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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생명을 향한 걷기에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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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생명을 향한 걷기에 나서자"

<21세기 사상강좌> 사티쉬 쿠마르의 '소박한 삶'

5월5일은 '어린이 날'이다. 많은 부모들은 보채는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사거나, 아이들을 기쁘게 해줄 일을 계획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주인공들에게 우리가 남겨줄 세상의 모습은 어떤가?

한쪽에서는 끔찍한 살육과 폭력으로 얼룩진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에 편입하지 못한 동포의 나라에서는 산업화의 낡은 유산을 감당 못해 터무니없는 사고로 수백명이 목숨을 잃고, 우리 아이들 또래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아수라장 같은 모습이 나아지기보다는 갈수록 심한 모습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데 있다.

환경 문제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각종 환경재앙 시나리오들이 주기적으로 언론에 거론되고 있으며, 그 양상도 점점 심해지고 있다. 해마다 불가항력인 자연 재해도 더 빈번해져 인간의 환경 파괴에 대한 '지구(가이아)의 복수'라는 말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아이들이 짊어질 미래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둡다. 이제 '어린이날' 하루 기쁨을 안겨주기보다는 좀더 밝은 미래를 그들에게 안겨주는 데 나설 때가 아닐까?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 네 번째 강연자로 한국을 방문한 사티쉬 쿠마르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29일 저녁 공개 강연회에 이어, 30일 생태·환경 활동가들과 간담회를 가진 세계적인 생태·환경 활동가이자 영성 지도자인 사티쉬 쿠마르는 시종일관 겸손한 자세로 자연과 사회, 인간이 맺어나가야 할 관계에 대해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세계의 대안적인 모습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고민을 털어놓았다.

사티쉬 쿠마르는 "자연과 사회와 평화를 유지할 때, 내면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서 "자연과 사회, 내면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것"을 권고했다. 내면 수양과 관련된 책이 유행하면서도 정작 생태·환경의 문제나 '이라크 파병'과 같은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우리나라의 최근 경향에 큰 시사점을 주는 대목이다.

사티쉬 쿠마르는 또 "지금과 같은 산업자본주의와 세계화는 지탱가능한 방식이 될 수 없다"면서 "'자립 경제', '소박한 삶'으로 대표되는 대안적 삶에 실천과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쿠마르는 "땅과 공동체를 살리는 다양한 실천들은 현재의 산업자본주의가 위기에 닥쳤을 때 그 위기를 벗어나는 '구명선'과 같다"면서 "우리는 '구명선'을 만드는 일과 함께 WTO, IMF 등에게 산업자본주의가 빙산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경고음을 끊임없이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쿠마르는 "낙관주의야말로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힘"이라며 "위기의 시대일수록 인내심과 지혜 그리고 긴급한 상황에 대해 긴급하게 대처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1960년대 미국과 구소련의 핵무장을 비판하기 위해 인도에서 미국까지 8천㎞를 걸었던 것처럼 세계 평화를 위해 언제든지 두려운 마음으로 걷기에 나설 수 있다"면서 "그 걷기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사티쉬 쿠마르는 미국과 구소련의 핵무장을 비판하기 위해서 무일푼으로 인도에서 러시아, 유럽을 거쳐 미국까지 걸어서 2년6개월에 걸쳐 8천7백km의 '평화를 위한 순례'를 감행한 인도 출신의 생태운동가이다.

그 후 사티쉬 쿠마르는 생태·환경운동의 영성적 지도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1974년 생태, 환경, 대안 경제와 새로운 영성을 지향하는 생태잡지 <리서전스>의 편집자로 추대돼 그 후 30년 가까이 <리서전스>를 발간했다. 쿠마르는 또 경제학자 슈마허(E. F. Schumacher)와 친분을 쌓은 것을 계기로 그 사후에 '슈마허 칼리지'를 설립해 지금까지 프로그램 기획자로서 관여하고 있다. 현재는 영국의 하트랜드 시골집에서 2천평의 땅에서 영국인 아내 준과 36살 된 아들과 농사를 지으면서 <리서전스>를 편집하고, 슈마허 칼리지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30일 부암동 에너지대안센터 녹색평론 자료실에서 열린 생태·환경 활동가와의 대담에서는 이라크 파병과 생명 파괴에 반대하며 전국을 순회하고 있는 '평화 유랑단'의 문정현 신부 일행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묵묵히 풀뿌리 생태·환경을 펼치고 있는 활동가들이 참여해 사티쉬 쿠마르와 함께 세계와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공유했다.

