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쯤 친구가 자살 시도를 했다. 폭음을 한 뒤 그동안 모아둔 수면제 수십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는 죽지 못했다. 자살 시도를 한 그가 깨어난 것은 수면제를 먹은 뒤 40시간이 지난 뒤였다. 기억 없는 밤낮은 많은 일을 했다. 응급실에 실려 가 위세척을 하고 수액을 맞았다. 죽으려는 와중에도 생리 활동은 왜 멈추지 않는지. 소변을 보게 하는 관을 생식기에 삽입했지만 기억에는 없었다. 죽으려는 자의 결단은 누군가의 노동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묻고 싶었다. 왜 죽음에 이를 가능성이 크지 않은 방법으로 자살 시도를 했는지 말이다. 생경하길 바란 그의 말은 익숙했다. "변화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이 일치하는지 모르겠다." 자존감이 사라졌단 얘기다.
단기간에 직장이 서너 차례 바뀌면서 그의 경제 환경이 악화했다. IT 관련 중소기업들을 계약직 신분으로 전전하다 말뿐인 개인사업자로 전환했다. 배달(사람이든 물건이든)을 겸해보려 했지만 온종일 시간을 쏟을 각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와! 삶과 죽음의 경계가 생각보다 아주 쉽게 내 곁으로 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그는 담담한 어조로 자살 실패 후기를 들려줬다.
변화를 주도하는 지배적 관념은 무엇인가
변화를 바라지 않는 이는 드물다. 노동이라면 존중받는 노동, 자본이라면 더 큰 이윤, 정치라면 더더더 높은 지지율. 대개 변화는 누군가의 지배적 동력에 이끌리는데, 이 때 한 측면의 목소리만 반영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패러다임 전환이니 혁신이니, 거창한 표현을 누군가 들고 나오면 겁부터 나는 이유다.
자살 시도를 한 그 역시 이게 뭔 변화인지도 모른 채 지나가는 혼돈 속의 피해자다. 왜 IT 시장은 저임금, 계약직 노동자 위주로 급속히 팽창했는가. 금융사는 왜 전보다 더 싼 가격에 IT 용역을 발주할 수 있게 된 것일까. 핀테크(fintech: finance+technology)는 왜 유행인가. 앱을 통해 노동을 거래하는 플랫폼에 소비자는 물론, 노동을 구하려는 자들까지 더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단 하나도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질문이지만, 변화 속에 일어나는 사건은 그저 '부작용'으로만 취급되는 경우가 잦다.
이대로라면 배달, 택시와 같은 운송 부문에서 확산하는 플랫폼 노동의 광역화가 머지않은 얘기다. 토스를 운영하는 비바리퍼블리카 등의 핀테크 업체는 금융규제 샌드박스(법 적용 면제 또는 유예)나 지정대리인(핀테크 업체가 금융 업무를 위탁받는 것) 제도를 통해 금융사업 부문을 넓히고 있다. 금융당국은 5월 3일부터 17일까지 샌드박스 신규 신청을 받았다. 토스 등이 영역을 확장할 것은 자명해 보인다. 이들 핀테크 업체가 앱으로 보험 상품을 비롯해 제한 없이 모든 금융상품을 취급하면 어떻게 될까.
보험사는 전속설계사를 둘 이유가 없어진다. 금융사의 창구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앱으로 대체된다. 토스는 한때 가상화폐를 중개했는데, 규제 타파라는 명분을 얻어 이를 재개할 수 있다. 물론 지점 축소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온전히 거스를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변화를 얘기할 때 우리가 어떤 서비스를 이용할지에만 중점을 두고, 어떻게 일하게 될지를 묻지 않는다면 변화는 누군가를 치고 넘어가며 수많은 사상자를 낳을 수밖에 없다.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플랫폼 노동이 전 서비스 및 판매 영역에 퍼진다면 우린 더는 편익을 추구하는 소비자가 아닌, 길거리에 내몰린 노동자가 될 수 있다.
자본 편향적 기술 변화 위주, 공익형 모델 고려돼야
핀테크를 다른 시각에서 보면 자본의 이윤 극대화 방침과 통한다. 이들은 핀테크로 포장, 비용을 줄이는 방식의 판매망을 넓히고 있다. 방과 후 학교강사, 화물차 기사, 학습지 교사, 캐디, 인터넷 설치기사, 보험설계사 등 노동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특수고용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디지털 특수고용직이 대량 양산되고 있다. 이런 변화를 두고 '내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낡은 규제를 풀어라', '죽음을 정치화하지 말라'는 선동은 자기애가 차다 못해 뿜어져 나오는 보수 정치인과 다를 바 없다.
한 개인의 입장에서 사라진 노동은 사라진 것일 뿐, 대체된 것이 아니다. 그가 일자리 1을 잃고 다른 이가 일자리 1을 얻었다고 해서 개인의 상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변화를 추구할 때 이런 상실의 지점을 고찰해야 한다. 핀테크는 다양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공익형 핀테크 모델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시민 사회나 노동조합이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사유를 돌고 돌아 다시 그를 만났다. 만난 장소는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으로 종종 그의 생사를 확인한다. "네 탓이 아니다" "죽지 않을 거다" "도와줄까" "생각을 도와 달라" "무슨 생각" "난 무엇 때문에 내 자신을 쏜 것이냐." 생존 본능은 부조리를 직감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