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31일 미국의 군사전문지 디펜스 시스템스 데일리(Defence Systems Daily)는 ‘미국이 한국에 대해 방공협정 파기를 위협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보도의 요지는 “한국이 차세대전투기로 미국 보잉사의 F-15K를 선택하지 않고 다른 나라 무기를 선택할 경우 미국 방위안보협력기구(DSCA)는 이 무기를 한미안보시스템에 통합시키지 않겠다는 입장을 한국측에 전달했다”는 것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얼마 전 한국공군이 DSCA에 한국이 타이푼, 라팔, 수호이35 등 유럽계 전투기를 매입할 경우 미국은 이를 한미간 안보통합시스템에 통합시켜줄 수 있는가를 묻는 의향서(LOAs)를 보내왔다. 그러나 이에 대해 DSCA는 중동 및 북아프리카 책임자인 에드워드 W.로스의 명의로 “현시점에서 우리는 당신들이 보낸 의향서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변을 할 수 없다”는 매몰찬 답변을 보냈다.
이 신문은 “무기시스템은 서로 호환성이 있어야 하며 공격목표를 동일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미국의 지원거부는 앞으로 잠재적으로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신문은 따라서 “만약 차세대전투기가 F-15K가 아닌 다른 기종으로 결정된다면 미국과 한국, 선택된 기종 제작사 등 3자 사이에는 통합문제를 풀기 위한 지리한 협상을 거쳐야 할 것”이라며 “한국은 이에 미국과의 관계를 건전히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결국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미국이 한국방위력에서 차지하는 비중 68%**
이 언론이 다분히 미국편향적 매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신문이 던진 화두는 현재 우리 정부를 가장 골머리 앓게 만들고 있는 냉엄한 ‘현실’임에 분명하다. 가격이나 기술이전 같은 문제이외의 차세대전투기 선정조건중 하나가 바로 한미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방위협력시스템이란 좋고싫고의 가치판단 문제를 떠나, 과거 반세기 동안 한국 군사시스템의 중심축을 이뤄온 엄연한 현실이다. 익명을 요구한 유럽계 무기판매대행 에이전트는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비록 내가 미국제가 아닌 전투기 판매를 대행하고 있긴 하나 한국이 처한 군사적 상황을 객관적으로 고려해 보면, 한국은 결국 미국제를 사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미국이 한국 방위력의 68%를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그런데 한국이 구매하려는 40대분의 차세대전투기가 한국 방위력에서 차지할 비중은 4%에 불과하다. 때문에 한국이 현실적으로 미국을 무시한 선택을 한 뒤 뒷감당하기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국제무대에서는 지난 90년대 한국이 미국의 스팅어 미사일 대신에 프랑스의 미스트랄 미사일을 구입했기 때문에 IMF(국제통화기금) 위기가 터졌다는 이야기도 나돌았었다.
혹자는 한국 못지않게 미국에의 방위의존도가 높은 대만이 미국제 전투기 대신에 프랑스제 미라주기를 구입했다는 대목을 들어 한국도 이런 식으로 해야한다고 주장하나, 대만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이 미국제 무기 도입에 강하게 반대했기에 미국의 양해하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차세대전투기를 미국제가 아닌 것으로 선택하면 미국의 대대적 반발에 직면할 텐데 과연 한국정부가 이를 극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F-15K가 한국판매를 마지막으로 생산중단될 가능성이 높은 사양 기종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가 결국은 F-15K를 구매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또하나의 고려변수, 미군 조기철수**
취재 과정에 만난 여러 외국계 무기판매대행 에이전트들로부터 공통적으로 들은 한 가지 놀랄만한 이야기가 있었다. ‘미군 철수’ 문제의 조기 부상 가능성과 관련된 전망들이었다.
이는 미국제 F-15K 구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에이전트나, 프랑스제 라팔 또는 유럽제 유로파이터(타이푼)의 구입을 주장하는 에이전트들이나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였다.
“10년안에 미군이 철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국제 군사학계에서 그다지 새삼스런 얘기가 못된다.
한 예로 미국의 보수잡지인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지는 최근호에 실은 ‘조정자 미국의 미래: 동북아 지역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10년내 주한미군의 철수 가능성을 언급했다.
필자인 존 J. 미어쉐이머는 이 글에서 “만약 잠재적인 패권이 부상하는 일이 없다면, 유럽과 동북아시아 각각의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10만명이 넘는 미군은 아마 2010년 안에 철수할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그런데 취재과정에 만난 에이전트들은 그 기간을 크게 앞당겨 보고 있었다. 거물급 미국계 에이전트의 말이다.
“테러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군 철수 문제가 당초 예상보다 크게 앞당겨져 3~5년 안에 거론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졌다.
이번 테러전은 걸프전처럼 하루아침에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전쟁이 끝나려면 최소한 1년반이 걸릴 것이라는 게 지배적 관측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더 길어질 수도 있다.
