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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던졌으면 또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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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던졌으면 또 어때!

유시민의 시사카페 <4>

"지고도 이겼다고 떼쓰는 X이나, 이기고도 졌다고 국기 팽개치는 X이나." 조선일보 신경무 화백이 2월 22일 '조선만평'에서 한 말이다. 정말이지 괴상한 양비론이다.

안톤 오노의 헐리웃 액션은 올림픽 정신에 어긋난다. 신 화백의 눈에 태극기를 '팽개치는' 것처럼 보인 김동성의 행동은 조선일보가 자랑하는 '애국심'을 훼손했다. 이 둘은 전혀 성격이 다른 문제인데도 신화백은 '그 X이 그 X'이라고 욕을 했다. 그러니 괴상하다고 할 수밖에.

지금까지 드러난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김동성은 태극기를 '팽개치'지 않았다. 깃발이 스케이트 날에 걸리는 바람에 깃대가 휘어지면서 떨어진 것이다. 그가 떨어진 태극기를 재빨리 다시 집어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여기서 김동성이 국기를 팽개쳤는지 여부를 따지자는 게 아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우리에게 태극기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개인의 자유를 근본으로 삼아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민주공화국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반세기 동안 대를 이어 지배해 온 독재국가다.

그러나 문화해부학적으로 볼 때 이 둘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종(種)에 속하는 닮은꼴이다. 사회 전체를 병영처럼 조직한 북보다는 덜하지만, 남에서도 전체주의 체제를 이상향으로 삼는 극우 파시즘의 헤게모니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소위 '국기에 대한 맹세'다. 내 기억에는 유신정권이 처음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온 국민이 외치게 만들었다.

지금도 무슨 행사에서 국민의례를 할 때는 이걸 듣고 있어야 한다. 따라하지 않는다고 타박하는 사람은 없지만, 쓸데없는 것이니 없애자는 말은 무척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 애국이라는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으로 몰리기 쉬운 탓이다.

애국심은 국민 개개인이 자기의 내면에 형성하는 소중한 가치 가운데 하나다. 다른 모든 좋은 가치가 그런 것처럼, 애국심이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죄가 되는 건 아니다. 국민은 국방이나 납세처럼 헌법이 규정한 의무만 제대로 지키면 된다. 태극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에는 별 관심이 없어도 되며,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개인은 자기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따라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해도 되지만, 오로지 자신과 가족의 안락한 생활을 위하여 힘과 지혜를 다 써도 된다. 여기는 "각자가 자기의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일부러 그러려고 하는 경우보다 더 효과적으로 공동선을 실현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나는 애국심이 매우 소중한 가치 가운데 하나라고 믿으며, 나의 내면에서 애국심을 키우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태극기 앞에서 큰 소리로 고백하고 남들이 듣는 데서 맹세하라는 국가의 요구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국가 상징물 앞에서 공공연하게 표현하는 '충성서약'은 애국심과 무관한 것이고, 특정한 가치를 내면화하도록 국민을 강제하거나 내면적 가치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서약하게 만드는 '국민의례'는 전체주의 체제에나 어울리는 야만적 문화양식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자유로운 나라, 물질적 문화적으로 풍요한 나라, 오래 머물러 살고 싶은 나라로 만들면, 시민들 개개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저절로 애국심이 자라게 되어 있다. 누구도 애국자임을 표방하지 않아도 온 국민이 저절로 애국자가 된다. 태극기를 신주단지 모시듯 모신다고 해서 애국심이 생기는 건 결코 아니다.

김동성이 태극기를 팽개쳤다고 하자. 그러면 또 어떤가. 젊은 선수가 분통이 터진 나머지 그럴 수도 있지. 그런 것까지 '적발'하고 '응징'하려는 극우 국가주의자들의 직업적 '애국질'이 나는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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