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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을 만든" '세번의 쿠데타 주역' 박정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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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을 만든" '세번의 쿠데타 주역' 박정희를 만나다

[노회찬 OOO를 만나다] '미완의 기록'으로 본 노회찬과 박정희

노회찬은 항상 '영감'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졌지만, 세상은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은 노회찬재단과 함께 노회찬이 만난 사람, 노회찬의 생각, 노회찬의 꿈에 대해 되짚어보는 '노회찬 OOO를 만나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편집자.


"오늘의 노회찬을 만든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노회찬, 2012년 9월 20일 인터뷰)

"1945년 건군과 함께 입대, 1961년 5·16혁명을 주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시고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 1963년 제5대로부터 1978년 제9대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을 역임하시는 동안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서 오천 년 이래의 가난을 물리치시고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터전을 닦으시어 세계 속의 풍요한 한국을 부각시키셨으며 겨레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시는 등 민족중흥을 이룩하신 영도자로서 민족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시고…삼천 칠백 만 온 국민의 애도 속에 11월 3일 국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시다."

▲ 박정희 묘비 및 묘비 제막식(1980년 2월 2일)

위 인용문은 박정희 묘비문의 내용 가운데 일부분이다. 이에 따르면, 박정희는 대한민국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의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으로 자리매김된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를 기치로 내건 <박정희대통령기념관>도 박정희의 업적을 기리는 걸로 가득 채워져 있다. 정녕 그러한가?

한국현대정치사에서 박정희만큼 평가가 극단으로 나눠지는 인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위 묘비문이 절대적 지지의 시각을 상징한다면, 비판적 접근은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공포통치 행위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오늘의 노회찬을 만든 것은 박정희'도 그런 연장선 위에 있다.
박정희는 3번의 쿠데타(1961년의 '5.16 군사쿠데타', 1969년의 '3선개헌 쿠데타', 1972년의 '10월유신 쿠데타')를 일으켰고, 박정희 통치 18년 동안 계엄령은 3번 선포되어 31개월 동안 지속된다. 같은 기간 중에 위수령은 3번에 총 5개월 동안 발동되었고, 각종 비상조치가 9건에 69개월 동안 지속된다. 이들 비정상적인 기간을 합치면 총 105개월로 박정희 집권기간인 220개월의 약 절반에 해당된다. 이처럼 박정희 통치시대는 군 병력이 동원된 위수령과 계엄령이 통치기간의 거의 절반에 해당되었던 '억압과 공포의 시대'였다. 특히 긴급조치로 상징되던 유신독재 중반기 이후는 취중언사에도 세심한 주의를 요했던 상호불신과 자기검열의 엄혹한 시대였던 것이다.


1979년 '10.26사태'와 박정희 대통령 유고(有故)·서거(逝去)

1979년 10월 27일 느닷없이 뿌려진 호외가 전국을 강타한다. 기사 제목은 박정희 대통령 유고(有故)에서 박정희 대통령 서거(逝去)로 바뀐다. 10월 26일 오후 7시 40분경 대통령 박정희가 서울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중정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다. 이른바 '10.26사태'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만 62세.

▲ 1979년 10월 27일자 한국일보, 동아일보 호외


▲ 동아일보 1979년 10월 27일

※ 참조) 동아일보 <고바우 영감>의 김성환 화백은 박정희 18년 집권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매우 비판적 자세를 견지한다. 만화 곳곳에 '법' 또는 '법치국가', '민권'이라는 단어가 등장시킬 정도로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을 표현한다. 그런 김성환에게 경천동지할 사건이 발생한다. 10.26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사건 다음날인 1979년 10월 27일, 김성환은 이런 내용을 고바우영감에 게재한다.
"고바우씨가 한가롭게 두 발을 책상위에 길게 올리고 회전의자에 앉아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라디오에서 '계엄선포'라는 말이 느닷없이 흘러나온다. 유신헌법 발효 이후 19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강권통치로 인해 대학가에서도 좀처럼 시위가 발생하지 못할 때였다. 따라서 계엄령이나 위수령 등의 비상사태가 수년 동안 내려지지 않았던 시기였던 만큼 '계엄선포'라는 라디오 보도에 고바우는 화들짝 놀란다. 그것도 매우 놀란 모습을 표현하느라 김 화백은 고바우를 회전의자에서 튕겨 올라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 번째 장에서 고바우씨는 의자에 앉아 벌벌 떨면서 라디오를 지켜보고 있다. 말 그대로 초긴장상태다. 라디오에서 어떤 놀랄 뉴스가 이어질까하고 노려보는 모습이 당시 시국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라디오에서 '박 대통령 서거'라고 간략한 멘트가 흘러나온다. 고바우는 의자에서 다시 튕겨져 올라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만화의 칸에 그의 얼굴이 잡히지 않는다. 만화적으로 벽을 뚫을 정도의 놀라움을 표시한 것이다. … 김 화백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내용의 고바우영감을 그 뒤에 게재하는데, 밤하늘에 별이 하나 진다. 그리고 그 밤거리의 무대를 열어 재치면서 '다시 역사가 시작 되는구나'라고 말한다. 박정희의 서거를 새로운 역사의 분기점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시사만화로 보는 시대상-10.26 사태」)

'10.26사태' 직후 전두환(보안사령관)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를 대통령 살해범으로 체포하고 최규하(대통령 권한대행)는 10월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이 사건으로 김재규·김계원(대통령 비서실장)·박흥주·박선호·유성옥·이기주·김태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김계원을 제외한 나머지 전원에게 사형이 집행된다(박흥주는 3월 16일, 김재규 등은 5월 24일 사형).
'미래의 육군참모총장감'이라 평가받던 박흥주 대령(육사 18기, 김재규 중정부장 비서실장)이 두 딸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내용은 이렇다. "아빠가 없다고 절대로 기죽지 말고 전처럼 매사를 떳떳하게 지내라. 아빠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겠느냐. 자기 판단에 의해 선택하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지게 되어 있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한다." (김형민, 「'육군참모총장'감 박흥주의 선택」, <시사인> 524호, 2017년 10월 2일)

▲ 김재규 등이 사형당한 서대문형무소 사형장과 사형장 입구 ‘통곡의 미루나무’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디지털아카이브)

2019년 5월 24일 오전 11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강당. '10.26재평가와 김재규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공동대표 강신옥, 김상근, 안동일, 청화, 함세웅) 주최로 <10.26 의인들 39주기 공동 추모행사(김재규, 박흥주, 박선호, 유성옥, 이기주, 김태원)>가 개최된다. 이 자리에서 안동일 변호사(홍익법무법인 고문변호사, 동산불교대학 명예이사장)는 "10·26의거의 진정성을 나는 믿는다. 10·26 이후 신군부 쿠데타정권 아래서 10·26의 참 뜻이 훼손되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김재규 장군과 그 부하들의 10·26의거가 재평가되고 명예회복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대한민국 헌법전문은 두 가지를 명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헌법정신이 3.1운동정신과 4.19혁명정신이라는 것,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시(國是)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것입니다. 저는 4.19때 대학생으로 시위에 참가하여 당시 경무대까지 달려가 독재타도를 외쳤습니다. 왜 저희들은 4.19혁명을 일으켰습니까? 자유당독재에 대항하여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김재규 장군은 왜 10·26거사를 하였나요?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역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40년 전 김 장군은 법정에서 시종일관 10·26사건을 일컬어 '민주회복국민혁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국현대사에서 만약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민주주의, 자유, 인권, 심지어 자유로운 선거가 언제쯤이나 가능했을까요? 그럼에도 아직도 10·26과 김재규 장군에 대한 재평가는 물론 10·26영령들에 대한 합당한 명예회복이 주어지지 않고 있음은 매우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브레이크뉴스>, 2019년 5월 24일)

'10·26사태'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박정희와 차지철에 대한 김재규의 사감 때문이라는 설, 김재규 자신의 말대로 부마사태의 참혹한 현장을 보고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에 회의를 품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사건 전날인 25일 아시아협회 주최의 만찬회에서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존 베시 육군참모총장이 한 발언 등을 근거로 미국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설 등 논란이 구구하다. 하지만 이는 민중항쟁이 격화되면서 위기에 직면한 정치권력의 내분이 빚어낸 결과로 YH사건·신민당 김영삼 총재 제명파동·부마민중항쟁 등으로 이어진 역사 흐름의 필연적 귀결이었다(<한국근현대사사전>, 2005)는 것은 분명하다.

박정희는 누구?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군인 출신으로 제 5·6·7·8·9대 대통령(재임 1963-79년)을 역임한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1979년 10월 26일)는 1917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다. 국군 창설에 참여하여 1946년 육사 2기로 졸업하고, 1948년 11월 11일 '여순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과 무기징역 형을 선고받았다가 풀려난 뒤 강제 예편된다. 이후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 육군포병학교장, 제5사단장, 제6사단장, 제1군참모장, 제6관구사령관, 육군군수기지사령관, 제1관구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등 군내 요직을 두루 거친다.
1961년 제2군 부사령관 당시 5·16군사쿠데타를 주도하고, 7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으며, 1962년 3월 대통령 권한대행을 겸임하고, 1963년 8월 육군대장으로 전역한다.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고, 그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1967년 7월 제6대 대통령을 역임한다. 1969년 9월 3선개헌안을 변칙통과시켜 이듬해 다시 제7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이어 1972년에는 영구집권을 꾀하기 위해 1인독재체제인 10월유신을 단행, 12월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1978년 제9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1979년 말 18년간의 군사독재체재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부마민중항쟁을 계기로 폭발하면서 반정부투쟁이 확산되는 등 체제위기로까지 심화된다.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고, 11월 3일 국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박정희의 '세 번의 쿠데타'와 노회찬

"오늘의 노회찬을 만든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노회찬이 한 이 말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72년 10월유신이다. 박정희는 세 번의 쿠데타를 일으킨, '헌정질서 파괴행위'의 주역이다. 1961년의 '5.16 군사쿠데타', 1969년의 '3선개헌 쿠데타', 그리고 1972년의 '10월유신 쿠데타'가 그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은 특별한 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살았을 뿐이에요. 학교에서 불의에 대해 맞서 싸우라고 배웠지 불의에 머리를 숙이라고 하지 않았잖아요? 저는 교과서에 나온 대로 살았다고 생각해요. 실은 굉장히 평범한 진리를 좇으면서 살아온 거죠. 그래서 돌이켜보면 박근혜 후보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때문에 오늘의 노회찬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죠. (<더 팩트>, 「[비하인드스토리] 노회찬 "오늘의 노회찬을 만든 것은 박정희 대통령"」, 2012년 9월 20일)

