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2017년 대다수 한국인에겐 낯선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중동, 아프리카, 유럽 등 멀고 먼 '나라 밖' 일로 다가온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내전'으로 600만 명의 '난민'이 64년 전 발생했다. 한국은 유엔이 공식적으로 난민을 돕자고 결의한 뒤 처음으로 도움을 받은 나라다. 당시 한국 난민들을 구제한 나라 중엔 시리아도 있다. 어쩌면 '나'의 부모, 조부모가 난민이었을지 모른다. 최근 한국의 난민에 대한 밀착 보고서 <우리 곁의 난민>을 쓴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은 "아기 예수도 난민이었다"고 강조한다.
전 세계적으로 난민의 숫자는 6530만 명(2015년 말, UNHCR)에 달한다. 이들 중 거리, 문화, 정서적으로 멀고 먼, 한국을 찾아온 난민은 2만 2792명(1994년부터 2016년까지 난민 인정 신청을 한 수)이다. 하지만 이들 중 난민 인정을 받은 이들은 3퍼센트(672명)에 불과하다. 난민에게 한국은 인색하기 짝이 없는 나라다.
문 이사장은 기자로서 오랫동안 여성과 인권 문제를 다뤘고,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과 서울시 인권위원장을 맡아 한국의 '소수자 인권'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경험이 풍부하다. 그가 10명의 난민 여성의 삶을 밀착 취재해 쓴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난민과의 심리적 거리를 좁혀준다. '사회적 이슈'로서 난민 이전에 '사람'으로서 난민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사람을 냉대하는 스스로의 모습도 깨닫게 한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아니 보지 않고 듣지 않았던, '우리 곁의 난민'들의 모습과 목소리를 살려내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난민들은 전쟁, 기후 변화, 종교적 박해, 가부장적 폭압, 인종 차별 등에 따른 피해자이지만, 생의 의지로 사선(死線)을 넘은 생존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울시의 싱크탱크인 서울연구원의 첫 번째 '마이너리티 리포트'인 이 책이 나오기까지 과정을 문 이사장에게 지난 22일 들었다.
한국 전쟁고아, 최초의 난민이었다
프레시안 : 한국인에게 '난민'이란 참 낯선 존재다. 책 <우리 곁의 난민>(서울연구원 펴냄)을 통해 처음 알았는데 한국에 난민인정 신청을 한 사람이 2만 2792명이나 된다니, 놀랍다.
문경란 : 조사를 하면서 나도 놀랐다. 한국이 난민인정 신청을 받기 시작한 1994년부터 2016년 말까지 난민인정 신청자는 2만 명이 넘지만, 현재 이 땅에 있는 사람은 1만 명 정도라고 보면 된다. 이중 난민 인정을 받은 경우는 672명(3%), 인도적 지위 1156명(5.1%), 심사 진행 6861명(30.1%), 그리고 국내 난민단체들은 1000여 명 정도가 한국에서 난민불인정 상태로 살고 있다고 추산한다.
프레시안 : 6.25 한국전쟁 반발로 600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발생하자 유엔이 유엔한국재건단을 설립해 구호와 원조를 제공했는데, 이는 유엔이 설립된 뒤 처음으로 실시한 난민 구호 활동이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문경란 : 유엔에서 공식적으로 '난민을 돕자'고 결의한 뒤, 처음으로 도운 나라가 한국이다. 일반적으로 '난민'이라고 하면, 국경을 넘는 경우만 생각한다. 하지만 유엔난민기구는 국경을 넘지는 않았지만 거주지를 탈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국내 실향민이라고 부르는데, 이들 또한 난민으로 분류한다.
개인적으로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한국을 도왔던 나라 중에 현재 내전으로 가장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시리아 같은 나라도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시리아 의사가 전쟁고아 두 명을 입양했는데, 이 중 한 명은 어른이 돼서 쿠웨이트 주재 한국통상대표부에서 총영사의 비서로 근무했다는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다. 우리는 시리아를 내전으로 지새우는 미개한 나라라고 생각하지만, 70여 년 전 한국도 똑같이 내전을 겪었으며 이때 발생한 난민들이 전 세계의 도움을 받았다.
프레시안 : 작곡가 프레드릭 쇼팽, 물리학자 알버트 아이슈타인, 정신분석가 지그문트 프로이트, 철학사상가 한나 아렌트 등도 모두 난민이었다.
