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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은행의 4대 위기', 그리고 대응

C-E은행, K-H은행, 자발적 합병 움직임 고조

'은행의 위기'가 다시 금융계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은행 파산이 거론되던, IMF사태 당시와 같은 극한위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합병 등 종전에 기피하던 대응책이 자체적으로 거론될 정도로 은행 내부구성원들이 느끼는 위기감의 농도는 결코 간단치 않다.

***위기 1. 주택담보대출 부실화**

국민은행의 김영일 부행장은 얼마 전 전국을 지역 단위로 세분해 주택담보대출 현황을 정밀체크했다 한다. 체크 포인트는 아파트값이 지금보다 얼마까지 떨어져도 국민은행이 견딜 수 있는가였다. 마지노선은 '30%'였다.

"거품이 많이 끼었다는 아파트값이 지금보다 10%, 20%, 30% 떨어졌을 때를 가정해 지역별 주택담보가계대출의 위험도를 체크해본 결과 30%까지는 기존의 대손충당금으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이상 폭락하는 공황적 상황이 오면 어찌할 수 없는 일이고.

문제는 다른 은행들도 과연 같은 상황일 것인가이다. H은행등 일부 은행의 경우 신용보증기관까지 동원하는 편법을 통해 아파트값의 100%까지 대출해준 곳이 있다. 이런 곳은 아파트값이 하락세로 반전되고 주택담보 가계대출 연체비율이 높아질 경우 수익구조가 급속히 악화될 위험이 크다."

김영일 부행장의 말이다.

80년대말, 90년대초 시중 유동성이 풍부한 결과 부동산 거품이 극에 달했을 때, 일본 은행등 금융기관들은 부동산값의 최고 120%까지 대출해준 적이 있다. 부동산값이 앞으로도 계속 오를 것이라는 전제아래 현재 부동산값보다 20%나 더 얹어 대출해준 것이다.

일본 소비자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어 집을 사고, 집 사고도 남은 돈으로는 호화내장을 하고 자동차를 새로 구입하는 등 흥청망청하다가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줄줄이 파산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일본 금융기관들은 부실더미에 올라섰고 지금까지 십수년간 일본경제는 장기경기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일본 수준까지는 아니나, 우리나라 은행 및 금융기관들도 일본과 유사한 위기구조에 직면해 있는 셈이다.

***위기 2. 카드 부실**

카드연체율이 손익분기점인 10%선에 급속히 육박하고 있다. 지난달말 현재 9.2%로 집계됐다. 매달 10만명이상이 새로 카드연체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미 지난달부터 몇몇 신용카드사들은 적자로 돌아선 상황이다. 1천만명이상 고객을 확보하고 있는 '빅3'의 한 곳도 간신히 10억원 흑자에 그쳤다. 빅3의 경우 카드연체율이 손익분기점을 넘어서 1%포인트 높아질 때마다 3천억원의 적자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카드산업 호황이 계속되던 지난 3년간 카드는 가계대출과 함께 은행의 '황금알 낳는 두마리 거위'중 한마리였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이 황금거위가 무더기 부실을 예고하는 미운 오리새끼로 둔갑하기 시작했다.

카드사들은 연체율이 급증하자 각종 편법을 총동원하고 있다. 예컨대 대부분 월말로 돼있는 카드빚 상환일을 월초나 월 중순으로 돌리는 작업에 열중이다. 여러 장의 카드로 '돌려막기'를 하고 있는 잠재 신용불량자들의 연체율을 낮추기 위한 편법이다. 또한 리볼빙 서비스이나 신용대출 등 대환, 즉 사실상의 만기연장 조처에도 경쟁적이다. 하지만 이같은 편법적 대응은 '위기의 연장'일뿐, 위기의 해결은 못된다는 게 일반적 지적이다.

김정태 국민은행장은 지난 18일 서강대 경제대학원 특강에서 한 기자가 "은행이 올 들어 무차별적 영업공세로 사상최대 이익을 올린다던 데 너무 한 게 아니냐"고 묻자 "올해 은행권 이익은 사상최대가 아니라 사상최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우리 시중은행들이 그때그때 털어야 할 부실을 털지 않고 미뤄오다가 연말이 되면 이를 한꺼번에 털어 은행이익이 4.4분기에만 가면 곤두박질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며 "올해 사상최대 이익을 낼 것이라고 말한 분들은 후회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행장은 이같은 부정적 전망의 근거로 다름아닌 카드를 꼽았다.