첫 번째 쿠데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우리 세대 특징의 또 하나는 '전후세대'라는 점입니다. 전후세대로서의 특성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중요한 건 우리는 '한국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예요. 어렸을 때 보고 회상할 때마다 잊기 어려운 장면들이 있는데, 그 장면들이 나를 규정하는 자아가 된 거 같아요. 그 장면들이 나름대로 정치적으로 역동적인 장면들인데요. 저는 4.19와 5.16날이 다 기억나요. 저는 1960년 4월 19일날 서대문 형무소에 있었거든요. 내 나이가 5살 땐데, 엄마 따라 외삼촌 면회 갔다가 나오려 하는데 형무소 근처에서 데모가 벌어지는 바람에 못 빠져 나와서 쩔쩔맸던 기억이 나고요. 또 열차 타고 부산에 왔을 때 우리 집 근처에 도지사 공관이 시위 민중들의 돌팔매질로 파괴되고 우리 식구들이 덜덜 떨고 있던 장면이 기억나고요. 또 5.16쿠데타가 나던 날 7시에 통금이 내려서 차가 안 다니던 바람에 어머니가 팔뚝에 야간 통행증 도장을 받았던 기억. 그리고 초등학교 다닐 때 월남 파병 가던 군인들 환송식에 부산부두에 동원돼서 태극기 흔들던 기억. 그런 것들이 한국 자본주의 변천사를 반영한 일이고, 또 무엇보다 전태일이 그랬죠.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퍼슨웹> 인터뷰」, 2003년 1월 1일)

노회찬이 "오후 7시 통금이 내려서 차가 안 다니던 바람에 어머니가 팔뚝에 야간 통행증 도장을 받았던 기억"을 갖고 있던 날인 1961년 5월 16일 새벽 5시,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今朝未明)을 기해서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라는 군부독재의 서막을 알리는 내용이 다소 떨리는 듯한 아나운서(남산 KBS 방송국 당직이었던 박종세)의 목소리로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퍼져나간다.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 주도로 장교 250여 명을 포함해 3,600여 명 정도의 쿠데타 세력—주 병력은 김윤균 준장이 지휘하는 김포 해병대 1여단 1500여명과 역시 김포에 있던 공수특전단 600명—이 한강을 건너 수도 서울의 주요기관들을 점령하면서 국회 해산 등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국가권력을 탈취한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라디오방송을 통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위원회가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통합·장악한다고 선언하고, 6개항의 혁명공약 발표와 함께 '군사혁명'이 성공했다고 발표한다. 이어 아침 9시를 기하여 군사혁명위원회령 제1호를 통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군사혁명위원회의 포고 제1호 7항을 보면 '야간 통행금지 시간은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아침 5시까지'라고 되어 있다.)

▲ (왼쪽)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중앙청으로 진입하고 있는 모습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오른쪽) 5·16 군사쿠데타 직후 시청 앞 광장에서 군인들을 지휘하는 박정희(1917~1979) 소장(중앙)과 휘하 군인들의 모습. 박정희 소장의 왼쪽은 대통령 경호실장이자 국회의원을 역임한 박종규(1930~1985) 소령, 오른쪽은 이후 대통령 경호실장을 역임하게 되는 차지철(1934~1979) 대위. 박정희 바로 뒤는 10.26 때 비서실장 김재원(1923~2016).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당일 경향신문은 '무혈 쿠데타'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낸다. '무혈(無血)'은 5.16쿠데타 기획자인 김종필이 강조하는 표현인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5월 16일 새벽 3시 30분경 한강대교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증언에 따르면 '헌병 2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부상당했다'는 설과 '사망자는 없고 부상자가 9명'이라는 설이 있는데 둘 모두 '무혈'은 아니기 때문이다.

▲ 1961년 5월 16일 경향신문 기사
5.16쿠데타 주역들은 민주주의와 조국근대화, 역사 발전, 명예혁명 등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5.16을 미화시켜 왔다. 박정희에 따르면 5‧16은 "민주주의의 파괴가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구명작업이자 민주정치에 대한 임상 수술"(박정희,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동아출판사, 1962, 216쪽)이게 된다. 나아가 이들은 5.16을 4.19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시켜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5.16쿠데타의 주역이자 박정희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은 "5.16이 쿠데타나 혁명이냐"는 질문에 "영어로는 쿠데타고 우리말로는 혁명"이라는 궤변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의 4.19가 한국사회 민주화운동의 출발점이라면, 1961년의 5.16은 30년간에 걸친 군부독재통치의 출발점이자 사실상 '4.19의 안티테제'였다. 5‧16쿠데타와 박정희 군정의 본질은 1963년 4월 19일 「4월혁명 제4선언문」에 잘 나타나 있다.

※ 참조) <4월혁명 제4선언문>
4월! 뜨거운 피의 적이었던 백색독재와 그를 밑받침한 사회적 제 모순, 즉 사회경제적‧봉건적 구조와 외세의존적‧매판적 경제질서, 의식의 보수성 등 온갖 질곡은 의연히 온존된 채 4월의 정신은 왜곡되고 자기합리화의 선전물로 타락했다. 질서를 약속하며 집권한 군사정부는 무질서한 자기 분열의 노정에 당황하여 안정이라는 이름을 호도하기에 분망하며, 부를 공약한 정권이 호사한 계획의 이면에서 의혹사건을 조작하고 있다. 4월의 피의 대가인 기본적 제 자유권은 헌법 책자의 지면 위에서만 효력을 발휘하고, 입헌주의는 중대 성명주의로 대체되었다. 민족자주역량은 외국 대사관의 성명 앞에 압도당하고, 외국 정부의 망언 앞에 우롱당하고 있다…군사정부의 위압적이고 획일적인 피상적 개혁에의 기도는 사회적 모순을 더욱 첨예화시키고 그것의 확대재생산을 예약해 주었을 뿐이다.

5‧16이 4‧19에 대한 역사적 반동이라는 사실은 1964년 5월 20일 김지하가 쓴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의 조사」에도 잘 드러나 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형욱이 "나는 숨이 막혀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이전에도 아니 그 이후에도 이것만큼 통렬하게 5‧16혁명정부를 비판한 글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박정희와 그의 허울뿐인 '민족적 민주주의'의 치부와 실상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 참조) 김지하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의 조사」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없는 시체여, 반민족적‧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 시체여, 죽어서도 개악과 조어와 식언과 번의와 난동과 불안과 탄압의 명수요 천재요 거장이었다. 너 시체여! 너는 그리하여 일대의 천재요 희대의 졸작이었다. … 구악을 신악으로 개악하여 세대를 교체하고 골백번의 번의의 번의를 번의하여 권태감의 흥분으로 국민정서를 배신하고 부정불하, 부정축재, 매판자본 육성으로 '빠찡꼬'에 '새나라'에 최루탄 등등, 주로 생활필수품만 수입하여 노동자의 언덕으로 알았던 워커힐에 화폐를 증산하여 민족정기를 바로잡아 국민도의를 고취하고 경제를 재건할 철두철미 위대한 시체여, 해괴할손 민족적 민주주의여! … 한없는 망설임과 변의 종잡을 수 없는 막연한 정치이념, 방향감각과 주체의식과 지도력의 상실, 이것이 곧 너의 전부다. … 백의민족이 너에게 내리는 마지막 이 새하얀 수의를 감고 떠나가거라. 너의 고향 그곳으로 돌아가거라. 안개 속으로, 시체여.

'5.16혁명' 또는 '5.16군사혁명'이 '쿠데타' 또는 '군사정변'라는 올바른 명칭을 갖게 된 것은 한 세대가 흐른 뒤였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펼치면서 '사월혁명'과 '5.16쿠데타'를 복원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5.16군사정변'으로 표기되기 시작했다(이재봉,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5.16쿠데타와 미국의 역할 (1)」, <프레시안>, 2018년 5월 10일).

2007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아버지의 5.16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으로 치켜세운 데 이어, 2012년 박근혜(새누리당 전 비상대책위원장)가 5.16군사정변을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평가한 데 대해 노회찬(통합진보당 국회의원)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헌정을 유린한 쿠데타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대통령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역대 대통령 중에 5.16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람은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밖에 없는데 두 사람은 5.16과 마찬가지의 내란으로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라고 지적한다. 또 박근혜 캠프의 정치발전위원을 맡고 있는 박효종 교수가 5.16을 '쿠데타이면서도 동시에 혁명'으로 표현한데 대해 "'독도는 일본 땅'과 마찬가지의 주장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역사적 실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한다.
"(5.16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얘기한다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불가피할 경우에는 법을 어겨도 된다. 최선의 선택이라면 헌법을 유린해도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로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으로 이뤄진 국회를 1961년, 1972년 두 차례나 해산시켰다. 총칼로 국민을 위협하고 국민 주권을 부정하는 행위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5.16과 박정희 정권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태어나서는 안될 정권이었다."고 강조한다. 또한 "1974년에 유신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용공조작사건인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이 억울하게 사형당했고 최근에 이분들이 다 무죄라는 것이 재판부에서 다 밝혀졌다. 유신독재에서 수많은 사람이 감옥에 가고 죽고 고문당하고 했는데 '좀 미안하다,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다' 이러면 되는 겁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5.16이 경제성장을 가져왔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세계적으로 높았던 우리나라 경제성장은 세계적인 저임금,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여전히 세계 제1위인 산업재해를 수많은 사람들이 감수한 많은 국민들의 희생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총칼로 권력을 찬탈한 사람 때문에 이뤄졌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질타한다.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2012년 7월 18일)


2012년 10월 22일 노회찬은 <노회찬의 난중일기>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한 아버지의 아바타」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다.
여름 소나기처럼 내리는 굵은 가을비 속에 마석 모란공원묘지와 국립현충원을 참배하였다. 어제 창당대회에서 선출된 당 지도부와 대선후보의 첫 공식 일정이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현충원 현충탑에 분향할 때마다 마주치는 제단의 검은 돌에 새겨진 헌시이다. 이 글을 처음 본 건 부산중 2학년이었던 1970년, 서울로 수학여행 와서 학생대표로 참배했을 때였다. 너무나 감동적인 글귀라 오랫동안 외우고 다녔다. 그러나 이 시가 시인 이은상에 의해 지어지고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새겨진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 국립현충원은 원래 6.25전몰장병을 위한 국군묘지로 출발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안장된 영령의 80%는 6.25전사자라고 한다. 그러나 현충원엔 무명용사의 묘로 상징화된 곳이 없다. 그래서인가? 대선 후보들이 어느 유명인의 묘를 참배하느냐를 두고 과도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박근혜 후보의 역사인식이 연일 시선집중이다. 박근혜 후보의 헤어스타일이 어머니 것을 빼어 닮았듯이 박후보의 역사인식은 아버지 박정희를 한치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의 모습을 한, 아버지의 아바타이다. 100년 전의 과거사에 대해 일본 국왕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역사의 왜곡과 퇴행이 가져올 참혹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박근혜 후보의 역사인식이 문제시 되고 거듭 과거사에 대한 사과가 요구되는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이다.

