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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발전을 위해 우리가 택해야 할 카드는?

[경제지리학자들의 시선] 지역산업육성과 지역혁신체제

대한민국은 신속한 경제성장과 산업구조 개편을 위해 국가주도의 경제성장발전 모델을 채택하였다. 소위, 개발주의모델(developmetalism)이라 불리는 성장방식을 통해 우리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가장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룩한 나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세계는 이와 같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 치켜세웠다. 하지만, 이런 '기적' 같은 성취는 사실 사회경제 다방면의 불균형을 감내한 결과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통해 황폐화 된 국토에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 지배집단이 사라지게 되었고, 이런 사회 권력층의 부재는 국가통치자의 계획대로 정책을 실행함에 있어 더 없이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렇게 자립경제와 신속한 국가경쟁력 향상을 위해 유망산업만을 골라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위너피킹(winner picking)' 전략이 실행됐다.

결과적으로 '위너피킹' 전략을 통해 우리는 '압축성장'이라는 달콤함을 얻었지만, 한편으로는 오랜 시간 해결해야 할 숙제 역시 떠안았다. 대기업 육성 정책으로 인한 정경유착이 드러났고 국토종합 개발계획이라는 명목하에 선별적으로 울산‧포항 등지에 대규모 공업단지를 조성함으로써 거점 공업 지역에만 자본과 인구가 집중되어 지역 간 격차가 더욱 커지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잠재적으로 지역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을 제공했다.

1990년대 후반 무렵 이와 같은 사회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지역 간 균형발전을 도모하고자 유럽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던 지역혁신체제(Regional Innovation Systems)가 국내에 소개됐다.

지역혁신체제란 일반적으로 각 지역에 내재하여 있는 혁신요소들(대학, 기업, 인력 등과 같은 물리적 조직과 사회적 관습 등)의 혁신능력 증진과 상호학습 촉진 등을 통해 자생적인 지역경쟁력 향상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혁신체제 구축의 전제조건으로 지방분권이 강조됐다.

이론적인 틀만 살펴보자면 지역혁신체제는 지역경쟁력 강화에 이상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 정부가 지속해서 추진 중인 지방분권화에도 잘 들어맞는 '만병통치약'처럼 보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학계나 정책입안자들은 지역혁신체제가 국내에서 잘 작동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 이유로 우선 정책입안자들이 지역혁신체제를 국내에 적용함에 있어, 사회경제적 환경이 다른 기존 서구 모델을 비판 없이 그대로 가지고 들어오는 실수를 범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지역혁신체제는 기본적으로 제도적 뿌리내림 등 지역이 가진 고유한 특성과 혁신요소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한 내생적 발전을 지향하지만, 우리는 제도와 지역 고유의 문화는 상대적으로 배척한 채 개발주의 시대처럼 물리적인 인프라 구축과 재정 지원 등에만 집중했다는 점이다.

사실 서구에서도 지역혁신체제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적지 않았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및 이탈리아 지역들의 개별적 성공사례도 있었지만, 혁신체제라는 이론적 틀을 제공했던 혁신 경제학자들(크리스토퍼 프리먼, 지오반니 도시, 리차드 넬슨 등)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유럽연합의 리스본전략(Lisbon Strategy)처럼 별다른 성과가 없었던 경우도 있었다.

기존 사례연구들을 살펴보면 지역혁신체제는 애초 지역에 내재한 혁신역량과 비례하여 성과가 나오는 경향이 있는데, 이 경우 혁신 인프라가 부족한 낙후지역에서는 궁극적으로 혁신체제가 가동되기 힘들다. 결국 지역혁신체제는 경쟁력 있는 지역만을 더욱 경쟁력 있게 만들면서 지역균형발전을 저해할 수도 있다.

여러 비판을 토대로 지역혁신체제 역시 다양한 방향으로 진화하게 되었고, 이런 맥락 속에서 스마트 특성화 전략(Smart Specialisation Strategy)도 탄생했다. 스마트 특성화란 저성장 시대의 진입과 글로벌 경쟁 환경 변화 등으로 인해, 지역이 가진 고유자산과 혁신역량 등을 바탕으로 지역 '맞춤형' 특성화 산업을 조성하고자 기존산업의 구조 고도화(현대화, 다각화 등) 및 미래성장동력으로 꼽히는 바이오, 나노, ICT 등을 지역 자산과 연계, 특성화하여 지역경쟁력 향상을 추진하겠다는 개념이다. 이는 이전 지역혁신체제에서 지역 혁신역량과 특성을 심도 있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수용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현재 국내에서도 4차 산업혁명, 저출산·고령화, 그리고 지역산업의 위기대응 방안으로 스마트 특성화 전략사업을 진행 중이다. 이를 통해, 지역경쟁력 향상과 지역균형 발전을 도모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스마트 특성화 개념 역시 지역혁신체제와 마찬가지로 국내에 적용하기 위해선 해결해야 할 다양한 숙제가 남아있다.

