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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미국은 책임 인정 언제 하나?

[기고] 미국은 제주도 민간인 학살의 최종 책임자

제주 4.3 사건 71 주기를 맞아 당시 무력진압에 앞장섰던 군 당국과 경찰이 처음으로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당시 강경 진압 결정을 내리는 등 결정적 역할을 한 미국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제주 4.3 관련 단체들은 지난해 4월 미국의 책임 인정과 사과를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미 대사관에 전달했으나 미국의 반응은 없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2000년 1월 공포되고,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가원수 최초로 제주 4.3 사건을 사과한 적은 있지만, 국방부와 경찰이 공식 사과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국방부는 제주 4.3 특별법의 정신을 존중하며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희생된 데 대해 깊은 유감과 애도를 표하며, 진상규명을 위한 정부의 노력에 적극 동참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도 경찰청장이 처음으로 제주 4.3 추념 행사에 참석해 당시 경찰이 저지른 행위를 반성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국방부는 4.3 사건에 투입됐다가 포상을 받은 군인들의 포상 취소는 검토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KBS 2019년 4월 3일).

아직 그 이름조차 제대로 지어지지 못한 제주 4.3을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이 기술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제주 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희생자'는 제주 4.3사건으로 사망․행방불명된 사람, 후유장애가 남은 사람, 수형자, '유족'은 희생자의 배우자 및 직계존속 등을 말한다. 제주 4.3사건 희생자 결정현황을 보면 사망자 1만244명, 행방불명자 3577명, 후유장애자 164명, 수형자 248명, 유족 5만9426명이다.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이 밝힌 제주 4.3사건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4.3사건은 제주도에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당시 제주도 인구 9분의 1인 2만 5천~3만 명의 소중한 인명이 집단으로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물적·정신적 피해도 컸고 특히 서로 도우며 평화롭게 살던 전통적인 제주공동체가 철저히 파괴됐다. 정부 조직인 제주4.3사건진상규명위원회에 공식 신고한 희생자만도 1만 5천여 명에 이른다. 이 중 86%는 토벌대에 의해 희생됐고, 어린이․노인․여성 등 약자 중 희생된 이는 무려 33%를 차지했다. 한편 진압작전에서 군인 180명, 경찰 140명가량이 전사했다.

제주 4.3사건은 민간인과 군경 사망자를 비교하면 집단학살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이 사건의 진상은 더 밝혀져야 할 부분이 많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에 비춰 볼 때 미군정은 발생 초기부터 초강경 진압 결정을 주도했다. 미군 지휘를 받던 남한 군경이 그에 복종 또는 동조해 가혹한 민간인 탄압을 자행했다. 제주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민간학살 사건이 자행되는 동안 소련 잠수함의 동해 출현이라는 가짜 뉴스가 속출하면서 제주 해상 봉쇄 등이 포함된 입체적 무력행사가 강행된 것은 주목되는 부분이다. 당시 미국의 극동전략은 소련의 남진에 대비하고 중국 마오쩌둥 세력의 천하통일과 사회주의 세력 확장을 적극 저지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와 같은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미국은 제주4.3에 과잉 대응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할 수 있다.

미군정 기간에 제주 4.3이 발생했을 때 미국은 2차 세계대전 후 군사강국으로 부상한 소련을 견제하는 한편, 중국내전에 미군을 투입하는 등 전력을 다해 장제스를 지원하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일제 패망 뒤에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과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 벌인 대결, 즉 국공내전(1945~1949년)에 적극 개입했다.

미국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협력하여 전후 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려는 전략을 수립했다. 1945년 8월 국공내전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이후 미국은 장제스 군에 무상공여 및 차관 20억 달러를 제공했다. 이에 따라 당시 국민당 군대의 253개 사단 중 39개 사단은 미국이 제공한 최신 무기와 장비로 무장해 공산당보다 우세한 화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한편 미국은 1945년 8월에서 12월까지 10만 명의 미군을 황하 지역에 투입해 국민당을 지원했고, 그밖에 국민당이 불리한 지역에는 미 해병대를 급파했다. 상하이․청두․톈진 등에는 한 때 5만 명의 미 해병대가 주둔한 적도 있었다(오마이뉴스 2011년 7월15일).

