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은 항상 '영감'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졌지만, 세상은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은 노회찬재단과 함께 '노회찬 OOO를 만나다' 연재를 시작합니다. 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은 정치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점에서, 같은 생각을 품고 있다고 봅니다. 노회찬이 만난 사람, 노회찬의 생각, 노회찬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노회찬재단과 함께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2004년 2월 14일~2월 17일: '민중의 스승 고 김진균 선생 민주사회장'
"영원한 청년이자 만인의 따뜻한 벗이었고 스승이었던 청정 김진균 교수 고이 잠들다. 이곳에 묻혔으나 민중은 그를 보내지 않고 그들의 가슴에 묻었다.” (묘비문)
2019년 2월 14일. 오늘은 고 청정(菁丁) 김진균(金晋均) 선생의 15주기 되는 날이다. 15년 전인 2004년 오늘 운명한 김진균은 사흘 뒤인 2월 17일 오전 10시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민주사회장을 마친 뒤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된다. 하관식에서 홍근수 목사는 "67세 그보다 긴 족적을 땅속에 묻고 가는 우리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소 짓는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이나마 실현된 것은 이 땅의 민중운동 때문이었고 그 투쟁의 한가운데에 선생은 항상 계셨다"며 조사를 전한다.
인식과 실천이 결합된 학문 추구의 과제를 후학들에게 남긴 '참 지식인'의 표상 김진균. 민중이 서로 돕고 사는 이상사회인 '상자이생(相資以生 만물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 삶을 열어간다)의 대동사회(大同社會)'를 꿈꿨던 김진균. 부음과 추모 기사를 통해 언론은 그를 이렇게 칭한다.
"'참 지식인'이자 대표적 진보학자-가난한 이, 소외된 이들의 영원한 파수꾼"(프레시안)
"국내 사회학계를 현실참여적 학문으로 이끌어온 거목"(동아일보)
"민중의 벗·스승이었던 진보 '느티나무'"(오마이뉴스)
"진보 사회학계 거목"(매일경제)
"진보사회과학계의 거목"(한겨레)
"진보적 지식인의 대부"(대자보)
"진보진영 거목,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해온 '행동하는 지성'"(미디어오늘)
"한국 민중학술운동의 대부(代父)"(중앙일보)
'민중의 스승 故 김진균 선생 민주사회장' 노동민중부문 장례위원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린 노회찬은 고인의 별세를 전후한 당시의 심경에 대해 <난중일기>를 통해 이렇게 적고 있다. (※ <난중일기>는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 선대본부장 노회찬이 "우리가 가는 길이 바로 역사이고 이를 기록하는 것은 나의 임무"라는 생각 속에서, 하루하루 일어난 일을 간결하고 담담하게 기록한 일기다. <힘내라 진달래>라는 제목으로 사회평론에서 출간되었다.)
(2004년) 1월 21일 수요일, 맑고 차다
설을 앞두고 책상정리를 하다 김진균 선생이 보낸 연하장을 열었다. 봉투 겉면 주소까지 손수 쓰신, 보기에도 정성스런 연하장을 여러 날 그대로 두었다. 병환이 깊은 상태에서 이례적으로 보낸 연하장이라 개봉하기가 꺼려졌었다. 선생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해 11월. 그동안 상당히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들 안도하던 터라 더욱 놀랐다.
권영길 대표, 천영세 부대표와 의논하면서 병문안을 미루는 것이 오히려 병중인 선생님을 위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다들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그 후 노동자의 힘 이종회 대표로부터 다소 나은 소식을 듣기도 했다.
연하장 봉투엔 사진 몇 장이 들어 있다. 작년 봄 김진균 선생의 정년퇴임 기념식에서 함께 찍은 사진들이다. 축사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뒤엔 갑신년 새해에 대망의 진전을 기원한다는 글을 쓰셨다. (…) 선생님이 과천으로 이사 가기 전 설날 세배를 가면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은 다름 아닌 동치미였다. 댁 마당에 묻은 독에서 꺼낸 동치미 국물의 깊은 맛에 과세객(過歲客)들은 품위를 잃기 일쑤였다. 묻힌 독에서 익은 그 구수한 동치미는 바로 선생님 자신이다. 백기완 선생님 댁의 평안도식 빈대떡도 마찬가지이다. 마흔이 넘으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듯 예순이 되면 음식 한 가지쯤은 책임을 져야 한다.
