본격화된 이후였다.
중국의 산업적 문화적 융성은 유럽으로 전해졌다. 볼테르를 위시한 많은 계몽주의자들이 중국을 찬미하고 종교적 미몽에 헤매는 유럽을 비판했다. 유럽 지식인들은 절대자 없이도 윤리적 삶이 가능한 '중국적 이신론'에 열광했다. 유럽은 계몽 군주제 치하가 아닌 '미몽 군주제' 치하였다. 이런 군주제를 종교적 보수주의가 뒷받침하고 있었다. 태극기부대의 핵심이 기독교 근본주의인 것과 유사하다. 중국의 영향은 마침내 '제한 군주정'이라는 정치체제 개혁으로 이어진다. 영국의 윌리엄 템플 경은 명예혁명 이전에 중국의 내각제를 분석·연구했다. 1679년에는 찰스 2세의 명령으로 추밀원 내각을 만들었다. 왕의 약속 위반으로 8개월밖에 지속되지 못했지만, 명예혁명 이후 다시 '영국식 내각제적 제한 군주정'으로 부활한다.
명예혁명 이후 유럽의 지식사회는 공자사상의 영향권으로 들어갔다. 당대 유럽 사상계의 파천황이었던 볼테르가 중국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르네상스가 '그리스철학'이 번성했다면, 계몽주의시대는 '공자 철학'의 번성기였다. 볼테르는 '제국민의 도덕과 정신에 관한 평론'에서 "공자 제자들은 사해가 다 동포임을 과시한다. 지구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가장 행복하고 가장 존경할만한 시대는 바로 사람들이 공자의 도를 따르는 시대였다"고 말한다. 당시 중국의 압도적 경제력·사상적 감화력이 없었다면 절대 나오지 않았을 표현이다. 볼테르만이 아니었다. 다양한 사상가들이 중국을, 공자 철학을 의식하며 자신의 사상을 구축해갔다. 황태연은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18세기 유럽 지식인들은 이처럼 공자 철학을 무기로 그리스·스콜라 철학을 물리치고 기독교적 몽매를 맹렬히 비판하면서 이신론적·무신론적 철학 사조를 관철시켜 유럽의 정신을 개화시켜나갔다." 계몽사상가들은 동아시아의 종교의 자유, 사상학문출판의 자유, 상업의 자유, 만민평등교육, 과거제를 통한 개방적 공무담임권, 중국과 같은 세습 귀족 철폐를 부러워하고 이를 관철하려 했다. 이런 흐름을 마이클 알브레히트(Michael Albrecht)는 아메리카 대륙 발견에 버금가는 역사적 대사건으로 비유했다.
공자의 경제사상인 무위이치는 근대 자유시장경제로 연결된다. 중국적 경제사상을 유럽의 언어로 살려낸 것은 프랑수아 케네였다. 케네는 자신의 저작 <경제표>(김재훈 옮김, 지만지 펴냄)를 통해 생산, 유통, 분배, 소비, 생산 재생산은 시장의 자연법을 따르도록 '자유롭게 방임'(레세페르, laissez-faire)' 하고,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생산활동을 자유롭게 할 것을 주장했다. 케네의 자유경제 사상은 당시 특권과 독점의 장벽이었던 중상주의 체제로부터의 경제적 해방을 의미했다. 농업을 생산적 활동으로 본 케네는 기업농을 생산 활동의 주체로 상정했다. 케네의 사상을 월터 데이비스(Walter W. Davis)는 이렇게 말한다. "서양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영향은 보통 상정되어왔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자유방임경제학, 즉 애덤 스미스와 중농주의자들을 거쳐 중국으로 거꾸로 추적될 수 있는 개념들을 생각해보라. 중국이 케네의 모델이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수 없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경우는 어떤가? 영국의 사상가 레슬리 영은 자신의 논문 '시장의 도: 사마천과 보이지 않는 손'(1996년)에서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중농주의자들이 '자연의 도', 즉 '자연질서' 개념에서 수입된 것이라 말한다. 레슬리 영은 심지어 "사마천이 애덤 스미스를 직접 고취한 한에서 그는 경제학의 참된 애덤으로 참된 스미스로 알려질 만하다"고 주장한다. 레슬리 영만이 아니라 영국 정치학자 홉슨의 주장을 들어보자. "앵글로-색슨 사람들이 편협하게 스미스를 최초의 정치경제학자로 생각하지만 스미스의 배후에는 프랑스 중농주의자 프랑수아 케네가 있고 더욱이 케네의 배후에는 중국이 있다."
