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회장 김희선의원)은 지난 달 28일 '친일파 708인' 명단 발표와 함께 그들의 친일 경력, 친일 행적을 상세히 기록한 백서를 작성한 바 있다.
이 명단에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 두 사람이 포함된 데 대해 두 신문사는 보도 등을 통해 크게 반발하고 있다. 또 사회ㆍ정치문제화되고 있다.
과연 두 신문사의 반발은 정당한 것인가.
독자들의 이해와 판단을 돕기 위해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작성한 두 사람 관련내용 전문을 긴급입수해 수록한다. 편집자
***방응모 주요 경력 및 친일 경력**
-1923년 동아일보 정주지국 경영
-1925년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의 교동광업소를 시작하여 큰 돈을 벌었음
-1933년 3월 조선일보사의 경영권을 계승하여 7월 자본금 30만원의 주식회사로 등기
-1935년 7월에는 서울특별시 태평로에 새 사옥을 준공하는 한편, 출판부를 신설하여 월간 잡지 <조광> <여성> <소년> 등을 차례로 창간
-1933년 이심회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뒤에 이를 서중회로 고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
-1936년에는 동방문화학원을 설립
-1935년 철저한 친일잡지인 월간 <조광>을 창간하여 사장으로 취임
-1937년 9월6일부터 전조선 명사 제2회 각도파견 시국강연 경기도 반으로 한규복, 박연서와 함께 피선됨
-1938년 7월6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
-1940년 10월16일 발족된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1941년 10월22일 발족된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1941년 8월25일 최린, 한상용, 윤치호, 이진호, 이승우, 신흥우, 조병상, 주요한 등 4백여 명의 친일주구배가 부민관에 모여 임전대책협의회를 감행하고 실천위원 35명을 선출하였는데 방응모도 실천위원이 되었음
-1941년 9월4일 오후 6시 부민관에서 임전대책연설회를 끝마친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로건을 세우고 동 회원 70여명을 동원하여 채권가두판매에 나섰는데 방응모도 윤치호, 한상용, 이광수, 최린 등과 함께 종로대로 나섰음
-1942년 조광 2월호에 '타도 동양의 원구자'란 논문을 발표
-1943년 1월 현재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1943년 11월14일에는 조선문인보국회 산하 10개 잡지사의 하나로서 '출전학도 격려대회'를 주최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사재를 출자해 고사포를 구입해 일본군에게 기증
-1944년 9월8일 조선항공공업회사에 자본을 출자해 중역으로 피선
-8.15 해방후에는 조선일보를 복간
-1946년 숭문상업중학교를 경영
-1950년 7월6일 공산군에게 납북당한 뒤 소식이 없음
***방응모 친일행적**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자기방어 한계 넘어선 친일논조**
'황국 일본이 명치유신 이후 일청, 일로의 양 전역을 지나 오늘 만주사변과 , 지나사변을 겪는 동안 우리의 발길은 대륙에 힘차게 드듸서게 되었으니 여기 일본의 뻐더가는 생장 발전의 힘참 거름을 볼 수 있거니와 이제 2천 6백년 2월11일 기원을 당하와는 천황, 황후 양 폐하와 성수무강 하옵심을 삼가 비옵고 천태자 전하, 의궁친왕 전하, 조궁, 효궁, 순궁, 청궁 4대친왕 전하의 어강녕을 빌어 마지 안는다......
이 전국적 제전에 임하여 오인은 국운의 창성과 황군장병의 무운장구를 삼가 기원하여 마지안는바이다(조광 1940.3월호 봉축 2천6백년의 기원절(紀元節))'
'2천6백년의 기원절'이라는 제목 하에 일본의 유구한 역사를 찬미하고 일본 왕족의 건강까지 기원한 이 글은 군국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인 일본인에 의해 씌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나 이 글은 엄연한 한국인, 그것도 조선일보사의 사주이자 잡지 조광의 발행인이던 방응모에 의해 씌어진 것이다.