내일이 그 설이다. (노회찬, <힘내라 진달래>, 사회평론, 2004, 71쪽)
2월 5일 목요일 맑음
천영세 선대위원장은 엊그제 김진균 선생 댁을 방문한 얘길 전한다. 김진균 선생의 용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힘내라 진달래>, 124쪽)
2월 15일 일요일 맑음 <김진균 선생 빈소에 조문 가다>
저녁 늦게 권영길 대표, 김혜경 부대표와 함께 김진균 선생 빈소에 조문 가다. 권 대표는 지난 연말 병문안을 자제한 것이 몹시 아쉬운 듯 눈시울을 적신다. 고인의 동생인 김세균 교수는 고인이 생전에 진보정당에 대해 가졌던 애정을 상기해서 말한다. 빈소는 민주노총, 민중연대, 학계 관계자들로 가득 찼다. 특히 고인은 어려웠던 80년대에 많은 사람들의 위안이자 버팀목이셨다. (…) 마지막까지 고인에겐 병의 상태를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연초에 생을 정리하듯 지나간 사진까지 챙겨서 보내주신 점을 생각하면 이별의 시간이 임박했음을 모르고 있는 듯한 태도로 마지막 배려를 하신 것이리라. (<힘내라 진달래>, 161-162쪽)
2월 17일 화요일 맑음
〈봄날은 간다〉도 장사익이 부르니 조가(弔歌)가 되었다. 최도은이 울음을 삼키며 부르니 〈불나비〉도 진혼곡이었다. 오늘 이애주는 1987년 6월로 돌아갔다. 이한열 장례식에서 맨발로 살풀이춤을 추던 그 몸짓으로 비장한 헌화무(獻花舞)를 영전에 올렸다.
'민중의 스승 고 김진균 선생 민주사회장'
유가족 인사를 통해 김세균 교수는 민중의 스승이란 칭호를 부여해준 것과 민주사회장이란 예를 갖춰준 것에 대해 각별한 사의를 표시했다. 고인의 유지를 실천으로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1937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오늘 경기도 마석 땅으로 먼저 가셨다. (…) 산 자들은 남아서 밥을 먹었다. 죽음을 기리며 삶을 걱정했다. (<힘내라 진달래>, 166-167쪽)
김진균은 누구?
1937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김진균은 1957년 서울대 문리대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학교 앞 개울을 세느강이라 부르며 막걸리를 마시고,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브람스를 듣던 낭만적인 사회학도였다고 한다. 1961년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한 뒤 1968∼1974년까지 서울대 상대 교수를 거쳐 1975년부터 2003년 2월까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68년 서울대 상대 전임강사로 처음 대학 강단에 섰을 때만 해도 김진균은 자신을 짓누르는 '4·19 세대로서의 긴장감'을 애써 떨쳐내고, '테니스와 술을 즐기며 학문에만 매진하는' 조용한 학자의 삶을 꿈꿨다고 한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검색해보면, 김진균이 언론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70년 5월 1일자 동아일보(5월 2일 70년도 춘계사회학대회에서 '생산기업체에 있어서의 전통적 관계' 발표)와 5월 6일자 경향신문 기사를 통해서다. 색다른 주장을 펼치긴 했지만 아직까지 진보학자로서의 면모는 그다지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그가 현실비판에 참여하게 된 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력의 가위질 때문이었다고 한다. 1972년 10월유신이 선포된 뒤 학술지인 <경제논집>에 새뮤얼 헌팅턴의 정치발전론을 비판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을 거론한 글과, 1979년 박정희의 사망을 보고 서울대학보인 <대학신문>에 기고한 글이 통째로 삭제당하는 경험을 겪은 것이다(동아일보, 2004년 2월 16일). (※ 김진균은 평생 세 개의 글을 검열에 의해 발표 저지당했다고 한다. 나머지 하나는 1987년 봄 서울대 <대학신문> '관악세론' 칼럼난에 박종철의 죽음에 관한 글을 썼다가 발행인에 의해 거부당한 일이다.)