문경란 :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겨 베들레햄을 떠나 이집트로 피신했던 갓난아기 예수도 난민이었다. 당시 헤롯왕은 하늘이 내린 자가 나타나 자신의 아들은 왕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풍문이 돌자, '두 살 이하의 아기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 아기 천사에게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요셉은 추운 겨울, 갓 태어난 아기와 산후조리도 못 한 부인을 데리고 약 400킬로미터를 도망간 것이다. 난민의 삶을 공감하기 어렵다면, 아기 예수를 둘러업고 도망가는 마리아와 요셉을 상상하면 된다.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겠나.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해 다른 나라에 피난처를 구하고 그곳에 망명할 권리가 있다."(세계인권선언 14조)
누구든 언제든 난민이 될 수 있다
문경란 : 국가는 국민 또는 구성원이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 권리를 보장해줘야 한다. 그런데 권리를 보장받기는커녕 박해를 받아 자신의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난민이다. 인간으로서 존엄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이 난민인 것이다.
누구든 언제든 난민이 될 수 있다. 누구는 존엄하고 누구는 존엄하지 않다면, 현재 누리고 있는 존엄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닌가. 난민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존엄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이 불쌍하니까 도와주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존엄하게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기에 그들의 존엄을 보장해 주자는 것이다.
사실 '어떻게 사는 게 존엄하게 사는 것이냐' 하는 문제는 종합적이다. 기본적으로 의식주를 보장받아야 하며, 자유롭게 의사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의료권과 교육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또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 노동하고 이를 통해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인간의 권리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최소한의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난민 또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 인권이 보장되고 보호받아야 할 동등한 존재다."(247~248쪽)
한국은 "매우 인색한 나라"다
프레시안 : 한국은 난민인정에 "매우 인색한 나라"라고 했다. 난민인정 전체 신청자의 3퍼센트, 총 672명만 난민인정을 받았다. 이는 전 세계 난민인정률 38퍼센트에 한참이나 미치지 못한다. 한국의 난민인정률이 이렇게 낮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문경란 : 이방인에 대한 높은 문화적 장벽이 있는 것 같다. 난민뿐 아니라 이주민에 대해서도 굉장히 높은 장벽이 자리해 있다. 그러다 보니, 이방인을 '짐'이라고 생각하는 정서가 있다.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부담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불온한 시선의 이면에는 또 다른 인종주의도 작동하고 있다. 홍세화 전 난민인권센터 이사장이 'GDP 인종주의'라고 표현했는데, 한국보다 GDP가 높은 나라에서 온 이방인에게는 호의를 베풀면서도 GDP가 낮은 나라에서 온 이방인은 비하하고 차별하고 혐오한다.
프레시안 : 한국은 난민인정률이 현저히 낮을 뿐 아니라, 난민인정 심사 과정도 길다. 난민들에게는 이중의 고통일 것 같은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문경란 : 늘어난 난민인정 신청자 수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한국은 2013년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난민법을 시행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급증한 난민 문제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박수받을 일이다. 물론, 한류의 영향도 있다. 지난해 난민인정 신청자 수는 지난 22년간 난민인정 신청자 전체 수의 3분의 1이 넘는 7542명에 달했다.
난민 심사는 난민인정 신청자의 말이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사람이 사지(死地)를 여러 번 넘다 보면, 기억이 왔다 갔다 하며 일관성이 떨어진다. 그런데도 심사위원은 '거짓말이지?'라며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특히 자국에서의 박해 경험 때문에 국가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보니 심사위원이 고압적인 모습을 보이면 부들부들 떨다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신청자도 있다. 무례한 태도는 난민 신청자에게 위협으로 느껴져 그들을 더욱 위축시킨다."(111쪽) 따라서 제도의 개선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난민에 대한 열린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난민 여성의 경우, 법무부 출입관리소가 여성적 관점에서 박해의 사유를 제대로 심사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난민 여성들은 가정폭력뿐 아니라, 성폭력과 성매매 등 성적 박해에 매우 취약하다. 따라서 난민 지위 인정 면접 때 여성 면접관과 통역관을 배치해야 하며, 난민 여성의 출신국의 인권 상황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무슬림 지역과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행해지는 '할례'에 대해 심사위원들이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라이베리아 출신 마틸다를 인터뷰하며 들은 비밀조직 산디(Sande)와 여성 할례 이야기는 정말 믿기 어려웠다. 할례 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여성들은 여전히 끔찍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연대의 측면에서 다른 나라 여성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출신 국가로부터도, 난민 신청을 거부한 나라로부터도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난민 불인정자는 무력하고 굴욕적이며 종속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는 '벌거벗은 생명'이요(아감벤, 2008), 지그문트 바우만이 통탄해 마지않는 '인간쓰레기'의 화신인 것이다(바우만, 2010)."(236쪽)
잘 사는 나라, 그러나 인권은 낮은 나라
프레시안 : 동남아시아 4명, 중동 2명, 아프리카 3명, 동유럽 1명 등 총 10명의 난민 여성을 인터뷰했고, 이들 중 8명의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 이들은 어떻게 한국까지 오게 됐을까. 물리적, 정서적, 문화적으로 한국은 매우 먼 나라다.
