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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전태일을 만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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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회찬, 전태일을 만나다(2)

[노회찬 OOO를 만나다] '미완의 기록'으로 본 노회찬과 전태일

노회찬은 항상 '영감'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졌지만, 세상은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은 노회찬재단과 함께 노회찬이 만난 사람, 노회찬의 생각, 노회찬의 꿈에 대해 되짚어보는 '노회찬 OOO를 만나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편집자.


(이글은 2018년 11월 13일 발행된 "노회찬, 노동자 전태일을 만나다"를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전태일의 영전에 바친다."
2004년 1월 5일부터 3월 31일까지 80여일에 걸쳐 노회찬이 쓴 <힘내라 진달래>(사회평론, 2004)의 여는글 제목이다. 여기서 그는 "우리가 가는 길이 바로 역사이고 이를 기록하는 것은 나의 임무라 생각했다"고 적고 있다.
2019년 11월 13일 오늘은 전태일이 떠난 지 49년째 되는 날이다. 노회찬이 떠난 지 479일 되는 날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노회찬이 남긴 삶의 흔적, 그 기록과 사료들을 뒤적이면서 '노회찬이 만난 전태일'을 기록하고 있다.

▲ (오른쪽) 전태일재단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친구 국회의원 노회찬’에게 선물한 소형액자 (노회찬재단 소장)


류석춘의 "전태일 착취 없었다"와 노회찬의 "'보수의 마약' 같은 역할, 류석춘"
2017년 7월 11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은 정치보복"이라는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 취임 인사 발언에 이어, 2019년 10월 몰역사적인 '위안부 매춘'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 있다.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류석춘이 바로 그다. 류석춘은 대중적 인지도가 그렇게 높은 사람은 아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학자로 활동해왔다. 뉴라이트전국연합 대표를 지냈고, 박정희 대통령기념재단 이사와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원장을 맡은 바 있다. 또 '태극기 집회'에 주도적으로 나선 사람이기도 하다. "잘못한 게 있어야 사과하는데 나는 사과할 일이 없다." 대학 강의 중 '위안부는 매춘부' 망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데 대해 학생들이 사과 요구를 하자 '교수' 류석춘이 한 말이다.
<월간조선> 2019년 10월호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40주년 특집' 기고문에서 류석춘은 전태일을 불러낸다. "전태일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 누구에게도 '착취'라는 용어를 적용할 수 없다"는 취지의 글을 실은 것이다.
이에 대해 전태일재단(이사장 이수호)은 수치만 나열한 채 당시 상황을 애써 무시한 전형적인 '곡학아세'(曲學阿世)라고 규탄하며,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지금이라도 오점을 반성하고 당장 교수직을 사퇴하라"는 내용의 입장문을 낸다. 전태일재단은 또 "류 교수처럼 편협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 불순하게 전태일을 거론하는 것은 우리 사회와 역사에 또 다른 오점을 남기는 일"이라며 "그래도 전태일에 대해 언급하겠다면 당시의 상황에 대한 검토와 연구를 한 후 이야기하는 것이 학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점을 류 교수에게 다시 상기시켜야 하는 현실이 참 안타까울 뿐"이라고 밝힌다. KBS는 2019년 10월 14일과 10월 20일 뉴스(「[팩트체크K] 류석춘 "전태일은 착취 당하지 않았다"…사실은?」; 「[취재후] "전태일 착취 없었다" 류석춘 교수님, 또 무리수입니다」)를 통해 류석춘의 주장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류석춘이 애써 무시한 끔찍한 노동환경에 대해 말한다.
KBS가 인용한 1970년 10월 7일 경향신문 석간신문의 평화시장 참상에 관한 보도는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표제와 '소녀 등 2만여 명 혹사', '거의 직업병…노동청 뒤늦게 고발키로', '근로조건 0점…평화시장 피복공장'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평화시장 내의 피복 가공 공장은 4백여 개나 되는데, 이들 대부분의 작업장은 건평 2평 정도에 재봉틀 등 기계와 함께 15명씩을 한데 넣고 작업을 해 움직일 틈이 없을 정도로 작업장은 비좁다. 더구나 작업장은 1층을 아래위 둘로 나눠 천정의 높이가 겨우 1.6m 정도밖에 안 돼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인데 이와 같이 좁고 낮은 방에 작업을 위해 너무 밝은 조명을 해 이들 대부분은 밝은 햇빛 아래서는 눈을 똑바로 뜰 수 없다고 노동청에 진정까지 해왔다." (경향신문 1970년 10월 7일; 조영래, <전태일평전>, 돌베게, 1983, 252쪽)
▲ 1970년 10월 7일 경향신문
KBS 취재진과 만난, 전태일과 평화시장에서 함께 일한 동료 임현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평화시장에서) 정해진 시간 일하고 정해진 돈을 준다는 게 아니라 되도록 많이 시키고 되도록 적게 줬습니다. 전태일을 만났을 때 근로기준법이라는 게 있고 우린 보호받을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뭉쳐서 개선하자는 말에 기꺼이 참여하게 됐습니다. 처음에 류석춘 교수의 주장과 관련한 얘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분노를 느꼈습니다. 전태일 동기의 숭고한 희생도 있지만, 그 수많은 학자들은 그 당시 착취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없는데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젠 측은지심을 느낍니다."

