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이익을 최고로 여기는 투명한 경영’. 이것은 미국 기업들이 자랑하는 '주식자본주의'의 핵심 윤리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의 분식회계 의혹이 연일 제기되면서 해당 기업의 주가가 곤두박질치는 '하류 자본주의 국가'로 전락했다.
분식회계가 문제되는 회사는 엔론만이 아니다. 많은 미국의 간판기업들이 회계법인과 ‘짜고 치는 고스톱판’을 벌인 사실이 줄줄이 드러나 월가는 지금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있다.
타이코, 센던트, 윌리엄스, PNC, 엘런, 애너다코 등이 그런 예다. 심지어는 세계최대기업인 제너럴 일렉트릭(GE)까지도 분식회계 의혹을 사고 있다.
미국증권거래위원회장을 역임한 콜로라도 대 교수 린 터너같은 이는 지난 6년간 회계 정정으로 인한 주식평가액 손실이 1천억 달러가 넘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수치는 엔론을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엔론으로 인한 손실만 해도 허리케인 앤드루로 인한 손실 1백50억달러보다 6배나 많다.
***"강도에게 털린 미국 투자자"**
골드먼 삭스의 행크 폴슨 회장은 "회계감사는 주식시장의 생명줄이다. 하루빨리 제도적 개선이 있어야 한다"고 개탄한다. 전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이었던 아더 레빗은 "미국 투자자들은 복면 쓴 강도에게 털린 은행과 같이 거덜났다"라고 극언한다.
왜 미국기업들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천은 최신호(2월18일자)에 미국기업들이 분식회계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심층분석한 기사를 실었다.
포천지는 미국의 최우량기업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기업들이 회계규칙을 변칙적으로 적용해 숫자 놀음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회계법인까지 동원해서 불법이 아니지만 투자자를 기만하는 결과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한 법률회사의 통계에 따르면 1997년 미국의 1백16개의 기업들이 기업회계 정정 대상이었으며, 2000년에는 2백33개 기업으로 그 대상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익명을 보장한 한 비밀조사에 따르면 대기업 CFO의 3분의 2가 상사로부터 분식회계 압력을 받았으며 55%만이 이런 압력에 저항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가 관리가 경영의 최고 목표**
분식회계가 이처럼 성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포천지는 “기업윤리가 실종된 탓”이라고 지적했다. 워렌 버핏은 기업윤리가 실종된 이유를 "1950년대와는 다른 기업 환경"에서 찾았다.
1950년대만 해도 기업 공개는 적었으나 일단 공개한 내용은 정확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대기업들이 인수합병에 주식을 현금처럼 활용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한 기업들도 적지 않아 선악의 대립 같은 정서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아무리 좋은 기업도 숫자 놀음부터 시작하고 이를 맞추는 식의 경영이 일반화되었다.
게다가 1970년대말 연방정부가 회계기업들의 담합행위를 금지하도록 한 것이 오히려 회계법인의 변칙적 행위를 조장한 꼴이 되었다. 경쟁체제로 바뀌면서 회계사들이 기업에 종속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분식회계 사태를 불러일으킨 가장 큰 요인은 주식에 열광하게 된 사람들이 급증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스톡옵션 제도의 활성화로 기업의 종업원들은 주가 변동에 목을 매게 되었다. 퇴직연금제도에도 자사주식이 편입되면서 주가 변동은 전국민의 관심사가 되었다.
컬럼비아 로 스쿨 교수 하비 골드슈미드는 "요즘 최고경영자들은 주가관리로 경영성적이 매겨지는 압력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시스코, 타이코 등이 1990년대 수십개의 기업을 인수한 것도 대부분 주식으로 한 것이다. 주가가 높을수록 많은 기업을 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주가관리는 경영의 최고 목표가 되어 버렸다.
이에 따라 분석가들의 보고서는 기업들과 타협한 산물이 되었다. 2001년 10월까지 엔론 담당 증권 분석가들 17명 중 16명이 엔론의 주식을 '매수 강력추천, 매수 권고' 등으로 평가했다는 것을 보면 기업과 분석가들의 유착 관계가 어느 정도 심했는지 알 수 있다.
기업들이 경영실적을 좋게 보이게 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다음 분기의 매출을 해당분기 매출로 잡는다거나, 다음 분기의 비용을 전 분기에 포함시켜 다음 분기 수익을 크게 하는 등이 대표적인 수법이다.
***매출증대 위해 위험한 영업방식 동원**
포천지는 변칙회계 뿐 아니라 투자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영업방식도 지적한다. 루슨트, 알카텔 등은 서비스 업체에 자금 지원을 해주는 조건으로 매출을 올렸다. 이들 기업은 서비스업체들이 부도가 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포드 등 자동차 업체가 구매대금을 고객에게 대출해주는 것도 비슷한 케이스다.
포드의 영업행위는 그 자체로는 불법적인 게 아니다. 그러나 많은 투자자들이 이러한 영업 방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모를 수 있다.
포드의 경우 2000년 1천7백억달러의 매출 중 16.9%인 2백88억달러가 융자구매였다. 지난 해에는 이 비중이 18.9%가 넘었다. 과거에는 이러한 대출로도 돈을 벌었다. 하지만 매출을 올리기 위해 무이자로 대출을 제공하면서 2001년 4분기에만 3억6천만달러의 손실을 초래했다. 대출까지 했는데도 포드의 영업실적은 4분기에 47억달러의 적자로 나타났다.
복잡한 회계조작으로 연금 수익을 정상 영업실적에 슬쩍 보태는 방법도 있다. IBM 등 종업원이 많은 기업들이 이런 변칙을 쓴 것으로 드러났다.
회계사들이 기업 회계의 공범자임을 입증해주는 여러 증거가 있다. 그러나 이는 회계사들이 법을 어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회계사는 법의 정신을 무시하지 않는 선에서 회계원칙을 준수한다는 기대를 저버린 것이다.
지난 97년 외환 위기 때 앤더슨 등 미국의 5대 회계법인들은 업무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한국회계법인들에 대해 자신의 명예에 누가 될지 모른다며 기업회계 감사의견에 자신들의 이름은 빼달라고 할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회계법인들은 스스로 신뢰를 망가뜨렸다.
***"이제 심판의 날이 왔다"**
포천지는 기업과 회계법인과의 유착을 막는 방안을 다각도로 제시했다.
예를 들어 일정기간마다 회계법인들이 고객을 교체하고, CFO가 그만 둔 기업의 경우 그 이유를 보고토록 하는 것 등이다.
그밖에도 동일기업에 대해 회계감사와 컨설팅을 겸업할 수 없게 하고, 소환장 발부권을 가진 독립회계감사위원회를 설치하는 방법도 제시되었다.
그러나 워렌 버핏은 무엇보다도 기업 이사회의 감사위원회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년에 두 번 두 시간씩 회계사로부터 보고 받는 것으로는 제대로 상황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포천지는 “이제 심판의 날이 왔다. '믿어 주세요'라는 말은 더 이상 소용없다. 정직한 회계를 해온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에 대해 시장은 확실히 구분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분식회계가 일반화된 주식시장이라면 투기장과 같게 된다. 그렇게 되면 주식은 매우 위험도가 높은 투자가 된다. 따라서 채권 가격처럼 주식의 가격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시장기능에 맡기자는 것이다.
그러나 분식회계가 가져올 궁극적 피해는 훨씬 크다. 월가에서 기업의 수익 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면 기업경영자들은 투자지출을 줄여 수익을 유지하려는 압력에 시달리게 된다. 이는 미국 경제의 회복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또다른 위험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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