다음은 29일과 30일, 이틀간 사티쉬 쿠마르와 생태·환경 활동가들을 비롯한 청중들이 나눴던 대담을 재구성한 것이다.

사티쉬 쿠마르와의 대담(소제목보다 크게)

질문 :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이틀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받은 인상은 어땠나?

사티쉬 쿠마르 : 한국을 처음 방문했지만, 내가 쓴 두 권의 책이 한국에 번역됐고, 김종철 선생이 나에 대한 글을 써서 <녹색평론>에 발표한 덕분에 한국에 나를 아는 사람이 약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김종철 선생의 글은 내가 받아야 할 것보다 더 과분하게 나를 칭찬한 것이었다.

오늘 삼각산에 있는 화계사에 다녀왔는데, 한국의 아름다움에 상당히 강한 인상을 받았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것은 한국의 산이다. 한국의 산은 너무 아름다운 인상을 줬는데, 나는 이것을 일종의 '산의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모래 군의 열두 달>(송명규 옮김, 따님 펴냄)의 저자인 미국의 생태 사상가 알도 레오폴드는 "산처럼 생각하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산의 정신' 즉 '자연의 정신'을 이해하라는 말이다.

***자연을 대상화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질문 : 그런 접근은 현대의 많은 과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산과 같은 자연을 물질로 대상화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쿠마르 : 그렇다. <가이아>(홍욱희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를 쓴 제임스 러브록은 이런 레오폴드의 철학을 좇아 '가이아 이론'이라는 가설을 만들었다. 레오폴드나 러브록은 지구를 죽어있는 물질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았다. 이런 사고방식은 러브록은 물론 프리초프 카프라와 같은 과학자들에게 계승되고 있다. 반면 많은 정치·사회 지도자와 기업가들은 자연을 단순한 물질로 파악하는 19세기의 사유 방식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자연을 얼마든지 남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여긴다.

지금 생태·환경운동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문제는 이런 세계관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이다. 이미 철학이나 종교, 특히 불교나 힌두교는 이미 오래전에 자연은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것을 인식했다. 우리가 지구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여긴다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 자연과 지구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자연, 사회, 내면의 평화를 지향해야**

질문 : 자연과 관계 맺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우리의 삶에 왜 그렇게 중요한가?

쿠마르 : 인도에는 만트라 주문이 있다. "샨티 샨티 샨티." 여기서 '샨티'는 평화라는 의미다. 우리는 보통 샨티를 세 번 외운다. 첫 번째 샨티는 자연을 위한 평화다. 자연의 평화가 없이는 사회의 평화나 영혼의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

자연은 일종의 선물이므로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간디는 "자연이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서는 충분하지만 한 사람의 탐욕을 위해서는 부족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나의 씨앗을 심으면 사과나무가 되고, 그 사과나무는 50년에 걸쳐서 우리에게 사과를 준다. 이것이 바로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사과나무에 열매가 가득 맺게 되면 모든 생명체와 모든 사람들에게 관대한 선물이 된다. 사과나무는 가난한 사람과 부자, 죄인과 성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자연의 평화의 결과로써 우리는 사회적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라크나 코소보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들은 모두 사회적 부정의 즉, 경제적 불평등과 착취 등이 그 원인이다. 사람들은 종종 정치적 이유나 테러리즘과 같은 표면적인 이유를 대지만 그것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제 이런 사회적 부정의를 극복할 수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세계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올바르고 공정한 사회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평화 없이는 어떤 평화도 있을 수 없다.

산업사회와 자본주의는 우리의 삶에 결코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고, 삶과 사회를 추악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에 기반을 둔 '소박한 삶(simple life)'을 지향해야 한다. 소박한 삶이야말로 우아하고, 아름답고, 지탱가능한 삶이다.

일단 여러분이 자연과 사회의 평화를 유지하게 되면 내적인 평화를 얻는 것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우리의 내적인 평화는 스스로의 분노, 탐욕, 욕망, 집착 같은 것에 의해서 흔들린다. 이것들의 원인이 되는 외적인 조건이 가벼워지면 내적인 마음도 가벼워질 수 있다.

***자연, 사회, 내면의 평화는 내면의 평화와 불가분의 관계**

질문 : 자연, 사회, 내면의 평화는 각각 어떤 관계인가? 좀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쿠마르 : 인도 철학에서는 우리가 자연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야그나', 사회와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다나', 내적인 평화를 '사타스'라고 한다. 이 세 가지 평화의 원칙이 인도 힌두 철학의 평화의 원칙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자연과 사회, 내적인 영성의 평화를 지향할 수 있을지 말해준다.

