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2일~3월 24일 고려대 구로병원 장례식장
2년 전 오늘인 2017년 3월 22일 "어느 무명의 정당인이 쉰 살의 나이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심근경색이 원인이었다. 원내에서 가장 작은 당에 몸담았고, 대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며, 구의원 선거 한번 나온 적 없는 사람이었다. 역사의 귀퉁이에 한 줄 기록되기도 쉽지 않은 이 죽음은, 그러나 그와 동시대를 살며 같은 꿈을 꿨던 이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무대 위의 삶을 살지 않았던 그가 남긴 흔적도 많지 않았다." (천관율, "삶을 '갈아넣은' 한국 진보 정당사", <시사인> 제499호, 2017년 4월 12일).
천관율이 말한 "쉰 살의 나이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어느 무명의 정당인"은 '진보정당의 영원한 조직실장'이자, 17대 국회의 마지막 기간 및 19대와 20대 노회찬의 정무수석 보좌관이었던 오재영이 바로 그 사람이다.
오재영 동지. "남자는 턱 선이 생명"이라며 소소한 농담을 하던 동지가 벌써 그립구려. 사실 나와 같은 국회의원들은 오재영이라는 줄기에서 나온 꽃 같은 존재입니다. 나무의 모든 영양분을 가져다가 화려하게 피는 그런 꽃 말입니다. 그 꽃이 '새 세상'이라는 열매를 맺고 임무를 마쳐 시들어버리기도 전에 왜 동지가 먼저 갔다는 말입니까. 원망스럽구려.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벗 오재영 동지, 두 아들이 사회에 나올 때쯤은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놓겠소. 편히 쉬시오. 그리고 늘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말, 이제야 드립니다.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오재영 조문보>에 실린 '오랜 벗 노회찬'의 추도사)
이 자리에 함께 한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오재영의 부인이자 오랜 동지인 권신윤의 말을 블로그 글을 통해 전한다(조희연, "동지로 함께 사는 아름다운 부부, 그 헤어짐의 현장에서 숙연해졌다!", 2017.3.26.).
"그 분(권신윤)은 영결식장에서 간단히 가족을 대신해 감사를 표하면서, '가정에서도 그는 언제나 진보정당과 사회운동에 대한 걱정을 했습니다. 그를 지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이제 그를 가정으로 돌려주어서 감사드립니다. 이제 동지를 가정에 돌려주고 여러분은 오재영이 바랐던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헌신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절로 숙연해졌다."
빛났던 청춘을 함께한 절친 정종권은 레디앙의 부음 기사로, 오랜 동료인 김윤철과 김정진은 추모 글로 먹먹한 마음을 달래며 그를 떠올린다.
- 레디앙, "'진보정당의 영원한 조직실장' 오재영 전 민주노동당 조직실장 별세", <레디앙>, 2017년 3월 23일
- 김윤철(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미래를 당겨쓰고 떠난 진보정당의 '영원한 조직실장': [추모사] 진보정당운동의 넋 오재영", <프레시안>, 2017년 3월 24일.
- 김정진(정의당 미래정치센터 소장), "진보정당의 위대한 조정자, 오재영이여 편히 쉬소서: [추도사] 민주노동당의 '영원한 조직실장'을 보내며", <오마이뉴스>, 2017년 3월 24일.
오재영은 어떤 사람?
오재영은 1968년 1월 11일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고 특히 빼어난 수학 실력을 갖고 있었는데, 1987년 대학은 이상하게도 이과 계열이 아닌 서울대 외교학과로 진학한다. 대학 1학년 때인 1987년 '구로구청 부정선거 규탄 투쟁'에 참여해 구속된 적이 있었다. 학생·청년운동 시절부터 오재영은 민중민주(PD) 계열 조직 담당자를 도맡았는데, 1992년 민중후보로 대선에 출마한 백기완 후보 선거대책본부에서도 조직국에서 일했다. 1996년 10월 3일 '하늘이 열린 날'에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권신윤과 백년가약을 맺어 현준과 태준 두 아이를 두었다.
대학 졸업 후 오재영은 '서울진보청년회' 초대와 2대 회장, '진보민청'(진보민중청년연합) 사무처장으로 청년운동을 계속하던 중 1997년 국민승리21 권영길 대통령 후보 선본 조직국 활동을 통해 진보정당 건설에 참여한다. 1998년 6월 24일 진보민청 사건으로 오재영은 홍제동 대공분실로 연행, 구속된다. (※ 1989년 12월 23일 인민노련 사건으로 체포된 노회찬이 끌려간 곳도 홍제동 대공분실이었다.)