1970년대 말까지 비교적 평탄한 교수의 삶을 살았던 김진균을 진보학계의 맨 앞줄에 서게 한 것은 군사독재체제의 억압성이었다. 김진균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1980년∼1984년까지 4년 동안 해직의 아픔을 겪었다. 신군부 집권에 대한 지식인 134인 성명서와 서울대 교수 시국선언문 참여가 그 빌미가 됐다. 1984년 복직 이후 김진균은 진보적 소장학자들의 연구단체인 '산업사회연구회'(산사연) 초대회장(1984-1987),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민교협) 공동의장(1988-1991), 학술단체협의회(학단협) 공동대표(1993-1996), 한국산업노동학회 회장(1994-1996)을 지내는 등 비판적 지식인으로 현실참여에 앞장서왔다. 이와 함께 전노협 고문 및 후원회 공동대표(1990∼1995), 사회진보연대 대표(1994∼2002), 민주노총 지도위원(1995∼2004), 민중연대 고문(2002∼2004), 전태일기념사업회 고문(2003∼2004)을 맡는 등 진보진영에서 중심 역할을 해왔다. 그의 이력을 보면 1백여개에 가까운 단체대표 혹은 공동대표를 역임한다.
민초들의 삶을 떠받치는 '밭가는 청년'(菁丁)으로 호(號)를 삼은 김진균은 67세가 되도록 청년이었다. 50대에 인터넷 시대를 맞아 '불나비'(bulnabia)라는 이름으로 사이버 공간을 누볐고, 죽음을 앞두고서도 자신이 대표로 있던 진보네트워크의 '김진균의 불나비처럼'이라는 고정꼭지에 칼럼을 기고해왔다. 이런 그의 멈추지 않은 열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김진균은 이런 말을 남긴다. "전선에서 고민이 떠나지 않으면 가능하다. 이 정세의 최접점을 이루는 투쟁 전선에서 떠나지 않고, 민중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사고는 더욱 새로워지고, 학문 실천의 범위도 확장될 수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함께 쓰는 민주주의>, '민중 속으로 날아간 불나비, 김진균 2').
19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과 80년 5월광주의 충격: 김진균과 노회찬
김진균과 노회찬 관련 자료를 보다 보면, '크리스찬 아카데미'(Christian Academy)와 함께 특히 '1980년 5월 광주'가 두 사람 삶의 새로운 시작의 이정표가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 명은 진보학자로, 다른 한 명은 노동운동가로.
19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이 터지면서 김진균의 삶은 크게 변화한다. 조희연(현 서울시 교육감)에 따르면 그의 인생에 혁명이 시작된 계기는 1980년 7월의 해직이었다. 그러나 1979년 4월의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이 없었다면 김진균 생애의 혁명적 전환은 아마 없었을지도 모른다.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강원용 목사를 중심으로 1965년 12월 발족한 기독교 사회운동단체로, 1970년대에는 현대사회의 인간소외 극복을 위한 '인간화'의 가치를 표방하면서, 극단적인 계층 간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중간집단교육'이라는 사회교육을 통해 노동, 농촌, 여성, 교회 등에서 지도력을 배출해 왔다.
이 사건은 크리스찬 아카데미를 사회주의 실현을 획책하는 불법 지하용공 세력으로 규정,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중간집단이론을 강의한 크리스찬 아카데미 간부 6명을 잡아들여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고 학문의 자유를 유린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동생 김세균(현 서울대 명예교수)과 매제 장상환(현 경상대 명예교수)의 뒷바라지를 위해 구치소와 법정을 돌아다니던 김진균은 이소선 어머니와 청계피복 노동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법정은 그에게 진정한 의미의 학교였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함께 쓰는 민주주의>, '민중 속으로 날아간 불나비, 김진균 1').
한편 노회찬은 노동운동 준비를 위해 1979년 무렵 크리스찬 아카데미 교육 프로그램을 연구했다고 한다. "교육이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가를 거기서 본 것 같아요."라면서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
거기서 참가한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떠올려 보면, 그것은 교재의 내용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노조 중간지도자 교육이라 해서 노조 중간간부들을 모아서 2박 3일 동안 교육을 시키는데, 거기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오는 거죠. 노조하면 진짜 좋더라, 어디 가서 밥도 공짜로 먹는다, 이런 이야기하는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그런데 거기서 2박 3일 동안 토론하면서 다른 사람 얘기 듣게 되고, 특히 어릴 때 얘기하면 다 같이 우는 경험을 하지요. 지식이 아니라 바로 그런 만남의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신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질의 인간관계가 형성되더라는 겁니다.
바로 이때 길러진 사람들이 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많은데, 교육이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가를 거기서 본 것 같아요. 2박 3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게 하나의 계기가 돼서 지속적인 만남으로 이어지고, 일종의 동창회 식으로 가는데 그 모임이 또 새로운 경험이더라는 거죠. 그냥 술이나 먹는 이런 동창회가 아니라, 자기들이 새롭게 눈뜬 현실인식이라거나 가치를 나누는 그런. 이런 기억들이 어려운 시절을 견디는 힘으로 작용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427쪽).