전쟁이 끝나더라도 미국은 지구상에 지금 같은 군사배치를 계속할 수 없을 것이다. 테러리스트 집단들과의 전선이 범지구적으로 확대되면 상대적으로 기존전선의 배치전력을 빼내는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아시아에서는 주한미군 병력이 줄어들고, 그 대신 여기서 생기는 공백을 중국 견제차원에서 일본이 맡도록 하는 방안이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역시 거물급인 유럽계 에이전트도 비슷한 전망을 했다.
“얼마 전에 발표된 QDR(미국방 4개년 보고서)을 보면, 최첨단 전자부대나 공군 등만 남기고 주한미군이 철수 또는 감축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현재 미국이 벌이고 있는 테러전쟁이 장기화한다면 그 시기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한국정부가 차세대전투기를 선정할 때 이같은 상황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국제무대에서 이같은 시각이 얼마나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지, 최근 들어 미국 대통령과 주한미국대사까지 나서 이례적으로 진화에 나설 정도이다.
조지 W 부시대통령은 지난 16일 아시아태평양정상회의(APEC) 참석에 앞서 한.중.일 3국 기자와 백악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군은 한반도뿐 아니라 극동지역 전반에 보장과 안전을 제공하는 매우 독특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미국은 한반도 통일이후에도 미군을 한반도에 계속 유지시킬 작정이며 감축할 의도도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토머스 C 하버드 주한 미국대사도 17일 밤 KBS TV와의 특별 인터뷰에서 “통일후에도 미군은 한반도에 계속 주둔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군 철수후 동북아정세까지 고려해 차세대전투기 선정해야**
미정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미군 조기철수 가능성은 차세대전투기 선정에 있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대변수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미군이 철수할 경우 한국,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군사지도에는 미증유의 대변혁이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주한미군이 철수 또는 감축할 경우 동북아는 각국이 군사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격전장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일본이 최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때 자위대까지 파병하며 적극적 참전의사를 밝힌 이면에는 앞으로 예견되는 동북아 군사헤게모니 쟁탈전에서 미국의 지원 사격아래 우위를 차지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일본이 이렇게 움직인다면 중국도 가만있을 리 만무하다. 중국 또한 이미 오래 전부터 욱일승천하는 경제력에 부응하는 군사력 증강을 추진해왔다.
주변국들이 군사력 증강에 나설 경우 과연 한국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까. 차세대전투기 도입건을 둘러싼 국내 군사전문가들 사이의 시각차도 바로 이 대목에서 비롯되고 있다.
시각은 크게 둘로 나뉘고 있다.
하나는, 차세대전투기 도입건을 갖고 미군을 계속 붙잡아두는 쪽으로 협상전술을 구사해야 한다는 쪽이다.
다른 하나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독자적 방위력을 구축할 수 있는 쪽에서 차세대전투기 구입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의 시각을 대표하는 쪽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미군철수는 한국방위력의 절대적 주한미군 의존도를 고려할 때 반드시 막아야 할 시급한 과제다. 따라서 F-15K 구입문제를 갖고서 미군 주둔을 확고히 하는 레버리지(지렛대)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유럽계 에이전트)
후자의 시각을 대표하는 쪽의 주장은 이렇다.
“프랑스가 라팔기 구입시 반대급부로 스칼푸 미사일 기술이전 및 공동생산 제안을 한 대목을 중시해야 한다. 라팔기를 도입하면 당장은 미국과 충돌이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사정거리가 최대 6백km인 스칼푸 미사일 기술과 생산능력을 갖추게 되면 독자방위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필요하다면 선제공격도 가능해진다. 전쟁을 일으키자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이런 능력을 갖게 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미군철수같은 사태가 현실로 나타나더라도 큰 충격없이 국토방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국방관련 연구소의 한 관계자)
과연 어떤 선택이 국익에 부합하는 것인가는 선뜻 결론내리기 쉽지 않다.
가장 이상적 방향은 남북이 조속히 평화체제를 구축, 이를 계기로 동북아 전체를 평화지대로 전환시키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눈앞 현실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한반도를 둘러싼 각국의 이해관계가 워낙 복잡한 탓이다. 그렇다고 해서 눈앞 현실의 이해득실만 따지는 것도 지나친 단견이다. 어떤 경우라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국방’은 대한민국 헌법이 집권세력에게 부과하고 있는 4대 의무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군부 및 학계 일각의 독자적 방위능력 구축 주장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주한미군이 없는 상황에서라도 방위는 계속돼야 하는 탓이다.
김대중 정부가 차세대전투기 선정에 있어 단순한 정치공학적 차원이상의 숙고에 숙고를 거듭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만에 하나 아직 이같은 고민의 최종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차세대전투기 선정은 최종해법이 나올 때까지 미뤄져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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