구속 당시 오재영은 면회 온 친구에게 이런 쪽지를 건넸다고 한다. "감옥에서 나가면 다시 활동할 것이니 아무도 딴 데로 튀지 마."(대학 동기 황필규 변호사의 말). 1998년 10월 30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1호 법정. 이적단체 구성, 이적표현물 소지, 고무찬양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진보민청 중앙간부들에게 전원 유죄가 선고된다. 김봉태 의장에겐 징역 2년, 김경윤 부의장에게 징역 1년6월의 실형이 선고됐으며, 오재영·유영주·정종권·강기웅에겐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다(<참세상>, 1998년 11월 1일). 재판부는 "수사기관에서의 진술내용과 증거물에 비춰볼 때, 진보민청이 추구하는 이념인 노동해방·인간해방은 맑스주의에 입각해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려는 것으로 평가된다"며 진보민청을 이적단체라고 규정했다. 진보민청 사건으로 구속된 정종권과 안양민주화운동청년연합(안민청) 사건으로 구속된 정경희는 부부인데 2살된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부가 같이 구속되기에 이르렀고, 정경희가 제출한 구속적부심사가 기각되어 반인륜성이 문제되기도 했다(<인권하루소식>, 제1165호, 1998년 7월 11일).
감옥에서 나온 오재영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의당으로 이어지는 진보정당의 길을 걸으며, 조직국장과 조직실장 등 조직 실무 책임자로 일한다. 당 활동을 함께 한 동료들이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오재영의 입버릇 중 하나는 "현장의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중앙은 존재할 자격이 없다"였다. 현장을 모르는 중앙당은 엉뚱한 지시와 해결책을 내리고, 그러면 현장은 작동을 하지 않으며, 결국 중앙당의 권위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정당에서 전략이나 기획이 더 중요하고 멋있는 일처럼 보이지만, 무슨 아이디어든 집행하려면 조직을 실제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조직이 없으면 전략도 기획도 없다. 그 출발선에 늘 서 있는 사람이 오재영이었다. 그래서 당 지도부가 어느 정파에서 나오든 오재영은 계속 쓰려 했다." 오재영과 같은 시대에 학생운동과 진보정당 활동을 함께해온 동료인 정의당 정책위 의장 김용신의 기억이다. 오재영의 오랜 길동무인 김윤철은 "오재영은 냉소적인 진보정당 인사들의 온갖 불만의 소리를 받아준 '소리 수집가'였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조직업무에 전담하던 오재영은 17대 국회의 마지막 기간 및 19대와 20대 국회 때는 노회찬 의원의 정무수석보좌관으로, 진보신당과 진보정의당 대표 시절에는 대표비서실장으로 활동한다. 노회찬은 3선 국회의원이었지만 사실 임기를 다 채운 적은 없었다. 17대는 민주노동당 분당으로, 19대는 삼성 X파일 사건 대법 판결로. 20대는 "굳은 신념이 있었기에 항상 유연했지만, 자신에게는 늘 엄격했던 무한의 책임의식"(조승수, "추모의 글: 그를 보내며", <노회찬의 진심>, 사회평론, 2019, 393쪽)에 따른 '멈춤의 결단'으로.
의정 활동 7년 동안 노회찬은 127건의 법안 및 결의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가운데 34건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현실 정치는 현실의 국민과 소통하고, 그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지지를 얻고, 참여를 도모하는 것"임을 강조한 노회찬의 의정 활동은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현실을 누리는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이었고, 사회 약자들의 현실을 정치 의제로 만드는 것이었다(노회찬, <노회찬, 함께 꾸는 꿈>, 후마니타스, 2019, 7쪽). 이런 일은 노회찬 개인의 역량과 소신 때문이긴 한 것이지만, 그의 옆에 오재영이, 그리고 박규님과 박창규 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노회찬과 오재영의 첫 만남, 인연의 시작
노회찬과 오재영의 첫 만남은 1992년 백선본(민중대통령후보 백기완 선거대책본부) 때 이루어졌다. 당시 노회찬이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었고, 오재영은 조직팀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1992년 9월 30일 대통령선거 공동기획단(진보정당추진위원회, 민중회의준비위원회, 사회당추진위원회, 전국노동단체연합, 민중의정치세력화를위한청년연석회의, 민중대통령후보추대를위한문화·예술인모임, 민중대통령추대학생선거대책본부, 민중정치실현을위한교수모임) 주최로 영등포 성문밖교회에서 전국의 여러 조직대표 52명이 참가한 가운데 '민중대통령후보 선거대책본부 구성을 위한 전국 제 단체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이어 10월 5일 <민중대통령후보 선거대책본부>(이후 <민중대통령후보 백기완 선거운동본부>/백선본으로 전환) 발기인대회 및 발족식을 갖고, 11월 1일 잠실올림픽 경기장에서 민중 대통령후보 선출대회를 갖고 백기완을 후보로 선출한다.