'곡학아세의 전형' 류석춘에 대해 노회찬은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2017년 7월 12일 노회찬(정의당 원내대표)은 티비에스(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나와 "자유한국당이 혁신과 반대로 가고 있다"며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류석춘 당 혁신위원장 카드'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어 류석춘에 대해 "보수가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는 근거와 철학을 계속해서 주입하는 '보수의 마약'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전날 취임 기자회견에서 류석춘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실제 저지른 잘못보다 과한 정치적 보복을 당했다"고 주장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혁신이란 건 말 그대로 껍데기를 벗겨서 새롭게 새로 태어나는 걸 얘기하는 거니까 반드시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고 '그 고통을 감내하겠다', '감수하겠다'라는 의지표현이다. 그런데 이 분(류석춘)은 아픔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길을 걷는 게 아니다. (류 위원장이) '박근혜가 억울하게 잡혔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잘못한 게 아니라 자신들은 계속해서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는 근거와 그런 철학을 계속해서 주입시키는 보수의 마약 역할을 하기 때문에 혁신이 있을 수가 없다. 8대2 정도로 탄핵 찬성이 많았는데, 자유한국당 지도부가 2라도 건지겠다고 해서 8은 버린 지 오래됐다. 보수의 매력을 새로 발굴해낸다거나 보수의 강점 장점을 다시 적립해서 지지를 확장해 나가려는 그런 의사가 없어 보인다. 그분들이 감각을 상실한 것이다. 지금 어디 있는지 위치에 대한 인지기능도 분명히 퇴화한 것이다.

2017년 8월 15일 류석춘은 "국가라는 게 성립하려면 정치학 교과서에 나오듯 국민, 영토, 주권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에서 1948년 건국은 자명한 일이다. 논란의 여지가 없다"라며 '1948년 건국론'을 다시 꺼내든다.
다음 날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노회찬은 류석춘의 '1948년 건국론'에 대해 "사실 혁신위원장인데 헌법정신에 어긋나는 발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면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헌법 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말이 헌법전문 제일 첫 문장에 이게 들어가 있어요."고 반박한다. 이어 "건국이라는 위대한 업적 앞에서는 그건(여러 독립운동의 조류는) 별거 아니다 라는 식으로 만들려는 이승만 복원운동이 바로 건국절 소동"이자 "친일 사대 세력을 역사의 주역으로 다시 세탁하는 작업이 건국절 소동"이라고 그 숨겨진 의도를 밝힌다. "결국에 국민들에게 쫓겨난 대통령 아니에요?"라고 반문하면서 노회찬은 "그런 부정적 평가가 더 많은 대통령을 긍정의 화신으로 돌리려면, 그래서 건국의 아버지로 만들려면 이승만의 가장 큰 공은 건국이다, 이 나라를 세운 우리의 정치적 아버지라는 것"이라며 "결국 자유한국당의 정신적 지주, 원천이 자유당이고 더 올라가 친일 부역세력들까지 올라간다는 뜻"이라고 파헤친다.
웃기는 것은, 류석춘 등 뉴라이트 계열이 이른바 '이승만 국부론'을 통해 그토록 추켜세우는 이승만 자신도 1948년 대통령 취임식에서 "대한민국 30년 7월24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라고 1948년을 대한민국이 30년이 된 해로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 (왼쪽) 초대 대통령 이승만 취임사(1948년 7월 24일) (오른쪽) 대한민국 관보 제1호 “대한민국 30년 9월 1일” (1948년 9월 1일)
노회찬과 전태일, 첫 만남

1948년 9월 28일(음력 8월 26일) 경북 대구시 남산동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치며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버들다리 위에서 자신의 몸을 불사른 전태일. 1956년 8월 31일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태어나 1970년 부산중학교 2학년을 다닌 노회찬과 살아생전 전태일 사이에 아마도 직접적인 만남의 인연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전태일은 노회찬의 삶의 여정 속에 언제쯤 등장할까? 동아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 한겨레 기사를 검색할 수 있는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보면, 전태일(全泰壹)이라는 이름은 1970년 11월 14일 경향신문 「평화시장 재단사, 병원서 숨져」 「혹사 등 항의…분신」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 이후 70년 기사에는 총 73건, 71년에는 총 28건, 72년 총 2건, 73년 총 3건, 74년 총 6건, 75년 총 2건, 77년 총 2건, 79년 총 2건, 80년 총 18건이 검색된다.
▲ 경향신문(1970년 11월 14일)
노회찬이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시절, 또는 재수생 시절 전태일의 이름을 언론이나 소문을 통해 접했을 가능성이 꽤 높지만 지금으로선 확인되지 않는다. 고입 재수를 하고 있던 1972년 10월, 노회찬은 강압적으로 국회를 해산시킨 박정희의 10월유신에 분개한다.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나와요. 국회는 해산시킬 수 없다고. 그런데 국회가 해산됐다는 거야. 내가 잘못 알고 있는가 해서 책을 다시 봤어요. 확실히 잘못된 거라. 나는 그 다음 날 엄청난 데모가 일어날 줄 알았어. 국회가 해산됐으니까. 그런데 아닌 거야. 멀쩡한 거야. 이게 지금 뭐냐,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하냐, 이래 가지고 어린 나이에 저항을 시작한 거죠. (안재성, 「진보정당운동의 산증인, 노회찬」, <월간 시대>, 제50호, 2017.07-08)