***친일잡지 조광을 토대로 교화 정책에 앞장서**
일제 당시 언론계에 몸담고 있던 문인 기자들이나 발행인들의 행적을 뒤쫓다 보면 이들에게 있어 민족이라는 개념은 일제의 내선일체 사상에 뿌리를 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갖게 한다. 특히 3.1 운동 이후 일본의 문화 통치 아래에서 등장한 민간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도 1930년대 후반기부터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적어도 일제하 한반도 내의 우리 언론사에서 민족지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이들 신문이 처음부터 친일을 목적으로 했던 것은 아니며 다만 시기적으로 상황에 편승하면서 점차 변절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변절의 길을 걷기 시작해 나중에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버금갈 정도의 친일 논조를 폈지만 당시 총독부의 창씨개명, 조선어 말살 등 황국신민화 정책과 전시하의 물자절약 차원에서 1940년 8월10일 강제 폐간 당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해 방응모도 시국강연회 등 친일행사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1935년에는 철저한 친일잡지인 조광을 창간해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특히 조선일보가 동아일보와 함께 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던 무렵부터는 조광의 권두언 등을 통해 일본을 찬양하는 글을 서슴지 않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전술한 '2천6백년의 기원절'(조광 1940.3월호)을 비롯하여 '지나사변 3주년'(조광 1940.7월호) '조광사 혁신의 사'(조광 1940.10월호) 등이다.
창간 5주년 기념사에서 그는 "뒤를 이어 소화 12년 7월에는 동아신질서 건설사업인 제2차 구주 대전쟁이 발발되어 세계신질서 건설은 지금 일, 독, 이 3국에 의하여 용감하게 진전되고 있습니다"는 말로 세계정세를 전제한 뒤 "밖으로는 혁신 외교 정책을 강행하여 하루바삐 동아신질서 건설을 완성시켜서 세계의 신질서를 건설하고 한 걸음 나아가서 세계 영구평화를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국민은 모름지기 이선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하고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조광 1940.11월호)"라고 일제에 협력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어 '지나사변 4주년'이라는 제목 하에 실린 권두언에서는 "우리는 이 의의 깊은 날을 맞이함에 있어 먼저 이 성전의 초석이 되어 전장의 꽃으로 사라진 황군 장병의 영령에 대하여 삼가 그 명복을 비는 바이거니와 이들에게 동아신질서의 완성의 우렁찬 고종 소리를 들려줄 날도 반드시 먼 장래의 일은 아닐 것이다. 과거 4년간 황군의 가는 곳엔 실로 글자 그대로 적이 없었다"고 일본 군국주의의 세계침략전쟁을 적극 찬양하면서 "우리에게는 사태가 악화되면 악화되는 데 따라 거기에 상응한 준비가 있다. 써 어떠한 방해가 온단들 조금도 쾌념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제국의 운명을 도하고 있는 이 성업에 있어 어찌 한 걸음인들 후퇴할 것인가. 다만 우리의 물심양방면으로부터의 총력전 준비에 있다(조광 1941년7월호)"고 국민 모두가 일본 전쟁 수행에 적극 동참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 외에도 '타도! 동양의 원구자'(조광 1942년 2월호), '일미 회담' '징병제 실시에 감사합시다' '극동위기설과 국민의 각오' '해군 특별 지원병제의 광영' '대동아 전쟁의 성전의식' 등 조광을 통해 발표한 권두언과 논설들에서 방응모는 자신의 친일 성향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징병제를 적극 지지하는 글을 앞다투어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시정(施政) 31주년'이라는 제목으로 씌어진 권두문에서는 "회고하건데 지금으로부터 만 31년 전 동아의 정국은 실로 난마와 같이 흩어져 구한국의 운명이 또한 위급존망지추에 있었다. 이때 명치 43년(1910년) 8월29일 일한 양국은 드디어 양국의 행복과 동양영원의 평화를 위하여 양국 합병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간 역대 조선총독은 선정을 하여 금일과 같이 경제, 산업, 교육 등 일반 문화 향상에 자(資)한 바 컸다"고 소위 한일합방을 구국의 결단이라 극찬하는 한편, 조선사람들의 생활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선정을 베풀었다고 그가 추켜세운 미나미 조선총독의 '시정 31주년 기념일에 즈음하여'라는 기념사를 함께 게재하기도 했다.
