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주식이 증시의 천덕꾸더기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특히 요즘 들어 외국투자가들의 은행주 기피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은행 주식은 IMF사태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국투자가들이 가장 선호하던 주식이었다. "한국에서 그래도 구조조정이 가장 잘 된 곳은 은행부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때문에 은행선도주인 국민은행의 경우 외국인 지분율이 70%를 넘을 정도로 외국인들은 은행주식을 앞다퉈 사들였다. 그러던 것이 요즘 들어, 특히 이달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2일부터 19일까지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판 상위 10개 종목 가운데 6개가 은행을 포함한 금융주였다. 외국인들의 최고 선호종목이던 국민은행이 1천7백47억원 순매도로 랭킹 1위를 차지했고 신한지주(6백59억), 한미은행(1백73억원), 대신증권(1백24억원), 삼성화재(1백19억원), 삼성증권(1백14억원) 순이었다.
이처럼 외국인들이 앞장서 주식을 내다파니 주가는 두말할 필요없이 큰 폭으로 떨어졌다. 월초대비 19일 현재 가장 주가가 많이 떨어진 은행은 한미은행으로 17.5%가 급락했다. 이어 국민은행(15.9%), 신한지주(15%), 우리금융(14.3%), 조흥은행(13.2%), 하나은행(11.7%), 기업은행(10.7%) 순이었다. 평균 종합주가지수 하락률의 2~3배에 달하는 급락장세였다.
은행주의 시대는 끝났는가.
은행은 또다시 위기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나.
만약 위기라면 어떻게 돌파해야 할 것인가.
***은행들을 둘러싼 각종 악재**
은행주는 올해의 대표적 실적주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은행들은 사상최대 흑자기록을 갱신할 게 확실하다. 전윤철 부총리는 "은행들이 올해 10조원대 수익을 올릴 것"으로 내다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투자가들은 은행주를 내다팔고 있고, 그 결과 주가는 급락을 거듭하고 있다.
외국투자가들이 은행주를 내다파는 이유는 간단하다. 비록 지금은 사상최대 수익을 올리고 있으나, 앞으로 상황이 좋아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선행성'이 작동한 것이다.
은행 산업의 향후 사업성을 밝지 않게 보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우선 은행들의 주된 대출원이자 수익원인 가계대출 및 카드 대출이 포화상태에 도달했고, 적잖은 기성대출에서 부실화가 우려된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은행간 과당대출 세일즈 경쟁으로 수익력이 감소하리라는 점도 우려하고 있다. 또한 가계대출의 대안인 기업 투자가 아직 냉랭한 데다가, 은행들이 돈 꿔주기를 희망하는 우량기업들은 더이상 은행돈을 쓰지 않으려 한다는 점도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더욱이 이미 곳곳에서 적신호가 커지고 있다. 한 예로 은행 전체수익의 3분의 1 정도를 충당해온 은행 겸업 카드사의 연체 증가 속도가 심상찮다. 여신전문협회에 따르면, 은행 겸업 카드사의 연체율이 지난해말 7.4%에서 6월말 현재 9.6%로 급상승했다. 이는 카드사들이 손익분기점으로 보는 연체율 10%에 바짝 근접한 수치다. 지난 2년간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카드사업이 실속없는 빈깡통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얘기에 다름아니다.
은행의 주수익원인 가계대출, 그중에서도 특히 주택담보대출의 경우도 정부의 강력한 억제책으로 부동산값 상승세가 꺾이면서 하락세로 돌아설 경우 부실증가요인으로 작용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지금 은행은 '전쟁중'**
상황이 이렇게 심상치 않게 돌아가니, 이미 은행들은 '전쟁중'이다.
신한은행의 황모 지점장 전언이다.
"요즘 들어 더이상 돈 빌려줄 곳을 찾기 힘들다 보니, 한마디로 각 은행들은 사활을 건 대출 세일즈 전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가장 공격적 세일즈를 펴고 있는 대표적 은행이 C은행이다. 농협도 공격적으로 대출 세일즈를 펼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대출금리가 턱없이 낮다는 데 있다. 각 은행의 조달금리가 뻔한데 이같은 초저금리로 나온다는 것은 마진을 포기하겠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합병이 아닌 독자생존을 천명한 C은행의 경우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으로 이렇게 해서라도 외형을 키워 피합병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속셈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은행들이 이런 식으로 수익성을 무시하고 출혈경쟁을 벌이다간 또다시 동반부실 위험에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은행장 등 고위급 임원이 직접 대출세일즈에 나서 상대방 은행의 고객을 뺏어오는 쟁탈전도 치열하게 전개중이다. 김정태 국민은행장은 최근 한 강연에서 작금의 상황을 이렇게 토로했다.