정부 발표는 일체 신뢰하지 않게 된 대신 노회찬은 함석헌의 <씨ᄋᆞᆯ의 소리>, 김상현의 <월간 다리>를 구독하고, 강제 폐간된 장준하의 <사상계>를 청계천 헌책방에 가서 권당 30원씩 한 보따리씩 사다가 읽는다. 박정희의 잘못된 통치와 불의한 세상에 대한 저항은 이후 쭉 이어진다. 1973년 경기고 1학년 때 정광필, 이종걸 등과 유신반대 유인물("귀 있는 자 들어라")을 학내에 배포하고, 4월 18일에는 수유리 4.19 묘소에 가서 친구들과 함께 참배를 하고, 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민청학련 사건이 터진 1974년에는 독재 정부를 규탄하는 시사 토론회를 열고 수업을 거부하기도 한다.
이런 그가 세상의 이목을 끌었던 1970년 전태일의 분신, 1977년 9월 9일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사건(이른바 '청계노조 9․9결사투쟁')을 모를 리는 없었으리라 짐작해본다.

두 번째 만남: 책

전태일과 노회찬이 만난 건 책을 매개로 해서였다.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노회찬은 1983년 2월 26일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현 서울산업정보학교)에서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한다. 이 6개월간의 직업학교 시절이 그의 기억에는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으로 남아 있다. 수료 이후 그는 서울, 부천, 인천에서 용접공으로 위장취업을 하였고, 1989년 12월 감옥에 가기 전까지 7년간의 수배생활이 시작된다.
ⓒ노회찬재단
1982년부터 노회찬과 직업학교에서 함께 용접을 배우고 87년까지 편지를 주고받는 등 친형제 이상으로 친근감을 느낀다는 김종해 씨는 2007년 3월 어느날 "노 의원이 보내 준 <전태일 평전>을 읽고 노동운동에 대해 조금씩 눈을 떴다"며 "가슴이 넓고 따뜻한 남자인 노 의원이 우리 정치사에 큰 획을 그었으면 좋겠다"는 기대와 소회를 밝힌다.

<전태일 평전>은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함께 노회찬이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손꼽은 책이다. <전태일 평전>의 원고는 1978년 11월 손학규·김정남에 의해 일본에서 김영기의 <불꽃이여 나를 태워라>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판된다. 이후 1983년 6월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가 엮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이란 이름으로 돌베개에서 출판된다. 저자인 조영래 변호사의 이름으로 1차 개정판이 나온 것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지난 1991년 1월이었다. 이후 2001년과 전태일 재단의 2009년 신판 등 표지를 바꿔 다시 나온다. 김종해가 받은 <전태일 평전>은 아래 1983년판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으로 보인다.

노회찬과 전태일의 만남이 이루어진 또 하나의 책은, "제17대 총선에서 노동자, 농민의 정치세력화의 결실인 민주노동당은 44년만에 국회에 진출하였다. 이 일기를 첫 원내 진출의 경과 보고서로 전태일의 영전에 바친다"는 <힘내라 진달래>이다.
ⓒ노회찬재단
노회찬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선대본부장을 맡아 선거를 지휘하는 동안 <선대본 일기>를 썼다. 78일간의 기록을 담은 이 일기는 '노회찬의 난중일기'로 유명세를 얻었고 <힘내라 진달래>(사회평론, 2004)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졌다. <힘내라 진달래>는 2004년 11월 3일 제13회 전태일 문학상 특별상을 수상한다.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는 '전태일 문학상'은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횃불을 높이든 전태일을 기념하고자 1989년에 만들어진 상이다. 특별상이긴 하지만 전태일 문학상 수상자로 정치인이 선정된 것은 노회찬이 처음이라고 한다.