▲ 서울국립현충원 방명록을 쓰는 노회찬, 현충탑과 현충시
5.16 미화 작업: '여의도 5.16광장', '제주 5.16도로', '5.16민족상'
1961년 5.16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쿠데타를 미화하고 군사정부의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비행장, 광장이나 도로 명칭 등에 5.16을 갖다 붙이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서울 여의도의 '5.16광장'(현 여의도 공원)과 제주의 '5.16도로'를 꼽을 수 있다.
1970년 박정희는 양택식(서울시장)을 불러서 여의도에 대광장을 만들라고 직접 지시한다. 처음 공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가칭 '민족의 광장'이라고 했지만, 박정희는 이미 '5.16광장'으로 이름을 정해 놓고 있었다.
'5.16광장'이라는 이름은 1962년 5차 개정헌법 전문에 규정한 4.19와 5.16 정신을 이어받은 근대화를 상징하기 위해 붙여졌다고 하지만, 애초에 헌법 전문에 있는 5.16정신은 박정희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넣은 단어였다. 박정희는 5.16광장을 전쟁이 났을 때 군사용 비행장으로 쓰기 위한 목적 이외에도 체제 선전의 목적도 있었다. 박정희의 의도대로 5.16광장에서 가장 많이 열렸던 행사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반공대회'였다. 선거 전이나 독재 정권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는 무렵이면 여지없이 '북괴남침 강력규탄 100만 시민대회' 등 관변단체를 동원한 행사가 열렸다. 5.16광장은 1997년부터 광장 공원화 사업이 추진되면서 '여의도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9년 지금의 '여의도공원'으로 개장하면서 도심 속 녹지이자 시민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임병도, 「제주 '5.16도로', 왜 아직도 이름 안 바꾸나: 박정희 군사쿠데타 미화 위해 이름 붙여진 '5.16도로'... 개명 여론 높다」, <오마이뉴스>, 2017년 1월 8일)

▲ (왼쪽)매일경제, 1974년 6월 25일 (오른쪽)동아일보, 1978년 10월 31일

1975년 9월 2일 오전 9시 여의도 5.16광장에서 중앙학도호국단 발단식이 열린다. 국무총리 김종필은 훈시를 통해 "나라를 지킬 결의를 가다듬고 대비를 서두르는 것은 겨레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한 길이며 나라 없는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한때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모든 국민이 여러분과 같이 자세를 가다듬어 북한공산집단의 부단한 도발과 위험에 대처할 총화단결과 국력배양의 가속화에 가일층 힘써 나갈 획기적인 계기를 맞게 되기 바란다"라고 말한다. 1975년 경기고등학교 학도호국단 연대장이 바로 황교안이다. 노회찬이 이른바 '문제학생'들과 함께 '문제서적'들을 학습하고 유신독재에 맞서 유인물을 제작·살포하는 등 민주주의 수호의 길에 앞장서고 있는 동안, 고교 동창 황교안은 연대장으로 유신 수호에 애썼던 것이다.

▲ (왼쪽) 경향신문 1975년 9월 2일 ▲ (오른쪽) 1975년 경기고 학도호국단 연대장 때의 황교안(맨 앞쪽) (출처: 경기고 72회 졸업앨범)

※ 참조) 학도호국단
학도호국단은 '반공사상교육을 실시하며 조직적 활동을 통하여 투철한 민족의식과 국가관을 정립하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1949년 9월에 결성된다. 그러다가 1960년 4월혁명의 성공으로 학생자치활동의 새로운 전기를 찾기 위해 10년 7개월 만에 해체되고, 각 대학에서는 학생자치기구의 명칭을 학생회로 통일한다. 그 뒤 1975년 5월 문교부에서 고등학교 이상의 학생과 교원으로 구성되는 학도호국단창설계획을 발표, 9월 2일에 전국중앙학도호국단 발단식을 가짐으로써 재발족되었다가 1980년대에 들어와서 폐지되고 학생회가 부활된다.

한편 제주 '5.16도로'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 만들어진 '하치마키'(일본식 머리띠)라고 부르는 도로였다. 군사용 목적과 산림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하치마키 도로를 포장하고 확장한 시기는 5.16군사쿠데타 이후 제주 계엄사령관으로 부임했던 김영관 제주도지사 때였다. 1962년 김영관은 군사정부에 건의해 장비와 국토건설단 인력을 지원받아, 세주와 서귀포를 횡단하는 포장도로를 1969년에 준공했다, 5.16도로가 만들어질 때는 '횡단도로'라고 불렸다. 그러나 1962년 3월 23일 기공식을 한 횡단도로는 개통이 되기도 전인 1963년에 5.16도로라는 기념비가 세워졌고, 기념비에는 박정희의 휘호가 새겨져 있다. 이 도로는 1969년 10월 1일 대선을 5일 앞두고 공사진척도가 70%만 이뤄진 상태에서 개통식을 가졌다는 일화도 있다(한겨레, 1995년 3월 21일). 1997년 5월 15일 제주범도민회는 '제주비전21' 제1회 포럼을 열고 "군사잔재가 남아 있는 51.6도로 이름은 바뀌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이름찾기운동을 펼치겠다"고 밝힌다.

제주 '5.16도로'의 정식 명칭은 '지방도 제1131호선'이다. 지방도가 제주도로 이전되기 이전에는 '국도 제11호선'이었다. 국도명이 있지만, 5.16도로라고 사람들에게 불리는 까닭은 군사쿠데타 이후 5.16을 정당화하기 위한 미화 작업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공무원과 관제단체, 어용 언론을 통한 세뇌작업으로 1131번 국도는 지금까지 5.16도로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임병도, 「제주 '5.16도로', 왜 아직도 이름 안 바꾸나: 박정희 군사쿠데타 미화 위해 이름 붙여진 '5.16도로'... 개명 여론 높다」, <오마이뉴스>, 2017년 1월 8일)
이 외에 박정희는 5.16을 기념하기 위해 '5.16민족상'을 제정하고 '5.16민족상운영위원회'를 설립(1966년 3월 24일)해, "1945년 8월 15일 이후 한국 학술, 예술, 교육, 사회, 산업, 안전보장 등 여섯 가지 분야의 발전에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의 업적을 인정"해 2016년까지 매년 5월 16일에 시상한다. 재단 등기부상 "5.16 혁명의 역사적 사명과 그 이념을 길이 선양함과 아울러 국가 민족의 문화와 산업의 개발에 기여함으로써 조국 근대화의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는 데 있다"고 설립 목적을 밝힌 '5.16민족상운영위원회' 초대 총재는 박정희, 초대 이사장은 김종필이 추대된다. 5.16 민족상 수상자로는 포항제철, 이병도, 전두환, 구자경, 김기춘, 조갑제, 대한민국해병대전우회 등이 있으며, 2016년까지 51회에 걸쳐 총 317명이 수상했다.
단골 후원자는 한국야쿠르트(회장 윤덕병. 5.16군정 당시 박정희 대통령직무대행의 대통령경호실 부실장 출신)로 1998년부터 2012년까지 17차례에 걸쳐 총 7억6,500만원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2013년에 지원을 철회한다. 5·16민족상이 그동안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5.16 군사쿠데타를 미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었고, 한국야쿠르트가 오랫동안 기부를 해온 사실이 알려지면서 인터넷 등을 통해 소비자들이 야쿠르트 제품 불매운동이 제안하고 불매운동이 본격화될 조짐 등 논란과 파장이 커지자 지원 철회를 결정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쿠데타: 1969년 3선개헌 쿠데타
박정희의 영구집권 음모의 결정판이 1972년 유신독재의 등장이라면, 그 음모가 공식적으로 가시화된 것은 1969년의 3선개헌 날치기 통과였으며 그것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 1967년 6월 8일 7대 총선이었다. 박정희와 정부여당이 3선개헌에 필요한 2/3의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로 6.8총선을 치룬 결과 공화당은 개헌의석 117석을 상회하는 129석 의석을 확보한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불법이 총동원됐으며 투·개표 과정에서도 공개투표, 대리투표, 쌍가락지표(야당을 찍은 투표용지에 한 번 더 기표를 해서 무효표로 만드는 수법), 피아노표(개표원이 손가락에 묻힌 인주를 투표용지에 주르륵 문질러서 몽땅 무효표로 만드는 수법), 빈대표(야당에 찍은 O표를 문질러 빈 속을 메우는 수법), 올빼미표(투개표장의 불을 끄고 자신들의 표를 마구 집어넣거나 상대방의 표 묶음을 훔치는 것), 닭죽표(수면제를 탄 닭죽을 먹여 야당 참관인들을 잠재운 뒤 투표용지를 바꿔치기 하는 수법) 등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광범위한 선거 부정 횡행했다(<동아연감>).

▲ (왼쪽) 동아일보 1967년 6월 9일 1면 기사 ▲ (오른쪽) 6월 10일 ‘동아희평’(讓位 두손들었읍니다). 부정선거의 대명사인 ‘3.15’가 ‘6.8’에 왕관을 씌어주고 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동아연감>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유권자들은 대가 없는 표를 찍으려 하지 않았다. 공공연히 금품을 요구했다. 무섭고 괴이한 이상 정신 상태가 전염병처럼 만연돼 퍼져 가고 있다. 가치를 상실한 돈의 노예들이 소돔의 천년성을 구가하고 있다."
<동아일보> 1967년 6월 3일 자에 따르면, 수성국민학교 5·6학년 학생 1000명은 "엄마 아빠, 술 먹고 춤추지 마세요" 등의 플래카드 문안을 준비해 등교했다. 오전 수업만 하는 토요일이었지만, 학생들은 오후 1시로 예정된 궐기 대회를 위해 다들 도시락까지 준비해 학교에 왔다. 그러나 학교 당국이 막아 대회는 열리지 못했다.

▲<동아일보> 1967년 6월 3일 자
박정희에 의한 3선개헌 추진작업은 이른바 '중단 없는 전진의 해'인 1968년부터 본격화되어, 1969년 1월 공화당 의장서리 윤치영의 '3선개헌 검토중'이라는 발언으로 공식적으로 수면 위로 부상한다. '단군 이래 지도자' 운운하면서 박정희를 떠받든 윤치영은 그로 인해 '단군 이래 아첨꾼'이라는 비난의 화살을 받기도 한다.
이후 박정희는 야당이 자신을 독재자라고 했다느니, 야당이 정치를 못하게 한다느니 하면서, '대통령 신임=3선개헌 지지, 대통령 불신=3선개헌 반대'라는 등식을 들고 나왔다. 즉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붙였다가 이것이 부결될 경우, 그것은 곧 자신과 내각에 대한 불신임으로 보고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다분히 위압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었다. 박정희의 권력욕이 노골화되자 3선개헌에 반대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잇따랐다.

이런 가운데 신민당이 주도한 1969년 7월 19일의 '3선개헌 반대 시국대강연회'에서 김대중은 "대한민국에서 황소를 상징으로 한 공화당이 지금 미쳐가지고 국민주권을 때려잡을 3선개헌 음모를 하고 있는데, 미친 황소의 갈 길은 도살장뿐"이라고 운을 떼면서, "3선개헌이 통과되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조문을 장사지내는 것"이자 "박정희씨를 위하여 헌법을 바꿀 수는 없다"고 항변한다.
김영삼 또한 "우리의 많은 농민들은 과거보다 더 못살고, 다만 잘사는 사람이 있다면 박정희씨 주위에 있는 몇몇 사람들일 뿐이며 박정희씨가 아닌 여기에 서 있는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경제발전은 계속 이룩할 수 있다", "양심을 가지고 이 개헌안에 부표를 던진다면 이 나라 이 민족이 살아있는 한 조국과 민족과 민주주의를 살리는 일을 한 것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하면서 3선개헌의 부당성을 공격한다.