노회찬은 오재영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오재영 실장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 자네는 만 스물네 살, 나는 서른여섯 살이었네. 같이 활동 한 번 해본 적이 없었고 소속된 단체도 달랐네. 그러나 스물네 살짜리 총각과 서른여섯 살짜리 새파란 중년이 백기완 선거대책본부에서 그 조직팀에서 만났을 때 이유가 있었지. 우리는 걸어왔던 길이 달랐지만 그리고 생각도 다 똑같진 않았지만 그 선거를 통해서 진보정당의 싹을 만들자는 그 일념이 똑같기 때문에 백기완 선거대책본부에서 그때 내가 조직위원장 할 때 자네를 처음 만났네. 그리고 우리의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네. 길지 않은 오재영의 청춘은 그 절반 이상이 진보정당이 이 대한민국을, 이 한반도를 새롭게 만들겠다는, 만들 수 있다는 그 일념으로 달려온 한 길이네. (노회찬, "추모사: 미안하다, 고맙다, 다시 만나자 오재영", 오재영추모사업회·정의당, [당신의 꿈이 우리의 꿈입니다-故 진보정당 활동가 삶의 기록<1>], 2019).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노회찬, 조직국장 오재영
1997년 국민승리21을 통해 다시 만난 노회찬과 오재영의 본격적인 인연은 민주노동당에서 시작된다.
1999년 연말 민주노동당(가칭) 창당준비위원회 <창당기획팀>은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 창당 준비와 관련, 박차를 가한다. 팀장은 노회찬이었고 오재영을 비롯해 최기영, 김웅, 김재운, 김종철, 김문영, 이재영, 원재철, 황이민, 서복원, 노현기 등이 팀 구성원이었다. 오재영은 '대의원 선출 및 지구당 창당' 담당자였다. 창당 후 오재영은 조직국에서 일하면서 '재창당기획위원회'(위원장 천영세)의 14인 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역할하기도 했다.
2002년 3월 16일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이 된다. 오재영은 조직국장으로, '당발전특별위원회' 조직소위 간사로서 활동하면서 분회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2003년 3월 당대회에서 '당 쇄신'을 위해 결의한 실천과제로서 '분회의 획기적 강화'는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중앙당-광역지부-지구당-분회'라는 조직 골간 속에서 민주노동당은 분회를 의사소통공간이자 당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정치투쟁의 무기로 정의하면서, 지역과 직장에 당을 알려내는 기본단위로 본다. 조직체계상 가장 말단이지만 당을 지탱하는 토대라는 것이다. 당과 현장의 연결고리로서 당시 '분회'는 민주노동당 당원들의 자부심의 원천 가운데 하나였고 기성 정당들에게는 부러움의 상징이기도 했다.
분회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구현한 브라질 노동자당(PT) 누클레오(지역 기초조직)가 모델이다.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편집국장 이광호) 25호(2000년 10월 6일-10월 12일)는 "정치활동의 기초단위이자 당원들의 생활공동체"라고 적고 있다. 한국 정당사상 첫 실험이었던 '분회'는 민주노동당이 2004년 17대 총선에서 의석 10석을 획득하면서 원내에 진입하는 디딤돌이 됐다.
2002년 3월 3백여개에 불과했던 분회조직은 2003년 12월 현재 9백여개에 이르고 있으며, 특히 8월 무주에서 열린 '2003년 제3차 전국 분회장 수련회'에는 이전보다 두세 배가량 많은 1천여명이 참여하는 장관이 연출되기도 했다. 지역구 한 곳당 풀뿌리 조직 책임자가 평균 4명 이상 살아 움직였다는 의미다. 초창기부터 활동한 당직자들은 '진보정당 영광의 순간'을 꼽을 때 2003년 8월 무주를 빼놓지 않고 기억한다.
