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혼자였지만 끝에는 수많은 선생님들이 함께였습니다. 여기 계신 선생님 한 분 한 분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여전히 더 큰 고통 속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새삼 재판이 끝이 아니라는 걸 실감합니다. 진실을 법정에서 밝히고 위력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면 모든 건 정상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550여일의 시간 뒤에 남은 건 막막한 현실의 어려움입니다. 일상에 켜켜이 쌓인 먼지는 아무리 바람을 불어도 사라지지 않고 세상에 흩뿌려진 거짓들은 쓰레기봉투에 담겨지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라 말씀하시지만 가해자의 일부 지지자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심신의 미약으로 치료를 받으며 오랜 기간 커리어가 끊긴 제가 돌아갈 곳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살아내고 싶습니다. 고 김학순 할머님께서 세상에 처음 위안부 피해사실을 알리시고 오랜 세월 고통과 멸시를 이겨내며 세상을 바꾸셨듯, 저 역시 성폭력 피해자의 한사람으로서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는 세상을 위해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습니다. 피해자의 잘못이 아닌 사회의 문제이고 가해자의 잘못임을 삶으로 증명해내고 싶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관심가져주시고 연대해주시길 간절히,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김지은 씨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김 씨는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편지를 전했다. 편지는 오매(활동명)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가 대독했다. 오매 씨는 "그 누구보다도 김지은 씨 본인이 버텨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승리"라고 말했다.
4일 서울시 마포구에서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 주최로 '보통의 승리-안희정 위력 성폭력 사건 의미와 과제 토론회'가 열렸다. 공대위는 지난해 3월 5일 김지은 씨의 '미투' 폭로부터 지난 9월 대법원 확정판결까지의 과정과 의미, 그리고 향후 과제를 짚어봤다.
지난 9월, 대법원이 안 전 지사의 비서 성폭행 사건 유죄를 확정하며 이 사건은 일단락된 듯 보이나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안 전 지사의 형은 확정됐지만 관련된 민사소송들이 아직 남아있다. 피해자 김지은 씨는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회복 중이다.
판결의 의미 : 잠자던 '성인지감수성'을 깨우다
안희정 전 지사 사건은 사법부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임에 틀림없다. 사실상 물증은 없고 '증언'만 있는 상황에서 1심은 '피해자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2심은 이를 뒤집으며 '성인지감수성'을 근거로 제시했다.
1심은 김지은 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봤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유력 정치인이고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거명되는 지위 및 도지사로서 별정직 공무원인 피해자의 임면 등 권한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행사해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억압했다고 볼만한 증거는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위력이 존재하나 행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피해자 김 씨의 진술을 배척한 이유로 "간음행위 전후 단계에서 피해자가 지속적으로 피고인을 지지하고 존중하는 대화를 나눈 정황과 행동에 미뤄봤을 때, 피해자 진술이 객관적 증거에 어긋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고 했다. 피해자가 얼마나 피해자다웠는지를 따지는 전형적인 통념에 의한 판단이었다.
2심은 이를 완전히 뒤집고 안 전 지사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이 사소한 부분에서 다소 일관성이 없거나 최초 진술이 다소 불명확하게 바뀌었다 해도 그 진정성을 함부로 배척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1심에서 배척당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온전히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성인지감수성'을 근거로 제시했다
"법원이 성폭행 성희롱 사건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한다."
이에 따라 2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뿐 아니라 가해자 진술의 신빙성도 살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안 전 지사의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의 진술은 일관된 반면 안 전 지사의 진술은 여러 차례 번복됐다는 점을 지적했다. 피해자의 폭로 직후 안 전 지사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모두 제 잘못이고,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 입장은 틀렸다"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검찰 조사에서는 "불륜과 간음에 대해 국민들에게 사과한 것"이라고 했고, 2심 법정 진술 때는 "합의에 의한 성관계이지만 당장 반박하는 것은 잘못이란 취지"라고 다시 말을 바꿨다. 검찰 조사 때는 김 씨와 '연인관계'라 했으나 2심에선 이를 부정했다. 국내 호텔에서의 간음 혐의도 투숙 및 성관계에 이르게 된 경위 등에 대한 진술을 계속 바꿨다. 2심은 안 전 지사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의 '성인지감수성'은 지난해 4월, 대법원의 판례(2017두74702)를 인용한 것이다. 해당 판례의 당사자 류영재 판사는 지난 3월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성폭력 사건은 제3자 증인이 있기 어렵고 대체로 물증도 없기 때문에 피해자 진술 증거의 신빙성을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중요하다"며 "유죄추정과는 전혀 다르다"고 밝혔다.
"성인지감수성이란 사건의 실체가 모호할 때 피해자를 믿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면 정말 유죄추정 문제가 생긴다. 성인지 감수성은 피해자의 진술을 재판부가 통념만으로 가볍게 배척하지 말라는 의미다. 실제 성폭력 판결들을 살펴본 결과, 피해자 증언 하나만으로 유죄 판결이 나오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 증언의 구체성·일관성과 현장에서의 진술 태도, 정황 증거들을 최대한 종합하여 판사가 심증을 형성한다."
