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교토대학 명예 교수 후마 스스무(夫馬 進)의 정의를 그대로 빌려오자면 "조선연행사(朝鮮燕行使)는 일찍이 조선국왕이 중국 북경(北京)에 파견한 사대(事大) 사절이고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는 조선국왕이 일본의 에도(江戸)에 파견한 교린(交隣) 사절이다." 이 중 조선통신사에 대해서는 한·일 양국에서 일찍부터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고, 학계는 물론 일반 시민에게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연행사의 경우 세계 학계에서 그 개요조차 소개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그런데 조선연행사는 세계외교사 측면에서 보면 지극히 특이한 경우다. "약 5백 년에 걸쳐 서울에서 북경까지 거의 같은 길을 통해, 거의 같은 목적으로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명나라 일대(一代)에 연행사절은 1,252회 파견되고 연 평균 4.6회였다는 수치가 제시된다.
한편 조선조는 청조에도 1637년(崇德 2, 仁祖 15)부터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光緖 20, 高宗 31)까지 258년 동안 합계 494회, 연 평균 거의 2회의 사절을 파견했다. 하지만 재자행(齎咨行)이라고 부르는 사무 차원에서 파견된 것까지 포함하자면 연간 약 3.7회에 달한다.
학술서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리고 논문들의 집합이지만, 책 <조선연행사와 조선통신사(朝鮮燕行使と朝鮮通信使)>의 논점은 크게 세 가지.
첫째, 조선연행사와 조선통신사가 교류한 시대에 동아시아 국제관계와 국제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라는 문제이다. 둘째, 조선연행사를 통한 조선과 중국의 학술교류는 어떠했으며, 여기에는 어떠한 변천이 보이는가라는 문제이다. 셋째, 조선연행사와 조선통신사를 따로따로가 아니라 통합해서 같은 시점에서 봄으로써, 같이 서울을 출발한 사절이 북쪽의 중국과 남쪽의 일본에서 어떠한 학술과 만나게 되는가, 또 여기에 어떠한 변천이 보이는가 하는 문제이다.
조선 시대의 외교 원리로 일관되었던 '사대'와 '교린'에 대한 논설이 좋았다. 대부분의 연행록이 고정화된 내용이거나 천편일률적인 관점을 지녔다는 사실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무로마치 시대 때 일본 측이 뻔뻔하게도 몇 차례나 조선에 고려대장경을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는 사실도 새삼스럽다. 일본 근대 정치학의 뿌리인 소라이학에 대한 당시의 평가도 반드시 읽어야 할 대목이다. 일본에 현존하는 조선 연행록을 일일이 훑어보고 해제한 대목에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흔들어댈 수밖에 없다. 극일은 정신승리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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