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이 있는데, 제나라(산동반도 일대) 사람 서복(徐福)이다. <사기>를 비롯한 정사에는 '서불(徐市)'로 기록되어 있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자 산동성 태산에 올라 성대한 봉선의식을 거행한다. 이때 서복은 진시황에게 신선과 불로초를 찾는 일의 어려움을 설명한다. "저 바다 밖에는 신선이 사는 선산(仙山)이 있는데 그 산 정상에서만 자라는 선약을 구해 술에 타 마시면 장생불로할 수 있습니다." 다만, 바다에는 커다란 상어가 길을 막고 있기 때문에 신선이 살고 있는 섬에 도무지 가까이 갈 수 없다고 했다. 더불어 견고한 함선을 만들고 거대한 선단을 꾸려 최고의 궁수를 배치하고 오곡과 온갖 장인과 삼천 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배에 실을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이토록 이민(移民) 혐의가 명백했음에도 진시황은 어째서 알아채지 못했을까. 진시황은 왜 서복에게 속고 말았을까. 서복은 바다의 신에게 성대한 예물을 바친다는 것을 핑계로 기어이 삼천 명의 청춘을 바다로 데려갔다. 그리곤 도박에 멋지게 성공했다. <사기>의 '회남형산열전'에는 "서복은 무리를 이끌고 동쪽 바다로 나아가 넓은 들판과 강이 있는 평원광택(平原廣澤)에 도달하자 그곳에 머물러 스스로 왕이 되고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고 적었다. 서복 일행은 신천지를 찾아 나설 때 유학·경서 및 의료 관련 서책을 많이 싣고 나왔다. 이는 진시황의 분서갱유 사건을 예견하고 미리 대피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이도 있고, 서복 탈출의 후환으로 분서갱유 사건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제주도는 이런 옛이야기를 바탕으로 2003년 10월 서복공원과 서복전시관을 조성했다. 일본 학계는 <사기>에 나오는 '평원광택'을 근거로 일본 규슈의 사가현을 서복의 최종 정착지라고 주장한다.
2015년 9월 제주도에서는 한중일 3국의 서복 연구자들이 모여 '서복문화국제연구협의회'를 창립하고, 연구결과를 교류하고 있다.
중국식 표현을 빌리자면 '구(舊)화교'와 '신(新)화교'가 있다. 1992년 한중수교를 기준으로 삼는다. 구화교의 90%가 산동 사람이다. 짜장면이 산동에서 유래했고, 중국 음식의 이름 중에는 산동 사투리가 많다. '라조기'가 대표적이다. 표준말로는 '라지오지'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 문화의 대부분은 춘추전국시대를 기준으로 제나라와 노나라 문화고, 지리적 기준으론 산동 반도의 문화다. 산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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