전국적인 항의와 시위에 대한 박정희와 공화당의 대응은 1969년 9월 14일 새벽 3선개헌안의 변칙적인 국회 날치기 통과였다. 30일 간의 공고기간이 끝난 개헌안이 9월 13일 국회 본회의에 회부되자 신민당 의원들은 표결저지를 위한 단상점거에 들어갔다. 이렇게 되자 이날 자정 이효상 국회의장은 "13일 본회의는 자동적으로 유회됐으므로 월요일인 15일에 본회의를 열 수밖에 없다"고 선포하고 본회의장에서 빠져나갔다. 신민당 의원들이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고 있을 때 광화문길 건너편 제3별관에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9월 14일 새벽 2시 30분, 쓰레기를 버리는 뒷문을 통해 제3별관으로 조용히 들어간 총 122명(공화 107명, 정우회 11명, 무소속 4명)의 의원이 이효상 의장의 사회로 헌법개정안 표결에 들어간다. 2시43분에 개표 시작, 2시 50분에 122명 전원 찬성으로 헌법개정안의 가결을 선포한다. 이어 국민 투표 법안까지 통과를 시킨 의원들의 많은 수가 기자들이 터트리는 플래시에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별관을 빠져나온다. 그야말로 신종 쿠데타적 수법이며 역대 개헌사에서 가장 비도덕적인 개헌안의 처리였다. 1952년 부산 5.25정치파동, 1954년 4사5입 개헌파동에 이은 세 번째의 헌정질서 파괴 개헌이었다.
스로들 부끄러워 한데서도 여실히 드러나듯이, 그것은 122명에 의해 불과 6분만에 이루어진 쿠데타적 폭거였다. 신민당 원내총무이자 대변인이었던 김영삼은 제70회 제2차 국회 본회의(1969년 6월 13일)에서 이렇게 말한다. "본 의원은 3선 개헌 음모는 제2의 쿠데타다, 5·16 쿠데타에 이어 다시 제2의 쿠데타다, 이렇게 단언하는 것입니다."

▲ (왼쪽) 3선개헌안 변칙 통과: 야당의원들이 본회의장을 점거, 농성으로 표결이 불가능해지자, 공화당 소속 의원들은 새벽 2시경 제3별관에서 기명투표로 3선개헌안의 표결을 만장일치로 끝낸 뒤 황급히 뒷문을 빠져나가고 있다. ▲ (오른쪽) ‘동아희평’의 그림 (동아일보 1969년 9월 15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개헌안 날치기에 대해 신문에 '날치기로 처리됐다'는 식이 아닌 '개헌안 통과'로만 나가도록 압력을 가하라고 각 신문사에 파견된 요원들에게 지시한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부장 권도홍은 이렇게 증언한다. "김OO이라는 담당요원이 '처리'가 아닌 '통과'로 제목을 달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당시 울분을 느끼던 편집국 기자들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굴복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개헌안 변칙처리'로 제목이 나갔다. 그랬더니 다음날 김의 얼굴이 여기저기 멍이 든 채 나타났다. 김형욱 부장한테 직접 얻어맞았다고 우물거리는 것이었다."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I>, 동아일보사, 1992, 164-165쪽)

10월 17일 6차 개헌안 국민투표 결과, 77.1% 참여에 역대 최저의 찬성률(65.1%)로 통과된다. 개헌안의 핵심 골자는 제69조 ⓷항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를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로 바꾸는 것이었다.

세 번째 쿠데타: 1972년 10월유신 쿠데타
유신독재체제의 신호탄이자 '공포정치의 악령'인 10월유신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발표된 '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해서다. 그것은, "평화적 통일의 지향과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위해 구질서를 청산하고 통일을 향한 민족주체세력을 형성하며 능률을 극대화, 자주적인 총력체제의 구축을 방향으로 일대 개혁을 단행…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국무회의를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불과 1년 전에 헌법을 지키겠노라고 국민 앞에 엄숙히 다짐하였던 박정희가 5․16쿠데타와 3선개헌에 이어 헌정질서를 또다시 유린한 것이다. 박정희는 10‧17 특별선언을 '10월유신'이라고 정식 명명하면서 '한국적 민주주의의 정착'을 강조하기도 한다.

▲ (왼쪽)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을 발표하고 있는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 ▲ (가운데) 1972년 10월 18일자 조선일보 1면 기사 (“박정희 대통령은 17일 오후 7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대통령 특별 선언을 통해 국회해산 등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켰다.”) ▲ 10월 유신 발표일인 10월 17일 저녁 7시경 서울 광화문 앞에 포진된 미국제 M48 탱크와 계엄군을 쳐다보며 지나가는 서울 시민들과 학생들
박정희와 그 추종자들의 화려한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유신헌법은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악의 헌법이자, 독재자 박정희가 국민에게 보내는 일종의 협박문서이기도 했다. 헌법개정안을 확정하기 위한 국민투표 또한 국민주권을 농락한 조작된 투표놀이에 불과했다.
유신독재의 탄생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권력에의 끝없는 집착과 함께 갔다는 것과 함께, 5‧16쿠데타, 3선개헌 쿠데타에 뒤이은 민주정치의 목을 비튼 세 번째 쿠데타이자, 나아가 그것에 저항한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위협을 가한 공포의 철권이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의 충복이었던 김형욱은 "박정희는 거칠 게 없는 독재자이자 총통으로 군림했다. 국회나 법원은 장식품이었고 헌법은 왕이 백성에게 내리는 서릿발같은 칙서에 불과했다. 유신으로 박정희는 사실상 박씨 왕조를 세웠다"고 말한다. 김재규는 "유신헌법을 세 번이나 읽다가 하도 화가 나서 '더러운 놈의 나라, 이것이 무슨 헌법이냐. 독재하자는 것이지'"하고 고함을 친다. (조현연, 「청산해야 할 박정희 독재통치 18년과 '인간 박정희'-'신화 속의 허구'에서 '역사 속의 진실'로」, <기독교사상>, 2004년 9월호),
유신독재체제의 권력구조적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일종의 제왕적 대통령제로서 대통령 1인에게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권력이 집중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3권분립을 통한 상호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송두리째 와해된 것이다. 둘째, 정당정치의 불구화와 그에 따른 사회적 통합의 빈곤을 들 수 있다. 이전 정권과는 달리 박정희 정권 하에서는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군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였고 정당과 정당정치의 중요성은 유명무실화되었다. 셋째, 속전속결식 재판과 검찰관의 구형량과 재판부의 선고형량이 일치하는 '정찰제 판결'이다. 유신체제 하에서 사법부는 정권의 시녀로 완전히 전락한다.
2018년 12월 21일 대법원 3부(주심 조희대 대법관)는 "1972년 계엄 포고는 옛 헌법과 현행 헌법에 모두 위배된다"고 판결한다.

※ 참조) 한홍구,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4. 유신의 정신과 뿌리」(한겨레, 2012년 3월 10일)

아기가 태어날 때 미리 이름을 지어놓는 경우도 있지만, 박정희는 비상조치를 준비하면서 이 조치를 무엇이라 부를지를 미리 정해놓은 것 같지 않다. 이 조치는 한동안 '10·17 특별선언'이나 '10·17 비상조치'라고 불렸다. 이 조치로 탄생한 비상국무회의는 열흘 뒤인 10월27일 태어나서는 안 될 이 아이의 이름을 유신이라고 지었다. (…) 유신체제가 성립된 뒤 한국의 헌정사는 크게 바뀌었다. 4월혁명 직후를 제외하고는 유신 이전에는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에서 보듯이 개헌을 시도하는 쪽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쪽이고, '호헌'을 주장하는 쪽이 헌법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쪽이었다. 유신을 분기점으로 호헌과 개헌 사이에 공수 교대가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고 헌법을 사유물로 만들었다. 유신헌법은 헌법이 아니었다. 이제 호헌, 그 유신헌법을 지키자는 자들은 독재의 앞잡이이고 개헌을 요구하는 쪽이 민주세력이 된 것이다.

긴급조치와 '감옥의 전성시대'

박태순과 김동춘은 박정희 통치시기를 '감옥의 전성시대'라고 부른다. "전국 방방곡곡 지명 수배자들을 검거하기 위한 구두 발자국 소리들이 밤새도록 들렸으며, 쫓고 쫓기는 유랑의 무리들의 온갖 사연이 전개되었다. 바야흐로 '감옥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박태순·김동춘, <1960년대의 사회운동>, 까치, 1991). 그 상징이 바로 '긴급조치'로, 그것은 유신독재의 정수이자 정권의 존속을 위한 무소불위의 방패였다. 유신헌법의 대통령 긴급조치권은 사후적․진압적 비상조치뿐 아니라 사전적 예방조치까지도 할 수 있고, 또 비상조치권의 내용․범위․효과가 지극히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국회나 법원에 의한 통제가 거의 인정되지 않는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유신헌법의 긴급조치는 대통령 개인의 의지와 판단에 모든 일을 백지위임하고 있는 것이었다.

▲ 1974년 1월 8일자 중앙일보 호외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1년 남짓 지난 1974년 1월 8일 첫 긴급조치가 발표된 이래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 제9호가 해제될 때까지 2,159일 동안 이 나라 국민들은 긴급조치 아래서 신음해야 했다. 특히 수많은 학생‧종교인‧노동자‧지식인‧재야 정치인들이 긴급조치에 걸려 영장 없이 연행‧구속되었고, 군법회의 재판에 의해 터무니없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 가운데서도 긴급조치 제1호, 제4호, 제9호는 특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 핵심 내용은 이렇다.

(긴급조치 제1호)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이를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긴급조치 제4호) 이 조치에 위반한 자,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영장없이 체포되어 비상군법회의에서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유기징역에 처하는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 학생의 출석거부, 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 학교 내외의 집회‧시위‧성토‧농성, 그 이외의 모든 개별적 행위를 금지하고 이 조치를 위반한 학생은 퇴학, 정학처분을 받고 해당 학교는 폐교처분을 받는다.
(긴급조치 제9호)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부정적 행위를 금한다. 이에 따른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

침묵과 굴종과 압제만을 존재케 한 이 긴급조치의 횡포를, 시인 김지하는 「1974년 1월」에서 '1974년 1월을 죽음으로 부르자', '1974년 1월의 죽음을 두고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고 부르자'라고 노래하기도 한다. 특히 어둠의 절정인 긴급조치 9호('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의 시대에는 음험한 독재의 공포와 질식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는데, 한 마디로 그것은 죽음과 배신의 클라이막스였다.