이에 대해 조직국장 오재영은 "분회장 대상 홈페이지 마련, 분회통신의 꾸준한 발간 등 조직국 차원의 노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각 지구당 활동가들이 분회조직의 유용성·중요성을 스스로 깨닫고 힘을 쏟은 결과"라고 말한다("당발특위 보고서 "논란" 끝 채택", <진보정치>, 161호, 2003년 12월 22일). 오재영의 겸손한 말과는 달리, 사실 이 사업은 사무총장과 조직국장의 열정과 헌신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신윤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그때 남편은 집에 와서도 마치 콜센터처럼 일했다. '몇 명이나 모아야 분회야?' 이런 전화가 전국에서 쏟아지더라. 사회성이 좋다고 할 수 없는 사람인데, 우리 동네에서 분회 모델을 만들어보겠다고 동네 술자리에도 열심히 나갔다."
2004년 17대 총선의 숨은 공신 민주노동당 기획조정회의, <힘내라 진달래> 속의 오재영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 선대본이 구성되기 직전인 2004년 1월 초부터 매일 아침 8시30분에 열렸던 기획조정회의는 4·15 총선의 숨은 공신이었다. 바깥으로는 이들의 역할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회의는 민주노동당의 짧은 역사에서 드물게 '정치활동'을 성공적으로 해낸 팀이었다. 노회찬(선대본부장)과 문명학(기조실장), 김종철(대변인), 박권호(총무실장), 오재영(조직실장), 이재영(정책실장), 황이민(사무부총장)을 고정 참석자로 하고, 조승범(홍보실장) 등 유관부서 실무자들이 현안이 있을 때마다 참석한 기획조정팀은 당시 민주노동당의 실질적인 집행기구 역할을 하면서 매일 아침 모여 당일 및 중장기 선거전략에 대해 논의한다. 회의는 30분 남짓, 선거 핵심부서 책임자들이 모였던 만큼 빠르게 결정되고 바로 집행이 가능했다.
2004년 3월20일, 노회찬 당시 선대본부장이 TV토론에 출연했다. 이날을 기점으로 민주노동당이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차분히 축적되던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급등세로 전환됐으며, '노회찬 어록'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한 날이기도 하다.
"선대본이 꾸려지고 들어가면서, 매일 아침 전략을 짜내고, 토론을 거듭했다. 그 속에서 정세인식의 중심을 잡아갔다. 3월 20일 TV토론에서 나온 말들은 상당 부분 이 팀에서 논의되고, 정리된 것이었다. 레토릭(수사)은 내 것이었지만, 내용은 토론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함께 지속적으로 논의하지 않았으면 그런 성과를 내기 어려웠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이! - TV토론, 탄핵 수렁에 빠진 민주노동당을 건져내다", <매일노동뉴스>, 2005년 8월 24일). 노회찬은 공을 기조회의에 돌렸지만, 노회찬의 뛰어난 개인 역량과 함께, 창당 때부터 준비됐던 당의 정책역량과 숨은 공신으로서 기조팀의 합작품이었다.
민주노동당 선대본부장 노회찬의 '난중일기'를 모은 <힘내라 진달래>(사회평론, 2004)를 보면 오재영이 몇 차례 등장하는데, 이는 선거운동이 숨가쁘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조직 실무책임자가 하는 활동의 몇몇 예에 불과할 뿐이다.