"신용카드 연체의 경우 담보가 없는 데다가 신용평가도 제대로 돼 있지 않아 대환을 해준다고 해서 개선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하지만 전업 카드사뿐 아니라 은행들까지도 대환으로 돌리는 데만 급급해 있는 실정이다."

한 시중은행의 카드 책임자는 카드연체가 특히 은행들에게 타격을 많이 줄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LG, 삼성 등 전업카드사들은 지난해 거액의 이익을 올렸을 때 올해 대손충당금 기준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해 대손충당금을 넉넉히 쌓아놓고 있어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공적자금 투입은행들의 경우는 지난해 경영개선계획 목표를 맞추기 위해 번 돈을 모두 배당 형태로 갖다 쓴 까닭에 카드연체가 곧바로 손실로 반영되는 어려운 처지에 있다"며 "카드연체는 전업카드사보다 공적자금 투입은행들에게 큰 타격으로 다가올 것"으로 우려했다.

***위기 3. 잠재 부실기업여신 증가**

'미완성 기업 구조조정'이 은행, 그 중에서도 특히 공적자금 투입은행들에게 가하는 잠재부실 위협도 만만치 않다.

최근 현대상선과 대우자동차 처리를 둘러싼 정부와 공적자금 투입은행간 갈등이 그런 대표적 예다. 정부는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을 앞세워 현대상선과 대우자동차 해외매각에 따른 대우차 20억달러, 현대상선 6억5천만달러 등 거액의 신규 금융지원을 시중은행들에게 주문했다. 하지만 대다수 은행들이 보인 반응은 '기피'였다.

국민은행을 비롯한 정부지분이 없는 대다수 우량은행들은 애당초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른 은행들도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우리은행의 경우 행장은 대출지시를 하고 일선책임자는 반대해, 한동안 내부진통을 겪기까지 했다. 결국 정부개입이 있었고, 그결과 대우차에는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16억달러를 맡고 나머지 4억달러를 우리,외환,조흥 등 3대 공적자금 투입은행이 분담키로 했다.

현대상선의 경우도 대동소이했다. 산업,우리,외환,조흥이 가장 큰 부담을 맡았고, 성의표시차 참여한 신한과 하나은행은 각각 전체 6억5천만달러의 채 10%도 안되는 2천만달러와 3천만달러를 분담하는 데 그쳤다.

밑빠진 독 꼴인 하이닉스 문제도 여전히 공적자금 투입은행들을 압박하고 있다. 채권단은 금명간 1억8천5백만달러의 채무를 출자전환하고 기존주식을 20대1로 감자하며 나머지 채무에 대해서도 만기연장, 이자감면 등을 해줄 예정이다.

이같은 출자전환은 공적자금 투입은행들에게 여간 버거운 짐이 아닐 수 없다. 외환은행의 전 임원은 이와 관련, "외환은행이 출자전환을 통해 갖게된 하이닉스 주식만 자그마치 1억주"라며 "하이닉스 주가가 1천원만 떨어져도 외환은행은 앉아서 1천억원의 평가손 손실을 입고 있다"고 심각한 내부상황을 전했다.

이밖에 쌍용, 아남 등의 채무에 대해 출자전환 조처를 한 조흥은행 등도 출자전환시보다 급락한 주가로 거액의 평가손을 입고 있는 등, 미완성 기업구조조정은 여전히 은행을 골병 들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위기 4. 불안한 자리**

이같은 경제적 요소외에 은행들을 불안케 하는 또하나의 요소는 경제외적 변수인 '연말대선'이다.