"요즘은 신용대출해주기도 쉽지 않다. 오늘만 해도 내 일정이 어떤 줄 아는가. 아침 7시반에 조찬이 거의 매일 있는데 오늘도 '금융산업의 미래'란 주제로 강연을 하니 9시가 돼 다음에 망우지점으로 가서 이 지역 중소기업 사장들을 열 분 정도 만나 인사를 했다. 오후에도 세 분 정도 만나기로 했는데 그만 여기에 와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내가 직접 사장들을 만나는 것은 사장들이 지점장들은 우습게 생각하는데 은행장이라고 하면 그래도 알아주기 때문이다. 은행장 명함이 값을 톡톡히 한다. 인사한 뒤에는 반드시 예금이나 대출 등 비즈니스로 연결되니까. 그 사장님들은 모두 다른 은행과 거래하는 분들이다. 내가 그쪽 고객을 뺏어오는 것이다. 비도덕적이라고 욕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경쟁이니 할 수 없다."
부산은행의 심훈 행장도 "지점장들이 SOS만 보내오면 곧바로 해당기업을 직접 찾아가 대출 세일즈를 하고 있다"고 밝히는 등 대다수 은행장들이 요즘 대출 세일즈맨으로 현장을 누비고 있다. 이렇게 하지 않을 경우 신규 고객을 모으기가 힘든 것은 물론, 기존 고객마저 경쟁은행에게 빼앗기는 일이 비일비재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 길은? 합병**
과연 은행들은 이같은 총성없는 전쟁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재정경제부 변양호 금융정책국장의 말부터 들어보자.
"올해까지야 어떻게 흑자를 내며 굴러가겠지만 내년부터는 은행을 둘러싼 상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가계대출 신장세도 급속히 줄어들고, 그렇다고 대신 돈을 빌어줄 곳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해법은 하나뿐이다. 합병을 통한 경쟁력 강화다.
합병을 안하고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일각에서는 앞으로도 계속 자산과 수익이 늘어날 테니 합병을 안해도 된다고 주장한다. 말도 안되는 얘기다.
지금까지는 합병을 안해도 연간 자산이 수십조원씩 늘어났으나 앞으로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대출해줄 곳이 있어야 수신을 하더라도 하지, 앞으로는 고객예금을 안받으려는 은행까지 나타날지도 모른다.
앞으로 은행들이 자산을 늘리면서 조달금리를 낮추고 비용을 절감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합병밖에 없다. 그런데도 H은행등 몇몇 은행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가능한한 합병을 안하려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서울은행을 인수하는 하나은행이나 이미 합병을 완료한 국민은행이 다른 은행들을 추가합병하면서 다른 은행들은 영원히 그 뒤를 쫓아가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국은행의 박철 부총재도 "은행들이 가계대출만으로는 지금과 같은 수익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며 "은행간 합병을 비롯해 보험, 증권 등으로 업무를 다각화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합병의 위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섭게 나타나는 법"**
그렇다면 과연 합병만이 대안인가. 이미 상당수 은행들은 보험과의 방카슈랑스, 증권사 합병등을 통한 지주회사화 등 나름대로의 활로를 추진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부문 1등이 만나는 식이 아니라 구색갖추기 식의 이업종간 합병보다는 우선 동종업종간 합병이 시급해 보인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 조언이다.
한미은행 김모 지점장의 토로다.
"일반 개인고객을 상대하는 데에는 현재 상황으로도 어느 정도 서비스 경쟁이 가능하나 기업고객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규모의 경제를 앞세운 국민은행등 합병은행과 도저히 상대가 안되는 게 솔직한 현실이다. 앞으로는 개인고객뿐 아니라 우량 기업고객도 은행이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고객인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합병이 불가피해 보인다."
국민은행의 한 임원도 "합병의 시너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무섭게 나타나는 법"이라고 합병의 불가피성을 말했다.
그는 "합병의 최대 난관인 전산통합을 끝낸만큼 앞으로 낮은 조달금리를 무기로 공격적 마케팅을 펼칠 생각"이라며 "이밖에 앞으로 3년 뒤에는 공격적 IT(정보통신) 투자의 결과 모든 통장을 없앰으로써 국민은행 차원에서만 연간 5천억원대의 비용절감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은행들은 지금 또다시 위기에 노출되고 있다. 물론 은행들이 직면할 위기가 IMF때 같은 극한위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 은행들은 이 정도 위기는 충분히 견뎌낼만한 내성을 키운 상태다. 그러나 본디 잘 나갈 때 어려운 때를 대비해야 하는 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의 위기는 은행들에게 한단계 도약을 위한 쓰디쓴 보약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