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북반구를 덮친 폭염은 최악의 자연 재해로 기록됐다. 지난해 8월 1일 강원도 홍천의 낮 최고기온이 41도로 측정돼 국내 관측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서울 기온도 같은 날 39.6도로 관측돼 1907년 기상 관측 시작 이래 111년 만에 가장 높았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영국, 체코, 스워덴 등 북반구 여러 나라에서 최고기온이 경신됐다. 그런데 올해에는 폭염이 예년보다 두 달 일찍 찾아왔다. 지난 주말 내내 전국적으로 33도 이상의 폭염이 지속됐다. 5월 일 최고기온 극값을 경신한 곳이 속출했다. 올해 여름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미국기상학회(AMS)는 세계 10개국 120여 명의 학자가 참여한 기후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2017~2018년 지구를 달군 폭염과 가뭄, 대형 홍수 등이 인간의 활동과 그에 따른 기후변화 때문이라는 사실이 지난해 다시 한 번 확인됐다고 밝혔다. 한반도의 2017년 봄을 뜨겁게 달군 이례적으로 이른 폭염 역시 인간 활동에 의한 결과이며, 이런 추세는 점점 가속화할 것으로 밝혀졌다. 올해 여름을 에어컨에 의지하며 근근하게 견뎌낸다 한들, 이후에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더 강력한 폭염을 더 강력한 에어컨 바람으로 이겨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될 뿐이다.
기후 변화와 멸종 위기
그러는 사이 수많은 생물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생물다양성협약의 과학적 자문을 위해 설립된 정부 간 협의체인 '생물다양성과학기구(IPBES)'는 최근 <지구평가보고서>에서 인간의 활동으로 인한 동·식물 서식지 감소와 기후 변화 등으로 지구가 대멸종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생물 멸종이 전례 없는 속도로 진행되면서 동·식물 종의 8분의 1인 100만종 이상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기후 변화로 인한 멸종 위기는 국내에서도 진행 중이다. 국내 1~2급 멸종위기종의 수는 1989년 92종에서 2018년 267종으로 거의 세 배가량 증가했다.
이러한 멸종 위기가 인간에게만 예외일 수는 없다. 지난해만 해도 전 세계 곳곳에서 폭염, 산불, 홍수와 가뭄, 태풍과 허리케인 등 온갖 자연 재해가 잇따랐고 이에 따른 인명 피해도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기후 변화는 기상 이변의 빈도를 늘리거나 위력을 더 강하게 만든다는 점도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재해뿐만 아니라 기후 변화의 결과로 나타난 지구 기온 상승이 이미 심각한 수준의 건강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세계은행, 런던대 등 세계 27개 기관으로 구성된 연구공동체 '랜싯 카운트다운'이 의학 분야 국제학술지 <랜싯>에 제출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현재의 추세로 기온이 상승할 경우 공공 보건 의료 체계는 곧 한계를 맞을 것으로 전망됐다.
기후 파업과 멸종 저항 운동
지난해부터 시작된 '기후 파업'과 '멸종 저항 운동'은 인류가 당면한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 단초이자 귀결이다. 또 독일과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 11개국 유권자들이 기후 변화를 투표 시 주요 기준으로 삼을 것이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있다. 기후 위기를 우려하는 시민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각국 정부도 일정 부분 반응하고 있고, 중요한 선거 의제로 부상하고 있다.
프랑스·벨기에·덴마크·네덜란드·스웨덴·스페인 등 유럽 8개국은 유럽연합(EU) 예산의 25%를 기후 변화 대응에 사용해야 한다는 공동 성명을 최근 발표했다. 영국 의회는 지난 1일 지금이라도 기후 변화에 따른 모든 생명의 멸종 위기를 막기 위해 비상 대응에 돌입하겠다는 '기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에서는 민주당의 그린뉴딜 정책이 이슈화되면서 기후 변화가 2020년 대선의 주요 의제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포용적 녹색국가와 현상 유지
한국 정부는 지난 21일 제3차 녹색성장 5개년 계획을 심의·확정했다. '포용적 녹색국가 구현'을 비전으로 책임 있는 온실가스 감축과 지속가능한 에너지 전환 등 3대 추진 전략과 5대 정책 방향, 20개 중점 과제를 추진할 계획이다. 20대 중점 과제 중 온실가스 감축 평가·검증 강화, 에너지 분권·자립 거버넌스 구축,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 추진 등 이전 계획보다 구체적이고 진일보한 과제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온실가스 감축 목표와 여태까지 여러 가지 기후 변화 대응 정책에도 불구하고 정책 실행력이 높지 않았던 사례에 비춰볼 때, 현상 유지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현상 유지(Business as usual)는 지구 평균 온도가 2도를 넘어 3도 이상 상승하는 것으로, 이에 따른 멸종 위기가 현실이 됨을 의미한다.
지난해 국내에서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는 48명이었다. 온열질환으로 숨진 사람 중 절대 다수는 노인 인구로 빈곤율이 높은 노인층은 만성 질환을 앓는 경우도 많아 폭염에 가장 취약한 계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노인들이 온열질환으로 가장 많이 쓰러져 목숨을 잃은 장소는 논밭이었다. 한편으로 온열질환은 일터에서 많이 발생한다. 특히 토목·건설 현장 등 폭염에 열악한 노동 환경인 작업장은 온열질환 환자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장소였다.
폭염과 우리 사회
지난해 폭염과 관련해 가장 뜨거웠던 이슈는 전기요금이었다.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제대로 켤 수 없는 에너지 빈곤층, 기후변화 취약계층의 고통이 아니었다. 폭염이 기후위기 대응과 온실가스 감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전기요금에 국한된 동안 취약한 주거 환경에 거주한 채 고립된 노인층과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더욱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던 외국인 노동자들은 질병을 얻었고, 목숨을 잃었다.
올해 여름 폭염에 직면할 우리 사회는 전기요금 할인이 아니라 폭염에 대피할 수 있는 대응 체계와 에너지빈곤층의 주거 환경 개선, 노동자들의 안전한 일터 보장 등 지속가능하고 정의로운 에너지 복지 정책 및 기후 변화 적응 대책을 요구하고 논의할 수 있을까. 보다 근본적으로 기후 위기를 줄이기 위한 보다 강화된 온실가스 감축 목표와 정책을 정부에 요구할 수 있을까.
기후 변화로 인한 멸종은 정의롭지도 평등하지도 않을 것이다. 생물권이건 인권이건 계급의 관점에서건, 이를 인식한다면 국내에서도 기후 파업이나 멸종 저항 운동이 촉발할 수 있을까. 폭염 파업을 선언하고 국회 잔디 마당에서 캠핑 시위라도 하면 내년 총선에서 기후 변화가 주요 의제가 될 수 있을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