***친일어용단체 가입, 전비 마련과 징병 권유에 적극 활동**
방응모는 자신이 발행하고 있는 월간지의 권두언 등을 통해 시종일관 친일적인 논조를 펼쳤으며, 김활란, 주요한, 서춘 등 친일 지식인들을 등장시켜 조광 구석구석을 친일파의 글로 채웠다.
중일전쟁 확대로 일본이 본격적인 전시 체제에 돌입한 해인 1938년부터 그는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 등과 함께 총독부 학무국에서 결성한 제2차 전선순회 시국강연반에 동원돼 '조선명사 59인 각도 순회강연'을 다니면서 일본이 수행하는 전쟁에 전국민이 동참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에 경기관내 시국 강연인 순회연사 좌담회에 참석해 국민지도 문제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조선반도에서 국어(일본어) 보급률이 식민지인 대만에 비해 뒤떨어진다며 전국적으로 일어상용운동을 전개하자고 주창하기도 했다.
그 외에 1943년 11월14일에는 조선문인보국회 산하 10개 잡지사의 하나로서 '출전학도 격려대회'를 주최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사재를 출자해 고사포를 구입하여 일본군에 기증해 일본을 향한 열렬한 충성심을 보여 주었는가 하면 비행기 제조 전쟁조력업체였던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에 자본을 출하해 중역으로 피선되기도 했다.
또한 일본의 총력 운동 단체와 국방 목적 단체 중 하나로 1937년 8월20일 결성된 애국금채회에 백관수, 이상협 등 15인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해 황군 원호와 전비 마련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며, 1938년 6월22일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일본은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미.일 관계에 틈이 벌어지자 종래의 전시 체제를 한층 공고한 결전 체제로 강화하기 위해 사상통일, 국민총동원, 생산력 확충 등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고도 국방국가건설을 달성해야 했다. 그래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을 해체하고 이를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재출발시켰다.
이에 따라 방응모도 이 단체의 참사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일본은 이 조직을 통해 황국신민정신의 앙양, 징병, 학병의 독려, 증산, 헌금과 공출, 군인원호 등의 총력 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1941년 8월에는 '삼천리' 사장 김동환의 발기에 의해 자발적으로 결성된 임전 대책협의회 위원으로 참여, 종로 화신 앞에서 김동환, 모윤숙, 이광수, 윤치호 등과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한 채권가두유격대로 나서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임전대책협의회에 윤치호 등이 주축이 되어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자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 총장 기와기시가 두 단체 통합을 주선해 1941년 10월22일 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명칭으로 친일세력을 총망라한 단체가 출범을 맞게 되며 방응모 또한 이 단체의 이사로 참여했다.
***친일은 과거의 일, 건국대업완성에 기여하자**
이처럼 일제가 강행한 총력 운동의 한 부분으로서 교화 정책의 하수인 역할을 충실히 해낸 방응모는 일본이 패망한 후 다시 조선일보사의 사주로서 일제에 의해 폐간되었던 조선일보를 1945년 11월23일자로 속간하였고 그의 속간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더퍼노코 황국신민이 되라는 강잉을 바덧스며 징병으로 징용으로 공출로 전쟁에 철저협력하라는 호령을 듯고 볼 뿐이엿다. 우리는 입을 가젓스나 생벙어리 행세를 하여야 하엿스며 할 말은 만헛느나 호소할 곳이 업섯다. 우리는 죽으라면 말업시 죽는 시늉을 하지 안흐면 안 될 환경에 노혀 잇섯다. 굴근 철쇄로 억매이고 날카로운 총검밋테 떨허 오직 노예적 굴종을 하지 않흐면 안 되어섯다. 확실히 총독정치 36년간에 이 기간가치 언론이 구속된 때는 업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는 이와 같은 말로 일제 치하에서 자신의 친일행위가 놓여진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었던 것임을 피력하며 그러나 이는 모두 과거의 일이니 언론의 자유를 회복하고 붓을 다시 들어 건국 대업 완성에 기여해 우리의 나아갈 길을 밝히겠다고 다짐하기에 이른다.