1980년 서울의 봄. 김진균은 서울지역 교수 361명 시국선언, 지식인 134인 선언에 잇따라 이름을 올린다. 1980년 4월 24일 서울시내 14개 대학교수 361명은 〈최근 학원사태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변형윤(서울대 교수협의회의장), 조기준(고려대), 길현모(서강대), 이우성(성균관대), 유인호(중앙대), 조요한(승전대), 이효재(이화여대) 교수 등은 성명서에서 "대학은 국가 사회 지성의 거점이며 정의 실현의 보루로서 대학의 민주화는 사회 각 분야 민주화의 선결 요건"이라고 하면서 ①대학을 족벌체제로 운영하면서 횡포를 자행한 경영자 퇴진 ②대학 군사교육의 근본적 개선 ③ 수재임용제 철폐 ④교수협의회의 민주적 기능 강화 ⑤대학민주화 추진을 위한 교수협의회 결성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대학생들의 가두시위가 한참이던 1980년 5월 15일에는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이라 불린 성명서가 나왔다. 이는 이틀 후의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인해 아무런 성과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오히려 서명에 참여한 교수들은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핍박받는다. 참여자들 가운데 일부는 탄압을 의식해 더욱 움츠리면서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80년 7월 31일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된 김진균은 사직서에 도장을 찍고서야 나올 수 있었다. 뒷날 그는 '불나비의 꿈'이란 다큐멘터리에서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술회했다. "대한민국에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그 값을 치러야 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일종의 자존심이지. 그래 내가 그렇게 하지만 느그들한테 굴복하지는 않겠다."
노회찬 역시 80년 5월 광주에 큰 영향을 받았다. 광주민중항쟁을 목도한 많은 대학생이 정치운동만으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절박감으로 노동, 농민, 빈민 등 기층 민중운동을 지향할 때였다.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거리로 나온 민중들을 보면서, 노회찬은 여러 인터뷰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이 총칼로 진압당하는 걸 보면서 학생운동·지식인운동으로는 민주화가 어렵겠구나 싶었고", "노동자들이 조직화, 세력화되어 앞장 설 때만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노회찬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첫 만남: 인민노련 사건과 1990년 3월 28일 '서명자 김진균 교수 외 147명'
지금까지의 기록으로 볼 때 노회찬과 김진균의 첫 만남은 1990년 3월 28일 '서명자 김진균 교수 외 147명'이라고 되어있는 교수 탄원서를 통해서였다. 노회찬은 인민노련 사건으로 1989년 12월 23일 체포, 구속된 상태였다(☞ 구속영장 발부는 체포 하루 뒤인 12월 25일임).
인민노련 사건 피고인들은 재판과정에서 분리심리에 대해 항의하면서 조직사건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전원 병합심리를 요구한다. 이들은 시종일관 인민노련 활동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남한 사회주의자로서 사회주의적 실천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특히 오동렬과 윤철호는 법정에서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라고 당당하게 진술해 파문을 일으킨다.
인민노련 사건의 1심 재판 중이던 1990년 3월 28일 김진균(서울대) 등 교수 147명과 권호경 목사 등 교직자 85명이 폭력혁명, 이적단체 운운하는 검사 측의 논리에 대해 "소수 독점재벌의 손에 우리 사회의 엄청난 부가 집중되고 그로 인해 많은 폐해가 야기되는 현실에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한 인민노련의 활동은 정당한 일면이 있다"는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 아래 탄원서 내용 가운데 <인노련>이라는 명칭은 <인민노련>의 잘못된 표현임)
◇ 김진균(53·서울대 교수·173번)▲개인특성=외곬성격
60. 4.19=4·19의거 당시 자문역할
80. 7.30=80.5.15 시국선언 등으로 면직