1974년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일어난 대표적 인권 탄압의 사례로 꼽히는 2차 인민혁명당 사건(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중앙정보부(부장 신직수)의 조작에 의해 만들어진다. 민청학련의 배후로 8명이 긴급조치 4호 위반·국가보안법 위반·내란 음모·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975년 4월 8일에 대법원이 사형을 선고한 후 불과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다. 당시 대법원 재판부는 민복기 대법원장을 비롯해 홍순엽, 이영섭, 주재황, 김영세, 민문기, 양병호, 이병호, 한환진, 임항준, 안병수, 김윤행, 이일규 등 13명. 이 가운데 판결 당시 이일규 판사만이 반대의견을 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 8명 사형, 무기 9명 확정판결문을 읽고 있는 민복기(대법원장). 위 사진 왼쪽부터 김용원(39세. 경기여고 교사), 도예종(51세, 회사 경영), 서도원(52세, 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송상진(46세, 양봉업), 여정남(31세, 무직), 우홍선(45세, 회사원), 이수병(37세, 학원 강사), 하재완(43세, 양조장 운영).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나라 밖의 반향은 컸다. 1974년 6월 8일자 <뉴욕타임스>는 주일 미국대사를 역임한 라이샤워의 「비참한 길을 걷는 한국」을 싣고 "박정희의 이른바 근대민주주의는 조지 오웰의 1인 전제정치이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삭감해야 한다."라고 보도한다. 이어 7월 22일에는 「한국에서의 탄압」이란 사설을 게재, "북한과 구별하기 힘든 독재가 계속된다면 주한미군이 장기주둔할 수 없다. 워싱턴과 도쿄가 공동으로 한국에 대한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워싱턴포스트>와 <더 타임스>도 유신정권의 장기독재와 탄압 실태를 상세히 보도한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형법 제104조의 2에 '국가모독죄'(1975년 3월 25일 제정, 1988년 12월 31일 폐지)를 신설해 맞선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는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한다. 1995년 4월 25일 MBC가 사법제도 1백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판사 315명에게 실시한 '근대 사법제도 100주년 기념 설문조사'에서 인혁당 사건 재판이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이었다고 응답함으로 이 사건이 정상적이지 못했음을 법조인들도 인정한다.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고 발표한다.
'사법살인'으로 줄곧 비판받아온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의 소는 사형 집행 후 30년이 지난 2005년 12월 27일에 받아들여진다. 2007년 1월 23일에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가 피고인 8명에 대한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 그러나 당시 사건을 조작하고 고문한 국가기관의 공무원들, 고문 조작임을 알고도 사형을 언도한 사법부의 담당 판사들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한편 1975년 5월 13일 발포된 긴급조치 9호는 긴급조치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만 4년 6개월 동안이나 지속되어 그 악명과 위세를 떨친다. 긴급조치 제9호의 발동은 한국사회가 전시비상체제로 돌입한 것을 의미했으며, 이 긴급조치 9호에 위배되지 않기 위해서는 국민들은 말하지도 듣지도 말고 오직 '바보처럼' 살아야만 했다. 유신체제가 막을 내린 1979년 10월 26일에 이르기까지 이 조치로 인하여 투옥된 사람은 1,000여명에 달했다. 그리고 설사 구속되지는 않았다 해도 그 이상의 신체적 위해와 정신적 고통과 사회적 격리에 시달린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대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위원회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긴급조치 제9호는 헌법개정에 대한 청원 자체도 금함으로써 유신헌법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올려놓는 동시에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기본권들을 사실상 박탈하여 헌법 위에 존재하는 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무엇이 유언비어라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국민들은 권력자의 비위에 거슬리기만 하면 언제라도 영장 없이 체포‧구금될 위협에 노출되고 말았으며, 누가 그러한 부당한 처우를 받게 되었는지조차 전해들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 조치를 위반하였다고 권력자가 판단을 내린 사람에 대하여 취해진 징계조치는 법의 심판 대상조차 되지 않음으로써 권력자는 사실상 신과 같은 절대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무지막지한 야만적인 긴급조치 제9호가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공산화의 위협'이라는 단 하나의 구실 앞에서 그 구호의 허구성과 기만성을 솔직하게 비판하지 못한 채 이를 묵과함으로써 진정한 안보를 해치는 결과만을 초래하였다."(<1970년대 민주화운동 1>, 1986, 665쪽)

2012년 9월 10일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박근혜는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 "인혁당 사건은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 그 부분에 대해서도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노회찬은 트위터를 통해 이렇게 비판한다.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이 사형당했고 32년 후 대법원은 재심에서 무죄로 판결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라구요? 일제강점이 옳았는지 두 가지 주장이 있는데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고요? 생각보다 중증입니다.

'체육관 선거'를 통한 99.9% 찬성의 '체육관 대통령' 박정희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 활동의 중지 등 '유신독재가 시작된 10월 17일'은 10월 26일 비상국무회의의 헌법개정안 의결 및 공고를 거쳐 11월 21일 국민투표(투표율 92.9%에 찬성 91.5%로 개헌안 확정)를 거친다. 삼엄한 비상계엄령 하에서, 그리고 찬성의 자유는 있되 반대할 수 있는 자유는 없는 가운데, 또 야당 참관인들의 투개표 과정 참석조차 허용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신헌법이 통과됨으로써 유신체제가 공식화한 것이다. 이 과정은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통령 선출로 일단락된다(12월 27일 제8대 대통령 취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전원 참석, 찬성 2,357표, 무효 2표, 99.99%라는 찬성률 속에서, '체육관 선거'를 통한 '체육관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다. (무효 2표 가운데 1표는 박정희 후보의 이름을 잘못 적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선거는 후보는 한 명 뿐이지만 찬/반 투표가 아니라 백지 투표용지에 후보자의 이름을 쓰는 것이었다.)
1978년 7월 6일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차 회의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회식을 갖고 현 박정희 대통령을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제2대 국민회의 대의원 2583명 가운데 2578명이 참석, 박정희 후보가 2577표(무효 1표)를 얻어(99.9%) 임기 6년의 제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78년 7월 7일 한국일보)
▲ (왼쪽) 1972년 12월 27일 제8대 대통령 취임식 ▲ (오른쪽) 1978년 7월 6일 제9대 대통령 취임식. 퍼스트레이디로 참석하고 있는 박근혜(당시 26세).
1970년대 문교부가 발행한 중학교용 교과서 <승공통일의 길 2> 47쪽, 52-53쪽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공산국가에서도 형식상 선거를 치른다. 그러나 그 선거는 민주주의국가에서 실시하고 있는 선거와는 다른 일종의 사기행위이다.…우선 공산국가의 선거에서는 단 한사람의 입후보자에 대하여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것을 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유권자는 찬성할 수 있는 자유는 있어도 반대할 수 있는 자유는 없다. 선거라고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많은 사람 중에서 적격자 한사람을 고르는 선택행위인데 입후보자가 한사람밖에 없다는 것은 벌써 선거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선거 결과는 항상 99% 이상의 투표율과 99% 이상의 찬성으로 나타난다. 이런 선거 분위기 속에서 반대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공산당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 의무만이 있을 뿐 다른 어떤 권리도 인정되지 않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 국가들임을 알 수 있다."

▲ (왼쪽) 문교부가 발행한 1972년 중학교용 승공통일의 길; (중간) 1973년 중학교용 승공통일의 길; (오른쪽) 1975년 중학교용 승공통일의 길

"전쟁을 겪은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다"

"전쟁을 겪은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다"라면서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궤변과 유신이라는 폭력에 의해 자유민주주의의 화려한 깃발이 갈갈이 찢어지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숱한 사람들이 구속되는 광경에 치를 떨며 고등학교를 다닌" 노회찬은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뒤 인민노련 사건으로 법정에 서서 이렇게 항소 이유를 밝힌다(노회찬, 「사멸해 가는 역사의 유물에 의해 산 인간이 심판 받을 수 없다」, 이진경.김진국.김학원.노회찬 외, <선진노동자의 이름으로>, 소나무, 1991, 244-246쪽에서 재인용).
재판장님!
전쟁을 겪은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본인도 16살 되던 해까지는 학교에서 배운 것을 으뜸가는 진리로 알던 순진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1972년 10월 17일 오후 5시 국회가 해산되었다는 라디오 뉴스를 접할 때 저는 집에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통령제는 의원 내각제와는 달리 국회 해산권이 없다는 것은 중학교 때부터 배워온 사회 과목의 상식이었고 교과서가 틀렸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태평로 국회의사당 입구를 가로막고 선 탱크와 중앙청 입구의 장갑차들을 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저는 이미 소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 중 오천석 씨 글에 나오던 '그대의 의견에 동의할 순 없지만, 그대의 말할 권리는 존중한다'는 볼테르의 말을 유달리 좋아했던 저는 그 다음날 집으로 배달된 조선일보가 전날 밤 태평로 조선일보사 앞에서 사들고 온 18일자 조선일보와 내용이 크게 달라진 것을 보고 충격과 함께 이 사회의 비밀을 하나씩 배워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궤변과 유신이라는 폭력에 의해 자유민주주의의 화려한 깃발이 갈갈이 찢어지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숱한 사람들이 구속되는 광경에 치를 떨며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지금 그 소년은 30대 중반의 장년이 되어 국가보안법에 의해 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규범이기도 한 자유민주주의가 유린되던 현장에서 이 길로 들어선 지 십수년만에 여전히 자유민주주의를 농락하는 자들에 의해 체포 기소되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가했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서게 된 것입니다.
재판장님!
지금으로부터 수백만 년 전 네 발로 생활하던 인류의 조상이 두 발로 걷는 데는 수만 년이 걸렸을 것입니다. 숱한 고통과 좌절이 뒤따랐을 것이며 때로는 목숨까지 요구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두 팔이 걷는 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 인류의 문명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 성장하는 노동운동 속에서 새롭게 발현하는 사회주의 운동은 수백만 년 전의 인간의 노력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것은 모순된 현실이 배태한 자연스런 요구이며 현실을 극복코자 하는 의지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더 나은 문명을 창조할 확신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계속 네 발로 기어다닐 것을 강요하는 어떠한 시도도 막을 수 없는 역사 발전의 필연인 것입니다.

경기고 72회 졸업생으로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 서울 화동의 경기고등학교 교정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는, 노회찬과 45년 지기인 이종걸(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10대 소년들이 청춘을 즐기기에는 10월유신으로 그 폭압성을 더해가던 박정희 철권통치가 너무나 분노스러웠다. 우리는 <창작과 비평>도 읽고 함석헌, 백기완 선생의 강연도 다녔다. 노회찬과 함께 퇴학 조치를 불사하고 유인물도 돌리고 데모도 했다. 그러면서 형성됐던 가치관과 사회관이 우리의 평생을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엄격히 얘기하면 같이 한 것이 아니라, 노회찬 친구가 주도하고, 만든 것에 제가 따라갔던 친구였기 때문에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본인이 다 기획하고 한 것에 대해 함께 했던 기억에서 당당하고, 어린 소년 시절에도 지금 보이는 모습들이 남아있다." (세계일보 2018년 7월 26일)
민병두(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는 '노회찬과 함께했던 추억 중에 기억나는 일화'로 1974년 어느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노회찬 의원과는 경기고 1년 선후배 사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비 오는 어느날, 다른 학생들과 함께 창덕궁 비원에 모였는데 그곳에서 갑자기 유신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경찰의 감시가 삼엄했을 때라 불시에 반대 시위가 벌어지곤 했다. 그 시위를 주동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고등학생 노회찬이었다." (김성훈, 「노회찬재단 설립 준비하는 친구들, 우리는 아직도 그가 그립습니다」, <씨네21>, 2018년 11월 29일)

박정희의 한일국교정상화와 노회찬의 '진정한 광복'

격렬한 항의 시위와 비판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1965년 6월 22일 마침내 한일 수교협정이 조인된다. 다음날인 6월 23일 박정희는 TV에 출연해 이렇게 말한다.
"지난 수십 년간, 아니 수백 년간 우리는 일본과 깊은 원한 속에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독립을 말살하였고 우리의 부모·형제를 살상했고 우리의 재산을 착취했습니다. 과거만을 따진다면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무친 감정은 어느 모로 보나 불구대천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습니까."
1965년 8월 14일 대한민국에서는 여당 단독으로 국회가 열려 한일기본조약을 비준한다. 이어 12월 18일 상오 10시 30분 한국의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두 나라의 국교정상화를 최종적으로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의한 비준서를 교환한다. 1951년 10월 20일 제1차 한일회담이 열린 이래 14년1개월28일간에 걸친 양국 간의 교섭을 거쳐 이날 양국 대표는 비준서 교환 의식을 끝냄으로써 두 나라의 수교는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지 60년만에 다시 한일협정이 이루어지게 된다.