민주노동당 지지율 6.5퍼센트는 보도되지 않았다(1월 14일 수요일 맑음, 아침 영하 9도)
울산으로 급파한 오재영 조직실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울산의 지구당위원장과 후보들이 18일 회의를 할 예정이라 한다. 그 전에 중앙당의 확고한 입장을 재천명할 필요가 있다.(41쪽)
22시 KBS 심야토론 대기실에 갔다 (3월 20일 토요일 맑음)
김미경 후보의 사퇴의사는 완강하다. 충남 서부지구협의회를 설득하기 위해 천영세 선대본부장이 귀경 길에 현지에 들르기로 하였다. 오재영 조직실장을 급파하였다.(241쪽)
무르익는 봄도 멀지 않았다 (3월 31일 수요일 맑음)
오재영 조직실장을 불러 지역구 후보 등록현황을 점검하다. 등록은 대부분 순조롭다. 그러나 몇몇 지역에선 기탁금이 모자라 급전을 구하느라 마지막 순간까지 애를 태우고 있다. (281쪽)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 개표 당일. 민주노동당 중앙당사에 몰려든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노회찬은 299명의 당선자 가운데 마지막에 결정이 난 299번째 당선자가 되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전성기는 짧았다. 내부 정파 갈등과 정치력의 부족, 당권을 잡은 정파의 패권적이고 비민주적인 당 운영 등으로 2008년 2월 3일 결국 당은 갈라졌다. "이날 당 대회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이혼할 뻔했다." 권신윤의 회고다. "남편이 '안 될 것 같아'라고 하더라. 나는 그게 분당에 찬성한다는 뜻인 줄 알고 화를 냈다. 남편 정파의 노선이 그랬으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막으려고 해봤는데 안 될 것 같아'라는 뜻이더라. 당이 깨진 날, 남편이 집에서 엉엉 울었다. 같이 살면서 그런 모습은 처음 봤다." (천관율, <시사인>, 499호, 2017년 4월 12일)
2008년 18대 총선 낙선과 노원구 상계동 <노회찬마들연구소> 시절
2008년 3월 노회찬과 오재영은 민주노동당을 탈당, 진보신당에 함께 몸을 싣는다. 2008년 4월 9일 18대 총선에서 낙선의 아픔과 아쉬움을 나누면서 11월 28일 노원구 상계동 지역에 <노회찬마들연구소>를 세운다. 노회찬은 "마들연구소를 노원과 한국사회를 개조할 정책생산의 산실로 만들겠다"면서 "'나눔과 돌봄, 희망을 향한 행복한 상상'의 허브가 될 것"이라는 포부를 밝힌다. 오재영은 "창립기념식을 먼저 하고 지역에서 사업을 펼치는 것보다 사업적으로 주민들에게 먼저 다가서고, 그 다음에 창립기념식을 하는 게 맞다고 판단해 다소 늦게 창립기념식을 열게 되었다"고 말한다(<레디앙>, 2008년 11월 27일).
마들연구소는 주민들의 생활에 밀착해서 지역 정당활동의 전형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명사초청월례특강', '학부모와 함께하는 교육아카데미', '나눔과 돌봄을 통한 활기찬 지역공동체 만들기 사업', '여성교실', '마들정책포럼과 지역정책연구' 활동 등을 통해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특히 지역명품특강이라는 애칭을 얻은 명사초청특강은 2008년 9월 7일에 시작해서 2012년 9월 26일까지 총 41회 진행된다.
4회 마들명사초청특강(2008년 12월 3일)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은 강연 중에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쓰는 말이 달라져야 합니다. 말은 생각이에요. 노회찬 전 의원을 두고 '스타가 나왔다'고 하는데 그건 바보의 언어예요. 노회찬 전 의원이 다른 언어를 사용했어요. 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노 전 의원에게) 신세를 진 거지요. 노회찬 전 의원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언어를 쓰고 있었어요.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는 특별한 말들을 쓰고 있었어요. 뛰어난 언어였어요. 노 전 의원과 저는 동급이 아니에요. 저는 제 고집의 언어를 썼어요."
조세희 선생은 특강 말미에 이런 말도 했다. "이 땅에서 바로 이 시간에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음 두 부류 중 하나다. 하나는 도둑이고 하나는 바보다." 우리는 아직도 '낙원동'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아마도 조세희 선생은 노 대표가 그런 슬픈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구영식, "노회찬 형을 위해 한 가지는 해야겠네", <오마이뉴스>, 2008년 12월 12일).
한진중공업 사태와 한 달 동안의 단식농성(2011.7.13.~8.11.)
2010년 12월 20일부터 2011년 11월 10일까지 1년 가까이 한진중공업의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서, 이른바 '한진중공업 사태'가 지속된다. 이 사태는 영도조선소의 생산직 1158명의 3분의 1이 넘는 400명을 정리해고하면서 시작됐다. 노조는 2010년 12월 28일부터 정리해고 전면 철회를 주장하며 나흘간 농성을 벌였고, 2011년 1월 6일부터는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내의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6월 11일에는 이들 노조를 지원하기 위해 전국에서 희망버스가 모여들었는데, 희망버스는 총 다섯 차례 운행됐다.
2011년 7월 13일 진보신당 상임고문 노회찬은 한진중공업 사태와 관련, 시청 대한문 앞에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무기한 단식농성 돌입한다. 오재영은 30일 내내 농성장을 지킨다.