2004년 9월 2일 전태일재단은 선정 배경에 대해 「제13회 전태일문학상 특별상을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밝힌다.
"지난 7월 말, 제13회 전태일문학상 응모 마감을 앞두고 한창 글들이 쏟아져 들어올 때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인 노회찬씨가 '선대본 일기'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지난 17대 총선 준비 기간에 대한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이고 공적인 내용들을 원고지 1200매에 달하는 분량으로 꼼꼼히 기록해서 제13회 전태일문학상 생활글 부문에 응모를 했던 것입니다. '선대본 일기'는 예심을 거쳐 본선에 올랐으나, 본심을 맡은 심사위원들은 오랜 고민 끝에 이 글을 수상작으로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전태일문학상은 ('생활글'에 있어서는 좀 다를 수 있습니다만) '리얼리즘' 문학의 미학적인 성취를 우선적인 심사기준으로 하여 평가하는 것이고, '선대본 일기'가 일정 정도의 문학적인 수준에 달해 있고, 매우 의미가 있는 기록물임에도 불구하고 수상작으로 뽑기에는 부담이 있는 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생활글 부문 본심을 맡았던 김하경, 안건모 선생님은 이 글이 '하나의 생활 기록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평범한 일상인들이 겪는 생활이나 노동과는 조금 다른 특수한 경험이라고 여겨져, 여기서는 다룰 수가 없었다.'고 최종 심사평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에 어제, '제13회 전태일문학상을 위한 제5차 운영위 회의'에서 이 글을 '특별상'으로 뽑을 것인지, 말 것인지가 제법 긴 시간 논의되었고, 어쨌든 '노동자 정당'이 처음으로 국회에 진출했다는 것과, 이 글('선대본 일기')이 이러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성실하고 진지한 기록이라는 점, 무엇보다 노회찬 의원 자신이 두 달 여 동안 최선을 다해 기록한 것을 "전태일의 영전에 바친다"며, '전태일문학상' 앞으로 보내왔다는 점 등을 볼 때, 이 글이 '전태일문학상'의 이름으로 상을 받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에 운영위원들(어제 운영위 회의에는 총 9명의 문학상 관계자가 함께했습니다.)이 다들 동의했고, 하여 뒤늦게 특별상으로 <선대본 일기>가 선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2004년 9월의 <노회찬의 난중일기>는 당시 소감을 이렇게 적고 있다.
2004년 9월 2일(목) 맑음
전태일기념사업회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대본 일기>가 올해 전태일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선대본 일기>를 전태일 문학상에 응모한 것은 상을 받기 위해라기보다 노동자정당의 첫 원내진출의 경과보고서로서 전태일의 영전에 바치기 위함이었다.
어쨌든 전태일의 이름이 들어 간 상을 받게 된다니 노벨평화상을 받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다.

2004년 9월 7일(화) 비
하루종일 전태일문학상 수상치레를 했다.
최연희 법사위원장이 축하한다며 점심을 샀고 대한변협 회장은 난을 보내주었다.
이종걸 의원은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축하메일 보내준 분들에게 일일이 답하지 못했다.
상은 명예지만 또한 멍에다.

후대의 사람들이 전태일의 일기를 통해 노동운동의 역사를 풍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듯이, 노회찬도 일기라는 지극히 개인적 행위를 통해 진보정당의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시키고 싶었다고 한다. 11월 3일 오후 5시 전태일문학상 수상식장에서 이소선 어머님은 "태일이의 친구들이 없었다면 이날이 없었을 것이다. 민주노총과 민노당이 생긴 것을 보면 태일이의 죽음이 헛된 것 같지 않다"고 말한다. 노회찬은 "전태일 열사의 정신이야말로 민주노동당의 강령이자 이념"이며, "노벨문학상과 전태일문학상을 선택하라면 전태일 문학상을 고르겠다"며 특유의 화법으로 수상소감을 밝힌다. 노회찬의 보좌관들은 전태일이 생전에 여동생과 같은 봉제노동자들에게 붕어빵을 사준 것을 상징, 대형 붕어빵에 '계승! 전태일'을 새겨 그에게 축하선물로 건넨다.
▲ (오른쪽) 이소선 어머님과 노회찬·김지선 부부
▲ (왼쪽)보좌진이 선물한 ‘계승! 전태일’ 붕어빵 (오른쪽)의원실 보좌진과 ‘노아정’(노회찬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정치) 지지자들

세 번째 만남: 추모식‧노동자대회 등 행사

전태일과 노회찬의 만남은 11월의 전국노동자대회 현장과 11월 13일 마석 모란공원 추모식, 그 외의 여러 모임을 통해서 줄곧 이루어진다.
1988년 11월 13일 연세대학교 노천극장, 제1회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 노회찬이 깊게 관여했던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에서 발행한 <노동자의 길> 1988년 11월호(제33호)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11월 13일, 오후 2시경에 이르러서는 이미 2만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세대 노천극장이 의기충천한 노동자들로 가득 메워졌다.…11월 13일, 18년 전 이 날은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 동지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고 외치며 산화해간 날이다. 이 날을 기려, 노동자들은 18년 후인 오늘 '전태일정신 계승 및 노동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아주 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다니러 가는 것이다"라는 그의 유언을 오늘, 연세대, 그리고 여의도에서 그의 친구들이, 동지를 아는 동지의 모든 분신들이, 동지를 모르는 동지의 모든 분신들이 힘찬 투쟁을 통해 실현해 낸 것이다."

