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기 법무부 장관께,
안녕하신지요?
최근에 법무부는 난민법 개정을 예고했습니다. 난민법이 행정 관리들의 편의주의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난민 보호를 목적으로 갖는다고 할 때, 개정안은 개선 방향이 아니라 개악의 방향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번 개악안이 의회에서 통과한다면, 난민 심사의 벽은 더 높아지고 신청 절차는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난민 신청 접수 장소는 대폭 축소되고, 난민 신청자가 출국하면 신청을 철회한 것으로 간주하여 가족결합을 어렵게 만들고, 90일 동안이었던 소송 기간은 30일로 줄어들어 난민 신청자들이 변호사 등의 도움을 받기가 어려워지는 반면에 강제 소환은 더 쉬워질 것입니다. 장관께 이 개악안의 철회를 요청하려고 이 글을 씁니다.
20년 동안 프랑스에서 난민으로 살았던 저는 한국 땅을 찾은 난민들의 사연을 만날 때마다 부끄러움이 앞서곤 합니다. 동시대인들과 행정 관리들에게서 난민 인권 이전에 난민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박하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법무부 개정안을 통해서도 다시금 대한민국 난민법이 난민 보호를 기본 취지로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개선을 하고 또 해도 모자랄 판인데 개악이라니오! 법무부 장관께 개악안의 철회와 함께 권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난민 관련 업무를 법무부에서 계속 붙들고 있지 말고 외무부에 이관하십시오. 무언가를 시도하는 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국가의 녹을 먹는 행정 관리들이 자주 벌이는 일이기도 하지요.
제가 난민 자격심사를 받았던 곳은 프랑스 외무부 소속의 '난민과 무국적자 보호실(OFPRA)'이었습니다. '보호'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난민 관련 업무가 프랑스에서는 외무부 소관인데 한국에서는 법무부 소관입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난민 관련 업무의 기본 목적이 '난민 보호'에 있나, 아니면 '출입국 관리, 통제에 있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요? 장관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제네바 협약은 인종, 종교, 국적, 사회적 신분, 정치적 견해의 다섯 가지 이유 때문에 귀국할 경우 박해받을 위험이 있는 외국인을 난민으로 인정하고 피난처를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도 이 협약을 비준했고 그에 따라 난민법을 제정한 것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난민 신청자 출신국의 정황을 직접 알 수 있고 난민 신청자와 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외무부에서 난민 심사를 관장하는 게 논리에 부합한다고 봅니다. 한국에서 난민 관련 업무를 법무부 관할로 둔 것에 대해, 저는 난민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보다 외국인의 출입을 통제하면서 되도록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보는데, 장관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합리적 존재라면 난민 관련 업무를 외무부에 이관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보는데 이에 대해 장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세상에 스스로 인종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인종주의적 언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눈으로 사물과 현상을 봅니다. 이방인들을 위험인물로 바라보는 것은 그들에게 투사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모르는 사람에겐 일단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게 우리의 자화상이니까요. 게다가 그 잘 모르는 사람이 가진 게 없는 사람일 때 의심의 눈초리는 배척과 혐오의 눈초리로 바뀌기도 합니다. 한국 사회엔 'GDP 인종주의'라고 부를 만한 게 관철되고 있습니다. 백인과 결합한 가족은 '글로벌 패밀리'라고 부르고, 비백인과 결합한 가족은 '다문화 가정'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물신주의와 인종주의가 한국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교묘히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법무부의 난민법 개악안이 담고 있는 정신도 한국 사회에 관철되고 있는 'GDP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가 결합된 것으로 봅니다.
4년 전의 일이었지요. 알란 쿠르디라는 이름의 시리아 어린이가 터키 해변에 죽은 채 떠밀려온 사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만약 그의 아버지, 그의 아저씨가 난민으로 이 땅에 들어오면 바로 위험인물이 되는 건가요? 인디언 수우 족의 기도문 중에 "상대방의 모카신을 신고 1마일을 걷기 전에는 그 상대방을 판단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역지사지의 지혜를 말하고 있지요. 장관께서도 잠시 이 땅을 밟게 된 난민의 처지가 되어보면 어떨까요? 일반적으로 예고 없이 이 땅을 찾아오는 이방인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돈도 없고, 직장도 없고, 거처도 없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의 손은 그야말로 빈손입니다. 그런 만큼 마음은 열려 있으며 몸은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위험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인종주의에 관한 책을 쓴 타하르 벤 젤룬은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을 두려워할 권리를 갖는 것, 그것이 두려움에 대한 승리인 것이다.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고, 우리 자신의 허약함의 거울 속에서 자신을 냉철하게 직시하는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을 적에 대한 무기로 만들고 방패로 사용하려고 두려움을 은폐한다. 그리하여, 위협인 이방인은 넘어올 수 없다."