7월 13일 대한문 앞 농성 얼마 전에 노회찬은 오재영을 대동하고 시청광장 잔디밭 앞 인도 쪽에 자리를 펴고 농성을 시작하려 했다. 남대문경찰서 경비계장의 철거 지시에 전경들이 몰려오자 오재영은 노회찬을 감싸안으며 한마디 내지른다. "야 이 XXX들아, 지금 뭐 하는 거야." 당황한 전경들이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자 경비계장이 말을 건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 10여분 정도 실랑이 끝에 두 사람은 대한문 앞으로 이동한다.
단식농성 중인 어느 날. 농성장을 지키며 고생하는 오재영에게 직접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노회찬은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2011년 8월 한 여름에 한진중공업 때문에 30일간 단식할 때, 그 땡볕 하늘 아래 오 실장도 함께 있었지. 나야 굶는다 치더라도, 굶지도 않으면서 바로 옆에 있어야 하는 오 실장 신세가 너무 미안해서 그가 다른 곳을 바라볼 때 몰래카메라라고 할까, 내가 너의 모습을 아이폰 사진기로 담았네. 한 10장 찍었나? 내가 그걸 다 보여주고 '어느 게 제일 마음에 드나?' 했더니 그 중 사진 한 컷을 자네가 골랐어. 그때 내가 약속했지. '네 환갑 때 이걸 사진 액자에 멋있게 넣어가지고 작품처럼 너한테 선물할게.' (노회찬, "오재영 추모사: 미안하다, 고맙다, 다시 만나자 오재영"-[당신의 꿈이 우리의 꿈입니다], 2019.3.)
2012년 19대 국회와 2016년 20대 국회: 오재영, "나 다시 돌아가도 될까?"
두 사람은 진보신당과 진보정의당의 대표와 대표비서실장으로 생사고락을 함께 해 왔다. 2012년 19대 총선 당선의 기쁨도 함께 나눈다. 19대 국회 개원 첫 일정으로 노회찬은 개원 다음날인 5월 31일 국회 환경미화 노동자 점심식사 자리를 함께 한다.
그러나 노회찬은 당선 10개월 만인 2013년 2월 14일에 '삼성 X파일'에 나오는 '떡값검사' 실명 공개로 대법원에서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형을 선고받고 국회의원직을 상실한다. 같은 해 7월 21일 '2013 진보정의당 혁신전당대회'가 개최, 당원총투표 결과 당명을 진보정의당에서 정의당으로 변경하였고 정의당 당대표로 천호선 최고위원을 선출하였다. 노회찬은 당대표 퇴임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난해 10월 21일 진보정의당이 창당하는 자리에서 저는 당대표 수락연설을 통해 6411번 버스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 진보정의당의 앞길에는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기만 하면 되는 철로는 놓여 있지 않습니다. 진보정당의 앞길에는 이정표도 신작로도 없습니다.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선 우리는 더 바뀌고 더 채워야 합니다. 우리는 혁신의 주체이지만 동시에 우리 스스로가 혁신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할 때 우리는 조금이라도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에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모로 부족한 저를 믿고 여기까지 함께 온 분들께 감사와 격려의 인사를 드립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가장 소중한 사람은 함께 손을 잡고 그 길을 걷는 길동무들이라 합니다. 당원동지 여러분 사랑합니다.
노회찬의 당대표 퇴임 이후 오재영은 깊은 고민 끝에 빚 청산과 생계 문제 해결을 위해 수학을 새로 공부해 가르치며 3년 가까이를 전업 학원 강사로 지낸다. 2016년 4월 13일 20대 총선. "노동자 서민의 땀과 눈물과 애환이 서려 있는 곳, 그곳이 저 노회찬의 고향입니다", "정권교체를 위한 영남벨트, 창원에서 시작하겠습니다", "창원의 가치를 높이겠습니다"를 기치로 경남 창원 성산에 출마한 노회찬은 민주노총 후보선거, 야권단일후보 경선, 새누리당 후보와의 본선 등 세 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3선 국회의원으로 원내로 돌아온다.
당선을 예감한 그는 개표를 며칠 앞두고 제일 먼저 오재영을 부른다. 오재영은 아내 권신윤에게 묻는다. "나 다시 돌아가도 될까?" 오재영은 다시 돌아왔다. 오재영이 돌아온 2016년 20대 국회, 노회찬의 첫 일정은 5월 30일 오전 11시 30분 국회 의원회관 의원식당 별실 3호에서 한 국회 청소노동자와의 오찬 간담회였다. 노회찬은 이렇게 인사한다.
