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협정과 전쟁 난민
나 자신이 난민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난민 관련 기사를 만나면 눈길이 멈춘다. 제네바 협정의 규정에 따르면, 난민은 다섯 유형으로 구분된다. 사회적 신분, 국적, 종교, 종족(소수민족)과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본국으로 돌아갈 경우 박해받을 위험이 큰 사람에게 난민 자격을 주도록 되어 있다. 나는 정치적 견해 때문에 프랑스 외무부 산하 'OFPRA(난민과 무국적자를 위한 프랑스 보호국)'에서 난민 자격을 얻었다.
한국에서는 난민 심사를 법무부 산하 출입국관리국이 담당한다. 난민 자격을 얻고자 신청한 외국인이 위에 말한 다섯 유형 중 하나의 이유로 귀국했을 때 박해받을 가능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심사하는 부처로는 법무부보다 외무부가 더 적합하다는 점은 삼척동자도 알 만하다. 난민 신청자 출신국의 정황을 일차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부처는 법무부가 아니라 외무부이기 때문이다. 통번역을 주선하거나 시행하는 일도 외무부에서 쉽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법무부가 담당하고 있을까? 난민 신청자를 인권 차원이 아닌, 출입국 관리 차원으로 바라본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이 한국의 난민 인정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신청자가 1994년부터 2015년 말까지 22년 동안 총 1만5250명이었는데, 인정 비율은 최하여서 단지 576명만이 난민 인정을 받았고 다른 910명이 인도적 체류 허가(난민과 달리, 가족 결합, 자녀 교육, 의료 등에서 혜택이 없는)를 받았을 뿐이다(출처 : 난민인권센터).
근래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주로 발생하는 난민 문제는 제네바 협정 당시(1954년)에 상정했던 것과 비대칭적이다. 오늘날 난민 문제가 국제법상 난제가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가령 위에 말한 다섯 가지 유형과 맞아떨어지지 않으면서 엄청나게 많은 난민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세계 체제의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들 수 있다. 현실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기 전까지 미국과 소련 사이에 힘에 의한 견제와 균형으로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지역들 중에서 소련이 해체되고 세계 체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정치 사회적 동요가 일어났고 경우에 따라 전쟁으로 치닫기도 했던 것이다. 유고슬라비아가 그랬으며 지금의 시리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전쟁을 피해 다른 나라에 피난처를 구하는 사람들을 난민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라는 물음에 제네바 협정이 구속력을 갖기 어렵게 된 것이다. 결국 국가에 따라 난민정책이 제멋대로인 상황이 벌어지고, 한 나라에서도 집권 세력이 바뀌면 난민정책도 바뀌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것은 지도자의 정치 철학과 '외국인 혐오'를 정치적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극우 세력의 영향력이다.
한편 똑같이 전쟁을 피해 난민의 처지가 되었는데, 난민 자격을 인정받기도 하고 거부되기도 한다. 거부되는 경우는 대부분 '경제적 난민'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부유한 나라에서 살고 싶어 자국의 전쟁 상황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터키 인근 그리스 섬들의 난민촌에서는 시리아 출신과 아프가니스탄 출신이 분리되고 있는데, 시리아 출신은 유럽에 수용될 가능성이 높지만 아프가니스탄 출신은 터키로 되돌려 보내질 가능성이 높다.
덴마크에서의 두 판결
덴마크에서 2015년 9월 7일 같은 날에 시리아 난민과 관련된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덴마크의 한 남성이 시리아 난민들에게 침을 뱉으며 모욕적 언행을 벌인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덴마크인 부부가 시리아 난민 가족을 자동차에 태워 밀입국시키려다 적발된 사건이다. 전자의 남성은 5000덴마크 크로나(약 90만 원)의 벌금을 냈는데, 부부에게는 각각 2만2500덴마크 크로나(약 400만 원)의 벌금형이 내려졌다.
덴마크는 15년 전부터 우파가 자기들만으로는 의회 다수를 점하지 못해 극우 정치 세력의 지지를 받아 집권하고 있는데, 극우 세력의 요구에 따라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외국인 규제법이 시행되고 있다. 경찰이 난민 신청자의 귀금속을 압류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이런 현실을 부끄러워하는 덴마크인들이 적지 않음은 물론이다. 부부의 선행이 범죄시된 것에 분노한 한 재즈 음악가는 모금 운동을 제창했고, 외국인들에게 우호적인 덴마크인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페이스북 계정이 열리기도 했다. 부부는 불복하고 항소를 제기했는데, <르몽드>는 다음과 같이 부인의 말을 전하고 있다.