문경란 : 인터뷰할 때마다 '어떻게 한국까지 오게 됐느냐'라고 물었는데, 대답은 제각각이었다. 그런데 한결같은 말이 있다. '한국은 잘 사는 나라이며, 민주화가 굉장히 잘 된 나라고, 인권 역시 잘 보장되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부끄러웠다.
한 4~5시간 동안 밥도 먹어가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들 중 몇몇은 '한국 국민의 인권 의식이 그렇게 높지 않아 실망했다'며 본심을 털어놨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한국 사람들이 난민들을 안 좋게 생각할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프레시안 : 미얀마 친족 출신 엄마(소피아 킴)를 따라 11살 때 한국으로 건너와 13년을 살았다는 캐롤라인.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은 자살공화국이자, 단절된 공동체 사회이며 위계질서가 군대식인 나라다. 그로 인해 인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참 부끄러웠다.
문경란 : 나 역시 너무 부끄러웠다. 평소에도 한국 사회는 물질적인 평등함과 달리 인간의 존엄성이 평등해야 한다는 인식에는 취약하다는 생각을 했다. 인터뷰에 응한 난민 여성들은 먹고사는 물질적인 문제보다 '자신들을 차별하고 혐오하고 무시할 때 정말 마음이 아프고 힘들다'고 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그들의 삶을 더 고달프게 만드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난민은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요,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일종의 '아웃 카스트(out-caste)'다."(235쪽)
난민 가정의 자녀, 정체성은 한국인
프레시안 : 책을 보며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가 뉴기니아 등에서 현지 연구를 하면서 기존 남성 인류학자와 달리 여성과 청소년들을 만났던 것이 떠올랐다. 난민 중에서도 여성만을 다루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와도 더 많은 접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이들은 무국적이거나 출신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난민 가정의 자녀 문제, 한국 사회가 고민해야 하는 일이다.
문경란 : 책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난민 가정의 자녀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부모의 출신국에서 태어났든, 한국에서 태어났든 아이들은 현재 살고있는 한국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피부색이 다르다고, 한국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기 일쑤다. 그런데도 난민 가정 자녀들은 이런 사실을 부모에게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들은 그러면서 꿈을 스스로 구조조정한다. 반면, 난민 가정 부모들은 "대학은 나와야 한국에서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며 자녀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프레시안 : 캐롤라인의 성장기가 인상적이었다. 대학에 가려면 형편상 장학금을 받아야 했지만, 미얀마 국적이라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온갖 정보를 다 뒤져 한국어 실력이 뛰어난 외국인에게 학비를 지원해주는 대학을 찾았고, 자신이 원하는 간호사의 꿈에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다.
문경란 : 캐롤라인은 '꿈이 뭐냐'는 질문에 '봉사와 베풂'이라고 했다. 우선 간호사가 돼 부모를 잘 부양하고, 돈을 벌면 매달 얼마씩이라도 고향을 도우며 기회가 되면 간호사로 직접 가서 봉사하고 싶다고 했다. 17살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캐롤라인은 개인적인 능력도 뛰어나지만,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객관화해서 볼 줄 알았다.