2014년 2월 12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정의당이 주최한, '동아시아 평화와 올바른 한일관계 정립을 위한 좌담회'라는 제목으로 일본 무라야마 전 총리 방문기념 좌담회가 열린다. 이 좌담회는 조현연(정의당 부설 진보정의연구소 소장)의 사회로 시작되었고 노회찬(정의당 전 대표)의 기조발제와 테루야 칸토쿠(사회민주당 중의원 의원), 아베 토모코(무소속 중의원 의원), 하토리 료이치(전 의원, 사민당 오사카 본부회장) 등 일본 정치인들과 김동춘(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장), 손호철(서강대 대학원장), 하종문(한신대 일본학과)교수의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노회찬은 홋카이도 대학의 야마구치 지로 교수의 말을 인용해 "일본의 유일한 야당은 이제 미국이다. 아베 정권의 극우적 독주를 견제할 만한 힘이 일본에는 더 이상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일본의 우경화 문제와 북핵문제, 한반도 분단문제 등을 해결하고 동북아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한일 양국, 더 나아가 한중일 3국의 평화를 염원하는 양심세력간의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동북아 평화공동체 건설을 위한 교류협력을 통해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노회찬재단
2016년 8월 15일 제71주년 광복절을 맞아 노회찬이 창원시 성산구 상남공원에서 열린 14회 단정 배중세 지사 추념식에 참석해 이런 추념사를 밝힌다.
진정한 광복을 위해서는 아직도 남겨진 과제들이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와 올바른 한일관계 정립, 그리고 분단된 조국의 통일이야말로 진정한 광복을 이루는 것입니다.

베트남 파병과 박정희, 노회찬의 '진정한 애국'


1964년 9월 22일 박정희는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 등 비전투요원 100여명을 베트남으로 파견,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다. 또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의 추가파병 요청을 받고 이듬해 2월 2000여명의 비전투부대를 보낸다. 박정희가 베트남 파병을 미국에 처음 제안한 것은 1961년 11월 미국 방문 때였다. 한일 국교정상화 안건과 마찬가지로 쿠데타 정권에 대한 지지를 얻으려고 한 제안이었다. 처음에 미국은 박정희의 제안을 거절했으나, 3년 뒤 전쟁이 전면전으로 번지자 태도를 확 바꾼다. 박정희는 1965년 10월 전투부대를 베트남으로 파견한다. 이후 1973년까지 한국은 32만명의 병력을 베트남 전장에 보낸다. 베트남 파병으로 8년 동안 5000명이 넘는 사망자와 1만1000여명의 부상자, 10만명으로 추정되는 고엽제 피해자 등이 났지만, 언론은 이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더러운 전쟁(Dirty War)'이라고 표현한 베트남 전쟁 파병을 통해 한국은 직접적인 외화 수익만 약 10억 달러를 벌어 제2차 경제개발계획(1967~1971)을 가동할 연료로 사용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과 한국의 베트남 특수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목숨값과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라는 과오를 저지르며 얻은 것이었다.

2014년에 출간된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비아북, 215-216쪽)에서 구영식 기자는 노회찬에게 '월남전에 관한 노 대표의 기억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이 애국심과 연결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노회찬은 월남전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역 앞에 있는 초량초등학교와 부산중학교에 다녔다. 초등학생 때는 월남으로 떠나는 병사들을 가득 태운 군함, 수송선 등이 부둣가에 도열해 있었다. 그것들이 출발하는 환송식에 가서 나도 태극기를 흔들었다. 중학교 때는 돌아오는 분들을 맞이하기 위한 환영식에 가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떠날 때 보면 가족들은 밑에서 박카스 한 박스라도 더 올리려고 애를 썼다. 던지다가 박카스가 물에 떨어지기도 했다. 사과를 빨랫줄에 묶어 던지기도 했다. "잘 가라. 살아 돌아와라." 참 엄숙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내가 중학생일 때 그들이 월남전에서 돌아왔는데,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국기에 대한 경례 때도 군인들은 안 했다. 밑에서 군악대가 연주하고 장성들이 "귀관들과 장병들의 노고를……." 이런 얘기를 하는데 군인들이 짝다리를 짚고 담배를 피우고 휘파람을 불었다. 아주 충격적이었다. '싸우고 돌아왔으니 더 자부심 있게 잘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들은 누구를 위한 전쟁에 갔다 왔지?' 그런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 사람들을 통해서 뭐가 애국인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이 뭔지, 진정한 애국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다.
나는 지금도 맹호부대와 청룡부대의 군가를 다 외우고 있다. 그때 하도 많이 불러서 그렇다. 그런데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보니 국가가 늘 정당하고 국가가 시키는 것이 늘 우선인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대학 들어갈 무렵에 리영희 선생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보고 나서야 월남전의 새로운 면모를 이해하게 됐다.

▲ 부산 부두 월남파병 환송식 (출처: 「베트남전쟁 파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바로 이어 '진정한 애국'과 '정치인의 역할'에 대해서 노회찬은 이렇게 답한다(216-217쪽).
그래서 애국심이 중요하고, 우리 국민들이 애국심을 갖길 바라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먼저 자기 나라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 국민들이 자기 나라에 자부심을 갖는 순간 애국심은 저절로 나온다. 애국심은 강요하거나 교육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좋은 나라로 만드는 것은 누구의 역할인가? 그건 정치인들의 역할이다. 그러라고 존재하는 것이 정치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이 이 나라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좋은 나라, 더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한글, 조선왕조실록, 불국사 등 지금도 자부심을 가질 대목이 있다.
솔직히 애국심을 묻는 사람에게 되묻고 싶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우리나라 출산율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이 나라는 애를 가장 낳기 싫어하는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노인들이 가장 많이 자살하는 나라다. 여기서 탈피하려는 노력이 박제된 애국심보다 중요하다. 그것이 진정한 애국이다.

노회찬, "'원조 종북'은 박정희"

2004년 10월 27일 한신대 교양강좌 특강에서 노회찬(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은 "어제는 10·26 25주기였던 날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에게는 특별한 날이어야 한다. 독재자로서 비운의 생을 마감한 아버지 박정희의 과오를 되밟지 않겠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국민들 앞에 자숙해야 하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보면 오히려 아버지보다 더한 과오를 저지르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든다"고 밝힌다.
이어 박근혜가 열린우리당이 추진하고 있는 '4대 개혁입법'의 철회를 요구한 것과 관련해서는, "한나라당의 퇴행적인 역사의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번에 추진되는 4대 개혁입법안은 이미 87년 민주화 투쟁 이후 만들어진 여소야대시절 이미 만들어지고 시행됐어야 할 사항"이라고 못을 박은 뒤, "박근혜 대표는 먹고사는 문제가 우선이라고 언급하면서 이 법의 철회를 요구하고 있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단지 '입으로 들어가는 밥'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상의 자유와 언론, 교육 등 모두 밥만큼 중요한 사안"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박 대표가) 노무현 정권의 경제정책을 사회주의적 정책이라고 비판한 대목에서는 다시 한 번 아버지 박정희가 추진해왔던 경제정책을 반추하길 바란다"며, "박근혜 대표는 노무현 정권의 경제정책이 사회주의적 정책이라고 비판하는데, 경제정책을 국가권력이 좌지우지했던 아버지 박정희야말로 사회주의자 아니었느냐"고 반문한다.

2012년 6월 11일 이른바 '통합진보당 사태'로 새누리당에서 번지는 종북 논란과 관련해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노회찬은 "종북으로 따지면 새누리당에서 모시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의 부친인 박정희 장군이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의 핵심당원으로 (남로당에) 가입한 죄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 아닙니까? 그리고 당시 49년도에 군에서 파면된 사람 아닙니까? 원조 종북이라면 박정희 장군이죠.…저는 과거에 어느 사건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종북이라고 얘기한다면 그런 뜻에서는 원조 종북은 박정희 장군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라며 역공을 펼친다.
1949년 2월 17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총살형 1명 무기 4명-군법회의서 73명에 언도」라는 제목으로 1948년 10월 '여수·순천 반란사건'에 대한 군법회의 판결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건전한 국군을 건설하고서 국방부에서는 특히 작년 10월 반란사건 이래 장교를 비롯하여 병사에 이르기까지 1천여명을 검거하여 취조 중에 있던 중 조사가 끝난 자들은 지난 8일부터 군법회의에 회부 중이었는데 지난 13일까지 판결언도를 받은 수는 73명에 달하고 있는바 그중 전 마산 15연대장 최남근은 총살언도를 받았으며 그 외 김학휴 조병건 박정희 백명종 등은 무기징역 언도를 받고 기타는 15년부터 5년까지 징역판결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남근은 남로당 군세포책임자로서 전번(에) 체포된 이재복의 사상적 감화를 받아 남로당에 가입한 후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동지를 OO중 반란사건 중에는 반군진압작전임무를 수행치 않고 O의 탈주로를 열어주는 등 물질적으로도 국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게 하고 38 이북으로 도주하려다가 체포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해 역사학자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억울했던 빨갱이' 박정희의 비명을 기억하라」, 한겨레, 2015년 10월 24일).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군사법정에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내란사범이자 헌법파괴자였다. 여순반란사건 관련자들이 수십명씩 무더기로 총살당하던 시절이니, 남로당이 대한민국 군부에 침투시킨 최고위 프락치로 지목받은 박정희 급이었으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선엽이 회고록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박정희는 "숙군 과정에서 중형이 선고된 군인 중 구명된 유일한 케이스"였다. (…) 단심제인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과 파면, 급료 몰수" 형을 받은 박정희는 심사장관과 관할관의 확인 과정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되고 다시 그 형의 집행을 면제받았다. (…) 사상적으로 박정희가 투철한 좌익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군 내의 남로당 책임자라는 그의 조직적 위치는 가벼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숙군 과정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기밀을 넘겨주는 대가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런 경력을 가진 사람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자리에 올랐다. 술래가 바뀐 뒤 박정희의 레드 콤플렉스와 사상논쟁의 트라우마는 있는 빨갱이 없는 빨갱이에 대한 병적인 공격증으로 나타났다."
박정희의 육사 동기로 숙군 과정에 직접 참여해 박정희를 수사한 육군본부 정보국 특무과장(제3과장) 김안일은 '자기 조직을 털어놓은 공산주의자란 거세된 환관과 같아 풀어줘도 안심할 수 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한홍구가 언급한 '사상논쟁'과 관련해 조현연은 <진보정치>(82호, 2002년 4월 8일)에서 이렇게 말한다.
"역설적이게도 적색 공포의 통치를 맘껏 구사한 박정희도 희생양이 될 뻔한 적이 있었다. 1963년 대선에서 윤보선이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을 근거로 이른바 '사상논쟁'의 불을 지핀 것이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 '북한에는 공산당이 있고 남한에는 공화당이 있다'는 등의 공세가 가해지기도 했다. 이 에 맞서 박정희는 "싸우다 힘이 부족하면 빨갱이라고 모략을 하는 것은 과거의 한민당이 주로 쓴 수법인데…3권을 쥐고 있는 최고회의 의장을 빨갱이로 모는 구 정치인들이 정권을 잡는다면, 앞으로 우리나라에는 그들이 밉게 보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갱이로 몰리는 무서운 분위기가 될 것"이라고 반격하고 나섰다. 선거를 마친 후 박정희와 윤보선은 축하와 위로를 교환했고 색깔 논쟁은 흔 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처럼 이 모든 색깔 공방은 한 마디로 '웃기는 짜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체로 시대착오적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실체적 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말살시켜야 할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보수정치권의 이합집산 역시도 그러하다. '끊임없이 반복하면 네모꼴도 원이 된다'는 히틀러 치하 괴벨스의 선전술을 통해 국민의 눈을 멀게 하고 무고한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하도록 강요해 온 우리의 '일그러진 영웅들', 국가 폭력과 집단적 광기, 가공할 만한 인간 파괴의 실상과 자기검열적 인격분열증 등은 바로 그 결과였다."