84. 3.21=광주 가톨릭센터에서 천주교 광주대교구 주관 「제7차 시민교양 강좌」에서 「한국산업사회 구성체와 가치의 일관성」을 주제로 한국의 경제는 재벌위주 체제로 비효율적이다, 한국교육은 ○,X 사지선다형 교육이므로 사물판단능력 결핍, 흑백논리
87. 7.21=전국 교수협의회 공동의장, 「사회민주화 촉구성명서」 발표 주도
88.12. 3=「민족·민주교육을 위한 교육관계법령개정 공청회」
89. 2.22=농정개혁촉구선언문 발표 주도
89. 3.15=「현대 노동자들의 생존권 확보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 발표 주도
89.4.17=「문익환 구속, 현대중공업 사태, 이영희교수 구속」 관련 「파쇼정권의 민중운동탄압을 규탄한다」 제하 성명서 발표 주도
89. 6.16=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공동의장 서울대 김진균교수 등 3명)는 6.16 18:00 공주 동학사 계룡산장에서 대의원 40여명 참석, 교수협의회의 조직개편, 교원노조가입 확대문제, 평양집회참가 「교수대표단」 구성문제 논의」
89. 7. 6=전교협(공동의장 김진균)은 6일 경북대 대학원 교수협의회 사무실에서 중앙위원 25명, 기자 7명 초치, 전교조 탄압중지 및 노조가입 교수 징계철회에 관한 성명서 발표 후 결의문 채택
89. 8.12=전교협(공동의장 김진균)은 「전교조 실체인정, 공안정국 조성규탄」 내용의 성명발표
89.12.29=민교협 공동의장으로서 회원 30∼40명과 송년회합
90. 1.17=계훈제, 박형규, 문정현 등과 문익환목사 병원치료 실현을 위한 위원회 공동대표로서 재소자 진료권 확보운동을 각계 2백55명과 함께 전개
90. 1.23=전노협지원 공동대책위 구성, 성명 발표
90. 2=상도연구실 대표로서 이진경 구속(1.17)과 관련, 대정부 투쟁 공언, 석방 노력
90. 3.15=청년학교 폐쇄조치됨(유인물압수, 간판, 플래카드 철거)
90. 4.13=KOEX에서 개최된 민연추 결성대회에 추진위원으로 참석 축사
90. 5.27=경희대에서 교사·학생·재야단체 등 4천여명 참석 하 전교조 관련 반대강연
진보정치·진보정당 활동과 김진균-노회찬의 만남
1987년 12월 해방 이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노동자의 지역연대조직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이 만들어졌다. 마창노련 8년 동안의 '투쟁정신과 연대정신'을 담은 800쪽 분량의 <내 사랑 마창노련>이 1999년 7월에 출간된다. 김진균은 이 책 제작에 참여한 동기를 이렇게 밝힌다. "기록이 없으면 역사가 달아나버린다. 기억만으로 역사의 감격이 살아 숨쉴 수 없다…."
그런데 김진균의 활동 연보를 보면 무슨 까닭인지 그의 진보정치, 진보정당 관련 활동 기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노회찬과 김진균의 만남을 찾아가는 이 기록은 진보정치·진보정당과 관련한 김진균의 발자취를 찾는 것일 수 있다.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와 <백선본>
1992년 4월 30일 '(가칭)민중후보추대와 민중의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민중연대 구성을 위한 준비모임'(약칭 민중연대 준비모임)이 만들어진다. 노동자, 농민, 빈민, 청년, 교수, 여성 등 각 부문조직 활동가 20여명이 함께한 자리였다. 6월 8일 준비모임은 기자회견을 통해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민중후보를 내겠다는 결의를 하는데, 김진균를 비롯해 노동계 22명, 문화예술계 24명, 시민정치운동계 28명, 종교출판계 4명, 학계 21명 등 99명이 서명을 한다.
7월 8일 <민중후보 추대와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민중연대>가 결성되고, 10월 5일 <민중대통령후보 선거대책본부>(이후 <민중대통령후보 백기완 선거운동본부>/백선본으로 전환) 발기인대회 및 발족식을 갖게 된다. 11월 1일 잠실올림픽 경기장에서 민중 대통령후보 선출대회를 갖고 백기완을 후보로 선출한다. 11월 3일 <민중정치실현을 실천적으로 염원하는 교수모임>은 「대통령선거에 적극 대응하여 민중정치실현 전망을 열자」를 발표한다.
인민노련 사건으로 구속된 노회찬은 1992년 만기출소한 뒤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활동을 하면서 14대 대선 국면에서 백선본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한다. 12월 16일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백기완 후보 23만8648표(1.0%)를 득표하였다.
이처럼 인민노련 사건, 백선본에서 맺어진 인연 속에서 노회찬은 김진균에게 매년 신년 연하장을 보낸다. 아래 두 장의 연하장은 김진균이 서울대기록관에 기증한 자료다.