1여년 뒤인 1989년 12월 23일 체포된 노회찬은 인민노련 활동과 관련해 이적단체 가입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2월 25일 구속되어 12월 26일자 한겨레신문을 통해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다. 이후 서울구치소, 안양교도소, 청주교도소를 거쳐 1992년 4월 1일 만우절 날 만기 출소한다. 이후 눈을 뜨고 있는 그의 모든 시간을 지배한 것은 '진보정당 건설'이었다. 진보정당이 있어야 세상을 바꾸고 인간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초기에는 ‘인노련’이라는 약칭으로 불렸는데 양승조 등이 이끌던 과거의 ‘인노련’과 혼동을 주는 바람에 점차 ‘인민노련’으로 불리게 된다.)
1999년 8월 29일 63빌딩 국제회의장. 진보정당 창당 발기인대회가 열린다. 정당 이름은 '민주노동당'으로 확정되고 (가칭)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가 발족된다. 노회찬은 정치개혁추진위원장을 맡는다. 대회장 입구 한편에서는 카피레프트모임과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에서 대자보를 붙여 문항마다 스티커를 붙이는 방식으로 의견조사를 실시, 한국 전보정당 운동의 역사를 가장 잘 상징하는 인물로는 '여운형' '전태일' '조봉암' 순으로 나타났다.

2001년 11월 10일 '2001 노동자대회' 전야제가 열린 숭실대 정문 앞. 민주노동당은 오후 7시부터 정치개혁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결의대회를 연다. 노회찬(부대표.정치개혁특위 위원장.서울시지부장)은 "31년전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며 산화해간 전태일 열사의 정신은 오늘날 노동자의 정 치적 단결, 즉 노동자 정치세력화로 완성되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l인2표 완전한 정당명부제 실현을 위해 민주노총과 함께 정치개혁투쟁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밝힌다. 이날 결의대회에 모인 2백여명의 민주노동당 당원들은 '1인 2표 정당명부제'라고 새겨진 몸벽보를 두르고 전야제에 참가하는 노동자들에게 정치개혁 유인물을 나눠주며 선전전을 벌여 눈길을 끈다(<진보정치> 65호, 2001년 11월 16일).

칼바람이 몰아치던 2002년 1월 2일 오전 10시 청계천 평화시장 근처 전태일 분신 동판 앞. '전태일과 함께 하는 2002년 민주노동당 서울시지부 합동시무식'이 열린다. "전태일 열사는 한국 자본주의 저항의 상징"이라며 신년인사를 시작한 노회찬(민주노동당 서울시지부장)은 "열사정신을 이어받아 우리의 모든 노력을 한국 자본주의 저항에 바치는 한 해가 되자"며 민주노동당 서울시지부가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와 열사정신계승 기념사업에 실천적으로 앞장설 것을 결의한다. 시무식을 끝낸 당원들은 국화꽃을 헌화하며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는 시간을 갖는다.
ⓒ노회찬재단
▲ 2005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비정규 권리보장입법 쟁취·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민주노총 창립 10주년 기념 2005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한 노회찬‧권영길‧천영세‧심상정‧단병호‧이영순 등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2005년 12월호 <신동아>는 송년특집으로 '2005년,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묻는다. 노회찬은 '청계천 버들다리에서 전태일을 다시 만난' 11월 12일 토요일의 '전태일다리'와 '전태일거리' 준공식순간을 꼽는다. 그리곤 이렇게 말한다.
2001년 1월 1일 나는 몇 사람과 청계천 6가를 찾았다. 정월 초하루 칼바람 부는 오전 8시의 청계천 6가는 인적은커녕 제자리에 10분을 서 있기도 어렵게 추웠다. 일부러 유념해서 찾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곳에 설치된 전태일 추모동판은 나뒹구는 휴지조각에 덮혀 있었다. 빗자루로 쓸고 장미꽃을 바치고 술도 한잔 부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자주 찾아와서 이곳이 어떤 곳인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깨끗이 청소해놓겠다고. 혼자서 하기 힘들면 함께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놓겠다고. 하지만 그뒤 이곳을 찾은 것은 몇 번 되지 않았고, 그날의 다짐은 지키지 못한 약속이 되고 말았다.
전태일이 산화한 뒤 많은 이가 또 다른 전태일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실제 전태일이 산화해간 그 불꽃으로 민주노총이 설립되고 민주노동당이 창당됐다. 그러나 전태일이 몸을 불살라 한국의 노동현실을 고발한 지 35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어느만큼 달라졌는가.
(…) 전태일이 자신은 굶어가며 여공들에게 붕어빵을 사주던 때에 비해 물질적 생활수준은 어느 정도 나아졌다. 그러나 빈부격차는 그 당시보다 더욱 벌어졌다. 노동운동에 대한 사회적 억압구조 또한 결코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현실에 대해 전태일을 따르고자 했던 사람들의 책임은 전혀 없는지. 우리는 정말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지. 전태일 다리 위 그의 동상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

ⓒ노회찬재단
2009년 11월 13일 오전 10시 모란공원 전태일 39주기 추도식 자리. 노회찬은 "오늘 이 자리에 민주노총 한국노총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모두 모여 있습니다. 전태일 앞에서는 우리 모두 하나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태일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거창한 약속보다도 우리 모두가 아직은 전태일이 되는 길을 찾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는 말로 추모 발언을 한다.
이날 노회찬의 트위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전태일열사 추도식 끝내고 이소선 어머님과 국밥 한그릇 했습니다. 제삿날이라며 소주 자꾸 따라주셔서 석잔 마셨습니다. 제 어머님과 동갑인 81세인데 안목이 예리하십니다. 저보고 많이 예뻐졌다고 말씀하시네요.