2007년 7월 17일 제헌절. 민주노동당 대선 예비후보 노회찬은 '제7공화국 건설운동'을 선포하면서 노동자의 이익균점권을 앗아간 박정희를 불러낸다.
1948년 7월 17일 만들어진 제헌헌법 18조에는 '이익균점권' 규정되어 있다. 기업이익을 균등하게 나눠 갖자고 요구할 권리가 노동자에게 있음을 명시한 것이다. 59년이 지난 오늘, 이익균점권을 주장하면 빨갱이 취급당하는 세상이 돼 버렸다. 노동자의 권리는 오히려 후퇴했다."고 지적하면서, "1960년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노동자의 권리인 '이익균점권'을 빼앗아갔다. 47년 만에 노회찬이 찾아오겠다. 박정희식 개발독재사상을 '대운하공약'으로 답습하고 있는 이명박 후보, 박정희 군사정권의 수구사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박근혜 후보를 확실하게 꺾겠다.

노회찬, "박정희는 국헌 문란 목적으로 폭동한 자"

2004년 7월 27일 박근혜(한나라당 당대표)가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의 헌법수호 원칙을 의심하고 있다"고 청와대를 공격한다. 청와대-한나라 공방에 가세한 노회찬은 "박근혜 대표는 헌법 정신 운운하기 전에 집 청소부터 말끔히 하라. 정말로 헌법수호를 위한 마음이 있다면 한나라당 내에 헌법을 유린한 사람들에 대한 정리부터 우선되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으로 국민의 기본적인 자유를 탄압하고 쿠데타 정권에 빌붙어 호의호식했던 사람들이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면서 어찌 헌법정신을 운운하냐"고 일침을 가한다. 노회찬은 "특히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정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 계엄확대와 관련해 내란죄를 선고 받은 바 있고, 민정당의 전신인 공화당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유신헌법 제정을 위해 국회마저 해산하는 내란죄를 저질렀다"며 박근혜를 겨냥한다.

2004년 9월 11일 노회찬은 <난중일기>에 「사랑하는 사람도 알고 보면 간첩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보안법과 생사를 같이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 나라의 역사가 정도를 걸어왔다면 1972년 10월 국회를 불법적으로 해산하고 무력으로 헌법의 기능을 정지시킨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자'로서 형법상 내란죄로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박근혜대표가 제 1야당의 당 대표를 맡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무는 북 고(鼓)에 춤 무(舞)이다. 북을 쳐서 춤을 추게 한다는 뜻으로 격려하여 힘이 나게 한다는 말이다. 격려할 때 북을 치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선수들을 고무할 때 '우레와 같은 박수'도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의 신념과 신앙 및 철학을 처벌한 것은 역사의 법정에서 모두 '야만'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누구를 칭찬하고 격려한다고 해서, 찬양하고 고무한다고 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박수를 친다고 해서 이를 이유로 처벌하는 것 역시 '야만'이다.
중국공산당 모택동 주석의 28번째 기일이다.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가 과거사 공방을 위해 최근 펴낸 연구자료에는 모택동으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으면서도 '모택동의 공은 7이고 과는 3이다'며 과거사를 포용한 등소평의 사례를 찬양하고 있다. 15년 전 그 당이 집권했을 당시라면 이처럼 공산주의자 등소평을 고무, 찬양한 여의도 연구소는 국가보안법에 의해 이적단체로 처벌되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담벼락에 어린아이 키만 한 붉은 글씨로 <사랑하는 사람도 알고 보면 간첩이다>고 써 놓았던 사람들이 마지막 비명을 지르고 있다.

박정희와 박근혜에 대한 비판과 질타는 이어진다. 2004년 10월 17일 <노회찬의 난중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32년 전 오늘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10.17 비상조치 이른바 유신이 선포되었다. 헌법상 근거가 없는 비상조치에 의해 국회는 해산 당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은 중단되고, 헌법의 일부 조항은 효력을 정지당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유신헌법에 의해 구속적부심사제 폐지, 임의성 없는 자백의 증거능력부인조항 삭제 등 기본권 제약이 이뤄졌다. 대통령의 국회해산권, 국회의원 1/3 추천권, 긴급조치권 부여, 대통령 연임제한 조항 삭제 등 절대권력화가 이뤄졌다. 대법원장을 비롯한 모든 법관을 대통령이 임명하고 파면할 수 있게 하였고 국정조사권을 삭제하는 등 사법부와 입법부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동일인에 의해 두 번째 쿠데타가 감행된 이 날 저녁 세종로의 중앙청 앞에는 탱크가, 태평로의 국회 앞에는 장갑차가 진주하고 있었다.
전쟁을 겪은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1972년 10월 17일 이후 나는 이미 소년이 아니었다. 그 때 서강대학교 3학년이었던 <박근혜양>은 2년 후 <퍼스트레이디>가 되었고 오늘 오전 한나라당 대표로서 <국가보안법 폐지는 친북활동의 합법화>라 주장하였다.

'독재자 박정희'는 노회찬만이 아니라 홍준표(자유한국당 당대표)도 인정한다. 2018년 3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이 정부 개헌안을 공식 발의하자 자유한국당은 '독재', '관제 개헌' 등의 수사를 총동원해 맹공에 나선다. 홍준표는 이날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확대원내대책회의에서 문재인의 개헌안 발의를 "국회와 상의하지 않은 대통령의 일방적 개헌안 발의"라며 "해방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에 이어 4번째 독재 대통령이 탄생하는 날이 오늘이다"라고 거세게 성토한다.
이런 상황에서 3월 21일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노회찬(정의당 원내대표)과 김어준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문재인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가 독재라고 주장하는 자유한국당의 이율배반적 행태를 강하게 꼬집는다.

김어준: 정부가 생각하는 개헌안은 이런 걸 담고 있어야 된다는 내용을 발표하자 야당에서는 독재. 독재 참 좋아해요. 이 단어, 독재라고 얘기하는데….
노회찬: 많이 해봤으니까 잘 알죠. 익숙하고. 이런 표현부터 먼저 떠올리는 거죠.
김어준: (대통령 개헌안 발의는) 이건 그냥 헌법에 보장된 권리고 자신들도 사실은 정부 발의하자고 계속 했었어요. 박근혜 전 대통령도 그랬고.
노회찬: 이 발언을 하기 위해서 굳이 평소와 다른 복장으로 나타났어요. 가죽점퍼 입고 나타났어요. 실제로 이 발언을 하기 위해서.
김어준: 전투 의지를 보여주는?
노회찬: 그렇죠. 가죽점퍼 하면 주로 누가 입었습니까? 파시스트, 무솔리니, 나치. 이걸 입고 나타나서 정말 독재적 발상을… "개헌 표결에 참여하면 제명하겠다." 본인은 국회의원이 아니니까 참여할 수 없다는 건 아는데 그럼 본인만 안 해야지 왜 이런 헌법파괴적 발성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노회찬, "박정희-박근혜 공동집권의 부녀정권"

2012년 6월 2일 '2012년 우리가 뽑아야 할 12번째 인물'이라는 주제로 대담회가 열린다. 노회찬은 "올해는 열두 번째 대통령을 선출하는 해이면서 동시에 1980년대 이후로 25년 즉, 4반세기가 지난 해이기도 합니다. 지난 25년이 1987년에 시작된 정치적인 민주화의 과정이었다면, 그 과정에서 제대로 진전시키지 못했던, 오히려 정체되거나 후퇴하기까지 했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제대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 올해부터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어느 당의 누가 되든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추진할 리더를 뽑는 것이 최선의 목표이리라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 '박정희와 박근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박근혜 후보를 박정희 대통령의 딸로만 인식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그 이미지로 인해 박 후보가 큰 힘을 얻고 있다고 보지만, 본인이 그간 정치 인생에서 보여준 이러저러한 능력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미지 또는 리더십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런 것들도 오늘의 박근혜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고 박근혜 지지율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근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시 박정희 대통령의 후광이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겠지요. 그런 면에서 박근혜가 가진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은 박정희 대통령의 아바타로서의 측면이 아닐까 합니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거나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분이 두 분인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박정희 대통령과 한편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이 있지요. 김대중 대통령도 못지않다고는 봅니다만… 그렇다면 박정희 향수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저는 그 점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이 '12'의 키워드라고 보고 있습니다.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 데는 박정희 대통령만이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역할도 크다고 봅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했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채워야 할 것을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한 갈증과 갈망이 한참 과거의 박정희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는 기폭제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2014년 4월 7일 한겨레 '취중진담'에서 노회찬은 '박근혜 정부가 2년차를 맞았는데 어떻게 평가하나요. 박근혜 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제주 해군기지, 의료·철도 민영화 등 논란이 되는 현안들이 민주정부에서 시작된 일이라고 주장하는데'라는 물음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민주당이 시작한 일을 계승하려면 민주당에 입당했어야죠. 보통 초등학생이 잘못하면 '형이나 아버지도 과거에 그랬다'는 변명을 해요. 중학생 정도만 돼도 그런 변명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해요. 대통령으로서 할 변명이 아닙니다. 현 정권은 약점만 보이고 있어요. 부정선거 시비를 방어하고 반발한 사람을 찍어낸 것 말고는 한 일이 없습니다. 역으로 보면, 현 정권이 (문제를 악용하기 위해) 지적한 것에 대해 우리가 반성하고 해결하려는 작업이 부족하다는 방증이기도 해요. 현 정부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이 공동 집권하는 '부녀정권'이라고 봐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지금도 힘을 발휘하는 데는 야당이 그때보다 나아진 게 없기 때문이에요.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합니다.  