먼저 과연 우리나라 지역들이 차별화된 산업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주변 지역의 산업구조와 상호연관성이 높은지에 대한 의문이다. 지역 주력(전략)산업을 살펴보면 실질적으로 지역 간 중복되는 주요 산업도 많을뿐더러, 지역산업의 특성화를 위한 혁신요소도 갖추지 않은 채 장밋빛 미래만을 꿈꾸며 지역의 주력산업을 선정한 건 아닌 건가 하는 회의적인 시각이다.

또한 현실적으로 지역마다 갖추어진 혁신역량의 차이를 고려한다면 스마트 특성화를 통해 과연 얼마나 많은 지자체가 지역산업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지 여부도 문제다. 이는 지역혁신체제와 마찬가지로 산업이나 혁신기반이 상대적으로 결핍되어 자생적 성장이 힘든 낙후지역의 경우에는 어떤 대안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설령 산업이 특화되어 발전하게 되는 몇몇 지역들이 발생한다면, 그 지역들로 직장을 찾아 떠나는 주변 지역의 경제활동인구가 늘어날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별적 지역산업의 특성화는 수도권과 마찬가지로 주변부의 잠재적 혁신요소들(기업이나 인력 등)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수 있다.

이 경우 지역경쟁력을 갖춘 몇몇 거점 산업화지역의 비대화가 진행될 것이고 이런 관점에서 과연 스마트 특성화 전략이 지역 간 균형발전과 이를 통한 지방분권, 그리고 나아가 실질적으로 국가 경제에 긍정적인 요소가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있다.

지난 5월 지역혁신체제를 주창한 사람 중 한 명인 영국 카디프 대학의 케빈 모건 교수가 '스마트 정부(smart state)' 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산업발전과 지역경쟁력 향상을 위해선 다시금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한 개념인데,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마리아나 마추카토 교수 역시 '기업가적 정부(the entrepreneurial state)'라는 개념을 통해 산업경쟁력과 민간부문의 기업혁신을 위해 미국 정부가 마치 기업처럼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한 사례를 소개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 캠퍼스의 프레드 블록 교수도 이런 미국 정부를 두고, '숨겨진 개발주의국가(hidden developmental state)'라고 칭했다. 공교롭게도 위의 개념들은 2007~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저성장 시대로의 진입과 함께 등장하였는데, 민간부문이고 산업육성이고 할 것 없이 정부의 전방위적이며 적극적인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토대를 마련했다.

개발주의 시기처럼 다시금 적극적인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분위기가 서구 학계로부터 형성되면서, 여태껏 지역에 내재한 혁신역량을 어떻게 극대화하여 자생적 경쟁력을 끌어낼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는 우리에게는 새로운 숙제가 생겨난 셈이다.

이상적인 방안으로는 지방의 자치권 향상과 더불어 지역은 미시적으로 지역에 특화된 산업육성 정책만을 추진하고, 중앙은 거시적으로 국가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지역산업을 안정적으로 육성할 수 있는 포괄적 정책을 상보적으로 펼치면 좋겠지만, 수도권 집중화는 갈수록 심해지고 지방은 이제 '혁신'이 아니라 '축소도시'를 대비해야 하는 현시점에서 이마저도 쉬워 보이지 않다.

세상에 범용적인 정책은 없다는 걸 고려한다면, 이제 우리는 서구사회로부터 비판 없는 개념 유입을 지양하고 우리 실정에 맞는 지역산업육성정책 및 지역혁신체제 구축이 필요하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정말 혁신적 사고가 필요한 시기다.


<필자소개>

전봉경 박사는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에서 혁신체제와 산업구조 고도화 관련 연구로 박사학위, 영국 서섹스대학 과학기술정책연구소(SPRU)에서 지역혁신시스템 관련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인천연구원에 초빙연구원 자격으로 근무 중이며, 한국경제지리학회 특임이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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