야그나는 자연으로터 우리가 취한 것을 다시 자연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는다. 하나의 나무를 자연에서 얻으면 다시 자연으로 다섯 개의 나무를 돌려줘야 한다. 이렇게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을 돌려주는 방식을 야그나라고 할 수 있다.

다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많은 것을 얻는다. 수천년 동안 그 사회가 쌓아 온 관습, 문화, 교육 등을 얻는다. 우리는 이렇게 사회로부터 받은 선물을 사회에 다시 돌려줘야 한다.

앞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개인의 상상력, 지능, 감정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인간 활동이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통해 내적인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우리는 이것을 보충해줘야 한다. 이런 에너지의 보충을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다. 산에 올라갈 시간, 명상할 시간, 강가를 거닐 시간, 꽃을 관찰하는 시간, 마음속으로 평화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을 통해 고갈된 마음속의 에너지를 보충해야 한다.

지금 전세계의 환경운동은 이처럼 큰 그림을 그리면서, 자연과 사회 그리고 내적인 영성이 하나로 통합돼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생태친화적인 지향,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것, 정신적 평화에 대한 갈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정신적 평화가 절이나 수도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 가지가 하나로 통합돼 생태적인 것, 사회적인 것, 정신적인 것을 하나로 인식해야 한다.

내가 '심층 생태학'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이분법적이고 파편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서 더 전일적이고 상호 연결됐다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개발', '진보'에서 '소박한 삶'으로**

질문 : '개발'과 '진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망각하면서 파괴를 자행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쿠마르 : 내가 생각할 때 '개발'이라는 단어는 이미 오염된 단어이다. 그것은 더 이상 의미 있는 뜻을 가지지 못한다. 1950년경에 미국의 한 대통령은 "이 세상에는 개발국가와 저개발국가, 2개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비행기, 자동차가 있는 개발국가와 농사를 짓고, 절이 있는 저개발국가. 이런 식으로 사용된 '개발'이라는 단어는 절박한 현실을 감추는 데 이용당할 뿐이다. '진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이제 인간 사회와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의미하는 새로운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방금 말한 '자발적 소박함'에 기반을 둔 '소박한 삶'이다. 우리는 '질'의 문제에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삶의 질, 문화의 질, 의식주의 질, 모든 면에서 양보다는 질을 따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우리가 지향하는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 개인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두 번째는 사회적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 <녹색평론>을 읽고, 토론하거나 유기농업에 참여하고 그것의 보급에 동참하는 것이 그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간디가 말한 것이다. 간디는 영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계화 시대 극복할 수 있는 대안, 자립 경제**

질문 : 간디의 스와데시(자립경제) 경제학이 대안이 될 수 있겠는가?

쿠마르 : 그렇다. '스와데시'는 굉장히 아름다운 단어이다. 이것의 의미는 우리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가능하면 직접 만들 수 있어야 하고, 그게 불가능하면 마을에서, 마을에서 불가능한 것은 도시가, 도시에서 힘든 것은 국가가, 국가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수입을 할 수도 있다. 바로 이렇게 내부에서 외부로 뻗어나가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지금처럼 외부에서 모든 것을 수입하는 경제는 지탱가능할 수 없다.

질문 : 세계화는 시대의 큰 흐름이다. 간디는 "영국의 상황을 빗대 인도인들이 영국인과 같이 산다면 지구가 5개가 필요할 것이다"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최근 인도 경제가 상당히 팽창하고 있다. 인도 출신으로서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 같다.

쿠마르 : 간디는 인도에서 새로운 '스와데시(자립 경제)'를 펼치려고 애썼지만, 독립 후 5개월 만에 살해돼 그 기회를 잃었다. 그 뒤를 이은 네루는 서양 교육을 받은 인도인으로 더 경제성장적이고 산업 위주의 경제를 만드는데 치중했다. 이것이 인도의 비극의 시작이다.

이런 경제성장 위주의 네루의 정책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인도는 결국 간디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했고 그 결과는 '파국'이다. 왜냐하면 인도에는 5개의 지구가 없기 때문이다. 인도인들은 15년 내지 20년 이내에 지금과 같은 인도의 경제 성장 방법이 잘못돼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간디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검토할 것이다.