"덴마크는 지금 둘로 나뉘어 있다. 예전에 덴마크는 인도주의에 있어서 스웨덴과 같은 최상국의 하나였다. 그러다 극우 세력이 등장했고, 정당들은 지지표를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나는 내 나라가 보내고 있는 신호들이 수치스럽다. 사람들에게 침을 뱉으며 모욕하는 자가 사람들을 돕는 사람보다 덜 비난받는다니…." 그들 부부가 밀입국시키려 했던 시리아인 가족은 결국 스웨덴에 망명처를 구했다고 한다.
캐나다, 그리고 독일
시리아 출신의 세 살짜리 아일란 쿠르디가 터키 연안에서 익사한 채 엎드려 있는 사진은 세계의 수많은 양심에게 충격을 주었다. 캐나다에서는 반향이 더 컸다. 밴쿠버에 살고 있는 아일란의 숙모가 그 가족을 캐나다에 입국시키려고 여러 달 전부터 애썼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마침 의회 선거를 앞둔 시기였다. 중도 자유당의 젊은 당대표 쥐스탱 트뤼도(44세)는 선거 캠페인 중에 "총리에 선출된다면 2015년 말 이전에 2만5000명의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선거에서 승리, 보수당의 스테판 하퍼에 이어 2015년 11월에 캐나다 총리에 취임한 그는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600명의 캐나다 민간인과 군인을 중동으로 보냈다. 그들은 레바논, 요르단과 터키에 있는 시리아 난민들을 직접 만나 그들 중에서 가장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 여성 혼자인 경우, 아이들, 그리고 가족 단위 난민들을 선별했다. 그리하여 세계인권선언 67주년인 2015년 12월 10일, 시리아 난민을 태운 첫 비행기가 캐나다에 입국할 때 트뤼도 총리가 그들을 영접했고, 2016년 2월 27일에는 마침내 2만5000명 째의 시리아 난민이 캐나다 땅을 밟았다. 트뤼도 총리는 약속을 지켰다. 약속한 날짜에서 두 달 정도 늦어졌지만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곰 인형의 나라예요." 프랑스 극우 정치 세력 '국민전선'의 수장인 마린 르펜이 캐나다를 비꼬아 한 말이다. 유럽의회의원단의 일원으로 3월 18일에서 23일까지 캐나다를 방문했던 그녀는 거기서 극우 정치세력을 만날 수 없었다. "캐나다의 난민 수용 정책은 잘못됐다"고 한마디 하는 게 고작이었는데, 존 맥컬럼 캐나다 이민 장관의 생각은 그녀와 달랐다. "여러 해 전부터 세계의 난민 위기가 더 심각해지는 터에 다른 나라들이 문을 닫을 때 우리는 문을 열 것이다." 그는 또 "가장 중요한 도전은 (난민을 위한) 주택과 언어 교육, 그리고 일자리다"라고 말했는데, 3월 20일 현재 69%의 난민들에게 이미 주택이 제공되었다고 한다.
캐나다는 올해에도 시리아 출신 등 5만5000명의 난민을 받아들일 예정이다. 그 일을 맡아 영광스럽다는 존 맥컬럼 장관에게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수상은 영웅이다. 사실 캐나다보다 더 놀라운 나라는 독일일지 모른다. 극우 세력의 반대는 물론, 소속 기독교민주당(우파)의 반대도 무릅쓰고 100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인 앙겔라 메르켈의 담대한 정치 철학도 그렇거니와 그런 지도자의 단안을 결국 수용한 독일인들의 수준도 놀랍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상상해 보자. 비율로 볼 때 5000만 인구 한국에 60만 넘는 외국 난민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아무리 역사와 문화적 배경, 경제적 여건이 많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독일은 이를테면, 한국과 일본의 위정자들이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고 말할 때, "나치 범죄에 대한 사죄와 반성에는 끝이 없다"고 말하는 독일이기도 하다.
홍세화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의 '나라 밖 이야기'는 <작은책>과 필자의 동의를 받아, 한 달에 한 번 <프레시안>에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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