1997년 15대 대통령선거와 <국민승리21>
1996년과 1997년의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이후, 진보진영 일부에서는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에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국민승리21(공동대표 권영길.이창복)이 출범하게 된다. 김진균은 8월 18일 '국민승리21(가칭) 건설과 국민후보 추진을 위한 선언자 대회'에 참석하고, 정책자문 등의 활동에 학계를 대표하여 앞장선다. 김진균과 노회찬은 국민후보추천위원회(위원장 고영구 변호사) 소위원회 위원으로 함께 활동하는데, 소위원회는 고영구, 이기욱, 김진균, 손호철, 김용태, 이수금, 임종철, 배석범, 양재덕, 노회찬, 유기홍, 김금수, 장기표 (여성 1인 미선임) 등으로 구성되었다.
9월 7일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는 약 3천명의 준비위원이 모인 가운데 국민승리21 준비위원회 발족식을 가졌고 공동대표에 이창복 전국연합 의장과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선출한다. 이후 국민승리21 중앙조직에서 노회찬은 기획위원장을, 김진균은 운영위원을 맡아 활동한다.
1999년 3월 14일 각계 인사 2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보정당 창당을 위한 제2차 원탁회의'가 개최된다. 2차 원탁회의는 <진보정당 창당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시민사회단체 대표, 학계 및 민주 진보운동의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인사들로 준비위원을 선임하는데 김진균은 학계를 대표하여 참가한다.
※ 진보정당 창당추진위원회 준비위원: 강태운(구 혁신계), 권영길(국민승리21), 김귀식(전교조 위원장), 김금수(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김진균(서울대 교수), 박순경(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상임의장), 신창균(범민련 고문), 양연수(전국빈민연합 준비위 의장), 윤정석(전국농민회총연맹 전 의장), 이갑용(민주노총 위원장), 이수갑(민족정기수호회 의장), 조영건(4월혁명연구소 소장), 천영세(민주노총 지도위원) 등 13명을 선임. 이후 고영주(민주노총 사무총장), 문성현(금속산업연맹 위원장), 강정구(학술단체협의회 공동대표), 장상환(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대표) 등이 추가.
1999년 4월 18일 민주노총, 전빈련 등 대중조직과 진보정당 건설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서울 용산구민회관에 모여 <진보정당창당추진위원회>를 결성한다. 이날 결성회의에서는 규약을 심의하여 제2조 목적조항을 '노동자가 앞장서는 민중중심의 진보정당 건설'로 수정하기로 하고, 공동대표를 5인 내외로 하되 우선 권영길, 이갑용, 양연수 3명을 선출한다. 이 당시까지 민주노총 400여명, 국민승리21 257명, 진보정치포럼 25명, 전빈련 19명 등 총 880여명의 추진위원들이 참여하였다.
1999년 6월 13일 오후 2시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창당 2차 추진위원 대회가 전체 1,044명 중 533명의 추진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다. 이날 대회는 4월 18일 1차대회에서 확정된 권영길(국민승리21 대표), 양연수(전국빈민연합준비위 의장), 이갑용(민주노총 위원장) 등 3명의 공동대표를 포함해 지식인부문을 대표한 김진균 교수를 공동대표로 선출한다. 실무총책임을 맡게 되는 집행위원장에는 천영세 전국연합 의장이 추천돼 만장일치로 통과된다. 노회찬(국민승리21 정책기획위원장)은 운영위원이 된다.
1999년 6월 20일 김진균은 다른 몇몇 교수들과 공동 명의로 진보정당 적극 참여 서신을 진보학계 교수들 앞으로 발송한다.
1999년 7월 10일 김진균은 공동대표 자격으로 「국민승리21 해산에 즈음하여」 메시지를 전한다. 메시지 내용에 앞서 문서 마지막 '불나비' 글씨가 눈에 뜨인다.
8월 29일 진보정당 창당 발기인대회는 (가칭)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킨다. 이날 오후 2시 반 김진균 공동대표의 개회선언과 천영세 집행위원장의 경과보고, 양연수 공동 대표의 발기취지문 낭독, 이갑용 공동대표의 대회사에 이어 권영길 공동대표의 진행으로 본 대회가 시작됐다.
상임대표, 공동대표, 사무총장 선출에서는 권영길, 김진균, 양연수, 이갑용 공동대표와 단병호(금속산업연맹 지도위원), 천영세(창당추진위 집행위원장), 정병호(협동조합연구소 이사장), 윤정석(전 전농 의장)이 공동대표로 추천됐고, 천영세 집행위원장과 정윤광 창당추진위 조직위원장이 사무총장으로 추천됐다. 이에 김진균, 정병호, 정윤광은 사의를 표했고, 결국 권영길, 양연수, 이갑용 대표가 공동대표(상임공동대표는 권영길)로, 천영세 집행위원장이 사무총장으로 만장일치 선출됐다. 노회찬은 정치개혁추진위원장을 맡게 된다.