공자의 유위이치 사상인 양민·교민국가론은 근대 독일의 대표적 경제학자인 크리스티안 볼프, 요한 유스티로 이어져 프로이센의 관방학(행정학)으로 발전한다. 이 사상은 이후 국민을 부양하고 보호하는 복지국가론인 양호국가사상으로 발전한다. 양호국가론은 마침내 비스마르크정부에서 복지정책으로 현실화된다. 공자의 무위이치와 유위이치가 유럽에서 꽃을 피운 경우다. 그런데 이 두 사상 못지않게 의미가 있는 공자의 개념 하나가 유럽에 전개되었다. 공자의 '서(恕)', 즉 한자 의미로 풀이하자면 다른 사람의 마음과 같아짐을 의미하는 '서'는 흄의 '공감'으로 거듭났다.
영국 경험론의 거목인 흄은 윤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런데 흄의 핵심 윤리개념인 '공감'은 공맹 철학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받아들여 자신의 철학으로 정립한 것이다. 우물에 빠지는 아이에게 누구라도 측은지심을 느낄 것이라는 맹자의 말과 말발굽에 짓밟히려는 사람을 보면 누구나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흄의 설명은 놀라울 만큼 일치한다. 공맹과 흄의 사유구조의 유사성은 놀라울 정도다. 미국의 저명한 철학연구자 놀런 제이컵슨(N. P. Jacobson)의 말이다. "흄에게서 가장 중심적인 개념들 중 하나, 즉 보편적 공감의 이론이 맹자에게서 처음 비롯되고 흄의 몇몇 동시대인, 특히 애덤 스미스 등 주요한 동시대인들의 윤리학을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것은 거의 우연일 수 없다." 제이컵슨은 이렇게도 말한다. "흄이 인간생활의 근본적 접착제요 인간본성의 궁극적 근거로 간주하는 비언어적 교감의 철학적 연결 경로는 지중해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맹자의 보편적 공감의 개념에서 시발하는 또 하나의 아시아적 주요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서양윤리학에서 '공감' 개념의 도입은 사유의 혁명적 전환이었다. 전통적 서구윤리학에 대해 황태연은 "그리스철학의 합리주의 전통에서 이성은 보편적인 반면, 감성과 감정은 특수적일 뿐 보편화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머리만 발달하고 인간적 감수성은 미발달한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 이런 사유가 발전하면 칸트 윤리학이 된다. 조너선 이스라엘(J. Israel)의 연구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급진적 계몽주의가 계몽주의의 핵심추동력이었음을 주장한다. 평등과 자유를 옹호한 급진적 계몽주의는 신분제 사회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이란 국가모델을 사상적 무기로 활용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지나친 친중국화에 반발하는 사상가들도 나타나게 된다. 몽테스키외를 필두로 칸트가 등장했다. 칸트는 논문 '추측해 본 인류역사의 기원'에서 중국을 '자유가 근절된 사회'로 묘사한다. 공맹의 측은지심을 바탕으로 한 흄의 공감론을 칸트는 의무윤리로 뒤엎는다.