***낙관주의는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힘**

질문 : 왜 15년이나 20년인가?

쿠마르 : 대부분 인간의 의식은 일종의 주기를 그리면서 변한다. 그 주기는 대개 15년에서 20년이라고 생각한다. 1960년대 인간의 의식과 지금 사람들의 의식은 분명히 다르다. 나는 인도의 경우에 15년이나 20년 후에는 사람들이 간디나 반다나 쉬바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질문 : 너무 낙관적인 게 아닌가?

쿠마르 : 여러분이 비관주의를 생각한다면 그저 포기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낙관주의는 우리가 행동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우리가 비관적이면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문정현 신부 : 이런 것도 생각해보자. 2003년에 새만금 간척사업에 반대하는 '삼보일배'가 있었다. '삼보일배'를 한 뒤에도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삼보일배'보다 더한 어떤 걸 할 수 있을지 막막한 심정이 있다. 갑갑한 현실을 타개할 돌파구를 찾는 것, 이게 낙관주의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2003년 세 분 성직자의 '삼보일배'는 쿠마르가 편집하는 <리서전스> 2004년 1~2월호(222호)에 실려, 사티쉬 쿠마르도 잘 알고 있었다.)

쿠마르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분리에 반대하는 운동이 성공하는 데는 40~50년이 걸렸다. 영국으로부터 인도 독립도 60~70년 이상의 운동의 결과이다. 간디는 15년이나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모든 것이 달라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이 다 무너졌다. 지금 미국이 강력해보이지만 언젠가는 미국도 무너질 것이다. 그것은 '모래 위에 세워진 집'이기 때문이다.

간디가 인도에 처음 왔을 때 인도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간디는 바로 행동에 옮기지 않고 2년 동안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인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내 어떤 운동을 펼쳐야 하는지를 모색했다. 우리는 지금 이것도 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을지, 전략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할지를 모색해야 할 때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긴급한 행동이 필요해**

문정현 신부 : 그런 상황이 아닌 듯하다.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파괴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당장 밖에 나가면 온통 다 파괴되고 있다.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보다는 전쟁을 추진하는 목소리가 더 세기 때문에, 아무리 "전쟁 반대"의 목소리를 높여도 최악의 상황은 계속 그대로 돌아가고 있다. 결국 모든 게 파멸된 다음에서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도대체 우리한테 희망은 있는가?

쿠마르 : 좋은 질문이다. 때때로 좋은 질문이 좋은 대답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또 어떤 경우에는 좋은 질문이 좋은 대답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웃음)

위기의 순간, 위험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우리는 더 많은 지혜와 인내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아주 제한된 힘만을 가진 미약한 인간일 뿐이다. 우리가 이루고 싶은 것을 하룻밤 새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긴급한 상황에서는 긴급한 행동이 필요하다. 최선의 행동을 하는 데 생명을 던질 준비가 돼 있어야 하고, 생명을 던지는 것에 두려움을 갖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희생이 거기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우리는 결코 운명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다. 단, 운명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지만 우리의 행동은 통제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행복해지고 싶다"는 갈망이 있다는 점이다. 생태·환경운동은 바로 그 사람들의 열망을 이해하고, 그것을 운동에 담아야 한다. 현재 생태·환경운동은 그런 것을 못하고 있는 것이 큰 약점이다.

***위기를 벗어날 '구명선'을 만드는 일**

(30일 간담회에는 인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세계화와 농업' 문제 등에 대한 글을 많이 써온 인도의 푸쉬파 서랜드라가 참여했다. 유네스코(UNESCO) 일로 한국을 방문 중인 서랜드라는 쿠마르보다 최근 인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푸쉬파 서랜드라 : 아까 인도에서 15년 내지 20년 이내에 인도인들이 간디나 쉬바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것은 매우 낙관적인 생각이다. 현재 인도는 급속한 산업화와 환경파괴로 갈수록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 자연 자원을 이용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모든 것이 급속도로 파괴되고 고갈되고 있다. 정치가들은 아주 가끔 생태·환경적인 것에 관심을 보이지만 그것은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때뿐이다. 농업과 농부들에 대한 관심도 정략적으로만 접근한다. 이런 모든 상황을 볼 때, 나는 쿠마르보다 현실에 대해서 훨씬 더 회의적이다.

쿠마르 : 실제로 인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지적 고맙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위기가 닥쳤을 때,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구명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산업자본주의는 언젠가는 망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만드는 '구명선'을 통해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이상호 옮김, 문예출판사)의 슈마허가 말했던 땅과 공동체를 살리는 실천이 바로 그 '구명선'이 될 수 있다.