2000년 1월 30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열린 창당대회를 통해 민주노동당이 공식 출범한다. 당대표로 선출된 권영길은 "이번 총선이 한국의 정치지형을 보수와 진보의 대결구도로 바꾸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대회장엔 참여연대 김중배 공동대표, 서울대 김진균 교수, 타이완 노동당 우종잔 주석 등이 축하사절로 참석했고, 프랑스 사회당 등이 축전을 보냈다.
암투병 생활과 사회활동
2000년 암 선고를 받고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김진균은 진보 진영의 각종 활동에 빠지지 않고 참석, 진보에 대한 열정을 놓치지 않는다. 암투병 기간 동안 그의 주요 활동에 대해 민중언론 <참세상>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001년 4월 19일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기자 윤재설은 김진균을 찾아가 묻는다. "당에 또 도움을 주실 계획은 없으십니까?" 김진균은 이렇게 답한다. "내가 관계하고 있는 사회진보연대나 진보네트워크센터, 민교협, 교수노조 일이 다 민주노동당에 도움이 되는 거죠." 이어서 "지식인의 역할은 현장의 의견을 사상적, 이론적으로 정식화하는 데 그쳐야 한다"며 당의 지도부가 아래로부터의 의견에 보다 더 귀를 기울일 것을 주문한다.
2002년 16대 대선 TV토론에서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라는 최고의 유행어를 만들어낸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선본에서 노회찬은 당 사무총장으로 선대본부장을 맡아 선거운동을 이끈다. 선거를 이틀 앞둔 2002년 12월 17일 연합뉴스는 이런 기사를 전한다.
"서울대 김진균 교수(사회학과) 등 진보 성향의 대학교수와 연구원 등 학계인사 122명이 여의도 민주노동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권영길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지지선언에는 박거용 상명대 교수(교육학), 장상환 경상대 교수(경제학), 노중기 한신대 교수(사회학),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정치학), 김수행 서울대 교수(경제학과) 등이 참여했다."
2003년 1월 <진보정치> 편집위원 이재영은 암 수술을 받은 김진균을 인터뷰한다. 기사 타이틀은 그의 말을 인용한 "삶의 한 발자국 전진이 진보"였다. 건강에 대해 "일상생활에는 별 무리가 없다"고 하면서 김진균은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무상의료·무상교육을 과감하게 주장한 건, 너무 잘한 일이에요. 자긍심과 자부심을 가져야 해요" 라고 말한다.
2003년 1월 22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정년퇴임
2003년 1월 22일 저녁 '청정 김진균 교수 정년 및 출판기념회'가 서울 마포구 서울대 동문회관에서 열렸다. 유덕상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 이수호 전 전교조 위원장,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고 박종철군 아버지인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 등이 참석해 축사를 했다.
이날 축사를 통해 노회찬은 김진균의 경력 발표에서 진보정당 창당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역임 사실이 누락된 점을 지적한 뒤, 김진균의 35년 교수 재임기간은 박정희로부터 김대중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부와의 투쟁이었음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최근 고건 총리 지명자가 여섯 명의 대통령을 모셨다고 해서 화제다. 하지만 김진균 교수님은 거리에서 연단에서 그 여섯 명의 대통령과 맞서 싸웠다. 결국 누가 이겼는가. 독재를 무너뜨리고, 대통령 당사자거나 혹은 그 아들을 감옥에 보낸 김 교수님이 승자 아닌가. (정관용, <프레시안>, 2003년2월19일)
다른 분들의 축사에서 정년퇴임을 섭섭해하거나 이젠 쉬시라고 말하는데, 민주노동당은 오늘을 기다려왔다. 이젠 학교에서 해방되셨으니 사회운동의 일선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해주십시오. (<씨네21>, 2003년 2월 5일).