IMF사태후 민간은행들의 경우 외국인지분이 급증하면서 상대적으로 행장 임면에 대한 정치적 외압은 크게 약화됐다. 그러나 공적자금 투입은행이나 국책은행들의 경우는 아직도 외압으로부터 자유롭다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연말대선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 권력이동이 일어나면 공적자금 투입은행이나 국책은행의 행장들에 대한 대대적 인사이동이 불가피하리라는 게 금융계의 일반적 관측이다 보니, 벌써부터 해당 은행장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남다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권이 바뀌면 모 행장이나 모 이사회의장은 반드시 바뀔 것이며, 모 은행에 대해선 강도높은 '장부 까보기'가 단행될 것이고, 공적자금이 투입된 모 은행과 모 은행은 합병될 것이라는 등 은행권 밑바닥에서는 여러 관측성 설이 나돌고 있다"며 "이렇게 분위기가 어수선하다보니 일이 제대로 손에 안잡히고 있다"고 전했다.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 이것은 아직 한국 은행들이 가야할 길이 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 증거다.

***위기와 대응**

위기가 오면 대응이 뒤따르는 법이다. 문제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이다.

미국 맥킨지사의 도미닉 바튼 등 3인이 최근 공동집필한 <위험한 시장(Dangerous Markets)>을 보면, 위기는 대응하기에 따라 정반대 결과를 갖다 준다.

무능한 기업CEO나 정책책임자는 위기에 잘못 대응함으로써 주주와 납세자들에게 그 피해를 고스란히 전가한다.
반면에 유능한 CEO나 정책책임자에게는 "위기야말로 돈 벌 기회"다. 위기속에 무능한 기업들이 도태되면, 살아남은 기업은 그만큼 독점적 이윤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어떻게 해야 위기를 기회로 바꿀 것인가. 지금 많은 금융인들이 하고 있는 고민이고, 마땅히 해야 하는 고민이다.

***주목해야 할 현상, '자발적 합병' 움직임**

이와 관련, 최근 은행권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자발적 합병' 움직임이다.

김영주 재정경제부 차관보는 지난 17일 한 TV방송에 출연, 작금의 금융상황과 관련해 "그동안 금융기관간 합병이 있었지만 아직도 은행수가 많다는 게 일반적 평가"라며 "자율적 구조조정 차원에서 한병과 제휴가 활발히 일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어는 은행이든 대형화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며 그런 차원에서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은행권 추가합병에 대해 부분적 얘기를 들어왔다"고 덧붙였다.

김 차관보의 이같은 언급은 '정부의 합병 독려'로도 해석가능하다. 그러나 최근 은행권 저류에 흐르는 분위기는 종전과 달리 상당히 '자발적'이다.

얼마 전 우량은행 범주에 속하는 H은행의 지점장은 초대형 우량은행인 K은행 지점장을 서둘러 만나 "우리 두 은행이 합친다는 얘기가 은행내에서 확 돌고 있는데 사실이냐"고 물어봤다. 둘은 대학동기 사이다. 확인결과 "확정된 것은 아직 없으나, 가능성은 농후"한 것으로 결론났다. 두 지점장은 합병을 피할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였다.

C은행과 E은행 등 공적자금 투입은행간 합병설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한 공적자금 투입은행 임원은 이와 관련, "국민은행과 하나은행이 합병을 통해 덩치를 부풀려나가면서 더이상 혼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며 "결국 남아있는 공적자금 투입은행끼리 합치는 수밖에 없는 게 아니냐"고 간단치 않은 내부분위기를 말했다. 그는 또 "현 집권층과의 친밀한 관계를 고려할 때 기왕 합병을 하려면 정권교체후보다 현정권 임기내에 해야 유리한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돌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은행권에 합병 바람을 불어넣은 김정태 국민은행장는 지난 18일 강연에서 "국민은행은 상반기 이익이 1조원이 넘는만큼 자은행 2~3개는 살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부가 현재 금지하고 있는 모은행과 자은행간 정보공유를 허용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합병 전선에 뛰어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미 김행장에게는 러브콜을 보낸 은행들도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합병만이 유일한 위기대응책일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로선 가장 유력한 해법인 것도 사실이다. 국민은행의 한 임원은 "IT(정보통신) 통합 및 투자의 결과로 3년내 통장을 모두 없앨 계획이며, 이를 통해 얻게되는 비용절감 효과만 연간 5천억원에 달할 것"이라며 "합병은 위기상황이 심해질수록 가속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위기와 대응. 또다시 피말리는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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