2010년 11월 30일 오후 7시 노회찬은 (사)참여성노동복지터('참터')가 주최하고 수다공방과 (주)참신나는옷이 주관하는 제4회 수다공방 패션쇼('대한민국 명품 봉제콜렉션 2010') 모델이 되어 만화가 박재동, 탤런트 정혜선 등과 함께 런어웨이에 선다. 봉제기술인과 사회지도층 인사 그리고 소비자가 함께 하는 신나는 패션쇼다.
참터는 2003년 동대문 지역 봉제의류 영세사업장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조건 향상과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 및 사회적 지위향상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나아가 전태일 정신을 따라 빈부격차를 없애고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있는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수다공방은 전태일의 동생 전순옥 박사가 설립한 참터에서 만든 공동 작업 훈련장이자 브랜드로, 그 성과는 사회적 기업으로 (주)참신나는 옷('참옷')을 세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노회찬재단
2011년 9월 3일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어머님이 별세한다. 향년 82세.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30일 단식농성(7월 13일-8월 11일)을 얼마 전에 마친 노회찬(진보신당 상임고문)은 빈소에 조문한다. 노회찬은 "좀 더 오래 사셔서 노동자도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꼭 보셔야 하는데 죄송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제 모든 것 다 산자들에게 맡기시고 편히 잠드소서"라고 트위터에 글을 올린다. 장례는 시민사회단체 등이 참여하는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묘소는 아들 전태일이 묻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 있다.
▲ (왼쪽)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빈소 조문(ⓒ이상엽) (오른쪽)이소선 어머님 묘비 뒷면: “하나가 되면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2012년 11월 1일 '전태일다리 명명식'에 참석한 노회찬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2012년 11월 1일 (목) 맑음
오후 2시 심상정후보와 함께 전태일다리 명명식에 참석하다. 2001년 1월 1일 신년 기념행사로 전태일 열사가 산화해간 그 자리를 청소하고 장미꽃을 바쳤던 일이 기억난다. 그간 추진해온 사업 중 하나가 첫 결실을 맺어 감개무량하다. 그러나 전태일거리는 아직 공식 지정되지 못했고 전태일기념관은 첫 삽도 뜨지 못하고 있다. 전태일기념관이야말로 양대노총 1백만 조합원이 1만원씩만 내어도 정부 힘 빌리지 않고 지을 수 있는데 민주노조운동 25년에 우린 아직 이걸 못하고 있다. 이럴 땐 과거 노동운동 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뿐이다.

2012년 12월 31일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자격으로 노회찬이 <박근혜 당선인께 드리는 공개서한>에 전태일은 158억 손배소 유서를 남기고 떠난 35세 노동자 최강서와 함께 등장한다.
저는 방금 당선인의 트위터에 트위터 친구 한분을 소개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바로 최은우(@nannaya4260)씨입니다. 지난 21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씨의 친누나입니다. (…)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몸을 불사른 것이 당선인이 대학 1학년생이었던 1970년 11월의 일입니다. 그런데 42년이나 지난 지금, '법을 지키라'는 말을 하기 위해 두 달째 철탑 위에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박근혜 당선인님
더 이상 지켜만 보지 마십시오. 일부 힘센 자들이 헌법과 법률 위에 군림하며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가장 약한 사람들을 짓밟는 현실이 더 이상 용인되어선 안됩니다. 이번 대선 결과가 그들을 더욱 기고만장하게 하는 신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직 인수에 여념이 없으시겠지만 당선인께서 더 시급히 인수해야할 중요한 것은 바로 '생사의 기로에 내몰린 국민들'입니다. 법을 지키라는 노동자들의 절규, 23명의 희생자를 낳은 정리해고를 철회하고 복직을 요구하는 쌍용차노동자들의 고통, 고 최강서씨 가족의 회한이야말로 당선인이 우선적으로 인수하고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고 최강서씨는 마지막 남긴 유서에서 '자본 아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고 했습니다. 불의가 만든 절망 앞에서 무릎 꿇고 항복하는 국민이 있는 한 '국민행복시대'는 오지 않습니다. 당선인의 약속이 조속히 실현되길 다시 한번 기원합니다.

4년 뒤인 2016년 12월 22일 '우리헌법읽기국민운동 정책토론회' 축사에서 노회찬은 "46년 전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 지키자며 스스로 촛불이 됐습니다. 그때도 근로기준법 있었지만 전혀 지켜지지 않음으로 인해 전태일 열사의 항거가 있었습니다."라면서, "왜 대통령이 탄핵 됐습니까. 헌법을 위배했기 때문입니다."고 말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69조는 취임에 즈음하여 대통령으로 하여금 헌법을 준수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하도록 하고 있다.