칸트는 공감적 연민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칸트는 자신의 책 <윤리형이상학>에서 곤경에 처한 친한 친구를 돕지 말 것을 권한다. 심지어 칸트는 주위의 불행에 공감하는 감정은 고통을 느끼는 사람의 수를 늘린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자기의 가장 친한 친구의 재화(災禍)를 동정하는 정동(감정. 필자 주)에조차 빠져서는 안 된다는 원리는 스토아철학의 전적으로 옳고 숭고한 도덕적 원칙이다"라고 칸트는 책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에서 주장한다. 칸트의 이런 사이코패스적 언설이 철학으로 이야기될 수 있었다는 것은 동양적 '공감'이 서구에서 그만큼 낯설고 이질적 사유였음을 말해준다. 철학연구자 나종석은 논문 '칸트의 자율성 도덕론과 동아시아'(2016)에서 칸트윤리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칸트는 연민을 모욕으로 이해한다. 존엄한 이성적 존재에 대해서는 연민의 감정은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 (중략) 칸트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연민을 느껴 그에게 호의를 보이는 행동도 사람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근대 서양이 배출한 불세출의 철학자가 보인 공감에 대한 반감은 놀라울 정도다. 칸트가 공감에 보인 극렬한 반감은 공자적 '공감'이 서양적 생활 세계에서 얼마나 이질적 개념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공감개념의 존재적 부재는 이후 일어난 제국주의 대학살극의 단초였다.
황태연의 연구는 황태연 혼자만의 이설이 아니다. 비슷한 연구도 상당히 많이 축적되어 있다. 다만 한국인들이 잘 몰랐을 따름이다. 가령 주겸지의 <중국이 만든 유럽의 근대>(전홍석 옮김, 청계(휴먼필드) 펴냄)도 황태연의 주장과 많은 부분 겹친다. 황태연의 주장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중국은 기나긴 시간 동안 압도적으로 선진적이었다는 주장이다. 사실이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이희재 옮김, 이산 펴냄)를 굳이 읽지 않더라도 앵거스 매디슨의 통계만을 참조해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 모델을 받아들여 중국보다 더 중국적인 국가를 만든 고려와 조선이 전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국가였음도 알 수 있다. 일본 덕분에 근대화되었다는 헛소리도 이 책의 내용만으로 간단히 물리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동의할 만하다. 그런데 황태연은 조금 더 나아가는 성싶다.
황태연은 자신의 주장을 통해 두 가지를 겨냥하고 있는 것 같다. 첫 번째는 중국과 한반도가 원래부터 최선진 문명세계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성공적이다. 황태연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이들과 황태연은 많이 다르다. 가령 주겸지의 책만 펼쳐보아도 중국이 유럽보다 물질적으로 더 잘살았다는 주장만 있다. 황태연의 또 다른 역저 <감정과 공감의 해석학>(청계(휴먼필드) 펴냄)에서도 일관되게 주장하지만, 그는 동아시아의 경이적 성공은 공자적 공감윤리에 기초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지점에서 황태연의 연구와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확보했다. 책 대부분을 이 주장을 설명하는 데에 할애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황태연은 첫 번째 목표를 넘어서는 또 다른 지점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문득 들게 된다. 공자의 시장친화적 무위이치를 통한 경제발전 전략이 그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이념적 멘토였던 그의 경력을 알게 되면 의구심은 더욱더 짙어진다.
신자유주의 1기는 레이건, 대처, 등소평의 합작품이었다. 신자유주의가 세계적 흐름으로 굳어진 것은 신자유주의 2기를 이끈 클린턴, 블레어, 김대중 세 사람 때문이었다. 물론 복지정책을 대대적으로 도입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앞선 두 사람과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책적 기조에서 동일한 흐름이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힘을 극단적으로 신뢰하는 사상이다. 경제의 불균등한 성장은 예외 없이 불평등을 초래한다. 심각한 불평등은 대중을 좌절하게 만든다. 이전의 나 자신보다 조금 나아졌지만 내 옆의 누군가보다 훨씬 못해진 자신을 보는 것은 불편하다. 황태연은 무위이치라는 시장자유주의가 과거 역사 속에서 국가적 부를 창출하는 핵심수단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수단이었다'는 과거형이 '수단이다' 또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로 변하는 느낌을 받는다.
황태연의 연구는 조선을 덜 떨어진 국가로 인식하는 '조·알·못(조선을 알지 못하는)' 대중에게 청량감 있는 지식을 제공할 것이다. 그의 연구는 깊이와 넓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하다. 다만 그의 연구가 필자가 의구심을 나타낸 그 과녁을 겨냥한 것이라면 또 다른 방식의 검증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을 말해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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