질문 : 산업자본주의와 관련된 많은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붕괴됐을 때 그들은 너무나 심한 고통을 당할 것이다. 빙하로 질주하고 있는 '타이타닉호'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쿠마르 : 내가 '구명선'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이타닉호'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좋건 싫건 간에 산업자본주의가 붕괴한다면 많은 보통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은 바로 몬산토와 같은 다국적 기업과 조지 W. 부시, 토니 블레어와 같은 정치가, WTO, 세계은행, IMF와 같은 기존 시스템의 옹호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구명선'을 만들면서, 시애틀의 저항과 같이 부시와 블레어, WTO 등에게 산업자본주의가 빙산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고 계속해서 경고를 할 필요가 있다.

***생명공학 발전, 결국 보통 사람들에게 재앙이 될 것**

질문 : 생명공학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생명 현상에 사람이 개입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쿠마르 : 유전자 조작된 씨앗의 예를 보자. 소수의 다국적 기업에 의해서 이런 씨앗은 독점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농부의 손에서 다국적 기업으로 '씨앗의 권리'가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농부에게는 '자유의 끝'이고 자유로운 '농장 경영의 끝'이다.

소농들은 씨앗을 잘 보존하고 해마다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국적 기업은 유전자 조작된 씨앗을 통해 농부들로 하여금 해마다 새로운 씨앗을 구입하도록 만들고, 그것만을 재배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좀더 근본적인 문제는 생명공학의 바탕에 "인간만이 더 좋은 것을 창조할 수 있다"는 오만한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여러번 강조했듯이 우리는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생명공학은 근본부터 그것에 역행하는 행동이다. 농사를 짓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단순히 식량을 얻는 데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문화적, 공동체적, 영적인 활동이다. 생명공학은 결국 인간에게 이것을 앗아갈 것이고 그 최대 피해자는 '평범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채식 위주의 식단은 지구적 환경의 문제**

질문 : 채식을 한다고 들었다. 채식과 생태·환경운동, 영성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사티쉬 쿠마르는 쇠고기, 돼지고기는 물론 생선도 먹지 않는다. 다만 계란이나 유제품 일부는 먹는다.)

쿠마르 : 현대 사회에서 인구 증가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현재 세계 인구는 60억인데, 이 사람들이 모두 미국과 유럽 사람들이 먹는 것처럼 고기를 먹는다면 지구에서는 동물들이 살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인간과 패스트푸드만 지구에 남을 것이다.

한 사람의 채식 식단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땅은 1천평이나 5백평에 불과하지만, 육식 식 식단을 위해서는 최소한 5천평의 땅이 필요하다. 고기를 먹는 것은 이처럼 경제적이지 못하다.

거기다 우리는 동물을 고기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생각하지 동물에 대한 배려나 존경, 그들의 권리에 무심하다. 단지 소비되기 위해 공장식으로 사육되는 동물들이 행복할 리 없고, 이런 불행한 동물을 먹는 우리들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더구나 육식은 여러 가지 병들의 원인이 된다. 이런 동물들은 행복하지 못하고 이런 행복하지 못한 동물을 먹는 여러분도 행복할 리가 없다. 또한 이와 같은 고기 소비는 여러 가지 병들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비만은 대표적인 병인데, 미국은 성인의 약 40%, 유럽은 25%가 비만에 시달리고 있다. 심장질환과 암도 육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나는 극단주의나 몽상적인 이상주의자는 아니다. 약간의 고기 특히 자유롭게 방목해서 키운 가축에서 얻어낸 고기는 채식 식단에 대한 좋은 보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과 같은 육식 위주의 식단은 경제적이지도, 생태적이지도, 영적이지도 못하다. 우리는 좀더 소박하고 우아한 삶을 살기 위해서, 좋은 음식물을 적게 먹는 것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생활과 학습이 통합된 '작은 학교'**

질문 : 당신은 '작은 학교' 운동의 주창자이기도 하다. 당신의 모범을 따라 한국에서도 대안학교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작은 학교'들이 평화와 생태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사회 참여의 방식을 가질 수 있을까? 2003년 영국이 이라크 침공에 참여할 때 당신의 학교는 어떤 개입을 했는가?