통기타 반주와 함께 부른 축가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투쟁 속에 동지 모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동지의 손 맞잡고/…." 양복 차림 제자들과 점퍼 차림 운동가들은 나직하고 그윽하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이 일어나 스승의 애창곡 <불나비>를 함께 불렀다.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밤이면 밤마다 자유 그리워/ 하얀 꽃들을 수레에 싣고/ 앞만 보고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 (<한겨레21> 제445호, 2003년 1월 29일)
2015년 <김진균기념사업회>의 해산과 2019년 <노회찬재단>의 출범
김진균이 세상을 떠난 1년 후인 2005년 2월 13일 김진균기념사업회(이사장 장임원) 창립총회가 열린다. 민주노동당에서는 노회찬과 함께 김혜경 대표, 권영길.심상정.천영세.단병호 의원 등이 참석한다. 기념사업회는 2006년부터 '김진균상'(학술상/운동상)을 제정해 사회진보와 민중 삶의 발전에 기여한 사회운동가나 연구자들에게 수여하기로 한다. (※ 2006년 제1회 김진균상은 학술부문은 김원서강대 연구교수, 운동부문은 정금자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 서울대병원 간병인지부장이 수상했다.)
또 매년 2월 둘째 토요일에 추모식을 열고 내년부터 매년 7월 첫째주 대학생과 젊은 사회운동가를 대상으로 한 '김진균 여름학교'도 운영키로 한다(<매일노동뉴스>, 2005년 2월 13일). 김진균 여름학교는 30명 정도의 대학생과 운동가들이 3박4일 동안 현장에서 다양한 체험과 고민을 하는 장으로 마련할 계획 아래 추진된다. 오후 2시에는 고인이 묻힌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1주기 추모식 및 묘비제막식을 열고 고인이 생전에 웹사이트 진보네트워크에 연재한 칼럼을 모은 <불나비처럼>과 지인들의 고인에 대한 회고담을 모은 추모서적 <벗으로 스승으로>를 헌정한다.
10주기를 맞아 2014년 초 김진균기념사업회가 기획하고 제자인 홍성태 상지대 교수(문화콘텐츠학과)가 집필한 <김진균 평전-민중을 위한 학문과 실천>(진인진)과 함께, <김진균 사진집-우리 선생님>(진인진)이 출간된다.
얼마 뒤인 6월 11일과 14일 "다시! 불나비"라는 제목으로 김진균 선생님의 10주기를 기리는 행사가 개최된다.
2015년 2월 7일 김진균기념사업회는 임시 총회를 열고 사업회 해산을 결의한다. ①10년의 활동으로 김진균 선생님의 학문과 실천을 기리기 위한 사업회의 목적을 달성할 것으로 판단하고, ②남은 기금을 김진균 선생님이 창립한 비판사회학회로 기부해서 여기에서 사업회의 활동을 이어가도록 하며, ③10년의 활동을 '백서'로 정리해서 간행하도록 한다.
2017년 김진균기념사업회는 10년 활동을 담은 <김진균 기념사업회 백서: 2004-2015>(진인진, 2017) 발간을 끝으로 해산하고, 사업회의 활동은 비판사회학회에서 이어간다.
노회찬재단은 지난 2019년 1월에 공식 출범했다. 1월 24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700여명이 함께 한 가운데 <노회찬재단 창립기념공연 '노회찬, 함께 꾸는 꿈'>이 치러졌다. 창립기념 행사에 맞춰 두 권의 책, <노회찬, 함께 꾸는 꿈>(후마니타스)와 <노회찬의 진심>이 출간되었다. 향후 노회찬재단 활동과 관련해 김진균기념사업회에서 해온 10년간의 활동을 차분히 살펴보면서 지혜와 아이디어를 구해봄직하다.
※ 6년 전 오늘 2013년 2월 14일
6년 전 오늘인 2013년 2월 14일은 대법원 형사3부(주심 박보영 대법관)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노회찬에 대한 재상고심(2011도15315)에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자격정지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 노회찬의 국회의원직을 앗아간 날이기도 하다.
삼성X파일 사건이 터진 2005년 당시 삼성 엑스파일 특별수사팀을 지휘하면서 '삼성·떡값 검사 무죄, 노회찬 기소'라는 시대착오적인 결정을 한 황교안 검사(당시 서울중앙지검 2차장)는 이후 박근혜 정부의 초대 법무부 장관, 제44대 국무총리, 대통령권한대행을 거쳐 이틀 전인 2월 12일 자유한국당 당대표 후보로 등록한다.
노회찬과 황교안은 '자유인·문화인·평화인'을 교훈으로 하고 있는 경기고등학교 72회 동창이기도 하다. 언젠가 "공안검사가 가장 적성에 맞다"고 말한 황교안에게 자유·문화·평화란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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