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에서 '제2의 최장집 사태'에 비유하는 이른바 '고영구-서동만 파동'은 우리 정치의 적나라한 현주소를 보여준 일대 사건이다.
국회 정보위원회의 여야 의원들은 지난 22일 인사청문회 과정에 '당파를 초월해' 고영구 국정원장 후보자와 서동만 기조실장 후보에 대해 사상검증을 이유로 무차별적 색깔공세를 폈고, 결국에는 "고영구 부적절, 서동만 불가"라는 경과 보고서를 내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색깔공세는 여론의 비난을 자초했고, 결국 노무현 대통령으로 하여금 25일 "국정원이 권력의 시녀였던 시절에 행세하던 사람들이..."라고 정형근 의원등 정보위 의원들에게 직격탄을 날리며 고영구 후보를 국정원장에 임명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과연 이번 파동이 의미하는 정치적 함의는 무엇인가.
무엇이 여야 정보위 의원들로 하여금 당파를 초월, 고영구 후보 등에게 융단폭격 공동전선을 펴도록 만든 것인가. 특히 민주당 소속의원들은 왜 "고영구 부적절, 서동만 불가"라는 당론과 상치되는 경과 보고서를 채택하면서 당 지도부와 사전상의조차 하지 않았는가.
이같은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몇가지 증언을 수집해 보았다.
***국정원측이 말하는 '사상검증 파동'의 근원**
한 국정원 관계자는 이번 사태의 근원을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한마디로 말해 정보위 의원들의 기득권 수호 아니겠나. 정보위 의원들은 나름대로 국정원에 줄을 대고 있는 인사들이다. 특히 전직 국정원 출신이나 검사 출신들이 그러하다. 이들은 국정원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빼내 정치에 사용한다.
국정원의 경우도 이들이 필요하기란 마찬가지다. 정보 수집은 간단히 말해 '주고받기'다.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 내가 필요한 것을 얻어오는 일종의 장사다.
사정이 이런데, 새 정권이 들어서 국정원을 확 뒤엎고 그동안 정치권으로 새나간 정보를 차단하려 하니 가만히들 있겠나. 당연히 저항을 하는 거지. 특히 과거정권 시절 국정원 상부를 장악하고 있던 특정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여당 소속 구주류의 정보위 의원들이 오히려 한나라당보다 거세게 몰아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특히 이런 저항은 고영구-서동만 팀이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면서 타스크포스(TF)팀을 짜는 과정에 특정지역 출신들이 배제된 것을 보고 '아차 저들이 들어오면 우리가 다치겠구나'라는 특정세력의 위기감이 커지면서 더욱 증폭된 측면이 크다."
***한 기자가 증언하는 '정형근 파워'**
다음은 한나라당을 오랜 기간 출입했던 모 언론 정치부 중견기자의 증언이다.
그는 대학시절 민주화 학생운동 때문에 옥살이를 했던 언론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나라당 출입기간 동안 자신의 성향과 극의 위치에 있던 정형근의원에 대해 도통 비판적 기사를 쓰지 않았다. 어떤 때는 도리어 그를 떠받쳐 주는듯한 뉘앙스의 기사를 쓰기까지 했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정의원이 한나라당의 모든 핵심 고급정보를 한 손에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한번 사이가 벌어지면 한나라당에 출입하면서 특종잡기란 끝이다. 그러다 보니 그가 하는 정치행위가 못마땅하더라도 그를 비판하는 기사를 쓰기란 쉽지 않다. 기자도 어차피 정보로 먹고 사는 직업인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수뇌부의 경우도 사정은 엇비슷해 보인다. 정의원의 정치행태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정국이 중대국면을 맞거나 대선 등의 주요 정치시즌이 돌아오면 정의원의 고급정보에 의존하곤 한다. '정형근 파워'의 근원은 그의 정보수집 능력에 있는 것이다."
정의원이 '저격수' '고문기술자'라는 온갖 비난을 받으면서 여전히 우리나라 거대야당의 한 축을 담당하며 늠름하게 군림하고 있는 이유를 읽을 수 있는 증언이다.
***서동만 교수, "국정원 정보유출 막아야"**
다음은 국정원 기조실장 후보로 인사청문회 과정에 증인으로 출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야 의원들로부터 고영구 국정원장 후보자보다 더 혹독한 사상검증을 받아야 했던 서동만 교수를 최근 만난 한 인사가 전한 말이다.
이 관계자 전언에 따르면, '지금 국가정보원의 최대 문제가 뭐냐'는 질문에 서교수는 서슴없이 "국정원 정보가 밑빠진 독처럼 정치권 사방으로 줄줄 새고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답했다 한다. 서교수는 따라서 "국정원 개혁의 최우선 과제는 정치세력들에게 사용화(私用化)되고 악용되고 있는 국정원을 말 그대로 '국가의 정보기관'으로 되돌려놓은 일"이라 말했다.
이럴 때에만 도-감청 폭로의혹 등 정쟁이 터질 때마다 국정원이 감초처럼 끌려들어가는 일을 차단하면서 국정원이 말 그대로 권위있는 국가정보기관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서교수의 주장이었다 한다.
서교수는 국정원의 두번째 개혁과제로 '국정원장 개인에게 사용화돼온 정보의 국가기관 공유'를 꼽았다. 그는 "국내최대 정보수집 전문기관인 국정원이 수집한 정보 대부분이 그동안은 국정원장 개인의 정치권력 유지라는 사적 목적을 위해 사용돼왔다"며 "그동안 국정원장은 핵심정보를 대통령에게 직보하고 나머지 정보는 실제로 이를 필요로 하는 다른 정부부처와 공유하지 않고 사장시키는 잘못을 범해왔다"고 말했다.
서교수는 따라서 "앞으로도 물론 최고기밀을 요하는 정보는 국정원장이 대통령에게 직보해야겠으나 나머지 정보는 유관기관들이 공유토록 해야 한다"며 "인수위 분과위원 시절에 국가안보회의(NSC)에 10여명의 직원을 둬 국정원이 수집한 해외정보중 유관부처에게 필요한 정보는 공유토록 하는 개혁청사진을 만들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라고 말했다.
서교수는 아울러 "노무현 정부가 언론사나 기업, 관공서 등에 국정원 직원의 출입을 중단시키겠고 천명한 것은 더이상 팔 비틀기나 네고(주고받기 거래)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를 안하겠다는 의미"라며 "이럴 경우 정권 입장에서 적잖은 불편함이 뒤따르겠으나 이런 기득권의 손실을 감수하면서라도 국정원을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는 것이 노무현 정부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다.
***'국정원 개혁'의 전초전**
이런 몇가지 증언을 모아놓고 종합해보면, 국회 정보위의 '고영구-서동만 사상검증' 파동을 계기로 불붙은 청와대와 한나라당간 극한대결은 '국정원 개혁'을 둘러싼 전초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정원은 그동안 우리 현대정치사에서 언제나 한 중앙에 서 있어 왔다. 그 결과는 노무현 대통령도 고영구 국정원장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표현했듯 '정권의 시녀'였다.
국가정보기관이 '정권의 시녀'에 머무르면 그 나라의 발전은 더이상 기약할 수 없다. 특히 지금같이 한반도 생존 자체가 백척간두의 위기를 맞고 있는 시점에는 더욱 그러하다. 국정원 직원들이 자부감을 갖고 정치권의 사익(私益)이 아닌 국익(國益)을 위해 전념할 수 있도록, 이제 정치권은 국정원과의 사적 연계고리를 끊고 국정원을 해방시켜줘야 할 때이다.
이것이 바로 국정원 개혁의 본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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