"이제까지 어려운 길을 헤쳐 나오면서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안 받았다면 베풂이라는 단어를 몰랐을 거예요. 경험을 통해 베풂의 중요성을 깨달았어요. '이제 꿈을 접어야 되나 보다'라고 생각하면 언제나 작은 틈새지만 길이 뚫렸어요. 주변의 관심이 중요한 것 같아요."(캐롤라인의 말 중. 91쪽)
난민과 소수자는 '짐'이 아니다
프레시안 : 소말리아 출신 난민이자 세계적인 슈퍼모델 와리스 디리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 <데저트 플라워>(쉐리 호만 감독, 2009)를 보면서도, 2015년 터키 해변에서 발견된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을 접하면서도 난민 문제를 그저 하나의 사건으로 대했다는 생각이 든다.
문경란 : 크루디 사건 이후, 난민 문제가 많이 보도됐지만 대부분이 타자화하고 대상화한 뉴스다. 나의 문제, 또는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한국은 난민 문제를 언제까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외신 보도만 인용할 것인지 답답하다.
책 작업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난민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들의 목소리를 가시화한 것이다. 인권적으로 보면, 인비저블(invisible)한 것을 비저블(visible)하게 하고 보이스리스(voiceless)한 것을 보이스(voice)하게 한 것이다.
프레시안 : 모든 소수자 문제가 그렇게 단편화된 채 사건사고로 다뤄지는 것 같다. 사회 시스템에 편입되지도 못한다.
문경란 : 나와 상관없는 타자, 즉 다른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관심도 일회성으로 끝난다. 좀 더 관심을 둔다면, '아이고, 안 됐네'라는 동정이다. 소수자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 인식은 딱 이 수준이다.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없애는 길은 친구를 두는 것이다. 소수자 문제를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면, 말도 함부로 하게 될 뿐 아니라 자기 생각을 속단하게 된다. 하지만 소수자 친구가 주변에 있으면 나와 별다르지 않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존엄하게 살아야하는데, 나의 존엄이 보장되어야 한다면 소수자인 내 친구의 존엄 보장도 당연한 일이 된다.
프레시안 : 미얀마 출신 소피아와 캐롤라인 모녀 외에도 러시아 출신 올가, 코트디부아르 출신 아만, 라이베리아 출신 마틸다, 파키스탄 출신 신디, 시리아 출신 나디아, 콩고 출신 미야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사례를 보면서 난민은 결코 불쌍하거나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다. 경계를 넘은 사람이 가진 힘, 이 사람이 겪었던 경험이 이들 안에 응축되어 있다. 그리고 이 엄청난 힘을 사회적으로, 긍정적으로 승화한 사례가 미야 씨와 이주 여성을 위한 문화·경제 공동체인 에코팜므(Eco Femme) 이야기다.
문경란 : 그렇다. 난민은 우리 사회의 '짐'이 아니다. 오히려 문화적 다양성과 잠재력을 가진 에너지이고 힘이다.
"난민에게 작은 환대를 베풀고 연대하는 것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국가의 책무다. 이제는 한국인도 자유와 존엄을 보장받지 못하는 세계인에게 손을 내밀고 함께할 때가 되고도 남았다."(255~256쪽)
'잘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문경란 : 어떤 사람이든 국가든, 더 잘산다고 손을 내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난민 문제로 유럽이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하지만, 세계 난민의 절반인 약 1200만 명은 요르단, 터키, 팔레스타인, 파키스탄, 레바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6개국에 몰려 있다. 이들의 GDP(국내총생산)는 2%도 안 된다. 반면 GDP 비율이 56.6%나 되는 미국, 중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등 경제 규모 상위 6개국이 받아들인 난민은 전체의 8.9%인 212만 명에 불과하다.
세상은 무엇을 중심으로 움직일까? 정말 좋은 세상은 소수자가 사회의 중심 의제로 들어올 때 비로소 누구나 잘사는 사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때 '잘산다'라는 것은 사회의 중요 가치가 '함께' 잘사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이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불행을 당하기 마련인데, 그런 불행에 닥쳤을 때 사회적으로는 최소한의 안전망이 있고, 개인적으로는 손을 잡아주는 이(이웃)가 있다면, 그래서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런 게 '잘사는' 사회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함께'라는 것은 빠지고, 물질적 풍요만을 강요하며 잘산다고 생각한다. 이는 압축적인 경제 성장의 병폐다. 소위 말하는 신자유주의적인 가치가 깊숙이 내면화된 것이다. '잘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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