2017년 11월 13일 노회찬은 모란공원 전태일 묘역 추모식에 참석해, 최순영(전 민주노동당 의원), 김주영(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최종진(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직무대행) 등과 함께 전태일을 떠올리며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 같은 날 청계천 전태일 동상 앞에서는 '노조하기 좋은 세상 운동본부'가 전태일 열사 47주기를 맞아 기자회견을 연다. 노동기본권과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라고 정부와 재계에 촉구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노동 존중은 기만이고 껍데기"라고 선언한다.
ⓒ노회찬재단

마지막 만남이자 첫 만남: 마석 모란공원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모란공원은 최초의 사설 공동묘지라고 한다.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다 숨진 많은 넋들이 모여 있는 곳이자,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 못다한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다. 1970년 11월 18일, 당시로는 외진 이 곳에 전태일이 묻힌 뒤부터 모란공원은 민주화의 상징공간이 됐다. 이소선 어머님은 아들이 모란공원에 온 이유를 "노동자들의 분노에 놀란 보안당국이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외곽에 아들을 묻길 종용해 모란공원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

늦봄 문익환 목사,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전태일 평전을 펴낸 조영래 변호사, 용산참사 희생자, 삼성전자 노동자,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등 많은 분들이 민족민주열사묘역을 지키고 있다. 그 때문인지 모란공원 묘역은 1년 내내 추모식 행사가 끊이지 않고 열리고 있다. 이제 매년 7월 23일이면 또 한 사람을 기리는 추모식과 다짐의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7월 23일 돌연 세상을 등진 노회찬이 마석 모란공원을 영원한 휴식처로 삼은 것이다.

2018년 7월 27일 오전 국회영결식에는 3000여명이 모였다. 국회 청소노동자들이 줄 서서 노회찬의 마지막 모습을 배웅하는 가슴 찡한 장면이 있기도 했다. 새벽 4시 서울 구로동을 출발하는 '6411번 버스'를 통해 고인이 말했던 우리 사회의 '투명인간'에 속하는 분들이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분들이 냄새 맡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으로 이 당을 여러분과 함께 가져가고자 합니다.

▲ (왼쪽) kbs뉴스(2018년 7월 27일) 화면 캡처 (오른쪽) 노회찬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국회 청소노동자 분들 (Ⓒ 이상엽)
48년 전 전태일은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는 일기(1970년 8월 9일)를 남겼다. 조영래는 "이 결단은 20여년 동안 그가 겪어온 그 지독한 가난과 고통과 학대와 모멸을 벗어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면서 "삶의 문제는 결국 죽음의 문제이며, 죽음의 문제는 결국 삶의 문제"라고 적고 있다.

2018년 7월 23일 서면발언으로 대체된 정의당 93차 상무위 노회찬의 모두발언 내용은 이러했다.
삼성전자 등 반도체사업장에서 백혈병 및 각종 질환에 걸린 노동자들에 대한 조정합의가 이뤄졌습니다. 10년이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이 사안을 사회적으로 공감시키고 그 해결을 앞장서서 이끌어 온 단체인 '반올림'과 수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KTX승무원들 역시 10여년의 복직투쟁을 마감하고 180여명이 코레일 사원으로 입사하게 됐습니다. 입사한 뒤 정규직 전환이라는 말을 믿고 일해 왔는데 자회사로 옮기라는 지시를 듣고 싸움을 시작한지 12년 만입니다. 오랜 기간 투쟁해 온 KTX승무원 노동자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노회찬은 우리 곁을 떠난다.
ⓒ노회찬재단
2018년 11월 13일 모란공원에서는 '전태일 48주기 추도식 및 제26회 노동상 시상식'이 열린다.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이 자리에 투쟁조끼 입은 현장의 동지들도 많이 와있다. 함께 싸워 전태일이 원했던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인간해방과 참 인간의 승리를 위해서 함께 손잡고 나아가자. 추모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다지고 전태일 정신으로 우리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추도식에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 정당 관계자들 200여 명이 참석했다. 그 가운데서 노회찬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 2018년 11월 13일 모란공원 ‘전태일 48주기 추도식 및 제26회 노동상 시상식’ (출처: 전태일재단)
노회찬재단은 1주기를 맞이해 2019년 7월 15일부터 28일까지를 추모주간으로 설정하고 추모행사를 진행한다. 추모행사 가운데 하나인 추모미술전시회는 '함께 꿈꾸는 세상'이라는 이름으로 7월 16일부터 7월 28일까지 전태일기념관에서 열렸다. 전시회에는 이동환, 이상엽 등 총 49명의 작가가 참여했고, 회화, 조각, 비디오아트, 사진 등 다양한 작품이 전시됐다. 전시관을 찾은 관람객은 2500여 명에 달했다
오랜 지인인 사진작가 이상엽은 이렇게 말한다. "노회찬의 매력은 소탈하고 탈권위적이라는데 있어요. 작품을 보는 직관력도 좋았고요. 문화예술인들 만나면서 그런 매력이 더욱 각별했고 예술을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도 놓치지 않았던 사람이에요. 러시아 음악과 노래를 각별히 사랑했지만, 전시 보는 것도 즐겼어요. 작품들을 사서 수집도 했는데, 경매에서 팔아서 파업기금 등으로 지원도 했어요. 조직 중심으로 돌아가는 진보정치 풍토에서 문화예술하는 이들의 목소리와 감성을 반영하려고 많이 고민하고 애썼던 분입니다."(한겨레, 2019년 7월 15일)
▲ (왼쪽) 전태일기념관 노회찬 1주기 추모전시회장 전경 (오른쪽) 인송자 작가의 작품 <나비>와 추모글들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의 벽돌을 하나씩 쌓아가다