노회찬, "박정희씨의 구미씨 개명 찬성", "광화문에 박정희 동상 조건부 찬성"

2014년 6.4 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새누리당 후보들은 '박근혜 마케팅', '박정희 마케팅'에 여념이 없었다. 3월 새누리당 경북도지사 예비후보인 박승호(전 포항시장)가 '이제 도시도 브랜드 마케팅이 필요한 시대'라면서 '구미시를 박정희시로 바꾸겠다'는 공약을 내놓는다. "우리 박정희 대통령은 5000년 가난의 한을 푼 대통령입니다. 구미시를 박정희시로 개명을 하면 수출이 많이 늘어날 수 있는 그런 계기를 마련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노회찬은 트위터(3월 14일)에 "대신 박정희씨를 구미씨로 개명하는 건 찬성입니다"라는 풍자성 글을 올려 일침을 가한다. 이에 대해 '금정이‏ @nnn2757'이란 분은 "구미시가 박정희시로 바뀌게 된다면 다음 차례는 육영수 여사 고향인 옥천을 육영수시로 바뀌고, 대구시는 박근혜시로 바꾸자고 할 사람이 나올거고,,완벽한 박정희일가의 국가로 거듭나겠군요. 이민 갈 준비를 계획해야 되는 건 아닌지~"라는 답글을 단다.


▲ JTBC 2014년 3월 11일: 「구미시를 ‘박정희시’로?…‘박근혜 마케팅’ 점입가경」
2015년 2월 9일 새정치민주연합 신임 대표 문재인은 취임 첫 일정으로 국립현충원을 찾아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이승만·박정희 묘역에 참배한다. 야당 대표로서는 처음이다. 참배 후 문재인은 "두 분 대통령에 대해 과(過)를 비판하는 국민이 많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들의 공(功)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이런 평가의 차이는 결국 역사가 하게 될 것"이라고 밝힌다(동아일보, 2015년 2월 10일). 이에 대해 노회찬은 트위터에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켜온 분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면 현충원 무명용사탑과 보라매공원의 산업재해희생자위령탑을 참배하면 족하다"고 지적한다.

7개월 전인 2014년 7월 8일 <노회찬의 동작일기: 첫 날 첫 걸음을 무명용사탑으로 정한 뜻은>이라는 글은 이렇게 적고 있다.
7월 8일 흐리고 비
오전 10시 국회 정론관에서 출마 기자회견을 마치고 첫 걸음을 동작구에 위치한 국립현충원으로 옮겼다. 동작구 주민이 41만여명인데 서울현충원에는 17만 2천분의 영령이 모셔져 있다.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 규모이다. 현충원 무명용사탑을 참배했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 온 참배이다. 한국의 대통령들이 외국을 정상방문하면 국가원수로서 참배하는 곳이 대개 그 나라의 무명용사묘이다. 그러나 한국의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무명용사묘를 참배했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물론 대통령만이 아니다.
현충원 무명용사탑은 한국전쟁 당시 포항전투에서 이름없이 숨진 학도의용군들이 안장된 곳이다. 실로 이 나라는 이름 없는 수많은 분들의 희생으로 지켜져 왔고 또 이름 없는 많은 분들의 땀방울로 성장해왔다. 첫 날 첫 걸음을 무명용사탑으로 정한 것은 이름 있는 사람 앞에 줄서는 정치가 아니라 이름 없는 사람들을 주인으로 모시는 정치를 펼쳐 나가겠다는 다짐의 뜻이다. 이름 없는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건강한 다리가 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다.

▲ (왼쪽) 채널A 화면 캡처 ▲ (오른쪽) 현충원 무명용사탑을 참배하는 노회찬
2016년 11월 박근혜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홍원이 추진위원장을 맡아 "동상 하나 떳떳하게 세우지 못하는 현실은 이제 극복돼야 한다"고 말하는 등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사장 좌승희)이 광화문에 박정희 동상을 세우겠다고 밝힌다.
이런 가운데 11월 3일 YTN 라디오 '최영일의 뉴스 정면승부'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노회찬(정의당 원내대표)은 '조건부 찬성' 입장을 밝힌다. 노회찬의 재치있는 답변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누리꾼 사이에서 '최고의 입담'으로 떠오르며 화제가 된다.
"어이없는 주장이지만 조건부 찬성이라 답했습니다. 어떤 조건이냐 묻길래 광화문 지하 100m에 묻는다면 검토할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 (왼쪽) 2016년 11월 4일 jtbc 화면 캡처 (오른쪽) tbsTV 화면 캡처 (2016년 11월 6일)
강상구(정의당 전 교육연수원장)의 책 <언제나, 노회찬 어록: 우리를 행복하게 한 그의 말들>(루아크, 2019, 151-152쪽)은 이렇게 보태고 있다.
"인간이 만든 시설물 중 지하 100미터에 위치한 게 많지 않다. 북한의 지하철이 지하 100미터 정도에서 운행 중이고, 중국 상해에는 100미터 깊이의 거대한 채석장 구덩이에 6성급 호텔이 세워져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폴란드 크라쿠프에는 소금 광산이 있는데 거기 지하 100미터에 성당이 있다. 입자물리실험을 위한 '강압자충돌기'도 지하 100미터에 놓여 있다. 지하 100미터에 뭔가를 만들면 이처럼 세계적인 이목을 끌 수 있다. 하물며 지하 100미터에 동상이라니. 최순실 사태로 국민의 분노가 점점 끓어오르던 때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 때문에 박근혜 후보를 찍었던 사람들조차 지지를 철회하던 시절이다. 박정희 동상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노회찬 의원의 제안대로 하는 것. 보수단체 입장에서는 매우 아쉬워할 일이다."

▲ 박정희 동상 건립 찬반 대치. 2017년 11월 13일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열린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의 박정희 동상 기증식에 맞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동상 설치 반대를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경향신문 2017년 11월 14일).
"최근 백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서울시 소유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부지에 이른바 '박정희 동상'을 건립하는 것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와 같은 동상 건립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017년 11월 15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TBS 의뢰로 박 전 대통령의 동상 건립에 대해 물은 결과, "반대한다"는 응답이 66.5%(매우 반대 50.7%, 반대하는 편 15.8%)로, "찬성" 응답(30.1%: 매우 찬성 16.3%, 찬성하는 편 13.8%)보다 2배 이상 높게 나타났다. 여론조사로 보면 '박정희 동상' 건립 반대 의견이 66.5%로, 국민 3명 중 2명은 동상 건립에 반대하는 셈이다. 특히 박정희의 고향인 대구경북("찬성" 45.8%, "반대" 54.2%)을 비롯한 모든 지역에서 반대 여론이 찬성보다 더 높았다.


한편 2017년 10월 13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법원(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은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어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이 인정된다"고 밝히면서 추가 구속영장을 발부한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나 국민 화합·통합을 명분으로 선처를 요구하는 주장도 있었으나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치주의의 대원칙을 다시 확인한 의미가 크다. 전직 대통령이란 이유로 불구속 선처를 하기에는 그의 죄상이 너무도 중대하다고 본 것이다.
구속 연장 여부가 확정되자 다음날인 10월 14일 노회찬은 페이스북을 통해 "박근혜 전대통령의 구속기간이 연장되었습니다. 10월 17일부터 내년 4월 16일까지 최장 6개월. 10월 17일은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시작된 날이고 4월 16일은 세월호참사 발생일입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 결국 뿌린대로 거두는 법입니다"라고 밝힌다.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

"전쟁을 겪은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노회찬이 남긴 기록을 보면 자주 등장하는 글귀다. 10대 청소년 노회찬이 겪은 '전쟁'은 바로 '유신독재'였고, 현실과 교과서의 괴리는 이후 노회찬의 삶의 여정에 푯대가 된다. 그의 말처럼 "'오늘의 노회찬'을 만든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으며 '감옥의 전성시대'를 연 박정희의 유신독재였던 것이다.
2006년 5월 17일 CBS 라디오 '뉴스야 놀자'에 출연한 노회찬은 "내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게 평가하는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의 독재통치 기간뿐 아니라, 전두환, 노태우라는 자신의 제자까지 키워서, 통틀어 일제 식민통치 기간과 똑같은, 무려 36년간을 군부독재 시대로 이끈 인물이라 도저히 좋게 평가할 수가 없다"고 밝힌다.

'접인춘풍 임기추상(接人春風 臨己秋霜, 다른 사람에게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하고, 자신에겐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대한다).' 박정희가 좌우명처럼 마음에 새겼던 말이라고 한다. 노회찬이 '전쟁'이라고 표현한 유신 시대, 특히 민주주의를 질식시킨 긴조(긴급조치) 시대를 떠올린다면 이 좌우명은 '접기춘풍 임인추상'으로 바뀌는 것이 박정희의 행적에 부합한다고 본다. "자신에겐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대한다."

스스로에게 늘 엄격했던 노회찬의 삶의 여정, 그 기록들을 살피다보면 문득문득 시인 신경림의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가 떠오른다.

일상에 빠지지 않고 / 대의를 위해 나아가며 /
억눌리는 자에게 헌신적이며 / 억누르는 자에게 용감하며 /
스스로에게 비판적이며 / 동지에 대한 비판도 망설이지 않고 /
목숨을 걸고 치열히 / 순간순간을 불꽃처럼 강렬히 여기며 /
날마다 진보하며 / 성실성에 있어 동지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보되 / 새로운 모습을 바꾸어 나갈 수 있으며 /
진실한 용기로 늘 뜨겁고 / 언제나 타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
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바꾸어 내며 /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고 /
내가 잊어서는 안 될 이름을 늘 기억하며 /
내 작은 힘이 타인의 삶에 / 용기를 줄 수 있는 배려를 잊지 말고 /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 끊임없는 역사와 함께 흐를 수 있는 /
그런 내가 되어야 한다.
- 신경림,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가난한 사랑 노래>, 실천문학, 1988)

▲ 2009년 4월 7일 노원역 근처 북부고용지원센타 10층 대강당. 마들연구소(이사장 노회찬) 제8회 명사초청특강 자리에서 ‘시를 읽는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신경림 시인. "시는 진실과 가장 가까이 있을 때 울림이 크고 빛이 난다."


※ '오늘의 노회찬'을 만든 것이 박정희라면, 노회찬과 노회찬의 꿈은 '오늘의 노회찬재단'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사후 40년이 흐른 2019년 10월 26일 오늘 노회찬재단은 노회찬의 꿈을 이어갈 '제2, 제3의 노회찬'들과 함께 <노회찬정치학교 1기>의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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