해방 정국에서 민족정기를 회복하려던 가장 큰 움직임인 '반민족행위 처벌법'이 친일 세력에 의해 폐기되면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언론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제에 빌붙었던 친일 언론인 대다수가 해방 이후 다시 문단과 언론계의 주역으로 활동을 재개하던 당시, 방응모도 이전의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 황국신민으로서 해야 할 바를 써내려 가던 펜으로 다시 대한민국의 건국대업 완성을 호소하는 재빠른 처세술을 보여 주었다.
자기 변명도 섞인 듯한 속간사 이외에는 단 한 줄의 사과문도 발표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어떠한 문책도 받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는 해방 이후 특별한 활동 없이 조선일보 사주로 있다가 한국전쟁 중인 1950년 7월6일 공산군에게 납북당한 뒤 소식이 없다.
***<인용저서>**
-청산하지 못한 역사 2, 한국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 반민족문제연구소 지음, 저술자:문영숙(반민족문제 연구소 연구원, 227~235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정운현 엮음(민족정기의 심판:33.39.53p, 친일파 군상:381.427.448.454.464p)
-친일파 99인 3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부록2.일제하 친일단체 및 소속 주요인명록:267.268.269p)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269.270p)
-조광 1940~1944
***김성수 주요 경력 및 친일 경력**
-1891년 전북 고창 생
-1906년 전남 창평에서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영어 공부를 했음
-1908년 군산의 금호학교에 다님
-1908년 송진우와 함께 일본 동경으로 가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와 긴조(錦城)중학교를 다님
-1910년 와세다(早稻田) 대학에 입학
-1914년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졸업
-1915년 4월 중앙학교를 인수
-1917년 경성직뉴주식회사를 맡아 경영
-1919년 10월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립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
-1932년 3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고 교장에 취임
-1937년 9월6일부터 전조선 명사 59명 망라 제2회 시국순회강연을 위해 각지에 파견되었는데 김성수는 이상협(李相協), 장헌식(張憲植), 최준집(崔準集) 등과 함께 강원도 반으로 피선되었다고 보도됨(매일신보 1937.9.1)
-1938년 7월 6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이사(매일신보 1938.7.2)
-1940년 10월 16일 발족된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매일신보 1940.10.17)
-1941년 10월 22일 발족된 조선임전보국단 감사
-1941년 8월 25일 윤치호(尹致昊), 최린(崔麟), 이성근(李聖根), 이진호(李軫鎬) 등과 함께 부민관에 모여 임전대책협의회를 강행하였는데 35명의 위원 가운데 한상룡(韓相龍), 신흥우(申興雨), 최린, 방응모(方應謨)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출됨
-1941년 9월 4일 부민관에서 임전대책 연설회를 끝마친 임전대책협의회에서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로건을 세우고 9월7일 시내 11개 장소에서 70여명이 '총후봉공(銃後奉公)은 채권으로부터'라고 하면서 가두 판매에 나섰는데 이진호, 신용욱(愼鏞頊), 신태악(辛泰嶽) 등과 함께 본정대였음
-1941년 8월 24일 조선호텔에 모인 윤치호, 고원훈(高元勳), 박흥식(朴興植), 김연수(金䄵洙) 등과 함께 모여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을 선출하였는데 경기도 위원으로 선출됨
-1943년 1월 현재 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부 기획위원
-1943년 2월 26일 '의용봉공의 추(秋)'라는 제목으로 경성일보 3면의 등재 요지 : '군교(軍敎) 일치의 대정신으로써 국가 주요의 촌(村)에 시(是)할 충량유의의 황국신민의 연성에 매진하여야 할 것이다'
-1943년 11월 7일자 매일신보에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대의에 죽을 때, 황민(皇民)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학병권유 논설을 게재