전태일과 노회찬. 두 사람 모두 노동자와 서민, 약자들의 벗이자 먼 길을 함께 하는 길동무로 살다가 떠났다. 혹독한 노동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전태일은 '바보회'를 만들었다. 이에 대해 조영래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자신을 보고 바보라고 부르는 세상의 거꾸로 된 가치관에 대한 도전이었고, 자신이 가려고 하는 길이 절대로 그릇된 길이 아니라고 하는 강렬한 자기 확신의 표현이었다.…전태일과 그의 친구들이 택한 길은 인간의 길이었다."

노회찬의 한자 이름 魯會燦을 내 식대로 풀이하면 "어리숙하고 둔한(魯) 사람들이 모여(會) 세상을 빛낸다(燦)"이다.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세상의 수많은 바보들, 목소리를 빼앗긴 투명인간들과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노회찬이 이루고자 한 꿈이었다. "저에겐 꿈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선진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꿈입니다. 노동이 존중될 때 선진복지국가는 그만큼 빨리 실현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노동존중사회를 만드는 데 이 몸 바치겠습니다." 짐작컨대 전태일이 선택한 '인간의 길'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생전에 노회찬은 묘비명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냐는 질문을 받고 "제가 써달라고 할지도 의문이지만 굳이 써야 한다면, '잘 놀다 간다', 이렇게 쓰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 다시 묻는다면 그는 어떤 말을 들려줄까? 과연 그의 묘비명으로는 어떤 게 괜찮을까? 뜻밖에도 수줍음이 많았던 노회찬, 묘비명이 없어도 그렇게 나쁠 것 같지는 않다.
전태일과 마찬가지로 이제 멈춰버린 노회찬의 꿈과 삶을 잇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길일 수도 있다. 힘들고 지칠수록 함께 걸어갈 길동무가 되어 서로서로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으며 다들 후회없이 잘 놀다 갔으면 좋겠다.

끝으로, 노‧회‧찬 하면 사람들은 어떤 생각,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까? '말 잘 하는 스타 정치인'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 같다.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은 이런 세간의 상식과는 다른 말을 전한다. "우리에게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쓰는 말이 달라져야 합니다. 말은 생각이에요. 노회찬 전 의원을 두고 '스타가 나왔다'고 하는데 그건 바보의 언어예요. 노회찬 전 의원이 다른 언어를 사용했어요.…노회찬 전 의원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언어를 쓰고 있었어요.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는 특별한 말들을 쓰고 있었어요. 뛰어난 언어였어요."

한때 엄청 다투는 사이였다가 당 활동과 '노유진의 정치카페'를 통해 친하게 지내게 된 유시민 작가는 울음을 삼켜가며 "회찬이 형. 완벽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어서 형을 좋아했어요."라는 추모의 글을 남겼다. 특별한 게 없는 것 같은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으며 잔잔한 울림을 주는 까닭은 뭘까. 나만 그런 걸까?

2018년 7월 27일 시인 김주대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얼굴이 닮지 않아도, 살아온 환경이 달라도, 먼저 죽은 사람의 정신과 실천을 닮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실은 그런 것이 부활"이라며 "노회찬 의원은 또 다른 어떤 사람으로 머지않아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을 담는다. 그는 "항일투쟁기 노동운동가 이재유는 유신독재 시기 전태일 열사로, 전태일 열사는 삼성공화국 시기 노회찬 의원으로 부활하였다"며 "그 부활은 당장 내일 이루어질 수도 있고, 다음 달이 될 수도 있고, 몇 년 뒤가 될 수도 있지만, 부활만은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어 "우리가 혹은 우리의 자식들이 노회찬을 추모하며 공부하고 배우면, 노회찬은 우리들 가운데 반드시 부활할 것"이라며 "부활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덧붙인다(정문영, 「시인 김주대 "노회찬은 반드시 부활한다!"」, <굿모닝충청>, 2018년 7월 27일).

2019년 1월 24일 고인과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여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을 공식 출범시킨다. 그의 꿈과 뜻을 새롭게 잇기 위해 '좋은 사람' 노회찬이 멈춘 데서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그를 만나고 싶다면 노회찬재단 홈페이지(http://hcroh.org)를 잠깐 방문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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