저희가 이런 행사는 사진 몇 장 찍으려고 형식적으로 하는 행사는 아닙니다. 저희는 현역의원으로서 정의당의 의원들은 특히, 여러분들과 같은 공간에서, 국회라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는 직장동료들입니다. 비록 맡은 바 업무가 차이가 있을지언정, 국민을 위해서 한 공간에서 일하는 동료라는 의식을 저희는 늘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20대 국회가 시작되는 바로 오늘 첫 행사로써 여러분들과 함께 식사하는 행사를 가진 것은 늘 여러분들을 직장동료로서, 우리나라 곳곳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여러분들과 같은 처지에 놓인 많은 분들이, 저희들과 똑같은 처지에 놓여있고, 누구보다도 먼저 생각하고 대변해야 되는 분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다소 어색하고, 다소 불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진심이라고 저는 생각이 듭니다. 진심과 진심이 잘 통하기 바라고 저희가 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옆에서 같이 깨우쳐 주시기 바라고, 또 여러분들이 일하는 동안 겪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저희들이 저희들 일로 생각하고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들리는 소문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고, 여러분들이 원래 쓰던, 여러분들의 노조가 쓰던 공간이 잘 유지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또 저희들이 노력을 할 것이고요. 혹 일이 잘 안되면, 저희들 사무실 같이 씁시다. 그냥 공동으로. 그래서 저희 정의당이 국회에 있는 한 여러분들이 외로워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원내대표로서 약속드리겠습니다. 오늘 식사 맛있게 하시고, 종종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대 국회에서 노회찬은 정의당 원내대표(1-3기)로, 민주평화당과 정의당이 공동으로 구성한 국회 교섭단체 '평화와 정의의 의원 모임' 원내 대표로 활약을 펼친다.
오재영은 물 만난 고기처럼 정무수석보좌관으로서 당과 의원실 안팎에서 제 역할을 다한다. 특히 2016년 연말부터 정국을 뜨겁게 달군 '박근혜 탄핵' 움직임과 관련해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실,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실과의 일정 등 조정 역할을 맡아서 한다. 2016년 12월 3일 오후 4시 10분,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과 무소속 의원 171명(정세균 국회의장 제외)이 헌법과 법률 위반을 이유로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서 발의한다.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국민의당 박지원, 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대표 발의했으며, 구체적인 사유로는 헌법과 법률 위반을 제시했다.
2016년 12월 9일 국회는 재적 의원 299명 가운데 234명의 찬성으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한다. "투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총투표 299표 중 가(可) 234표, 부(否) 56표, 기권 2표, 무효 7표로써 대통령 박근혜 탄핵소추안은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기계적인 표 계산을 한다면 야당은 물론이고 당시 집권여당인 새누리당 의원 62명이 탄핵에 찬성한 것이다. 이후 탄핵소추안이 헌재에 접수한 지 92일 만인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헌법재판소 재판관 8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이 내려진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헌재가 국회의 탄핵심판 청구를 인용한 것은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의 현직 대통령 파면이었다.
오재영의 빈 자리, 1주기 그리고 2주기 추모
오재영의 마지막 직책은 정의당 노회찬 의원실의 정무수석보좌관이었다. 오재영이 세상을 떠난 뒤 노회찬은 그의 빈자리를 채우지 않았다. 고인에 대한, 동지에 대한 예우였다. 1주기 추모제 행사를 며칠 앞둔 2018년 3월 12일 노회찬의 트위터는 이런 글로 오재영에 대한 그리움을 표한다.
재영아, 보고 싶다.
일년이 지났는데 너의 빈 자리를 채울 수가 없구나.
부디 편히 쉬려무나.
다음날인 3월 13일 노회찬은 트위터에 이렇게 적고 있다.
"겨울이 군림하던 산하에 봄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동백나무 꽃망울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있고 매화나무 가지에는 이슬처럼 봄이 탱글탱글 맺혔습니다."
며칠 뒤인 3월 18일 오전 11시 봄이 달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마석 모란공원 한 묘비 앞에 진보정당 전·현직 지도부와 당원들, 오재영의 지인들이 모였다. 1주기를 추모하는 자리였다.