-1943년 8월 5일 징병제를 찬양하는 장문의 논설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문약(文弱)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尙武)의 정신을 찬양하라"는 논설을 발표
-1943년 11월 8일 '학도 출전 장행의 밤'이라는 행사를 개최하여 "반도 청년에게 순국의 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왜 학도 전원이 용감하게 지원하지 않는가"라는 요지의 '격려사'를 행하여 학병으로 나갈 것을 요구하였음
-1943년 11월 16일에는 학부모에게 전보를 발송하여 학병에 나갈 것을 권유하고 호별 방문을 행하여 강요하기도 하였음
-1943년 11월 26일에는 경성일보에 "황국신민의 연성에 매진해야 한다"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
-1944년 1월 22일 "징병이 닥쳐온다"라는 담화를 발표하여 닥쳐오는 징병에도 열심히 참여해야 함을 강조
-1945년 미군정청 고문회의 의장에 취임
-1946년 1월에는 복간된 동아일보의 사장을 다시 맡음
-1946년 1월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당수)가 됨
-1946년 8월 보성전문학교 기초로 고려대학교를 창립함
-1947년에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함
-1949년 2월 한국민주당과 대한민국당이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자 최고위원이 됨
-1951년 5월 대한민국의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됨
-1952년 5월 정부의 국회 탄압 사건에 항거하여 부통령직에서 물러났음
-1955년 2월 18일 사망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 지금의 대통령장)을 추서받음
***김성수 친일행적**
일제하 김성수의 활동과 노선을 평가할 때, 그의 활동과 노선은 '실력양성론'에 기반을 둔 '근대화론'에 입각한 것으로써, 일제 말기의 그의 '분명한' 여러 친일 행위들도 그의 노선에 비춰볼 때 자연스러운 것이고 어쩌면 불가피한 선택의 하나로 평가하는 입장이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일제 전시 체제하에서 그의 여러 전쟁협력 행위들은 부자연스럽다거나 오로지 일제로부터의 '강요'된 행위로만 평가되지는 않는다.
이에 비해 일제 말기 그의 '친일행위'들은 오로지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고 , 따라서 그것은 강요에 의한 일탈 행위로서 그의 활동과 노선의 본령에서 비춰볼 때 비판의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 있다. 이런 입장에 설 때 일제 말기의 친일활동보다는 교육(중앙학교, 보성전문), 언론(동아일보), 기업(경선직뉴, 경성방직 등)을 통한 민족운동에 대한 다양한 기여를 높이 평가해야 하며, 이런 그의 활동은 그의 일탈적인 친일행위를 덮고 남음이 있다는 평가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 말기 그의 친일활동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그의 활동을 정확히 평가하는 바탕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제 전시 체제하 그의 친일활동을 밝히고자 한다.
***학도여 성전(聖戰)에 나서라-동족을 죽음의 전장(戰場)으로**
김성수의 일제 말기 친일활동은 그의 전기(인촌기념회, '인촌 김성수', 1976)에 나와 있는 것처럼, 본인이 집필을 거부해서 담화 형식으로 조작되어 나온 하나의 기사에 그치는 것일까, 그 대답은 명백히 '아니다'라는 것이다.
먼저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일제는 조선을 전시체제로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 각 분야의 유력 인사들을 전시 체제에 강제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김성수 역시 중일전쟁 직후부터 이른바 '시국 강연'의 연사로 참여함으로써 일제의 전시 동원 정책에 협력하게 된다. 1937년 9월 경성시(京城市)의 라디오 강연에 나서서 일제의 전시 동원에 협조했으며, 또한 강원도 춘천까지 '순회강연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또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 당시에는 발기인 및 이사로 참여했으며, 연맹 산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와 아울러 1939년 7월에는 전시 체제하에서 당시 일본에 있던 조선인의 치안대책을 강구하며, '황국신민화'를 도모하기 위해 일본 내에서 협화회(協和會)의 '재경성 유지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기도 했다.