쿠마르 :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하트랜드의 작은 학교에는 20명의 학생들이 있다. 우리 교육의 목표는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용적인 측면과 학문적인 측면이 그것이다. 학생들은 정원을 가꾸고, 요리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학문을 쌓는다. 학습과 생활의 통합을 지향하는 것이다. 교사들도 바깥에서 뭔가를 아이들 머리에 심어주기보다는 아이들 스스로 내부에서 바깥으로 솟아나는 교육을 펼친다.

사회 참여 역시 마찬가지다. 슈마허 칼리지는 2003년 2월15일 런던에서 1백만명이 모이는 큰 집회에서 중요한 멤버로 참여했다. 슈마허 칼리지 사람들은 집회에 참가하는 것 외에도 주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전쟁에 관한 토론을 벌이고, 평화 행진에도 참여했다. 이 모든 것이 교육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질문 : 슈마허 칼리지가 세계적인 생태 교육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교육 철학과 관계가 있나?

쿠마르 : 물론이다. 슈마허 칼리지가 성공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방금 지적한 생활과 학습이 같이 이루어지는 독특한 교육 시스템이다.

다음으로 다른 곳에서 만나기 어려운 세계적인 생태 활동가들을 슈마허 칼리지로 초대해 학생들을 만나 가르칠 기회를 준다. 이들은 3주간 같이 기숙하면서 생활을 같이 하면서 학생들에게 독특한 교육을 제공한다.

***지치고 힘들 때, 고통 자체를 직시하라**

질문 : 당신의 길은 끊임없는 '순례의 길'이다. 어느 순간 주저 않고 싶은 순간은 없었는가? 그 때 어떻게 극복했는가? 활동을 계속 해나가는 힘을 어디서 얻었는가?

쿠마르 : 그렇다. 내가 전 세계를 순례하는 동안에 어려운 점이 많았다. 심리적인 것도 있고, 육체적인 것도 있었다. 심리적인 어려움은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느끼는 외로움과 그들에게 미안한 감정 때문에 비롯됐다. 물론 육체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하루 종일 음식을 먹지 못할 때도 있었고, 아주 먼 길을 걸어왔는데도 민가를 찾지 못해 잘 곳을 못 찾은 적도 있었다. 이란에서는 모래 폭풍을 만나기도 했다.

그 때마다 나는 '세상에서 어떤 평화를 얻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여러 사람들이 부딪히는 어려움에 비하면 나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굶주림, 기근, 난민, 전쟁과 같은 수많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살아가면서 고통, 슬픔, 어려움을 겪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어려움을 겪은 뒤에야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더 공감하게 되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어려움을 통해 수천명의 난민들과 전쟁 희생자들에 대해서 더 공감하게 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됐다.

질문 :항상 우리는 매사에 목적을 염두에 두게 된다. 순례를 하면서 결과보다는 한 걸음, 한 걸음에 의미를 두는 것이 쉽지 않다. 특별한 방법이 있는가?

쿠마르 : 심리적, 육체적으로 고통을 느낄 때 그 고통에 직면해 응시하고 생각해보라고 충고하고 싶다. 살아있는 마음을 가진 자만이 슬픔을 느끼고, 살아있는 몸만이 고통을 느낀다. 슬픔, 낙담, 의심이 들면 그것을 회피하지 말고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응시하라. 고통이라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결국 그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사고방식은 고통, 의심을 나쁘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전통적인 철학, 특히 불교에서는 고통을 우리 삶의 일부로서 받아들일 것을 권유한다. 인간의 삶에는 항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있다. 이를 통해 인간은 전진할 수 있다. 우리는 고통에서 도망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한 걸음,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사티쉬 쿠마르>(서계인 옮김, 한민사 펴냄)로 번역돼 나온 쿠마르의 자서전의 제목은 그래서 <목적지는 없다(No Destination)>이다.)

***언제나 두려움 없이 평화 위한 걷기에 나설 것**

질문 : 또 다시 걸을 계획은 없는가? 당신이 세상을 향해 걸었던 그 때보다 지금이 더 나아보이지 않는다.

쿠마르 : 지금이 1960년대보다 훨씬 더 평화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걸었던 당시는 냉전 시기였고, 그 때도 지금만큼 많은 문제가 있었다. 어떤 시대나 문제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평화를 지향하기 위해서 걷기를 시작할 때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지금 걷기를 시작한다면 다시 두려움 없는 마음으로 임할 것이다. 부시와 블레어가 정말 세계 평화를 원한다면 그들도 전쟁을 사주할 것이 아니라, 이라크를 향해 걷기에 나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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