공대위에 참여한 서혜진 변호사는 이날 토론회에서 "성인지감수성이 법률상 근거가 없다거나 혹은 오직 성인지감수성으로만 판결한다는 것은 오해와 편견"이라며 "성인지감수성은 양성평등기본법에도 명시된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성인지감수성'은 결국, 피해자가 처해있는 특별한 사정을 고려해서 심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폭력 사건에서의 '진술'도 마찬가지입니다. 피해자의 진술이 있고 이것이 일관적이고 구체적이어서 당사자가 아니면 모를만하다고 인정이 되면서 동시에 이를 뒷받침하는 다른 진술들이 있을 때 신빙성을 인정받는 것입니다. 일관되고 모순되는 부분이 없다면 특별히 배척할만한 사정이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는 무고의 동기와 같은 것도 함께 심리합니다."
김지은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적이었으며 자신이 경험하지 않고서는 말하기 어려운 세부적인 내용까지 상세히 묘사했다. 피해자 김 씨가 왜 방송에 출연했는지, 평소 피고인과의 관계가 어땠는지도 심리했다. 모순되고 비합리적인 피고인의 진술도 증거였다. 이것에 부합하는 다른 추가 증언이 김 씨의 진술과 부합하면서 신빙성을 더했다.
김 씨의 증언을 뒷받침 해준 다른 증언은 함께 일하던 동료들에게서 나왔다. 캠프 분위기가 매우 고압적이었다는 점, 안 전 지사가 평소 비서들에게 큰 위축감을 주며 대했다는 것, 휴일이 없고 일상을 밀착 수행하는 것이 수행비서의 업무 범위라는 것 등이 이들 증언으로 입증됐다.
공대위에 참여한 정혜선 변호사는 "실제로 증인들은 협박성 압박을 받기도 했다"며 "그럼에도 증언해준 덕에 진실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2심에서 한 분이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피해자가 하는 말을 다 믿을 수 있었냐, 피고인은 당신이 신뢰하고 믿었던 사람인데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도 있었던 것 아니냐'라고 질문받으니까 이렇게 답하셨어요. '피해 사실을 약자가 호소했을 때 가해자인 권력자에게 이게 맞느냐고 물어보는 건 피해자를 보호하는 일이 아니다'라고요.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은 사실 가해자나 피해자가 다 '아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증인들에게는 고약하고 괴로운 시간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이 용기를 내 준 덕에 진실이 밝혀졌다 생각합니다. '미투'에 '위드 유'라고 답해주셨던 그분들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일상의 수많은 '안희정'들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안 전 지사의 성폭력 사건은 그 자체로 큰 충격이었다. 평소 인권에 대한 그의 관심, 정의를 위해 맞서 온 그의 이력, 스스로 '페미니스트'라며 성차별에 대해 목소리를 내왔었고 차기 대선주자 1순위로 거론되던 이였다. 그런 그가 비서를 성폭행했다는 사실은 지지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에게도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지지자였던 사람들에게는 큰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안 전 지사의 지지자 그룹이었다가 지지를 철회한 '팀 스틸버드'의 일원이자. '안희정 성폭력 아카이브'라는 트위터 계정을 운영한 매이(가명) 씨는. "(김지은 씨의 폭로가 있던) 그날은 잊혀지지 않는다"라며 "'지사님 비서 성폭행이 보도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지사님의 비서가 성폭력 가해자라는 거냐'고 되물었을 만큼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고 말했다.
매이 씨는 "안희정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타인의 인권을 착취했고 그 배경에는 우리의 지지가 일정 역할을 했다. 김지은 씨에게 미안한 마음"이라며 "이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 노동자로서 김지은 씨의 용기에 존경을 표한다"고 말했다.
"여전히 안희정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뉴스룸 보도 당일, 온라인 지지그룹 리더방에서 안희정 측 인사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이제 대응논리를 세워가면 된다' 이렇게.
'팀 스틸버드'가 입장문을 내자 저희에게 '왜 양쪽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이렇게 서두르느냐'며 책망하던 지지자들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마치 더 많은 정보가 있으면 다 듣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겠다는 듯이 말했는데 정작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온 지금까지 그분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왜곡된 보도를 모아서 피해자를 비난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한테 '성폭력'은 단지 남자 앞길 막는 여자문제인거죠. '안희정'이라는 귀한 보물에 티끌 하나 얹었다, 잘 닦으면 없어질 별것 아닌 흠이다, 이런 식으로요.
그게 저에게 되게 절망적이었던 건, 그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이거나 유별난 사람들이 아니어서였어요. 그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 퍼져있는 성폭력,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통념 범위 내의 일반적인 사람들이죠."
'보통의 승리', 남은 과제는?
토론회에서는 향후 과제도 제시됐다. 한 방청객은 '나는 불륜녀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사용한 것을 두고 "불륜 여부와 성폭행 사실은 전혀 별개의 문제인데 '나는 불륜녀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사용함으로써 마치 '불륜녀는 성폭행을 당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남긴 것 아닌가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차혜령 변호사는 이에 대해 "저 역시 그 지적에 공감한다"면서도 "한 가지 사건에 모든 쟁점을 해결할 수는 없다"며 한계를 인정했다. 차 변호사는 "명백하게 김지은 씨를 음해하려는 허위의 공격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고 답하며 "남은 과제도 무겁게 받아들이며 잊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안희정 성폭행 사건 공대위에 참여한 여성단체들은 지난 9월부터 '강간죄 구성요건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 폭행과 협박 등을 요건으로 하는 현재 강간죄의 구성 요건을 '동의 여부'로 변경하자는 것이다. 미투운동이 가져올 변화는 진행 중이다. 또 다른 '안희정'에 맞선 '김지은'들의 연대는 앞으로도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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