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후신으로 1940년 10월에 조직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로 참여했고, 1943년에는 이 단체의 총무위원이 되어 활동했다. 이 국민총력조선연맹은 그야말로 조선인을 '총체적으로' 전시체제에 동원하고, 억압하기 위해 조직되었던 '총력조직' 이었다.
1941년에는 조선인 스스로 일제의 전쟁동원에 협력하기 위해 단체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이었다. 그리고 그와 별도로 조직을 준비하고 있던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와 흥아보국단을 합쳐서 하나의 단체로, 발족한 것이 바로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이었다. 임전보국단은 이름 그대로 전쟁에 협력하기 위한 단체로 조선인이 스스로 조직한 데에 특징이 있었다.
김성수는 1941년 8월 흥아보국단의 준비위원으로, 그리고 그해 10월에 발단된 조선임전보국단의 감사로 참여하여 활동했다.
김성수의 일제말기 활동 중 활발했고, 가장 많은 발언을 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1943년부터의 것으로 징병제와 학병제의 실시와 관련된 것이었다. 일제는 그때까지 미뤄 오던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徵兵制)'를 1944년부터 실시한다고 1942년에 발표했으며, 이와 아울러 1943년에 본격적으로 징병제를 실시하기에 앞서 '학병제(學兵制)'를 실시했다.
징병제 실시를 위한 시범단계로 일제는 이른바 '지원병제(支援兵制)'를 1938년부터 실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을 군대에 동원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고, 이에 따라 학병제와 징병제를 본격적으로 실시하기 위해서는 일제가 의심하고 있던 만큼의 '황국신민화'를 위한 '동화작업'이 필요했다. 이런 사정으로 조선인 유력자를 동원한 대대적인 선전활동이 필요했고, 이러한 일제의 의도에 가장 잘 부응한 사람들이 조선 내의 '지식인'들이었다.
김성수 역시 당시 보성전문학교 교장의 자격으로 1943년 8월 5일 징병제를 찬양하는 장문의 논설을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기고함으로써 징병제와 학병제 찬양의 '포문'을 연다. "문약(文弱)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尙武)의 정신을 찬양하라"는 논설이 그것인데 그 중요한 부분만 살펴보자.
'작년 5월 8일 동연히 발표된 조선의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영광이라. 당시 전역을 통해 선풍같이 일어나는 환회야말로 무엇에 비유할 바가 없었으며 오등(吾等)반도 청년을 상대로 교육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특히 일단의 감회가 심절(心切)하였던 바이다.… 그런데 이 징병제 실시로 인하야 우리가 이제야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의 자격을 얻게 된 것은 일방을 전 반도 청년의 영예인 동시에 반천년 문약의 분위기 중에서 신음하던 모든 병근(病根)을 일거에 쾌치(快治)하고 거일(去日) 신생(新生)할 제 2의 양질(良質)을 얻은 것이다. 어찌 반갑지 아니하며 어찌 감격치 아니하리요 하고(何故) 오하면 문약의 고질을 치료함에는 오직 상무의 기풍을 조장함이 유일무이의 양약인 까닭이라.……'
징병제는 조선반도 청년의 영예이며, 조선인의 단점인 문약과 단결하지 못함을 치료할 양약이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하여 힘써 노력하여 위대한 황국신민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 요지이다.
이어 1943년 10월 학병을 권유하는 담화를 발표한 후에, 11월 7일자 '매일신보'에는 "학도여 성전(聖戰)에 나서라"라는 조선 내 지식인들의 학병 권유논설 가운데 세 번째로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제목의 논설을 게재했다.