어떤가요? 이번에 법무부가 내놓은 개악안도 "이방인은 넘어올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지요. 우리 국민의 의식 안에 폭넓게 자리 잡고 있는 이른바 순혈주의가 난민 정책의 배타성을 강화시켜주고 있습니다. 이주민들의 정주를 막는 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일민족 신화에 갇힌, 배타적 민족주의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태조실록에 나오는 아래 기록을 읽어보면 어떨까요?
"호조에서 보고하기를, '내년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올적합, 올량합(이상 여진의 한족). 왜인, 회회(아랍계 무슬림) 등의 사람으로서 토지를 받고 거실을 소유한 자의 월급을 없애서 비용을 줄이십시오'라고 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조실록> 태종 16년(1416) 5월 12일의 기록입니다. 조선 땅에 사는 외국인 관리들이 너무 많아 조정 예산을 관장하는 호조가 걱정하는 내용입니다. 외국인이 아닌, 외국인 관리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입니다! <고대, 한반도로 온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이 기록을 소개한 이희근 겨레문화유산연구원 전문위원은 한반도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함으로써 "다양한 인종이 끊임없이 유입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하면서 “한반도의 주민은 단일민족인 적이 없었다"고 단언합니다.
실상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두 이방인들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 우리는 눈을 질끈 감습니다. 즉자적 인간은 타자의 눈으로 나를 볼 줄 모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과거 모습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난 4월 11일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로 시작하는 임시정부 헌장이 선포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날 여의도공원에서는 기념식이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이낙연 총리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뿌리 위에 꽃 피웠"다고 말했습니다. 100년 전에 독립운동가들이 새로운 나라, 새로운 정부를 세웠던 곳은 중국 상해였지요. 다시 말해, 박상기님께서 오늘 법무부 장관이라는 중임을 맡고 있는 대한민국의 출발은 난민들에 의한 망명 임시정부였습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처지는 난민과 어떻게 다른가요? 가령 '초대 법무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시영 임시정부 법무총감도 난민이었습니다. 그런 뿌리를 둔 대한민국이 오늘 세계의 난민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요?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의 인구 대비 난민 수용률은 세계 139위였습니다. 한국의 2017년 기준 난민인정 비율은 1.51%로, 전세계 24.1%, 유럽연합 33%, 미국과 캐나다 약 40%에 비추어, 일본과 함께 세계에서 꼴찌 수준입니다. 그렇게 바늘구멍과도 같은 인정율을 통과해 난민 자격을 얻어도 고용허가제라는 굴레가 기다립니다. 저는 노동허가제 덕분에 파리에서 택시운전을 하면서 생계를 꾸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노동 허가제가 없습니다. 난민 자격을 얻어도 고용주에게 '간택되어야' 일할 수 있을 뿐이어서 일자리를 찾기도 어렵거니와 일터를 옮길 자유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내국인들의 잦은 폭력들, 이주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성폭행에 대해 한국의 법무부는 얼마나 관심을 갖고 대처하고 있나요?
이란인 친구의 난민 신청을 도우려고 나섰던 서울 송파구의 한 중학교 학생들이 떠오릅니다. 그 학생들이 이방인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이방인과 친구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대부분의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이방인들을 위협적 존재로 보고 혐오하는 것은 거의 무지("이방인을 만나지 않아 잘 모른다"의 뜻입니다)와 편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정 관리들이 해야 할 일은 대중 영합주의에 머물러 이번과 같은 개악안을 만드는 데 있지 않고 그 중학생들의 경험을 국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있습니다. 법무부 행정 관리들부터 솔선수범하여 그 중학생들을 초청하여 얘기를 듣는 기회를 가지면 어떨까요?
우리 모두의 것인 듯해 그럴 것입니다. 멀리 보이는 불빛은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가까이 갈수록 불빛의 따스함은 점차 사라집니다. 모든 불빛에는 주인이 있고 문이 닫혀 있어서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이방인들은 먼 곳에서 이 땅의 불빛을 보고 다가왔지만 그 불빛은 차갑기만 합니다. 크로포트킨이었지요. "법은 힘센 자의 권리다"라고 말한 사람은 모든 불빛에 주인이 있다고, 그래서 문을 걸어 잠글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기능을 가진 게 법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타자의 생명을 존중하고 타자와 인격적 관계를 맺어야 '나'라는 존재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말을 전하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긴 편지,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2019년 4월 21일
홍세화 드림
* 최근 법무부 장관은 난민제도 '악용을 막는' 난민법 개정을 발표했고 입법예고를 앞두고 있습니다. 난센은 난민 정책의 근본적인 방향 설정 없이 난민 신청자들의 권리만을 제한하는 법무부의 개정안에 반대합니다. '난민에게도 사람으로서의 권리가 있다'는 난민법의 애초 의도가 훼손되지 않도록, 시민분들과 <법무부장관에게 편지쓰기> 캠페인을 진행합니다.
약 한 달간 시민분들의 편지가 법무부 장관께 도착합니다. 매일매일 보내지는 편지를 난센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 이 캠페인에 함께 참여하고자 하시는 분은 refucenter@gmail.com으로 문의주세요.(☞바로 가기 : 난민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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