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 해외매각이 30일 결렬됐다.
경제계에서는 이번 하이닉스 매각 결렬이 97년 당시와 같은 '제2의 기아사태'로 발전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특히 협상과정에 드러난 채권단 및 정부의 주먹구구식 대응방식은 이번 협상 결렬의 주된 요인으로 비판받고 있다.
***5시간 격론 끝에 만장일치로 부결**
하이닉스반도체 이사회는 30일 오후 메모리부문 매각을 골자로 하는 양해각서(MOU) 동의안을 부결시켰다. 부실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채권단의 결정사항을 이사회가 거부한 것은 사상 처음이다.
하이닉스는 30일 서울 대치동 영동사옥에서 박종섭 사장과 이용성 전 은행감독원장 등 이사회 전원 10명이 참석하고 정상영 하이닉스 노조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5시간여동안 이사회를 열고 격론 끝에 이같이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이사회는 또 메모리부문을 매각하고 남는 잔존법인의 생존방안을 담은 채권단의 재무구조 개선안에 대해서도 승인을 거부했다.
이에 따라 하이닉스 구조조정특위와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지난 19일 체결하고 29일 채권단이 승인했던 양해각서(MOU)는 이날로 효력을 상실, 양사간 매각협상은 사실상 결렬됐다.
마이크론은 아직 공식입장을 발표하지 않고 있으나, 이번 MOU가 마이크론사의 최종협상안이라고 누차 밝혔고 하이닉스 인수에 대한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의 신용등급 하향으로 마이크론 주주들의 반발도 거세 사실상 재협상은 힘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마이크론 주가 폭락이 부결의 핵심동인**
이사회가 이날 부결 결정을 내리게 된 데 가장 결정적 작용을 한 것은 최근의 마이크론 주가 하락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달 19일 MOU 체결당시 주당 29달러선이던 마이크론 주가는 S&P의 신용등급 하향조치후 급락을 거듭해 29일(뉴욕 현지시간) 26달러선까지 급락했다.
채권단은 MOU 체결시 하이닉스 매각 대금을 마이크론 주당 35달러로 계산해 받기로 마이크론과 합의했다. 이에 대해 하이닉스 소액주주들은 주가가 26달러로 떨어지면 15억달러의 무보증 신규자금 투입 및 우발채무 처리 조건 등을 고려할 때 사실상 한푼도 못 받고 매각하는 것이라며 강력 반발해왔다.
이사회는 이날 하이닉스 홍보실을 통해 낸 '하이닉스 이사회의 입장'에서 "채권단이 작성한 잔존법인의 재건방안은 메모리사업의 매각대가로 인수할 마이크론사 주식을 최근 주가와는 달리 과다하게 산정했고 우발채무 발생규모와 시기를 비현실적으로 추정하는 등 타당성과 실현 가능성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나치게 불평등하며 저평가된 매각조건이 부결의 핵심요인이라는 지적이다.
이사회는 "따라서 회사가 처해 있는 여러가지 상황과 문제점, 그리고 다양한 해결방안을 검토한 결과, 메모리사업 매각이 그 자체로서는 의미있는 대안이 될 수 있으나 반도체시장의 여건 호전, 신기술 개발로 인한 사업경쟁력의 향상 등을 고려할 때 독자생존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밝혔다.
노조와 소액주주들의 반발도 이사회 부결의 큰 요인이 됐다. 이사회 부결에 앞서 30일 오전 노조는 해외매각에 반대하는 하이닉스 직원 6천여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정상영 노조위원장은 이날 "지난 28일부터 노조원들을 대상으로 사직서를 제출받은 결과 30일 현재 전체 노조원(8천2백여명)의 70%인 6천명이 사직서를 낸 것으로 집계됐다"며 "노조 외에도 사직서를 내는 직원 수가 계속 늘고 있다"고 말했다. 노조는 또 전체 직원의 99.3%인 1만3천여명으로부터 매각 반대서명을 받았다고 밝혔다.
하이닉스 주식의 80%를 갖고 있는 소액주주들도 이사회 가결시 법정 절차를 밟겠다며 이사회를 압박했다. 채권단은 매각협상을 서두르다 기존 주식의 소각 및 채무의 출자전환을 하지 않아 소액주주들이 최대주주군을 구성하고 있다. 이사회는 결국 이들 주주들의 뜻에 따라 MOU를 부결시킨 것이다.
한편 그동안 매각협상을 주도해온 박종섭 하이닉스 사장은 이날 이사회에서 사의를 표명했다.
***채권단과 정부, 갈팡질팡**
이사회의 부결 소식을 접한 채권단과 정부는 당황하며 갈팡질팡하는 분위기다.
하이닉스 채권은행인 한빛은행은 앞으로 하이닉스에 신규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빛은행 관계자는 "하이닉스 이사회가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로 매각하는 MOU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채권단의 추가 지원없이 독자생존을 하겠다는 뜻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며 "기존 채권회수도 불투명한 상황인데 추가지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채권단이 기존 채권 회수에 나선다면 하이닉스는 곧바로 부도에 직면할 수 밖에 없고 법정관리는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의 이연수 부행장도 "이로써 마이크론과 협상이 결렬된 것 같다"며 "현재로선 채권단이 하이닉스에 신규 지원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며 앞으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감독위원회 관계자는 그러나 "하이닉스 매각안에 대해 이사회의 부결이 이뤄져 협상이 결렬됐다 하더라도 당장 하이닉스가 법정관리나 청산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하이닉스는 당분간 현재 보유한 자금으로 영업 및 투자를 계속해 나가겠지만 올 하반기 반도체 가격이 5∼6달러 정도로 뛰는 등 영업이 호조를 보이지 않을 경우 내년께는 상황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협상 결렬에 따라 하이닉스는 지난해 10월께 채권단의 채무조정안을 그대로 유지하는 수준으로 회귀한 셈이 됐다"고 덧붙였다.
채권단과 정부 사이에조차 입장통일이 안되고 있는 것이다. 채권단과 정부는 29일 전체 채권단 회의에서 MOU 승인에 반대하는 일부 투신사 등 제2금융권에 압박을 가해 어렵게 MOU를 통과시켰었다.
***제2의 기아사태가 돼서는 안된다**
이사회의 부결 사태로 하이닉스의 앞날은 독자생존밖에 없게 됐다. 독일의 인터피온이나 중국 지자체 등이 아직까지 관심을 보이고 있으나, 마이크론보다 나은 조건을 제시할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생존의 앞길도 평탄한 것만은 아니다. 아직까지 전세계적으로 정보통신(IT)산업이 과잉투자를 완전해소하지 못한 상태이며 수익성도 의문시되고 있어 즉각적 반도체 수요 증가를 기대하기 힘든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반도체값이 빠르게 회복되지 않을 경우 채권단의 신규자금 지원과 이에 따른 금융권의 추가부실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한 시장 관계자는 "이번 이사회 부결은 채권단과 정부가 안이하게 상황에 대처하다가 초래한 자충수"라며 "하이닉스 매각대금을 주당 35달러라는 높은 가격으로 마이크론 주식으로 받기로 한 점이나 기존주주 주식을 사전에 소각하지 않아 주주 및 이사회의 반란을 자초한 점 등도 문제점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 사태를 보면서 97년 기아사태가 연상된다"며 "이제부터라도 이해관계자들이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이번 사태가 대외신인도를 급락시킨 제2의 기아사태로 발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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