서울진보청년회 시절 동지로 만난 권신윤이 연대와 지지의 꽃 흰 장미를 안고 묘비 앞으로 다가섰다.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순진한 마음을 표현한다는 하얀 장미의 꽃말 가운데는 '우리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당신 18번이 '낭만에 대하여'란 것도 여태 몰랐네", "다시 (정치권으로) 돌아가도 될지 물었을 때 잡았더라면…." 그의 대답을 심상정 의원이 대신했다. "우리의 청춘은 뜨거웠고, 우리의 중년은 고달팠다. 우리는 너무 거창하게 살았고 그래서 자신에게 가혹했다."(경향신문, 2018년 3월 28일).
2018년 10월 21일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눈물의 생일파티'로 치러진 정의당 창당 6주년 기념식 인사말을 이렇게 전한다.
"오늘 저희 생일에 와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오늘을 자축하기에 앞서 지난 시간을 함께 지켜주신 모든 분들께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오늘 정의당을 성장시켜준 11가지 결정적 장면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모든 것을 다 담아내지는 못했습니다. 그 장면의 뒤에 숨어 있는 너무나 많은 얼굴이 있습니다.
최일선에서 몸이 부서져라 뛰다 우리 곁을 떠난 오재영 보좌관, 김미경 사무처장, 오태환 위원장. 중앙당사가 있는 동아빌딩에서 식구처럼 함께 지내고 있는 경비·청소 노동자분들에서부터 새롭게 인연이 되어 정의당을 찾아준 파리바게트, 네이버 노동조합의 청년들까지.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도 없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늘 함께 했던 노회찬 대표가 없는 창당 6주년 기념식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6년 전 우리는 6411번 버스와 함께 창당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창당정신 6411번 버스를 매일매일 되새기며 노회찬 대표에게 부끄럽지 않은 정의당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노회찬 대표는 정의당과 함께 국민 속에서 부활할 것입니다."
2019년 2월 26일 <오재영추모사업회>는 페이스북으로 3월 16일에 있을 '영원한 조직실장 고 오재영 동지 2주기 추모식'을 이렇게 알린다.
'당신의 꿈이 우리의 꿈입니다'
바쁘시면 마석까진 못 오셔도 괜찮습니다
하루, 기억해주세요
"당신의 꿈이 우리의 꿈입니다." 2019년 3월 16일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재영의 2주기 추모식이 마석 모란공원에서 있었다. 나누는 인사말과 기억 속에서 오재영의 삶/꿈과 노회찬의 삶/꿈이 함께 한 자리였다.
오재영의 2주기 추모식을 맞아 <오재영추모사업회>와 <정의당>은 [당신의 꿈이 우리의 꿈입니다-故 진보정당 활동가 삶의 기록 <1>]을 펴냈다. 이 사업은 2018년 6월 9일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에 참석, 진보정당 활동을 하다 세상을 떠난 분들의 이름이 별로 없었다는 걸 알게 된 권신윤 동지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이라고 한다. 책을 펼치면 "고인이 된 진보정당 활동가를 기억하며"(오재영추모사업회 대표 김진석), "이들 삶의 궤적은 진보정치 역사 그 자체입니다"(정의당 대표 이정미), "꿈을 만들고 꿈을 실현해온 동지들을 불러봅니다"(민주노동당 전 대표 권영길)는 인사말과 함께, 곽정숙·김미경·김병세·김혜자·노회찬·류정이·박은지·오재영·오태환·유병기·이명영·이범윤·이봉진·이재영·이창호·이해삼·조성배·조승범·허세욱 등 열아홉 분의 이름과 삶의 기록이 적혀 있다.
지난 2018년 3월 1주기에 맞춰 발족한 오재영추모사업회는 활동보고와 함께 향후 사업계획을 밝히며 진보정당 활동가들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과 활동가 지원사업을 하겠다고 한다. 누군가는, 어디선가는 이미 했어야 할 일이었다. 좋은 일이다. 첫 지원은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으로 일한 황이민이라고 한다. 또 정기적인 '포럼'을 개최하는 구상과 함께, 후원회원 확대를 하겠다고 한다.
추모사를 통해 '미안하다, 오재영. 고맙다, 오재영. 다시 만나자, 오재영'을 말한 노회찬.
당을 잘 세워 좋은 세상 만들어 가면서 (노회찬의 알려지지 않은 묘비명처럼) 잘 놀다가 천천히 노회찬이 오기를 원했을 오재영.
오재영은 지금 노회찬과 함께 있다. 노회찬이 영면하고 있는 바로 그 위에서. 아마 가끔씩 술 한 잔 기울이며 세상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오재영과 노회찬의 기록을 정리하고 있는 지금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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