미국은 국공내전에서 궁극적으로 장제스가 승리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지만, 1947년 말에 이르러 국공내전의 승기는 마오쩌둥의 공산당군이 쥐게 되었다. 미국은 국민당의 패배가 기정사실이 된 뒤인 1949년 12월 중국을 포기하고 일본을 선택하겠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런 과정에서 미국이 취한 남한 군정 통치 특성이 드러난다.

소련이 북한지역을 점령한 뒤 사회주의 세력의 집권을 조장하자 미국은 남한 좌파 정치 세력과 언론 탄압에 친일 경찰 세력 등을 앞잡이로 이용했고, 이에 제주 등에서 불만이 고조되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유엔을 통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강행했으며 이런 요인들이 제주 4.3과 여순사건 등의 도화선이 된 측면이 강하다. 미국이 자신을 지지하는 이승만 세력을 앞세워 남한에 단독 정부 수립을 독려한 데는 북한 사회주의 세력을 직접 견제하고, 중국의 공산당 통일에 대한 저지 세력을 구축하겠다는 노림수가 있었으리란 추정이 가능하다.

제주 4.3 참극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고 미군정이 종료된 뒤에도 미국은 미 군사고문단을 남한에 잔류시켜 한국군과 경찰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또한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에도 전시작전권을 행사하면서 수많은 민간인 학살에 직간접적인 책임을 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본격적인 진상 규명 작업은 여태 이뤄지지 않았다.

제주 4.3의 도화선은 1947년 3월 1일 3.1절 행사 과정에서 발생한 경찰발포사건이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공개한 조사 자료에서 미군정이 친일파들을 앞세워 어떻게 비상식적으로 대처했는지가 드러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경찰발포사건으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총상을 입자, 이에 항의해 제주도에서 3월 10일부터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민․관 합동총파업이 시작됐다. 이에 미군정은 제임스 카스티어(James A. Casteel) 대령이 인솔하는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했다. 미군 보고서는 파업원인을 '경찰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을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고 분석하고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 동조자"라고 기술했다. 당시 경무부 최경진 차장은 기자들에게 "제주도 주민 90%가 좌익색채"라는 발언까지 했다.

카스티어 대령이 제주를 떠난 다음날인 3월 14일 조병옥 경무부장과 응원경찰 421명이 급파됐다(당시 제주경찰은 330명). 조병옥은 15일 파업 주모자를 검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틀 새 200명이 연행됐고 본토에서 파견된 수사요원들에 의해 연행자 고문이 시작됐다. 1947년 4월 중순께 검속자는 500명으로 늘어났다. 수감자들은 유치장 안이 비좁아 앉지도 못한 채 서서 수감생활을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이에 대해 미군 감찰보고서는 "10×12피트(약 3.3평)의 한 방에 35명이 수감됐다"고 기록했다. 이어 중문 발포사건(3월 17일), 종달리 6.6사건(6월 6일), 북촌 발포사건(8월 13일)과 1948년 2.7사건 등 민중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잦아지면서 검속자들은 계속 늘어났다.

3.1 경찰발포사건 이후 다음해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검속자가 무려 2500명에 이르렀다. 1947년 12월 13일자 미군 CIC 보고서는 "제주도의 여론은 만일 경찰이 빠른 시일 내에 정의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모든 조직들이 제주경찰감찰청을 공격하리라 한다"라고 적었다. 그 후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350명의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지목해 습격하고 무장봉기가 경찰의 탄압에 대한 저항임을 주장했다.

미군정은 4월 17일 경비대 제9연대가 진압작전에 나설 것을 명령하면서 "대규모 공격에 앞서 항복을 유도하라"고 지시해 무장대와의 평화협상이 성사됐지만, 전투 중지 사흘 만인 5월 1일 대낮에 제주읍 오라리 민가에 우익청년단원들이 자행한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미군 방첩대(CIC)는 "폭도의 소행"이라는 경찰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평화협상은 결국 무산되었다. 미군은 불타는 오라리의 모습을 지상과 상공에서 촬영하였고, 각종 동영상 필름을 덧붙여 '제주도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라는 무성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에서 '오라리 방화'는 무장대가 저지른 것처럼 편집되어 있다. 이후 제주 4.3은 민간인 수 만 명이 살해되는 비극으로 치달았다.