'대동아 건설은 제군의 사소한 존재를 돌아볼 사이도 없이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매진 앞에 제군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잃어버리고 그로 말미암아 반도가 이에 뒤떨어질 때 우리는 대동아 건설의 일분자는 그만두고 황민으로서 훌륭히 제국의 일분자로 될 수 없을 것이다.……우리는 단시일일지라도 위대한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내지인이 오랫동안 바쳐온 희생에 필적할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까. 이 임무를 수행할 절호의 기회가 지금 이 순간에 우리 앞에 열려진 것이다. 제군의 희생은 결코 가치 없는 희생이 안 될 것을 나는 확언한다.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반도의 장래는 오직 제군의 거취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일본과 같은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충성과 희생이 필요하며, 그러할 때에야 만이 진정한 황국신민이 될 수 있다는 논리로써 청년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김성수는 그가 운영하고 있던 보성전문학교의 학생들을 비롯하여 조선인 청년학생들을 '학병'으로 내몰기 위하여 갖가지 방법으로 동원했다.
11월 8일에는 '학도 출진 장행의 밤'이라는 행사를 개최하여 "반도 청년에게 순국의 실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왜 학도 전원이 용감하게 지원하지 않는가"라는 요지의 '격려사'를 행하여 학병으로 나갈 것을 요구했다. 또한 11월 9일에는 보성전문학교의 '학부모 간담회'를 개최하여 자식들을 전쟁터로 보낼 것을 부모를 동원하여 강요했으며, 그리도 성과가 별로 없자 11월 16일에는 학부모들에게 전보를 발성하여 학병에 나갈 것을 권유하고, 호별 방문을 행하여 강요하기도 했다. 또한 11월 17일에는 '학도 출진을 말하는 좌담회'에 참가했으며, 같은 날 보성전문학교에서는 '궐기대회'를 개최하여 훈시하기도 했다.
11월 26일에는 "황국신민의 연성에 매진해야 한다"는 요지의 담화를 '경성일보'에 게재했으며, 12월 7일에는 징병에 절대로 협력할 뿐만 아니라, 군인의 원호사업에도 참여할 것을 다짐했다.
12월 12일에는 '보전 장행회(壯行會)'를 개최하여 "학병 지원은 이 시대 최고의 영광이며, 한번 길이 열린 이 순국의 대도에 시종여일하게 돌진함으로써 학도의 머리에는 영광이 길이 빛날 것이다"라는 요지의 격려사를 전장에 나가는 제자들에게 했다.
학병이 전쟁털 나간 뒤인 1944년 1월 22일에는 "징병이 닥쳐온다"라는 담화를 발표하여 닥쳐오는 징병에도 열심히 참여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후에는 가두 계명과 원호금 모금에 참여했다.
김성수의 이와 같은 조선인에 대한 '학병', '징병' 동원 활동이 오로지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활동적'이었음에 놀랄 뿐이다. 또한 당시 '강요'당한 지식인들이 하나같이 강조하고 있듯이 위험에 빠진 조선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으로 보기에도 너무 '자발적'이고 '논리적'이다. 당시 보성전문학교는 1943년 문과가 폐지되었으며, 1944년에는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개명되어 유지됐다. 그 때문에 그의 이러한 활동이 학교 하나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기에는 그 명분은 너무 약하다. 그가 그의 학교 하나를 살리기 위해 제자들을 전쟁터로 내몬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8.15 해방 후 1948년에 '반민족 행위자 처벌법'에 의하더라도 일제 말기 김성수의 행위는 명백하게 문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민족 행위자 처벌법'의 제 11조인 "종교, 사회, 문화, 경제 기타 각 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데 협력하기 위해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 저작과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한 자"는 반민족 행위를 행한 자로 처벌받게 되어 있었다. 앞서 본 일제 말기 그의 활동이 어찌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다만 그 시점에 그는 이승만과 더불어 정부 수립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던 한국민주당을 이끌고 있음으로써 '면죄부'를 발급받을 수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그의 활동 자체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용저서>
-청산하지 못한 역사 2. 한국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 반민족문제연구소 지음, (저술: 반민족문제연구소, 32-55쪽)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 33 35 39 53 54쪽, 친일파 군상 : 353 365 428 440 454쪽)
-친일파 99인 3- 분야별 주요인물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부록 2. 일제하 친일단체 및 소속주요인명록 : 267 268 269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 (724-7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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