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했던 일이 가시화되고 있다. 미국이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서 탈퇴한 지 하루 만에 중국을 겨냥한 중거리 미사일을 아시아에 배치할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와 관련해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은 3일(현지 시각) 아시아 순방의 일환으로 호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지상 발사형 중거리 미사일의 아시아 배치를 검토 중이냐'는 기자들 질문에 "그렇다. 몇 달 내에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는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INF 조약 탈퇴 의사를 밝힌 작년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작년 4월 상원 청문회에서 당시 태평양 사령부 사령관 해리 해리스(현 주한미국대사)는 "중국이 INF 조약의 당사국이었다면 중국 미사일 전력의 약 95%는 이 조약을 위반하는 셈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은 러시아와의 INF 조약에 의해 (중국과) 상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중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역시 작년 10월 탈퇴 의사를 밝히면서 중국을 거론했다. "러시아가 (INF 조약이 금지한 무기를) 만들고 중국도 만들고 있는데 우리만 조약을 준수한다면, 그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8월 1일부로 INF 조약 파기를 공식화한 미국은 그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탈퇴 명분은 러시아의 조약 위반에서 찾았지만, 그 목표는 결국 중국을 겨냥한 것임을 감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미국 본토에 배치하면 무용지물
INF 조약이 금지한 대상은 500~5500km의 지상 발사 미사일 및 발사대이다. 이에 따라 이 조약에서 탈퇴한 미국이 이러한 사거리의 미사일을 만들어도 본토에 배치하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미국이 본토에서 유사시 중국이나 북한을 향해서 쏘면 태평양에 떨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진 배치가 불가피해진다. 에스퍼의 발언도 이러한 취지를 품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중국을 겨냥하는 미사일을 어디에 배치할 수 있을까? 먼저 미국 영토인 괌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러 종류의 미사일을 곳곳에 분산 배치해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기지가 있는 한국과 일본도 후보지로 떠올리게 될 것이다.
바로 이 길목에 한반도 정세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전쟁'이 똬리를 틀고 있다. 가령 이런 질문이다. '미국이 한국이나 일본에 미사일 배치를 추진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존재할 때가 될 것이다. 반대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다가설수록 미국의 미사일 배치는 여의치 않게 된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치고는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이 벌어져왔다. 미국이 INF 조약 탈퇴를 공식 천명한 시점과 '하노이 노딜'이 시기적으로 일치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전면에 나서 2월 1일에 INF 조약 탈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내놓을 '비핵화 정의 문서'도 작성했다.
협상을 결렬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방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내놓는 것이다.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이 정확히 이랬다. '비핵화 정의 문서'에 북한의 핵포기뿐만 아니라 화학무기와 생물무기, 그리고 모든 탄도미사일과 이중용도 프로그램 폐기까지 담아 북한에 들이민 것이다.
6월 30일 판문점 번개팅을 통해 반전이 이뤄지는 듯했지만, 파격적인 형식에 비해 내용이 바뀐 것은 현재까지 없다. 미국은 상기한 비핵화의 정의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고, 북한은 이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남북한의 담대한 용기가 절실하다
미국이 중국 봉쇄를 염두에 두고 한반도 비핵화의 문턱을 크게 높여 대북 협상에 장애물을 설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나 구조적으로 보나 미국의 대중 봉쇄 전략과 대북 협상은 어울리는 짝이 아니다.
미국은 1990년대 초반 이래로 중국에 대한 봉쇄의 필요성을 느낄 때마다 북핵 문제를 의도적으로 과장하면서 협상다운 협상을 회피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구조적으로 볼 때에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비핵화, 그리고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 정상화는 주한미군을 비롯한 한미동맹의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오늘날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대중 봉쇄 전략에 사로잡혀 있다. 개전과 휴전을 거듭해온 미중무역전쟁은 트럼프가 중국산 제품에 또다시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해 확전을 예고하고 있다. 1972년 이래 미중관계의 초석이 되어왔던 '하나의 중국 정책'도 하나둘씩 허물고 있다. 급기야 INF 조약에서 탈퇴하자마자 중국을 겨냥한 미사일 배치 의사를 피력하고 나섰다.
미국의 대중국 매파들은 한국은 대중 봉쇄의 '전초기지'로, 북한은 미국의 군사력과 동맹 강화의 '꽃놀이패'로 삼아왔다. 트럼프는 이러한 전통적 기류에서 탈피하려는 것처럼 비춰지기도 했지만, 아직은 아니다. 북한을 상대로는 전쟁과 핵실험 및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막았다는 점을 강조해왔지만, 더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고 있다. 동시에 중국몽을 꺾겠다는 의지를 역대 그 어느 대통령보다 불태우고 있다.
이렇듯 트럼프는 북미관계에서 약간의 진전을 이룬 상태에서 '현상 유지'를 관리하는 데에 치중하고 있다. 또한 미중관계에서는 전면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다. 트럼프가 이러한 방식으로 미국 주류와 부지불식간에 타협을 이루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드는 까닭이다.
남북한은 더 늦기 전에 '미국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북한은 '북한식의 빅딜'을 마련해 미국과의 담판에 나서야 한다. 트럼프의 귀가 솔깃해질 만한 제안을 마련해 그의 정치적 계산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한국도 미국의 부당하고 황당한 요구에는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 미사일 배치는 물론이고 방위비 분담금 인상 및 호르무즈 해협 파병 등이 이에 해당된다. 지금이야말로 남북한의 현명하면서도 담대한 용기가 절실한 시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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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wooksik@gmail.com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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