미국이 제주 4.3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제주에 소련 잠수함이 출몰한다는 가짜뉴스 등을 근거로 제주 4.3 학살의 당위성을 부여했고,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알고도 우려를 표하기 보다는 공산주의자 제거를 명분으로 진압을 격려했다는 주장이 훗날 제기됐다. 2018년 10월 4일 열린 '제주4.3, 진실과 정의-지속가능한 정의를 향해'라는 이름의 제주 4.3 제7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토론자로 참석한 한겨레신문 허호준 부국장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일으킨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 발발의 직접 원인은 경찰과 극우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항거와 5월 10일 치러진 제헌국회선거, 이른바 '5.10선거' 반대였다"면서 "미군정은 5.10선거의 성공적인 실시를 한반도 점령기간에 수행할 핵심 사안으로 인식하고, 제주도 사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고 설명했다(헤드라인제주 2018년 10월 4일).

허 부국장은 제주4.3의 전개과정에서 소련 연계설 근거로 등장하는 것이 '소련 잠수함 출현설'이며 "잠수함이 제주도 연안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나올 때마다 외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면서 "이러한 정보보고나 언론보도는 모두 가짜로 판명됐고, 이런 '가짜뉴스'들은 제주도를 미국의 대소봉쇄를 위한 전진기지로 간주하도록 하는데 기여했다"고 강조했다. 이 '가짜뉴스'가 당시 미 당국 관계자들에게 제주도 토벌의 당위성을 부여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일어난 제주도 초토화 시기에도 미국의 개입은 지속됐고, 제주도에서 이뤄진 작전에서 일관된 것은 제주도민 학살 우려보다 공산주의자 제거를 명분으로 한 군․경의 진압을 격려하고 고무한 것"이라며 "주한미군사령부는 (한국군) 9연대가 민간인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고 평가하지만, 주한미군사고문단은 이를 저지하기는커녕 초토화 작전을 감행한 지휘관을 높게 평가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제주4.3시기 국내에 있던 미 당국의 제주도 관련 보고서에 등장하는 '대량 처형'(mass execution), '대량 학살'(mass slaughter), '대량 집단학살'(mass massacre) 등의 표현은 그만큼 제주도에서 이뤄지는 대량 학살을 미국이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며 미국이 민간인 학살을 알고도 방조했음을 지적했다.

미국이 친일파를 기용해 해방정국의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정착시킨 가운데 제주도에서는 공산주의자 제거를 내세운 군경의 민간인 학살로 인해 도민 약 3만여 명이 희생됐다. 1947년 미군정기 항일기념일인 3.1절에 분단을 막기 위해 일어선 주민의 시위가 시초였던 제주 4.3은 7년여에 걸쳐 지속됐고, 그 결과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큰 인명 피해를 낳는 비극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국가이기주의적 접근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미국의 필리핀 침략을 서로 용인하기로 했다. 그 밀약은 대한제국 말기 헤이그 특사 파견 국면 등에서 철저히 지켜졌다. 미국은 3.1운동도 철저히 외면했고, 일본 항복 이후에도 남한을 일본 식민지로 인식해 점령했다. 미군정은 일제 잔재가 남한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과정이었다. 이 맥락에서 제주 4.3항쟁의 엄청난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근거를 마련해 주었으며, 한국전쟁을 전후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에도 묵인 이상의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정전협정이후 즉각 추진됐어야 할 평화협정을 계속 거부하고 팀스피리트 훈련 등을 통해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포함한 전면전쟁을 준비하는 군사훈련을 1980년대 말까지 실시해 북한의 핵무장 원인을 제공했다.

오늘날 미국은 북한을 두고 실질적 핵보유국이라 칭하지만, 그 숫자는 수십 개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미국의 전략 핵무기는 실전용만 6천 여 개에 달한다. 지금도 미국은 새로운 무기 개발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붓고 있다.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빌미로 한미군사훈련에 동원된 모든 무기는 그것이 하와이에 있든 일본에 있든 그 수리비 등을 한국이 부담해야 한다는 논리를 휘두르고 있지만, 한국 정부나 정당은 제대로 된 문제제기도 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가 주권자인 국민보다 미국을 더 무서워하는데, 미국이 제주 4.3 등을 통해 한반도에서 보여준 잔인성이 남긴 후유증의 하나로 추정된다.

▲ 제주 4.3사건의 유족들은 해당 참사에 관한 미국의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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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우

전 한겨레 부국장, 전 한성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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